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시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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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씨의 삶과 문학에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올해 일흔여섯인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 태어났다. 경북 영양의 뿌리 깊은 양반 가문이었지만 일본 유학파에 남로당원이었던 아버지 이원철(1999년 작고)씨가 한국전쟁 기간 중 월북하며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연좌제의 굴레를 피해 작가가 된 그는 80~90년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사실상 등단작인 79년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이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사랑받으며 ‘이문열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치밀한 리얼리즘(신춘문예 등단 중편 ‘새하곡’), 초월적 교양주의(『사람의 아들』), 분단으로 결딴난 현대사(『영웅시대』), 화려한 의고체(擬古體, 『황제를 위하여』) 문장에 이르기까지 그가 감각적인 수법과 묵직한 주제의 신작을 낼 때마다 독자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영광 뒤에는 상처가 도사리고 있었다. 월북한 아버지의 내면을 허무주의로 채색한 84년 장편 『영웅시대』가 진보 진영의 비난을 불렀다. 92년 산문집 제목으로 사용한 ‘시대와의 불화’라는 표현이 어느새 그를 상투어처럼 따라다녔다. 2001년 DJ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비판 칼럼, 이 칼럼이 촉발한 ‘책 장례식’이라는 문화참사를 겪으며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듯했다. 시대정신이라 할 페미니즘과 갈등했고, 보수 정당의 공천 심사 과정에 참여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씨는 중도과 극단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보수적인 목소리로 세상일에 개입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이씨가 모순으로 가득 찬 듯한 문학과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25일부터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 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에 주 1회 연재되는 회고록 ‘이문열, 시대를 쓰다’를 통해서다. 책 장례식부터 연좌제로 인해 일그러진 성장 과정, 작가로서의 영욕, 생중계되다시피 한 이북의 아버지 상봉 무산까지, 그의 인생 갈피마다 서린 현대사를 소상하게 전한다. 회고록은 30회가량 연재될 예정이다. 지난달 13일 이후 여러 차례 사전 인터뷰에서 이씨는 “글 한 줄 쓰지 못한 지 3년쯤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지어내지 않은 진솔한 인생 회고록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이문열, 시대를 쓰다’는 육성으로 듣는 큰 작가 이문열의 시대 회고록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받은 질문일 텐데, 어떻게 작가가 됐나.
등단 전 젊었을 때는 가능하면 작가가 되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성리학 전통이 뿌리 깊은 고향 경북 영양의 문중에서는 작가를 그리 높게 쳐주지 않는다. 오래 살다 보니 생각도 바뀌고 기억조차 바뀌는 것 같은데, 결국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자발적이지 않은 원인이 있었다는 게 최종적인 느낌이다.
작가가 된 게 아니고 되어져 버린 것 같다. 작가가 되고 보니 꼭 거부할 일은 아니었다. 원래 내가 할 일인데 잊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일시적인 절필 선언을 한 적은 있지만 작가를 그만두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
1979년에 등단해 올해로 작가가 된 지 46년째인 소설가 이문열씨. 말과 글로써 꾸준히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 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작가가 되어져 버리게 만든 요인은 어떤 것인가.
말을 운용하고 글을 쓰려면 결국 언어 훈련이 필요한데 내 경우 정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검정고시로 마쳤고, 대학교(서울대 국어교육과)도 세 학기만 다녔으니 학문적으로는 붕 떠버린 혼처럼 돼버렸다. 그 빈 시간들을 메워준 게 독서였다.
다행히 이래저래 책이 흔한 환경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별 목적 없이 읽었는데 고등학교 무렵부터 내 딴에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상당히 정선(精選)해서 읽었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에는 만 권가량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려서 형편이 어려워 고아원에서도 지낸 거로 알고 있다.
밀양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석 달 정도 지냈다. 어머니가 권사로 있는 교회에 딸린 고아원이었다. 고아원에서는 밥도 주고 따듯한 방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6·25 직후 우리처럼 아버지가 월북한 불온한 가족에게 교회나 선교사는 신기한 부적 같은 존재였다. 좌익에게 엄혹하던 시절 아닌가. 수사관들이 따라붙었다가도 목사님이 뭐라고 하면 가버렸다.
