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찰스 시미언 – 부끄러움의 바닥짐과 경배의 돛 1. 그의 생애 ① 그의 생애와 사역은 핍박, 반대, 비방, 오해, 실망, 자기 비하, 약점, 위험 등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된다. 그 안에는 위대한 인내의 능력이 있었다. ② 1759년 9월 24일 출생.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변호사였으나 불신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알려진 바가 없다(일찍 세상을 떠난 듯) ③ 7세. 영국 최고의 기숙학교인 이튼 칼리지에 진학. 12년간 생활하면서 못 생기고 희한한 옷을 입고 다니며 운동신경이 있고 뽐내기 좋아하는 학생으로 알려짐 ④ 1779년. 19세.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로 진학. 그 후 처음 4달 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 회심하게 된다. 그는 혼자 있을 때에도 엄격한 기도와 묵상 실천함 ⑤ 1782년 11월 10일. 트리니티 교회의 교구 목사로 부름 받아 첫 설교를 함. 그 이후 54년간 사역 ⑥ 1836년 11월 13일. 별세 그는 일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독신생활을 신중하고 단호하게 선택하였다. 2. 그의 사역 ① 선교에 큰 관심 가짐. 교회 선교사 협회 설립에 핵심적인 영적 영향력 발휘. 영국 및 해외의 성서공회와 유대인 선교협회를 위해서도 수고 ② 그의 설교 – 성경적. 모든 주제의 중심이 그리스도임 시미언의 전기 작가 휴 에번 홉킨스는 “그는 결코 단 순간도 쓸데없는 미사여구에 빠지지 않았다. 자기 앞에 놓인 성경 본문을 가능한 한 면밀하고 명쾌하게 강해하는 일, 그리고 그 메시지를 청중의 양심과 의지에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일은 그가 처음부터 지혜롭게 염두에 두고 심형을 기울인 확고한 목표였다. 그러면 그의 교리는 무엇이었는가? 두 단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시미언의 설교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그분께로 되돌아갔다.”고 설명한다. 시미언은 “내가 힘쓰는 일은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을 성경에서 끌어내는 일이지 내 생각에 성경에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을 그 속에 얼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다.”고 하였다. ③ 트리니티 교회의 전임 목사가 1782년 10월에 소천 했을 때 시미언은 대학을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요크 주교는 시미언을 트리니티 교회의 목사로 승인하고(시미언의 부유한 아버지가 미리 주교에게 자기 아들을 천거해 달라고 요청함) 그는 목사직을 받아들여 1782년 11월 10일, 첫 설교를 한다. 문제는 교구민들이 시미언을 원하지 않은 것이다. 교구민은 그 당시 부목사였던 해먼드를 원했다. 시미언은 기꺼이 물러날 용의가 있었으나 요크 주교는 그가 목사직을 사양해도 해먼드를 그 자리에 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 그 당시 주일 오후 예배는 교인들이 관장하고 있었는데 교인들이 시미언에게 주일 오후 설교를 맡기지 않는다. 5년간 해먼드에게 맡긴다. 해먼드가 떠나자 다시 7년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1792년부터 시미언이 주일 오후 설교자가 된다. 시미언은 주일 저녁 예배를 신설하려고 시도해보았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왔는데 교구 위원들이 교회당 문에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 그 당시는 교인들이 지정석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일 아침마다 신자석의 출입구를 잠가 놓았다. 자신들도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하였다. 시미언은 자비를 들여 교회당 복도, 모퉁이, 가장자리에 의자를 놓았다. 그러자 교구 위원들이 그 의자를 밖으로 끌고 나가 교회 부속 묘지에 집어던진다. 호별 방문을 시도하면 그에게 문을 열어 주는 교인이 거의 없었다. 그 상황이 최소 10년간 지속된다. 그는 쉼없이 말씀 사역과 기도와 심방을 통해서 서서히 교인들의 반감을 극복한다. - 1812년에(교회를 섬긴지 30년) 교인들 가운데 반대파가 또 생겨나 풍파를 일으킨다. 1815년에 교회에 다시 평화가 찾아와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된 성도들을 목양하는 기쁨”을 누린다. - 트리니티 교회에 찾아온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은 적대적인 교인들의 영향을 받아 시미언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진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온갖 종류의 나쁜 소문을 내어서 시므온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 온갖 선한 척하는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예배를 반복적으로 방해했고, 길거리에서 흥청망청 술을 마셔댔다. 