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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갈4:19)-2021.1.3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3장14절을 통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좇아가는 것은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화라고도 부릅니다. 성화는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레11:45). 또한 베드로 사도도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벧전1:15).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거룩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기 원합니다. 감히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형상이 없으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아니 닮아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창1:26). 분명히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비록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려 버렸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4장4절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오신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빌립보서2장6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골로새서1장15절은 예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본체의 형상이 그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니라”(히1:3)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입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8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아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요10:30). 아버지 안에 아들이 있고,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이지요(요일5:10). 여기서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결국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묻는다면 가장 명쾌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시오, 완전한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가장 완전한 고백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형상이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형상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 빌립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요14:8).
‘예수님!!! 저희에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당시 제자들의 영적수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소원은 하나님의 얼굴을 한번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4장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았지요. 당시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드리고 있거든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절)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1절).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거든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은 것이 정상입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제 아버지를 보신 적은 없지만 저를 보면 제 아버지를 대충 상상하실 수 있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본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성부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은 형상은 없어요. 형상은 우리 육안으로 보이는 현상이거든요. 이른바 형상[形象]은 물건의 생김새나 상태를 말하지요.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형상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형상을 입지 않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인간은 믿음을 갖기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도 잘 믿지를 못하는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성육신이 은혜 중에 은혜요, 복음 중에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요. 분명히 하나님을 보았으니까요. 한마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가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 되고,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의지가 주님의 의지가 되는 것이에요. 즉, 주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내안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거예요.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면 결국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주님과 내가 하나 되어 사는 것이 형상을 이루는 것이에요.
누군가 우리를 보고 주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말한다면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가끔씩 저도 누군가로부터 목사님 같다는 말을 들을 때 정말 행복합니다. 비록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할지라도 누군가로부터 내 말을 듣고, 혹은 나의 행실을 보고 그런 말을 듣게 될 때 감사하기도 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가짐도 주님이 부어주시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말 한마디도 주가 공급하시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하여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주의 복음으로 세웠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자라야 합니다. 절대 율법의 소리를 들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와서 율법을 지키라고 충동질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고 경고한 것입니다(1:8). 그들은 바울의 복음 안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들의 유일한 영적인 목표였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유대 땅에서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방한 거예요.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방하는 거짓 교사들이었던 겁니다. 그들은 얼마나 열심을 내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모든 일에 가짜들이 훨씬 더 열심을 내거든요. 우리 주변에 이단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은 거짓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다합니다.
언젠가부터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감지된 것입니다. 전에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바울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노라”고 칭찬하지요. 그들은 바울의 육체 안에 시험당할 만한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업신여기지 아니하였고,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며, 바울을 마치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던 사람들입니다(14절).
당시 육체의 질병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침을 뱉는 습관이 있었지만 그들은 바울의 육체적인 질병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아니하였고, 바울을 떠나거나 버리지도 아니했던 것입니다. 오직 바울의 복음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지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서 바울에게 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학자들은 당시 바울이 안질로 심한 고생을 했다고 전합니다. 그런 바울을 위해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모름지기 성도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짜 되는 교회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그래야 합니다. 성도는 목회자를 향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의 깊은 사랑과 애정을 가져야 하고, 목회자는 바울처럼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19절). 그런 교회는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둘 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거든요 그러나 되지 못한 교회는 그런 마음이 없어요. 오히려 그런 상황이 되면 돌아섭니다. 그리고 피합니다.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험담까지 하지요. 그런 교회는 주님이 없는 교회요, 주님과 상관없는 교회에요. 그런 교회는 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히려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들의 방식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자들은 잘못된 자기들의 방식을 고치려고 생각을 안해요. 결국 주님과는 상관없는 믿음생활을 하다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는 참 좋은 관계였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복음으로 맺어진 관계니까요. 그런데 그들 안에 율법이 파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가 아직 복음과 율법을 분별할 정도의 신앙이 있는 교회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방인들이요, 신앙의 연조가 매우 짧은 교회였지요. 그래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소곤거리는 소리에 쉽게 미혹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을지라도, 혹은 교회 안에 그럴싸한 직분이 있을지라도 힘이 없으면 당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요. 제가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힘을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이른바 사람을 구원하는 강력이지요. 그 힘이 없으면 주변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를 이기지 못해요. 우리가 왜 넘어집니까? 왜 우리가 죄에 항복합니까? 힘이 없어서 그래요. 영적인 힘이 없어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힘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신령한 힘이요, 절대적인 힘이에요.
그래서 믿는 자는 반드시 시편18편1절처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실제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 율법으로 돌아가고 말거든요. 율법에 무릎을 꿇고 마는 거지요. 그러면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그냥 교회 다니면서 종교 생활하다가 지옥으로 가는 거지요. 문제는 이 말씀이 정말 심각한 말씀인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리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노골적인 통고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은 내가 복음을 전하니까 너희가 나를 원수 취급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일들이 있지요. 옳은 소리를 하면 디스를 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말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설교하는 내용이 교인들의 비위를 건들거나 인격을 건드는 것은 피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에 민감한 소재는 가급적 피한다는 말이에요.
