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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캄
오컴 [Ockham, William of, 1285?~1349]
요약 -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국적 - 영국
활동분야 - 철학
출생지 - 영국 잉글랜드 오컴
본문 - 잉글랜드 오컴 출생. 젊어서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배운 뒤,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몇 가지 명제(命題)는 유죄 선고를 받아, 교황 요하네스 2세와 알력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認識論)에서 뛰어나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크다. 그의 입장은 유명론(唯名論)으로서, 중세의 사변신학(思辨神學) 붕괴기에 근세의 경험론적 사상을 준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원천은 개체에 관한 직관표상(直觀表象:notitia intuitiva)으로, 개체가 실재(實在)이고, 보편자(普遍者)는 실재가 아니며, 또한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다. 보편자는 정신의 구성물이며,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또는 말로서만 존재하고, 정신 속에서의 보편자의 존재는, 정신에 의하여 사고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보편자가 다수의 개(個)에 관하여 술어(述語)가 되는 것은, 보편자가 다수의 개의 기호로서 이들을 대표하는 것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근세의 영국 경험론자가 답습하였다.
Occam's Razor, 오캄의 면도칼
'불필요한 다수성(Plurality)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cesitate)'. 이것은 중세 영국의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윌리엄 오브 오캄(William of Ockham, ca.1285-1349)의 말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다른 많은 수도사처럼, 윌리엄은 청빈주의자(minimalist)로서 청빈한 인생을 보냈고, 또 성프란시스코와 같이,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교황과 논쟁을 시도했다. 윌리엄은 교황 요한12세에 의해 파문되었다. 그는 교황 요한을 이단이라는 논문을 써서 반론했다. (역주 : Plurality를 정확하게 번역할 수 없어서 다수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
중세 철학의 일반적인 원리인, 오캄의 면도칼은, 오캄 오브 윌리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윌리엄이 빈번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영원히 붙게 되었다. 현대의 우리들이 그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수도사인 윌리엄이 기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반론을 할 때,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오캄의 면도칼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떤 일이든 간에 형이상학적 존재를 추가로 논의에 개입시키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이 '불필요한 다수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unnecessary plurality)'를 사용한 것은, 중세판 초능력(psi)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면, 피에르 아벨라르(Peter Abelard, 역주 : 프랑스의 철학가이며 신학자로 11세기 말에서 12세기에 활약했다.)의 '신학명제 강해(Commentary on the Sentences)'의 제2권에서, 그는 '높은 등급의 천사는 낮은 등급의 천사보다 더 적을 것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깊은 고찰을 하고 있다. (역주 : 천사는 모두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그는 '불필요하게 다수성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에 맞추어, 이 문제의 답이 '그렇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연이 완전하면 할수록' 자연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들도 적어진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인용하고 있다. 이 원리는, 무신론자가 진화론을 선호하고 신-창조주의 가정을 부정하는데 지금까지 사용되어왔다. 즉, 만약 전능한 신이 우주를 창조하였다면, 우주와 그 구성요소는, 더욱 단순해야 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연 신학(自然神學 natural theology)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자연신학은, 신을 이해하는데 오직 추론만을 사용하며, 계시신학은 이것과 반대로 성서학적인 계시에 기초하고 있다. 오캄 오브 윌리암에 의하면, 신이라는 개념은 명백한 경험이나 추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모두 계시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학의 근거는 신앙에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오캄의 면도칼을 정신세계 전부를 제거하는데 사용했지만, 오캄은 신앙고백서까지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만약 그가 신앙고백까지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했다면, 그는 존 톨랜드(神秘가 없는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1696)와 같은 소시니안(Socinian)이 되어,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의 양면성(역주 : 신이면서 인간임)을 하나로 정리했을 지도 모른다.