당시 할머니와 어머니는 교회를 전략적으로 다녔다. 어머니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건 교회밖에 없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국민학교 때 성경 암송대회에 나가 1등을 한 적도 있다.
출세작인 『사람의 아들』은 그래서 나왔겠다.
교회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 곳이다. 구약성경만 해도 살인·간음 같은 온갖 못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평생 성경 아는 척하며 살았는데 뒤늦게 군대 가기 전 두어 달가량 구약을 꼼꼼히 읽었다. 참 대단한 이야기다 싶더라고. 당시는 소설을 알 때다. 그래서 초고를 썼는데, 평생 한 번 쓰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에 남은 약간의 믿음과 자라면서 생긴 기독교에 대한 회의가 충돌했다.
25일부터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에 주 1회 회고록을 연재하는 이문열 작가. "지어내지 않은 진솔한 회고록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결국 기독교 해체 소설 아닌가.
기독교에 대한 반동의 뜻은 있다. 내 재주로 반동을 할 수는 없으니 헬레니즘을 반동의 구실로 삼아 싸워보려 한 것 같다.
무슨 뜻인가.
기독교의 바탕인 헤브라이즘(유대교 전통)은 헬레니즘(그리스·로마)이라는 거대한 문명체계를 뚫고 성장했다. 나중에 기독교가 번성했을 때는 헬레니즘을 크게 억압했다. 그에 대한 역해방이 소위 14, 15세기의 르네상스였다. 그런 역사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려 했다는 뜻이다.
작가로서 보람은 어떤 건가.
속된 감정으로 이야기하면 책이 많이 팔려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밖에 나가면 아무개라고 알아보는 상태 아니겠나. 그렇지만 내 방식으로 어떤 위대한 영혼의 이야기를 잘 써내면 굉장히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쁘지 않은 일거리를 찾았다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유익한 것을 제공할 수 있다는 기분인가.
한 국제 문학대회에서 ‘이야기는 지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시대는 묻혀도 이야기는 남는다는 뜻이었다. 글의 보존성을 강조하는 주장은 많다. 위대하고 고귀한 정신들을 보존해 주는 도구가 글이라고 생각하면 경외감이나 신비로움마저 생긴다.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았지만 비난도 많이 받았다. 때때로 과도하게 비판받았다고 생각하나.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들이 내 작품이나 칼럼을 읽고 화를 내거나 공격적이게 되면 대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의도 없는 글이 있겠나.
논란이 예상되는 글을 굳이 발표했다는 얘기인가.
승산 없고 결말 안 나고 요란스럽기만 한 싸움을 왜 했나 싶다. 글을 쓰다 보면 완벽하게 못 쓰고 자신 없어도 슬쩍 넘어가는 대목이 생기는데 그걸 참 기광스럽게 찾아내서 욕하면 기분 나쁘지….
경기도 이천 이문열씨 자택 작업실에는 '가유헌'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지난 1월 별세한 풍수지리가 최창조씨가 생전 지어준 이름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즉 살 수는 없다는 뜻. 이씨는 최씨의 조언에 따라 당초 이 작업실 자리에 지으려 했던 자택을 옮겨 지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페미니즘 진영과도 불편했다.
1997년에 낸 소설 『선택』에 반발해 ‘이프(if)’라는 페미니즘 잡지까지 만들어졌다. 훨씬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악의적으로 문제 삼았다고 생각한다.
2001년에는 이른바 ‘책 장례식’까지 벌어졌다.
나는 지금도 왜 그렇게까지 됐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부산에서 사진관을 운영한다는 주동자를 그일 있기 며칠 전에 만났는데, 내가 시답지 않게 대한다고 느꼈는지 무척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당시 DJ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비판한 내 조선일보 칼럼(‘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에 반발해 내 책을 반환하겠다는 얘기가 나오길래 동아일보에 후속 칼럼(‘홍위병을 떠올리며’)을 썼던 게 발단인데,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보다 지역색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전라도 출신 아니냐고 내가 캐묻더라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퍼졌다.
세무조사 비판 칼럼은 왜 쓰게 된 건가.
어느 날 TV를 켜보니 마치 난리라도 난 것처럼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를 방송 3사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중계하고 있었다. 언론사도 당연히 세무조사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몰아가는 방식이 나쁘다고 봤다.
