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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동네 원문보기 글쓴이: 하남표
시적 이미지는 어디에 있는가
정현종 (시인)
제 작품 중에 부엌을 기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늘 드나들고 왔다갔다하는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써본 작품입니다.
여자들의 권력의 원천인
부엌이여
利他의 샘이여.
사람 살리는 자리 거기이니
밥하는 자리의 공기여.
몸을 드높이는 노동
보이는 세계를 위한 聖壇이니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향기인들
어찌 생선 비린내를 떠나 피어나리오.
-[부엌을 기리는 노래]
이 시는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고, 또 부엌이라는 공간을 늘 보면서 받은 느낌을 써 본 것입니다. 부엌에서 늘 일하는 주부라든지 여자들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부엌에서 보내실 겁니다. 부엌이라는 공간은 실용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좀 다른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부엌을 '이타(利他)의 샘'이라고 했습니다만, 밥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만 먹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독신은 좀 다르겠지만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음식을 자기 혼자서 먹으려고 하지는 않고 가족을 먹이려고 해서 이타의 샘이라고 했습니다. 밥하는 자리의 공기, 즉 분위기는 사람을 살리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엌에서의 노동은 몸을 드높이는 노동이라고 생각해서 '성단(聖壇)'이라고 해보았습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향기인들 생선 비린내를 떠나서 피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란 정신이나 감정, 마음을 말하는데 생선 비린내를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음식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인도의 요가에 '당신은 누구냐' 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은 당신이 먹는 바로 그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양학에서는 '먹는 대로 간다'는 설과 함께 '육식을 좋아하면 성질이 조금 잔인해질 수도 있다'든지, '채식주의자는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다'든지 등 먹는 것에 따라서 사람의 됨됨이가 결정이 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 젊은날 읽은 책 가운데 인도의 {우파니샤드}가 있습니다. 옛날에 수필을 쓰느라고 거기에 나오는 얘기들을 더러 인용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음식은 안 먹으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성찰이나 중요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해 왔고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파니샤드}에서는 음식을 대단히 높은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다라고 하는 사람이 성자 사나트 쿠마르한테 질문을 합니다. "천문학, 지리학, 경전, 경제, 정치 등 모든 것을 다 아는데 나 자신을 잘 몰라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러니 나를 슬픔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성자한테 묻습니다. 그랬더니 그 성자가 대답하기를 "거기에 음식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아는 것은 이름일 뿐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름보다 위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름보다 위에는 말이라는 게 있다." "말 위에는 또 뭐가 있습니까?" "말 위에는 마음이 있다.>
이렇듯 마음 위에는 의지가 있고, 의지 위에는 마음의 본 바탕인 근본이 있고, 그 위에는 명상이 있고 다음에는 지혜, 지혜 위에는 힘이 있고 힘 위에는 음식이 있습니다. 음식 위에는 물, 빛이나 공기, 기억, 희망, 생명 등이 있습니다. 부엌이라는 공간은 밥하는 공간으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부엌에는 상당히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이고 다른 하나는 불입니다.
부엌을 일만이 아닌 명상의 공간으로 만들어라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불을 점화하는 순간의 어떤 느낌을 소중히 하든가, 불을 피우면서 명상을 잠겨 보십시오. 물과 불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이 그 부엌이라고 하는 공간을 유용성, 실제적인 쓸모만 가지고 있는 공간이 아니고 미적 공간으로 만드는 걸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움직이는 여자들을 보면 거룩합니다. 그 거룩함을 뒷받침하는 것은 물과 불입니다. 물이 하는 일은 깨끗이 씻는 일과 정화하는 것입니다. 불도 역시 열과 에너지인데 정화하는 겁니다. 음식들을 가지고 명상을 하면 거기서 한없는 의미를 끌어낼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사물은 무궁무진한 암시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과 연결을 시켜서 가브리엘 미스트랄이라고 하는 여류시인의 작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분은 칠레의 시인으로 1945년도에 남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탔습니다. 1889년에 나서 1957년에 죽었습니다.
상이 차려졌다, 아들아
크림의 고요한 흰색과 함께,
그리고 네 벽에는 질그릇들이
푸른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다.
여기 소금이 있고, 기름은 여기
가운데는 거의 말을 하고 있는 빵.