오캄은 철학의 청빈주의자로서, 당시 인기 있던 실재론(realism)에 반대하여, 유명론(nominalism)을 제창했다. 즉, 그는 보편(universals)이 마음의 밖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보편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개개의 사람이나 사물의 특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명칭을 말한다. 실재론자는, 개개의 물체와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개념의 배후에는 보편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캄은 이것을 너무 지나친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무엇을 설명하든, 보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명론과 실재론, 어떠한 입장이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의 인간존재며, 또 소크라테스에 대한 관념을 나타낸다. 실재론자에 있어는, 또한 소크라테스의 인간성이나 동물성 등이 존재 하는 것이 된다. 즉, 소크라테스에 관한 성격 전부는, 각각 '실재(reality)' ,'보편' 혹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형이,eidos)가 있는 것이 된다. 윌리엄은 보편론적 세계관이라 불리는 이러한 다의적 세계에 회의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논리나 인식론, 형이상학에도 불필요하다. 그러면 왜 이러한 불필요한 다수성(plurality)을 가정하는가? 물론, 플라톤이나 실재론자가 옳을 지도 모른다. 현실의 각각 물체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모델의 보편적 실체들, 즉 이데아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각의 사상이나 개념이나 지식을 설명하는데, 이러한 것을 전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과잉이며, 형이상학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불필요한 짐인 것이다.
죠지 버클리 주교는 물질적 존재(material substance)를 불필요한 다수성이라고 간주하고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해서 제거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버클리에 따르면, 무엇을 설명하든 간에,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마음과 개념뿐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이 면도칼을 조금은 선택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주관적인 관념론자는, 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면도칼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에 귀착한다. 유아론에서는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생각만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뿐이라고 한다. 이것과는 반대로, 유물론자는 마음을 제거하는데 면도칼을 사용할 것이다. 우리들은 두뇌의 다의성(plurality of brains)과 의식의 다의성(plurality of minds)을 함께 가정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역주 : 죠지 버클리는 관념론자이며 물질주의에 대해서 반대했다. 유심론자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며 하나는 실재론이고 다른 하나는 관념론이다.)
오캄의 면도칼은,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려진다. 최근에는 '설명은 단순한 것일수록 뛰어나다', '불필요한 가정을 추가하지 마라' 등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어쨌든, 오캄의 면도칼은 존재론 밖에서도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철학자는 정확한 정도가 비슷한 가설이 여러 개 있을 경우, 가장 적합한 가설을 골라내는데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한다. 어떠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을 할 경우, 불필요하게 복잡한 가정을 세워서는 안 된다. 폰 데니켄이 옳을지도 모른다. 즉, 지구 밖의 생명체가 고대 지구인에게 예술이나 기술을 가르쳐 주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인의 기술이나 예술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우주인의 방문을 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 불필요한 복잡한 가정을 만드는가? 또, 많은 사람이 하는 것처럼, 꼭 필요한 가정만 만들어야 된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데 에테르를 가정할 수는 있지만, 굳이 에테르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럼, 왜 근거가 희박한 에테르를 일부러 가정하는 것인가?
올리버 호움즈(Oliver W.Holmes)와 제롬 프랭크(Jerome Frank) 는 '법(the Law)'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오캄의 면도칼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오직 사법적 판단만 있으며, 각각의 판결과 그 판결을 합쳐서 법률이 형성되는 것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유명한 법률가는 혼동스럽게도, 자신들의 관점을 법률 유명론(legal nominalism)이 아니라 법률 존재론(legal realism)이라고 칭하고 있다. 좀 더 문제를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오캄의 면도칼은 단순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simplicity)라고도 불리워지므로, 일부 창조론자 는, 오캄의 면도칼을 이용해서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복잡한 구조로 설명하는 진화론보다, 훨씬 단순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캄의 면도칼은 '단순한' 가정이 더 좋은 가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캄의 면도칼은, 현명하지 못한 대중에게는 대단히 무딘 면도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산 삭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돈을 들인다면 낭비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오캄의 면도칼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가정"이라는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오캄의 면도칼을 오캄의 면도칼의 원리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것은 숫자가 적다는 말은 양이 적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오캄은 가정(assumption)을 줄이자는 것이지,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이 원리는 완전성이란 것은 곧 간결성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이 개념은, 우리들이 중세나 고대그리스인 등과 공유하는, 형이상학적 편견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도 그들처럼, 원리 그 자체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론자에게 있어, 이원론자는 불필요한 다수성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원론자에게서는, 정신과 육체를 가정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무신론자에게서는 신과 초자연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 것은 불필요한 다수성이다. 하지만, 유신론자에게는, 신의존재는 꼭 필요한 것이다. 다른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마, 폰 데니켄에게는, 아마 사실을 설명하는데 외계인을 가정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우주인은 불필요한 다수성이다. 결국에는, 오캄의 면도칼은, 아마 무신론자에겐 신이 불필요 하고, 유신론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원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편, 오캄의 면도칼이 믿기 어려운 설명과 확실해 보이는 설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에는 확실해 보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이 원리는 불필요하다. 이것은 보통,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리가 진짜 청빈주의자(minimalist)의 원리라면, 환원론적인 일수록 더욱 좋은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검약의 원리는 오캄의 전기톱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것의 주요한 사용 목적은 실재론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론 [ 唯名論 , nominalism ]
요약 - 보편자(普遍者)는 명사(名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그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철학상의 입장.