2004년 한나라당 공천 심사에도 참여했는데.
관상가도 아닌데 공천 희망자들의 정치 경력이나 식견을 따지는 역할을 했다. 원래 내가 할 일이 아닌데 집안 손자뻘인 당시 이재오 의원이 부추겨서 한 일이다.
공교롭게 요즘 공천 철인데.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고, 돌아가는 메커니즘도 모르겠다.
좋든 싫든 강경 보수 이미지가 강하다.
세상 진행 원리라는 게 아무것도 없던 데서 새로운 게 생겨나지 않는다. 있던 것이 개량되고 그동안 써오던 것이 세월 지나 낡게 된다. 그런데도 지나간 것들을 전부 죄악시하는 진보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애꿎은 두 아이를 데려다가 서로 따귀를 때리게 하면 감정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다가 내 감정이 격앙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보수의 가치를 잊지 말자는 주장을 했을 뿐이다. 그걸 두고 나를 공격하고 싶은 사람들이 보수를 지나치게 옹호한다고 말한다.
다수나 집단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감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일에 다수가 중요한 기준은 되는데 항상 선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간다고 반드시 옳다는 보장도 없다. ‘나’라는 존재는 한 번 고정돼 굳어져 있는 게 아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획일적으로 개인을 재단하려 하면 짜증이 난다.
결국 자유주의가 강조되어야겠다.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도 자유주의 전통이 있다. 과거 자유주의가 제도적으로 억압됐다면 요즘은 감춰지고 희석돼 자기가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조차 많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자기검열 비슷하게, 지역감정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느끼는 것도 일종의 억압이라고 본다.
이씨는 과거 휘말렸던 크고 작은 논란들에 대해 "승산 없고 결말 안 나고 요란스럽기만 한 싸움을 왜 했나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시 문학 얘기를 해보자. 문장이 빼어나다는 평이 많았다.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해 과한 덕을 보긴 봤다. 문장이 좋다 나쁘다, 이렇게 얘기할 때 좋다는 편에 자주 들어갔다. 단련을 하면 글이 매끄러워지기는 할 텐데 정확한 내용 전달과 동떨어진 아름다운 문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되 비유나 수사(修辭)를 활용하면 훨씬 강하게 전달되는 건 있다. 비유에는 그런 힘이 있다. 나는 그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려서 독서를 많이 했다고 했는데, 글쓰기 수련은 어떻게 했나.
고등학교 그만두고 놀 때 일기를 썼다. 지금 보면 문학수업이다. 그림 배울 때 데생하는 것처럼 잉크병이나 책상 같은 실용적인 물건들에 대해 각각 대학노트로 한 장씩 써보고는 했다. 대학노트 한 장이면 200자 원고지 7쪽쯤 된다. 그렇게 1년을 하고 났더니 말이 되든 안 되든 이야기라는 게 늘이려고 하면 한없이 늘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아가셨다고 전해져 무산됐지만 99년 아버지 상봉을 위해 중국에 간 적이 있다. 요즘 남북 관계가 좋지 않은데.
나빠진 게 아니고 점점 남북한이 관계없어지는 것 같다. 이러다 영구분단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지개벽하는 무지막지한 힘이 크게 한 번 뒤섞어 범벅을 만든다면 모를까. 남북한 주민들의 인간성 자체도 많이 변하지 않았나 싶다.
최근 이승만을 재평가한 영화 ‘건국전쟁’이 다큐멘터리치고는 크게 흥행해 화제가 됐다.
글쎄,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한데 이승만을 너무 악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많았지만 해방 직후 혼란스러울 때 남한 정부 설립을 이끌어내 국부 같은 사람이 된 거지. 한국전쟁 기간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을 사례로 깎아내리던데 그 같은 사건을 이승만이 직접 기획했겠나.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지난해 호되게 앓고 난 뒤 글을 쓸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글 한 줄 안 쓴 지 3년 됐다. 이번 중앙일보 연재가 그 대신일 수도 있겠는데, 기회가 된다면 지어내지 않고 진솔한 인생 회고록을 쓰고 싶다.
‘이문열, 시대를 쓰다’ 25일부터
‘이문열, 시대를 쓰다’는 25일부터 중앙일보 프리미엄 디지털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에 매주 월요일 30회가량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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