물론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그런 목사님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노골적으로 그들의 비수를 찔렀습니다. 그러면서 17절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열심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열심도 좋은 열심이 있고, 좋지 않는 열심도 있거든요.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은 복음의 열심이요, 복음의 열심은 좋은 열심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주장하는 열심은 당연히 복음의 열심이요, 복음을 위한 열심이지요. 그러므로 좋은 열심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열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인들을 자기 사람으로 유인하여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열심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열심으로 자기들을 섬기고 대접하라고 꼬드깁니다. 그것이 마치 믿음의 본질인 것처럼 미혹하는 것이지요. 절대 속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나는 좋은 일에 열심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도 좋은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열심은 언제든지 좋은 것이라고 말입니다(18절). 그리고 바울 역시 다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좋은 열심을 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내용이 19절입니다. 19절은 금년도 우리 교회를 이끌어갈 표어입니다. 금년도 교회 표어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심정
바울은 흔들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세우기 원했습니다. 복음으로 세워진 교회가 율법으로 무너지는 것을 본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를 위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여전히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바울의 애틋한 사랑과 관심이 들어 있는 호칭이지요. 그는 갈라디아 교회를 복음으로 낳은 어미의 마음으로 재건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일종의 리빌딩하는 것이지요.
크게 의미 부여는 하지 않지만 작년이 경자년이요, 새해는 신축년이랍니다. 다시 한번 교회가 새롭게 갱생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로부터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갱생하는 목표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의 목표는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각 심령마다 그리스도를 충만히 채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단순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을 채우려면 무진장 복잡해집니다.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방법도 다양하니까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 안에 예수를 채우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셔드리지 못한 사람이라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셔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지요.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셨다고 인정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날마다 내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고후13:5).
주안에 있는 자는 주님을 닮은 자요,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형상이 충만히 이루어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지요. 우리의 목표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충만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머니 태속에 생명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태중에 착상하는 것이에요. 생명체가 착상하면 당연히 자라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자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진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점진적으로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영적성장의 분명한 목표를 준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달려가라는 거지요. 한마디로 아무도 닮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라는 말이에요. 그것은 주님의 소원입니다. 주님도 믿는 자가 주님을 닮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혹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 속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라면 그것은 역시 그리스도의 소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다는 증거일까요? 혹은 예배를 드린다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형상은 내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는 것이에요. 인격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고, 말에도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며, 행실에서도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행심사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사셔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내안에서 사신다는 말은 우리가 새 언약의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언약의 방식이 아니면 결코 내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실 수가 없거든요. 왜냐면 옛 언약의 방식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새 언약의 방식은 내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그 방식을 믿는 믿음이 새 언약의 믿음이에요.
새 언약의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안에서 나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성전의 주인으로 모셔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내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을 수 있고, 그분의 형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보다 극단적으로 말씀 드려볼까요? 소는 소를 닮고, 양은 양을 닮습니다. 한마디로 유전인자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비유컨대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합당치 않는 말이지요. 미안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님이 안계시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른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겠습니까? 맞지 않는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당연히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하는 것이에요.
솔직히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우리 아버지를 닮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전혀 피한방울 섟이지 않는 옆집 아저씨를 닮을 수도 없거니와 닮으면 문제가 심각하겠지요. 논리가 안 맞는 말이지요.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그런 비유를 들어 보는 것이에요. 아무튼 우리가 예수를 닮는 조건은 아주 단순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주하셔야 해요. 그리고 나도 예수 안에 거해야 하구요. 그러면 닮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지요.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닮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냥 듣기 좋은 소리로 예수님을 닮은 것 같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내안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는 것이지요. 틀림없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말은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것이지요.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에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내안에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지요.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은 내가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주인이요, 왕이요, 머리요, 전부로 사시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예수님이 주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것이지요.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 삶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그것이에요.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입니다. 좇아간다는 말은 그분이 원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닮아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거예요. 성화는 거룩하게 되어져 가는 과정이지요. 나의 모난 부분을 그리스도의 말씀의 정과 끌로 다듬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지요. 쉬운 말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을 할 때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어요. 조심해야 해요.
겉 사람도 닮아가야 하고 속사람도 닮아가야 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사람보다는 겉 사람을 닮아가는 데 치중합니다. 사람들의 속성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치장하고 포장하고 단장하거든요.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은 속사람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닮으면 겉 사람도 닮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겉 사람이 닮아가는 것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고 말할 때 조심해야 할 함정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잘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거든요.
사실 교회는 교인도 있고, 성도도 있습니다. 교인은 그냥 그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에요. 아무라도 그 교회 출석을 하면 교인명부에 오르게 되고 합법적으로 그 교회 교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아니에요. 성도는 진짜 구별된 그리스도인이어야 해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날마다 그분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무나 교인은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아무나 겉 사람은 단장할 수 있어도 아무나 속사람을 단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속사람을 그리스도로 단장해야 해요. 이른바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지요. 그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한해 우리 교회는 오직 예수를 닮아가는 교회되게 하십시다. 그리고 믿음의 성도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한 해가 되게 하십시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충만하게 하십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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