본문 - 명목론(名目論)이라고도 한다. 실재론(實在論)과 대립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個體)뿐으로, 예를 들면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개념은 많은 빨간 것을 갖는 빨강이라는 공통 성질에 대하여 주어진 말, 혹은 기호로서,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이 명사를 주어진 근거로 하여 사물간의 유사성(類似性)이라는 것마저 부정한다. 실재론·개념론과 함께 유럽 중세(中世)의 보편논쟁으로 일파(一派)를 이루었다. 11세기 후반기에 로스켈리누스가 이 입장을 대표했으며, 14세기에는 W.오컴이 체계적 이론을 전개하였다.
17세기 때 영국의 경험론 속에서 부활하였는데 T.홉스가 그 대표자이다. 중세에서는 플라톤적 실재론과 결부하였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위험사상시되었고, 명백히 유물론적 색채를 띠었다.
실재론과 유명론(realism and nominalism)
고대 및 중세
이 용어들은 중세 철학 학파들에 이르러서야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었지만 중세기의 논쟁은 그들이 물려받은 희랍 철학의 단편들 가운데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이 용어들에 대한 구분에 의하여 준비되었다. 플라톤은 실재론자로 알려졌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로는 실재론과 그 반대 이론의 종합을 의미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는 플라톤에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것으로 믿어졌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형이상학에 대한 첫 번째 진술인 플라톤의 대화편으로부터 형상들(관념들)은, 플라톤이 이에 대하여 기술하기 전에는 대상들 사이 또는 개체들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은 경험의 자료들이 A. 개체들, 대상들 또는 사물들 그리고 B. 개체들과 특수한 관계를 지니는 바, '형상들'(eide, ideai)이라 불리는 또 다른 특정한 실재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양자의 관계가 때로는 참여됨 또는 복사됨으로 얘기되었고(개체가 실재 속에 참여됨 또는 개체는 실재의 복사란 뜻임) 이 관계는 플라톤 학파에서 개체들이 형상보다 어떤 의미에서 덜 실재적인 것 즉 의존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하여 이것은 명백히 있는 것에 새로운 종류의 개체적 존재를 덧붙이는 것일 뿐이라고 하여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논증은 아마도 개체가 궁극적 실재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의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형상이 개체보다 덜 실재적인 즉 형상이 개체에 의존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중세 사상의 초창기에 스토투스 에리게나는 반(semi)철학적 진술들, 원시과학과 대중적 미신이 혼합된 이른바 로마 가톨릭의 catholica fides(보편적 신앙)에 논리적 통일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침으로 삼았던 견해는 위디오니시우스의 모호한 신플라톤주의였다. 그는 이 신플라톤주의에 일치하게 실재론의 한 형태를 수립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유사함, 즉 형상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인 존재가 궁극적 실재가 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따라서 감각의 대상들에 접근한다는 것은 실재와는 더욱 멀어지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기서 신학적인 결과를 논할 필요는 없다. 한편 철학적인 측면에서 실재론은 대체로 '추상'이라고 불리 우는 것이 실재 세계의 연구에 대한 정확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감각-인식이 배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추상에 종속시키게 되었고 따라서 실재는 외양과 대조되는 것이 되었다. 그 결과로 실재론은 신비주의의 한 형태로 되는데 정확한 지식은 무익한 것처럼 여겨졌다.
