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0일 마산역에서 7시40분 출발하여 음정 마을10시 도착하다
산대장님같이 음정에서 시작하여 영원사 방향으로 출발하다
일부는 도솔암방향으로 출발하다
사진 찍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쌉살개에게 물릴번하였다 더운날씨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굴비트구역이나 주위를 살피지 못하여 굴을 보지못하고 지나가다
일부회원은 여기서 상무주암으로 가다
영원사에는 작약꽃, 꽃잔디,....만발하였다
신령의 고향’이란 뜻의 영원사(靈源寺)
지리산 영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45) 때 영원(靈源)이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창건자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으며, 2가지 창건 설화가 전한다.
그중 하나는 영원이 범어사에서 수행하다가 욕심 많은 스승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10년 후에 다시 돌아와 보니 스승은 흑구렁이로 변해 있었다. 영원은 불쌍한 스승의 영혼을 인도하여 지리산으로 돌아가다가 만난 한 부부에게 '열 달 후 아들이 태어날 것이니 7세가 되거든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하였다. 영원은 이후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고, 그곳으로 찾아온 동자를 제자로 삼았다. 그는 동자를 방 안에 가두고 문에 작은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수행하라고 하였다. 훗날 동자는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들어오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영원이 이곳에서 8년간이나 수도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다른 곳으로 가려고 산을 내려가는데,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시를 하면서 영원을 향하여 혼잣말로 ‘8년간 낚시를 했는데 아직 고기를 낚지 못하였다. 그러나 2년만 있으면 큰 고기를 낚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영원이 이 말을 듣고 다시 2년간 더 수도하여 큰 깨달음을 얻고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영원사였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 노인을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수행처로 이름나 고승 109명이 안거하였다고 한다. 이 사찰의 역대 조실들을 기록한 《조실안록(祖室安錄)》에는 영관(靈觀:1485∼1571)과 휴정(休靜:1520∼1604)·인오(印悟:1548∼1623)·유정(惟政:1544∼1610)·상언(尙彦:1707∼1791) 등의 큰스님이 열거되어 있다. 절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으며, 1948년 여수·순천사건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1년 중창되어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인법당만 남아 있고, 암자는 도솔암과 상무주암(上無住庵)·문수암 등이 남아 있다. 이중 도솔암은 인오가 수도하던 곳이고, 상무주암은 지눌(知訥)과 혜심(慧諶) 등이 머무르던 암자이다. 문수암 뒤편에는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1000명이 피난하였다고 전하는 천인굴(千人窟)이 있다. 유물로 영암(靈巖)과 상언·중봉(中峰)·청계(淸溪)·벽허(碧虛)·인오의 부도 6기가 전해진다. 글-naver 백과사전.
글-naver 백과사전.
11시경 영원사를 추발하다
시원한 계곡따라 산행하다
11시50분 도솔암 도착하다
도솔사에 도착하자 목이마른차에 도솔사에서단술을 제공하여 정멀 맛있게 먹었다
도솔암
지리산 도솔암은 조선시대 사명대사의 사형이신
청매조사께서 수행하시고 열반하신 유명한 도량이다.
82년도부터 혜암스님께서 천막을 치고 정진 하시다가
87년도에 허가를 내어 도량을 지었다.
사형스님이신 정견스님께서 처음부터 도량을 짓는데 매진하여
지금까지 관리를 하시면서 정진중이시다.
붉게보이는 꽃나무가 천도복숭아 나무라고한다
지리산 노래가사
1.철쭉이 피고 지던 반야봉 기슭엔/
오늘도 옛같이 안개만이 서렸구나/
피아골 바람 속에 연하천 가슴 속에/
아직도 맺힌 한을 풀 길 없어 헤메이나/
아 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임아/
오늘도 반야봉엔 궂은 비만 내린다.
Ⅱ.써래봉 달빛 속에 치밭목 산죽 속에/
눈을 뜬 채 묻혀져간 잊지 못할 동무들아/
시루봉 바라보며 누워있는 쑥밭재야/
잊었느냐 피의 노래,통곡하던 물소리를/
아 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간 푸른 임아/
오늘도 써래봉엔 단풍잎만 휘날린다.
Ⅲ.추성동 감도는 칠선의 여울속에/
굽이굽이 서린 한이 깊이도 잠겼구나/
거림아 대성골아 잔돌의 넓은 들아/
너는 알지 눈보라가 울부짖는 그 밤들을/
아 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 간 푸른 임아/
오늘도 천왕봉엔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지리산·영원사>
임진왜란 때 동래 범어사에 매학이란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은 원래 욕심이 많아 신도들의 재물을 탐내어 수도보다는 재물을 모으는데만 눈이 어두웠다.