빵의 금빛보다 더 아름다운 금빛은
대나무나 과일엔 없느니,
그 밀 냄새와 오븐은
끝없는 기쁨을 준다.
굳은 손가락과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우리는 더불어 빵을 쪼갠다, 귀여운 애야.
검은 땅이 흰 꽃을 피워내는 걸
네가 놀라운 눈으로 보고 있는 동안,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네 엄마가 자기의 손을 낮추듯이,
아들아, 밀은 공기로 된 것이고
햇빛과 괭이로 된 것이란다;
그러나 이 빵, <신의 얼굴>이라고 불리는 이 빵은
모든 식탁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다른 애들이 그걸 갖지 못했다면
아들아, 그걸 건드리지 않는 게 좋고,
부끄러운 손으로
너는 그걸 가져 가지 않는게 좋다.
아들아, 굶주림은 그 찌푸린 얼굴로
타작하지 않은 밀을 휩싸며 회오리친다.
그들은 찾지만, 서로 발견하지 못한다.
빵과 곱사등이 굶주림은,
그러니 그가 지금 들어오기만 하면 발견하는 것이니,
우리는 이 빵을 내일까지 먹지 말고 놔둘 일이다.
케추언 인디언은 닫는 법이 없는
문을 타오르는 불로 표시하고,
그리고 굶주림이 몸과 영혼이 잠들 때까지
먹는 걸 볼 일이다.
이 작품은 남미의 당시 경제 상황과 상관이 있습니다. 이 시인은 상당히 오랫동안 고등학교 교사 노릇을 했습니다. 이 시인은 시에서 이런 노래도 했지만 실제로 불쌍하고 가난한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춰라'는 구절은 못 먹는 애들이 있기 때문에 하는 얘기인데, 도덕적으로 우리를 엄숙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일관성이 좀 없는 작품인 것 같아도 보입니다.
1연을 보면 빵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거의 말을 하고 있는 빵은 밑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이 시인이 말없는 빵의 말을 들은 겁니다. 그렇게 귀중하고 소중한 빵 한 조각입니다. 가난한 나라는 더 그렇습니다. 지금은 먹을 게 많아져서 식품에 대한 경건함도 다 없어졌습니다. 전부 인스턴트 식품이기 때문에 빵을 집에서 반죽을 해서 오븐에 굽는 집이 별로 없습니다. 가령 밀가루를 반죽을 하고 그걸 굽고 냄새가 나고 열을 가해서 빵을꺼내 보면, 노릇노릇하고 가무잡잡하게 익은 걸 보는 체험이 지금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먹는다고 하면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밀가루나 빵의 깊이를 거의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문학은 밥을 넘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문학은 모든 우리 일상사의 자질구레한 세목(細目)들에 대해 다 씁니다. 소설은 더 많이 쓰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물건들이 전부 의미심장한 것을 봅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배만 부르고 동물처럼 살기 위해서 먹고, 먹고 배부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밥을 먹으면서 밥에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접시나 숟가락 하나라도 그렇습니다.
제가 번역을 했는데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백 편이 넘는 작품을 숟가락이나 자잘구레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로 썼습니다. 부엌 안에 있는 것도 모든 게 다 우리가 사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명상의 수단으로 그걸 통해서 뭔가 생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모든 게 시를 쓰는 사람한테는 범상하게 보이지를 않습니다. 무얼 봐도 사물의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부엌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어떤 문학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기가 만지고 보는 물건들이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글을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읽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작품을 읽을 때면 행복하고 시를 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삶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느낌이 많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느낀 걸 다른 사람은 못 느낀다든지, 어떤 사람은 느낌의 깊이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의 풍부한 삶이나 가난한 삶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각별한 느낌을 늘 갖고 움직이고 본다는 것은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때와 공간의 숨결이여
내가 드나드는 공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집과 일터
이 집과 저 집
이 방과 저 방
더 큰 공간에 품겨 있는
품에 안겨 있는 알처럼
꿈꾸며 반짝이는 그 공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꿈꾸므로 반짝이고
품겨 있으므로 꿈꾸는
그 공간들은 그리하여
항상 태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항상 새로 태어나고 있다.
어리고 연하고 해맑은
그 공간들의 胎內에 나는 있고
나와 공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서로 품어 더욱 반짝여
서로가 서로를 낳는 안팎은
가없이 정답다
그 공간들을 드나드는 때를 또한
나는 사랑한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그 모든 때는 太初와 같다.