이에 대해서 유명론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res:실재)들은 빈사(predicate)들로서는 명백히 나타낼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 결과는 보편성 즉 '물'들 사이의 유사성이 'res'(물)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res'라는 단어가 현재 우리가 '실재'라는 말에 의하여 의미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유명론자에게 보편들은 단순한 단어들 즉 flatus vocis(내뱉은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초기 유명론자들에 대해서는 오직 그들의 반대자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철학적 관심을 개별적인 인식 대상들 쪽으로 돌리게 하고자 시도하였으리라는 것은 상당히 가능한 것 같다. 한편 중세 최초의 위대한 사상가인 아벨라르두스는 사물 서로 간에 있어서 유사한 것들의 분류는 인식자의 변덕스러움에서 기인될 수 없고 따라서 사물들 가운데 근거를 두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쉽사리 보여 주었다. 아벨라르두스를 순수한 개념론자로 보거나 그가 마음의 형상들, 즉 범주들이 마음의 구조에서 기인되었다는 이론을 지녔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마도 역사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중세 초기의 사상가들을 역사적으로 올바로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말이 내포하고 있는 것보다는 더 단순하고 원시적이었을 것이다. 이러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보다 많이 소개되면서 큰 진전을 보게 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쉽게 당시의 사상적 흐름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개체(indi-vidual)가 궁극적으로 최종적인 실재라는 이론을 지지하긴 했지만, 보편은 객관적이며(중세어에서는 주관적) '사물 안에'(universalia in rebus)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실재론자였다. 다른 면에서는 아퀴나스의 훌륭한 대적자인 둔스 스코투스도 이 점에서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그가 개체에 대한 설명으로서 '개별자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라는 말보다 '이것임'(hicceitas)이란 말을 더 좋아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감각된 개개의 대상을 보편(유사함들)에다 약간의 개성화 요소를 첨가하여 만든 하나의 합성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수정된 실재론은 아주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사물의 분류가 제멋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대상이나 개체가 인식자와는 전혀 무관하게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도 보편을 인식 대상의 구성요소로 만듦으로써 보편을 확보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적인 시도를 함으로써 그 안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씨앗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 때에 논쟁의 마지막 단계는 아퀴나스와 스코투스의 실재론을 철저하게 분쇄한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에 의해 도달되었다. 그의 가장 효과적인 논쟁은 선배들의 '개별자의 원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논쟁의 궁극적인 차이는 바로 다름 아닌 개별자 그 자체라는 것을 밝히고 개별자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하면서 실재론자의 보편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보편이 물 안에(in re)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현한 대로, 정신 안에(inmente) 존재하는 것임을 밝혔다. 아마도 오캄은 자신이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보편이 꾸며낸 것(fict-ions)이라거나, 더구나 '마음의 작용'(the work of the mind)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명백히 그는 그와 같은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이 논쟁은 식어져서 중세 때의 격렬했던 위치로부터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논리상 모든 새로운 형이상학적 이론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으면서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철학자들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이론은 오캄이 남겨둔 그대로였다. 인식의 개체적 대상들은 실재이며 또한 우리의 모든 인식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들 간의 유사성은 정신적인 것이거나 개념적인(conceptual)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유사성들이 인식하는 마음의 구조나 활동에 기인한다는 함축적 의미는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캄의 유명론이 견지하였던 감각지각(sense-perception)에 대한 관심은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기꺼이 결합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캄은 보편이 실재적인 것이라고 한 중세의 실재론에는 반대했으나 보편들에 개념적(객관적)실존을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물은 그 사물의 성질들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를 거부한 점에서 현대 실재론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초기 현대 철학자들을 실재론자와 유명론자로 분류하는 것은 전혀 옳지 못한 일이다. 르네상스 이후 이 특유의 문제는 중세 때와 똑같은 조건으로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 이론은 계속되었고 개념론이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되었는데 그 이론이란 인식 대상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정신으로 인하여 현재의 그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버클리와 흄에 있어서 이 이론은 사물서로 간에 있어서 유사한 것들을 분류함에는 특정한 인간의 인위성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신 작용에 대한 세밀한 연구도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결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철학적 편견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리고 헤겔에 와서는 평범한 사람이 보통 세계라고 간주하는 것 전체가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으로부터의 발산(emanation)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결과는 정확한 과학, 즉 정신 작용과 그 효과들에 대한 연구를 만들어 내게 되었고 실재론은 그 분야로부터 추방되었다.