시미언은 “창문가로 돌이 날아오는 일이 몇 번 있었다.”고 말한다. 시미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고 각성한 학생들은 곧 따돌림과 비웃음을 당했다. 시미언의 졸개들이라고 불렀다. - 대학 내 동료들의 따돌림과 냉대가 있었다. 어느 특별 연구원은 학생들이 시미언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헬라어 수업을 주일 밤 시간으로 잡았다. 시미언은 존경하는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은 우등상 수여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④ 1807년. 목회를 시작한지 25년 뒤, 그의 건강이 악화된다.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서 설교를 하기가 굉장히 어려웠고 때에 따라서는 속삭이는 소리로밖에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쇠약한 몸 상태는 예순 살이 될 때까지 13년간 지속된다. 악화된 그의 건강이 단기간에 호전되고, 육십 세에 그는 강단과 교회의 지역 및 세계 선교에 대한 헌신을 다짐했고, 숨을 거두기 두 달 전까지 17년은 더 열정적으로 설교한다. 3. 그의 인내의 뿌리 ① 성도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강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는 목사는 등대지기와 같다고 하였다. 등대지기가 잠들면 여기저기 시체라 널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부주의하고 나태한 자세로 사역에 임하지 않았다. ②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이나 개인적인 분노를 설교를 통해 쏟아내지 않았다. 책망하는 어조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한이 있어도 “친구들 앞에서는 쾌활하고 즐거운 태도를 유지하여 언제나 주님을 높이려고 애쓰는 것이 그의 처신의 대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③ 그는 부당한 대접을 받았지만 소문을 쫓아다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에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말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별로 없다.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교만해지고 비판하는 말을 들으면 낙심하며 잘못된 말을 들으면 화가 날 뿐이다. ④ 비판을 받아들이고 비판에서 유익을 얻는 일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필수적이다. 시미언은 47-60세(13년)의 건강 악화를 60세에 은퇴하려 했던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소천 할 때까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몰두했다. ⑤ 그는 생활방식과 재물에 대해서 비판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다. 그는 대학 내의 자기 방에서 독신으로 살았고, 수입의 모든 남은 돈은 지역 내의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부유했던 형이 남겨준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사양했다. ⑥ 교인들이 자신들의 지정석을 10년이나 계속해서 잠갔을 때 시미언은 “이런 상황에서 나는 믿음과 인내 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알지 못했다. 내 마음을 복종시키고 다스린 성경 구절이 있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딤후2:24)”라고 하였다. 그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⑦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그의 나이 71세 때 49년간 핍박을 이겨낸 비결을 묻자 “사랑하는 형제님,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소한 고난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고 답했다. ⑧ 그의 인내의 뿌리는 기도와 묵상생활이었다. “묵상은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주된 방편이다. 묵상이 없으면 기도 그 자체는 공허한 일이다.” 겸손에 있어서는 아래로 자라가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위로 자라가는 두 가지가 그의 내적 생명의 핵심이었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는 자기 스스로의 깊은 뉘우침이라는 갈아엎은 흙에서 가장 잘 자라는 것이었다. “당신의 모든 기쁨이 그분의 십자가에 대한 묵상에서 흘러나오게 하라.” |
첫댓글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그 긴시간을 어찌 참으셨는지~
- 그의 인내의 뿌리는 기도와 묵상생활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