햇살 속의 먼지와도 같이
반짝이는 그 때의 숨결을
나는 온몸으로 숨쉬며
드나든다. 오호라
시간 속에 秘藏되어 있는 태초를
나는 숨쉬며
드나든다.
모든 때의 알 또한
꿈꾸며 반짝이며
깃을 내밀기 시작한다.
시간이란 그리하여
싹이라는 말과 같다.
시간의 胎가 배고 있는 모든
내일의 꽃의 향기를
(폐허는 역사는 짝이거니와)
그 때들은 꽃피운다.
내가 드나드는 공간들이여
그렇게 움직이는 때들이여
서로 품에 안겨
서로 배고 낳느니
꿈꾸며 반짝이느니.
여기서 [때와 공간의 숨결] 이라고 하는 작품 역시 내가 드나드는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써본 것입니다. 이 공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안겨 있다는 느낌을 젊은 시절부터 늘 갖고 삽니다. 자기가 들어 있는 모든 공간들은 자기의 '태(胎)'다라는 느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들한테 얘기를 할 때 캠퍼스라는 것도 하나의 태다. 캠퍼스가4년 동안 학생들을 배고 있다가 4년 뒤에 낳는 것이기 때문에 모교라고 합니다. 자기가 다닌 모든 학교들의 공간들이 태라고 하는 것은 아주 엉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태에 비추어서 이 세상에 우리가 나온 뒤에도 있는 공간들은 태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자기가 드나드는 공간들이 전부 하나의 태라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교 때를 생각해 보면 6년 동안 나를 뱄던 태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나 뭘 하던지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태라는 비유를 해봅니다. 자기가 드나드는 장소들이 아주 저한테는 의미심장하고 귀중하게 느껴집니다.
1연은 공간에 관한 얘기이고, 2연은 그 장소들을 드나드는 때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문예진흥원 강당에 와 있습니다만 여기를 오고 가는 공간 속에서 제가 하는 얘기를 듣고 계시고, 저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 인생살이의 하나의 사건이고 체험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체험 속에서 뭔가 하나쯤 자기를 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틀림없는 태가 됩니다. 사실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드나드는 장소뿐만 아니라 그 시간들을 보면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라는 것은 결국 '태초(太初)'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초라고 하면 기독교의 성경식으로 말씀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우주 탄생론에서 보면 우주가 탄생했을 때라든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먼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에서 말하는 태초는 먼 과거가 아닙니다. 태초는 항상 지금을 말합니다. 늘 시작할 수 있는 때가 지금입니다. 40대 중반쯤 새벽에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예비군 훈련을 갔는데 출석만 부르고 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새벽을 좋아하는데 어두워서 길도 분간이 되지 않는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쯤 걸어가니까 먼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이 트는 순간 하늘의 빛이 파르스름해지면서 숲에 있는 나무 가장자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은 '하루하루가 태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천지창조가 매일 새벽이 되고 있구나'. 특히 새벽녘 숲에 동이 트기 직전에 들어가서 동트는 것을 보면 천지창조가 매일 일어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빛은 안 보이던 것을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비침으로써 사물이 나타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시는 매 순간을 태초이게 한다
시적 이미지라는 것은 매순간이 태초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를 읽을 때 저는 실제로 체험을 합니다. 인생살이와 모든 게 막 시작되게 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우리가 읽으면서 마음속에서 감동을 느끼면서 완전히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늘 우리를 시작하게 만든다고 하면 좀더 실감이 납니다. 그 순간 모든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과거는 우리한테 좋은 추억도 있지만 짐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나 기쁨, 그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으면서 위안을 받지만 시는 추상적인 교리를 설법하는 게 아니고 시의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를 늘 원초로 가져다 놓는다는 것이 시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 ; 죽은 기형도 시인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책 속에 미발표시가 [가을 무덤] 외에 15편이 있고 그 속에 선생님의 시 [설렁설렁] 이라는 시가 들어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바람은 저렇게 나뭇잎을 흘려내는 바로 그것이거니와
나 바람 나 길떠나 바람이여 나뭇잎이여 일렁이는 것들 속을 가네
설렁설렁 설렁설렁
이 시를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외우고 다녔습니다. 이 시가 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의 기형도 시집 속에 들어있는지 궁금했고, 또 시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는 말씀대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기형도 씨가 너무나 빨리 청년시절에 건너갔기 때문에 선생님의 설명을 좀 듣고 싶습니다.