현대 사상에서의 실재론
대체로 관심의 중심이 존재론으로부터 인식론으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현대의 실재론은 그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이 이제는 인식과 인식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 되었다. 비철학적인 사람들의 소박한 실재론과 같은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보면 실재론이란 (인식) 주체가 외부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 지식을 갖는다는 것, 즉 사물은 보이는 그대로이며, 인식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들은 나타나 보이는 그대로라는 견해-존재의 독자성 문제는 별도로 하고-는 '인식론적 일원론'.'내재론'.'현상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진다. 이 가운데 현상주의란 용어는, 현상과 대조되는 것으로서의 '실재'라는 보다 초기의 의미가 남긴 유물이요 그에 대한 반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실재란 인식된 것의 실재를 뜻하며 인식된 그대로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코틀랜드 학파의 '자연적 실재론'(natural realism)이 바로 이러한 '실체'(substance) 이론의 유형에 속하였다. 이것은 버클리와 흄의 '관념 이론'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단순히 외부 대상들을 표상할 뿐인 '관념들'만 우리가 경험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리이드(Reid)가 피하려고 애쓴 주관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리이드는 몸(물체)의 성질들 자체가 그 몸의 구성하지는 않기 때문에 성질의 기저가 되고 있는 몸의 존재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지속하여 존재하는 단순한 관념들의 존재는 말할 여지도 없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증은 이상한 데가 있다. 왜냐하면 몸과 그 성질들을 뚜렷이 구분함으로써, 모든 인식 작용에서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은 인식 대상 그 자체가 아니며 단지 그 대상을 표상하는 관념에 불과하다는 가능성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이드가 피하기 원했던 것이 바로 이 같은 인식론적 이원론이었다. 실제로 그는 인식이 직접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도 이 사실을 실증하지 않는다. 사실상 인식론적 이원론은 사물들에 관한 명제가 주부-술부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신념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히 해밀턴이나 스펜서와 같이 '실재'(진짜)대상에 관한 불가지론에 빠진다. 그리하여 실체에 대한 모든 자연주의에 치명타를 안겨 주게 된다. 소박한 실재론의 일부인 인식론적 일원론이 어떻게 인식에 대한 관계론적 견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홉하우스(L.T. Hobhouse)와 더불어 영국 '신실재론'의 선구자인 하지슨(S.H. Hodgson)은 '실제로 경험된 것에 대한 주관적 분석'을 통하여 '직접 지각된' 대상들의 실재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물은 인식된 그대로이다. 즉 지각하는 의식(주체)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실재가 존재한다. 그런데 버클리 자신은 인식론적 이원론을 부정함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므로 실재론이 버클리의 일원론과 그의 주관주의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후자를 피할 수 있고, 또 실재의 독립성을 긍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것이 무어(G.E. Moore)의 '관념론의 공박'이 미래의 실재주의적 해석을 위하여 길을 열어놓게 된 이유이다. 무어는 감각(작용)이란 사실상 어떤 것을 안다거나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청색에 대한 감각 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가 아는 사실은 청색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이다. 분석해 보면 청색에 대한 감각 작용은 청색 이외에도 인식이라는 독특한 요소, 청색에 대한 이 요소의 독특한 관계 이 양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로부터 청색에 대한 감각 작용이 존재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실제로) 청색을 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주관주의자가 말하는 자기 자신의 관념들과 감각 작용들이 그리는 원(순환) 밖에 서 있다. 따라서 감각 작용과 감각-자료 사이의 이러한 구별은 주관주의에 대한 일반화된 논박을 향하여 진일보하게 해 준다. 이러한 구별은 관계들의 외부성(인식하는 정신 '밖'의 실재성을 뜻함)에 근거하였으며, 이 외부성은 현대 논리학의 성공에 의하여 지지받고 있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관계의 외부성은 단순히 논리 분석의 정당화로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신실재론자(new realists)들이 논리 분석에 집착했음은 홀트(E.B. Holt), 마빈(W.T. Marvin), 몬테규(W.P. Montaque), 페리(R.B. Perry), 피트킨(W.B. Pitkin), 스폴딩(E.G. Spaulding) 등과 같은 '강단 실재론자들'(pla-tform realists)의 중대한 시도에서 예시되어 있다. 이들의 시도는 러셀(Russ-ell)이 그들의 출현을 환영하면서 "과학의 승리를 가져온, 결과들에 대한 끈질긴 상호 협력적 축적"이라고 불렀던 그것이다. 페리는 비판적 자연주의가 "결국에는 존재에다 실체적 특성보다는 논리적인 특성을 부여한다"는 점을 밝힐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실재론이 한층 더 강화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세부적이며, 검증 가능한 결과들"을 추구하는 '논리적 원자주의'는 이미 확립된 입장들에 대해서도 일상 담화의 조야한, 비분석적 언어로는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확립된 입장이란 온전한 존재론적 지위와 논리적 실체들(개별자들만이 아니라 보편자도 실재이다)의 일치나 칸트의 주장의 수락을 말한다. 칸트는 만일 인식론의 우선순위를 인정하지 않는 지식이란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것은 수학과 논리학의 지식이라고 했다. 대략적으로 얘기해서, 미국의 신실재론자들과 영국의 신실재론자들 간에는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이것은 주로 하지슨과는 반대 학파인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기인하는 것이다. [Essays in Radical Empiricism](London, 1912)에서 제임스는 사물은 인식된 그대로이다라는 견해를 인정했다(p.27). 그러나 존재하기 위해서 인식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p.26). 이와 같은 차이는 그가 정신적 사물이라는 특수한 성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정신적인 존재와 물질적인 존개간의 차이는 맥락과 배열의 차이라고 주장함(p.25)으로써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의 기원은 자아 중심적 범주로부터 끌어낸 논증을 대상으로서의 주체에다 적용시킨 흄에게 있다. 이리하여 "만일 주관(주체)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지각순간에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사물) 속에 있는(주관 객관으로부터) 중립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철저한 현상주의적 세계에 도달한다. 더 나아가 흄은 지각과는 상관없이 이들 요소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정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소위 감각의 환상(착각)이 관념이란 우리의 (감각)기관의 구조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흄의 초기의 가정에 의하면, 우리의 기관이라는 것은 영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감각기관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지각할 때에 존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밟아온 과정을 다시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A. 감각 기관과의 상대(관계)성에 기초한 주장은 효력이 없는 것이므로, 위에서 말한 중립적 요소에 독립성을 부여하려 했던 흄의 시험적인 가정은 가능하다. 그러나 B. 우리가 그러한 가정의 필요성에 이끌리게 되었던 것은 주체를 대상으로 인식함에 있어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C.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은 다만 주관주의가 전제될 때만 일어난다. 따라서 이러한 흄의 주장은 D. 무어(Moore) 에 의해 반박되었다.
미국의 실재론자들은 그들이 더 이상의 후퇴 없이 A의 단계를 재해석할 수 있다고 믿으며, 중립적, 인식론적 일원론에다 독립성의 이론을 '덧붙인' 제임스의 주장에 가담하게 된다. 위에서 이미 설명된 이에 대한 반론이 클리포드(Cl-ifford).피어슨(Karl Pearson) 그리고 마흐(Ernst Mach)와 아베나리우스(Avena-rius) 등의 현상주의적 자연주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중립적 일원론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러셀(Russell)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몇 가지 중요한 결론들이 이 일원론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오직 하나의 경험만을 가진 정신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일원론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외부와의 관계들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립성에 대한 중요한 실재론자들의 주장을 위이너(N. Wiener)와 같은 철저한 상대주의자의 손에 맡겨 버리는 견해이다. 더욱이 중립적 일원론은 부당하게도 믿음이나 판단을 감각 작용과 표상에다 융합시켰다. 따라서 오류는 비실재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게 되며, 결과적으로 비실재적 사물을 용인하게 된다.
그러나 오류의 문제는 '착각'(허상; sense-illusion)이란 문제와 분리되어야 한다. 영국 실재론자들은 보다 더 완전히 주관주의를 버림으로써 이런 문제를 보다 쉽게 만들며, 이차적 성질(사람의 감각 작용에 따라 달라지는 성질들; 색깔, 맛 따위)에 관한 문제도 보다 더 다루기 쉽게 만든다. 인지의 대상은 환상적인 것(허상) 곧 비실재의 것일 수 없다. 따라서 뜨거운 금속이 피부의 찬 부위에 접촉하면, 우리는 '차가움'을 대상으로 느낀다. 비록 감각 작용이 감각 기관과 신경 조직의 작용이라지만, 이처럼 (차갑다고 느끼는) 인식은 본래적인 인식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으로써 인식론의 인식론적 전제의 (본질적) 일부를 형성할 수는 없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색깔들에 관한 난점도 해결되었다. 넌(T.P. Nunn)은 '(사)물'에 대한 보다 넓은 개념이 중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한 필수적, 논리적 작업은 러셀이 완수해 놓았다. 그는 '이와 같은 장소'라는 구절에서 오는 난점은, 실은 너무나도 단순하며 전혀 모호하지 아니한 공간 개념에서부터 나왔음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아직은 미해결의 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즉 실재론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이 새 철학이 숲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숲속에 있는 희망의 오솔길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현대 논리학과 실재론
수학에 대한 현대의 논리 분석과 무한과 연속의 이론에 있어서의 수학적 진보는 철학적 실재론에 하나의 자극을 주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학파의 전통적 논리학이란 주로 삼단논법적인 추론의 규칙들을 수집해 놓은 것이었으며, 명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로 분석되었다. 이에 비해 라이프니츠(Leibniz)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고로 예수그리스도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어머니다"라든가, "다윗이 솔로몬의 아버지이므로 의심할 것도 없이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다" 등과 같은 비삼단논법적 추론이 타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라이프니츠가 보여준 관계의 논리는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에 의해 추진되긴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세기 중엽 드모르간(Augustus de Morgan)에 의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점에서 드 모르강의 업적은 부울(George Boole)의 업적과는 지극히 다른 것이었다. 