답 ; 몇 주기 때 나온 줄은 모르지만 죽고 나서 추념하는 걸로 책을 냈는데 작품을 건네준 것뿐입니다. 작품이 책에 들어간 것은 그 내용과 기형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형도는 노래를 잘했습니다. 목소리가 바이브레이션이 아주 좋고, 특히 [한오백년] 같은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공부를 참 잘했고 머리도 좋았으며 중앙일보에 입사할 때 수석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내 창작 시간에 들어오던 학생이었는데, 지금 소설가로서 많이 알려진 성석재와 같은 반에 들어왔습니다. 첫 시간에 기형도씨를 맨 먼저 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좌절감을 느꼈다고 할 정도로 학생시로서 시를 참 잘 썼습니다.시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아주 쉬운 말로 진짜와 가짜를 나눈다면 한용운이나 김소월부터 오늘날까지 볼 때 사실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기형도는 그 중의 진짜배기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기형도를 흉내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타고나기를 페시미스트라고 할는지 어두운, 심지어는 푸른 나뭇잎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 속의 죽음을 숨기느라고 색깔을 내는 거라고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나와는 사제지간이니까 살아 생전에 이것은 좀 건강하지가 않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나뭇잎을 보면 감동부터 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고 기본적이며 건강한 것입니다. 꽃을 보면 아름다워서 참 좋다고 만인이 생각할 겁니다. 시인도 그 만인과 똑같아야 합니다. 가령 꽃을 보면서 나중에 떨어질 것을 미리 감추느라고 아름답게 피어서 있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짜는 진짜인데 조금 평가하는데 있어서 유보하는 게 있습니다.
문 ; 선생님만의 태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 ; 드나드는 곳은 다 태입니다. 다만 느껴야 태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문 ; 시라는 문학의 장르가 우리 사회에서 현재 갖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문단을 통해서 나온 시집 외에도 요즘은 일반 대중들이 자비로 자기만의 스타일대로 시집들을 출간하고, 또 학생들한테 베스트셀러라는 시집들도 많은데, 보면 시의 형태를 띠고는 있지만, 그 내용이나 감성 같은 것들이 사춘기 소녀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해서 인기에 영합하려고 하는 그런 의도를 많이 느끼게 하는 시집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담당자들의 말로는 그런 시집이 상당히 많이 팔린다고 하는데 물론 문화에는 상수도문화와 하수도문화가 있고 있어야 된다고 이론상으로는 말하지요. 과연 지금 사춘기 학생들이나 그냥 시집을 한번 보고 싶은 사람들이 보았을 때 자비로 출판한 천차만별의 시들과 현재 교복을 입고 있는 사춘기 학생들이 즐겨 찾는 가짜 비슷한 시들을 읽는 현상을 어떻게 보시며, 어떻게 소화를 시켜야 하는지 걱정이 됩니다. 학생들은 좋은시, 진짜시를 많이 읽어야 될 텐데 이런 시들을 읽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 우리 나라 시문학의 사회 현상에 있어서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답 ; 언제나 있는 현상이고 막을 수도 없을 겁니다. 다만 사춘기라는 게 중·고등학생들인데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그걸 어떤 기회에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읽을 필요도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른바 당의정시라고 해서 아주 감상적인 것을 건드려서 만족시켜 주는 것들은 값어치가 전혀 없는 작품들입니다. 안목이 있는 눈으로 보면 지금 신문 등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등 유명시인의 시들 가운데도 이런 시즐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들도 역시 당의정시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박인환, 윤동주시를 읽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오면서 달라졌습니다.
대학에 와서 보니까 박인환은 겉멋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청마(靑馬)나 청록파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그런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을 우리가 막을 길은 없는데 다만 혹시라도 중·고등학교 문학과정에서 교사들이 안목이 있어서 비판을 하면서 읽어보는 기회를 가지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대학을 가면 자연스럽게 보지 않게 되고 쓸데없는 것을 읽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출판사들이 잘못하는 겁니다. 제대로 된 출판사라고 하면 작품의 질에 대한 평가를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