부울의 논리학의 기호론은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드모르간의 업적들은 1850-65년 동안에 나온 '케임브리지 철학학회지'(Transactions of the Cambridge Philosophical Society)와 그의 저서 [새로운 논리 체계의 요목](Syllabus of a proposed System of Logic, Lo-ndon, 1860) 등으로 이룩되었다. 그의 업적 중 이 부분은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충고를 성공적으로 이행한 것이라는 말로 간단히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사고 속에 작용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고려해야 하며, 따라서 명백하게 논리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논리란 그 자체의 주장처럼 사고의 비 배타적 반영이어야 하며, 단순히 사고의 여러 형태로부터 제멋대로 선택하는 것-일련의 세련된 축출-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현대 논리학은 프레게(Gottlob Frege)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관념론, 순수 사고의 수학적으로 복사된 형식어에 대하여](Begriffsschrift, eine der arithmetischen nachgebildete Formels-prache des reinen Denkens, Halle,1879)는 두 번째 저서인 [수학의 원리, 수의 개념에 대한 논리, 수학적 고찰](Die Grundlagen der Arithmetik, eine logisc-hmathematische Untersuchang ueber den Begriff der Zahl, Breslau,1884)과 연관시켜서 읽어야 한다. 프레게는 수의 개념의 본성(종합적이건 분석적이건 선험이건 후험이건 간에)에 관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좀 조잡하긴 하지만 논리적 연역법에 대해 다양한 개념들과 방법들을 상당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대단히 효과적인 기호논리학을 고안해냈다. 기호논리학과 분석과 1879년과 1903년 사이에 전개되었다. 그의 전체 이론에 대한 최종적 진술이 그의 저서 [관념론적으로 추론한 수학의 근본 원리](Grundgesetze der Arithmetik begrif-fsschriftlich abgeleitet, 제2권, Jena, 1893-1903)에 나타나 있따. 철학적으로 말해, 프레게의 관점은 그가 에르트만(Benno Erdmann)이 [논리학](Logik, H-alle, 1892)에서 주장하는 심리학적 논리학(psychological logic) 을 비평한 부분에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개념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논쟁의 기원으로 보인다. 나는 진리를 객관적인 것이고 판단자로부터는 독립된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심리학적 논리학자(psychological logicians)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렇지 아니하다. 에르트만이 '객관적 확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판단자들로부터 생겨난 일반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판단자들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심적 특성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나는 실제 사물의 영역이 아닌, 객관적 영역을 인정한다. 반면에 심리학적 논리학자들은 충분한 근거도 없이 비실제적인 것을 주관적이라고 간주해 버리고 만다."
프레게는 그의 많은 저서에서, 때로는 아이러니컬한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수학에서의 주제는 실제 기호이지 그 기호에 의해 정의된 보편이 아니라는 논제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헬름홀쯔(H.L.F. Helmholtz), 크로네커(L. Krone-cker), 하이네(H.E. Heine), 토메(J. Thomae), 스톨츠(O. Stolz), 프링스하임(A.Pringsheim), 슈베르트(H. Schubert) 등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수학자들까지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명백하게 이와 같은 형태의 유명론을 주장했다. 이리하여 프레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정도로까지, 수학에서 사용되는 수(number)는 곧 비실제적(non-actual) 이며 비정신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페아노(Giuseppe Peano)의 논리학 저서는 프레게의 것보다 9년 뒤에 발행되기 시작했으나, 그것과는 아주 독자적인 것이었다. 페아노의 논리적 체계의 기초는 프레게보다는 부울(Boole)과 그 후계자들에게 훨씬 더 가깝다. 그러나 페아노는 아주 훌륭하고도 편리한 기호 논리학을 사용하여, 이미 기호화된 수학적 추론들을 포함한 추론 전모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페아노는 자기의 기호 논리가 진정한 '표의문자'(ideography)이므로, 일상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조금도 이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비록 많은 점에서 페아노의 분석이 프레게보다 뒤떨어지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와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명제는 그 형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지적해 낸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프레게도 이 같은 두 명제의 구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아노가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구별이 몇몇 기호논리학자들을 포함한 그 밖의 논리학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명제들이 같은 연사("is" 혹은 "are"…<이>다)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별의 철학적인 측면에 대해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혼동은…판단과 추론의 형태에 대한 모든 연구를 모호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사물과 그것들의 성질의 관계, 구체적인 존재(자)와 추상적 개념의 관계, 그리고 감각 세계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와의 관계까지도 흐리게 만들었다."
러셀은 제 관계를 서로 대응하게끔 기호화한 논리학을 추가함으로 페아노의 체계를 완성하는 작업에서 시작하여, 기대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발견은 물론 페아노가 했던 미묘한 구별들 중 많은 것을 독자적으로 발견함으로써 프레게의 논리학 연구 결과들, 칸토르(Georg Cantor)의 한계 초월수의 이론 연구의 결과들, 그리고 페아노의 기호 논리학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결합, 발전시켰다. 그의 저서 [수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제1권, Cambridge, 1903)의 주요 내용은 보다 더 철학적인 토론들로 구성되었다.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 제3권, Cambridge, 1910-13)에는 화이트헤드(A.N. Whitehead) 와 러셀의 기호 논리학의 이론이 상세하게 전개되어 있다.
현대 논리학의 철학적 의미는 러셀에 의해 특별히 강조되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고유 명사는 개별자(특수자)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 외의 실명사,(영어의) 형용사, 전치사, 동사(verbs) 등은 보편자를 나타내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대명사와 약간의 부사도 개별자를 가리키지만 모호하다. 철학자들은 오직 형용사나 실명사에 의해 명명된 보편자만을 자주 주목하였을 뿐, 동사나 전치사에 의해 명명되는 보편자는 보통 간과하여 왔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형용사와 보통 명사는 단일 사물들의 성질이나 속성을 표현하는 반면, 전치사나 동사는 두개 이상의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문장 속에서 개별자를 나타내는 단어들만을 중시한다. 이 사실로부터 생겨난 전치사와 동사를 무시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결국 모든 명제는 두개 이상의 사물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일 사물에다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즉 모든 명제를 주어.술어의 형식으로 믿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관계 따위의 실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이러한 생각이 결국은 스피노자와 브래들리의 일원론으로 가든가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방금 언급한 이같은 생각은 위에서 언급했던 해밀톤이나 드 모르강의 것과 거의 같은 종류의 반성을 일으킨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신비스런 통찰력에 의해 계시되거나 불변하는 논리적 실체로 구성되는 초감각적 "실재" 세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일상생활과 과학의 세계가 비실재의 세계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에 비하면 그러한 일상생활과 과학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이유의 실례는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스피노자, 헤겔 등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가 이상주의적(관념론적) 철학 전통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모든 관계들이 (겉보기에) 명백하게 서로 관계된 명사들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철학자들이 감각 세계의 실재성을 의문시한 또 하나의 이유는 무한(infin-ity)과 연속(continuity)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한과 연속을 가정하고 세계를 설명하면 훨씬 더 쉬워지고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나 제논(Zenon) 때부터 무한이 모순이라는 추정이 철학적 사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제논의 역설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이 무한의 문제는 볼자노(Bernard Bolzano)에 의해서 어느 정도 잘 처리되었다. 그러나 최초로 이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한 것은 1882년경 수학자 칸토르에 의해서였다. 사실상 (무한) 집합이 존재하고, 나아가서는 그 집합에 관하여 인식하고 추론하기 위하여, 꼭 우리가 그 (무한) 집합의 항들을 하나하나 검토할 수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즉 무한 집합의 항들을 열거할 수 없을지라도 그 특성들에 의해 무한 집합들이 인식될 수 있다. 무한 집합의 특성들을 정의하는데 필요한 개념들은 즉각 말할 수 있다. 이리하여 끝없이 연속되는 항들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게 되고, 또 그 전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항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무한 집합이 자기 모순적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공간과 시간을 비실재로 간주하는 논리는 효력을 잃게 되며, 형이상학적 해석들을 이끌어 내던 커다란 원천의 하나가 말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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