어느 날 매학 스님이 지금의 화정, 당시 조선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던 소산 앞을 지나다가 조그만 초가집에 서기가 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님이 옷깃을 여미고 그 집에 들어서니 옥동자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토방 앞에 다다른 스님은 밖에서 기침을 하고는 산모를 향해 말했다.
『태어난 아기는 불가와 인연이 깊은 옥동자입니다. 그러니 잘 길러 주시면 몇 년 후 내가 와서 데려갔겠습니다.
아기를 낳느라 힘이 빠져 기진맥진한 산모는 아기가 불연이 있다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불가에 인연이 깊은 아이라면 당연히 부처님 앞으로 가야지요. 하오나 밖에 계신 어른은 뉘신지요?』
『소승 범어사에 있는 매학이라 합니다.』
『그럼 언제쯤 아기를 데리러 오실는지요?』
『10년 후에 들르겠습니다.』
산모는 매학 스님의 말에 순순히 응낙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매학스님은 동자를 범어사로 데리고 와서 상좌로 삼았다. 어린 상좌는 아주 영특하여 잔심부름을 잘하고 부처님께 예불도 곧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학 스님은 동자에게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라고 시켰다. 저녁때가 다 되어 돌아온 상좌는 빈 지게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어디서 놀다가 빈 지게를 지고 돌아오느냐?』
매학 스님은 불호령을 내렸으나 어린 상좌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스님, 그저 놀다가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수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었더니 그 나뭇가지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저히 무서원 나무를 벨 수가 없었어요.』
상좌의 말에 매학 스님은 노발대발하여 호통을 쳤다.
『원 이런 고약한 놈을 봤나? 어디서 그런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을 배웠느냐? 나뭇가지에서 피가 흐르다니! 나를 속이려거든 내 앞에서 당장 물러가거라.』
상좌는 하는 수 없이 그 길로 범어사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금강산 영원동에 가서 세간을 영원히 끊고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한 상좌는 크게 깨달아 영원조사가 됐다. 스님은 흰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과 흐르는 시냇물에 마음을 두고 자적하게 지냈다.
스님이 30세가 되던 어느 날 선정에 들어 스스로 법열을 즐기고 있는데 홀연히 시왕동에서 범어사 옛 스승의 사후 죄를 묻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스님은 출정하여 스승을 구하려고 신통력으로 명부에 이르러 그 원인을 알아봤다. 그 이유인즉 스승은 생전에 탐심으로 재물을 모으고 선한 일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아 죽어 구렁이의 과보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영원 스님은 곧 범어사로 향했다. 범어사에 도착해 보니 큰 구렁이가 고방에 도사리고 앉아 팥죽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원 스님은 여정은 풀지도 않고 즉시 고방으로 들어가 구렁이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그 구렁이는 이상하게도 팥죽을 잘 먹어 대중은 구렁이에게 늘 팥죽을 쑤어 주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구렁이가 팥죽을 다 먹길 기다린 영원 스님은 얼마 동안 독경을 하더니,
『스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어서 해탈하여 승천하시옵소서.』
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구렁이도 꿈틀거리며 영원 스님을 따라 나가는 것이 아닌가. 구렁이와 함께 시냇가에 이른 영원 스님은 구렁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업신을 얻게 된 것은 전생에 탐심으로 재산을 모은 까닭이니 이제부터 모든 인연을 버리고 몸과 마음의 탐욕을 버리십시오.』
말을 마치는 순간 영원 스님은 옆에 놓인 큰 돌을 들어 구렁이를 내려쳤다. 바로 그때였다. 숨져 가는 구렁이의 몸에서 새 한 마리가 나와 영원 스님 품에 안겼다. 스님은 다시 금강산으로 향했다. 길 가는 도중, 이 새는 암수의 짐승이 짝을 지어 노니는 것을 보면 그곳으로 날아가려고 퍼득거려 스님은 이를 막느라 무척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날이 어두워 인가를 찾던 영원 스님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서 하룻밤 묵어 가게 되었다. 그날 밤 스님은 품안의 새를 주인에게 맡기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지금부터 열달 후에 당신들 내외에게 옥동자가 생길 것이니 잘 길러주기 바랍니다. 그 아이는 불가와 인연이 깊으므로 10년 후 내가 다시 와서 데려가겠소.』
그 후 10년이 지난 뒤 영원 스님은 다시 이 집에 찾아와 동자를 절로 데려갔다.
동자승은 영원 스님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불도를 닦아 차츰 스님의 풍모를 갖추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영원 스님은 동자승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스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아니, 스님 어찌된 일입니까? 어서 일어나십시오.』
동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스님, 저는 본래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정신을 차려 저를 똑똑히 보십시오.』
영원 스님이 목메인 소리로 말할 때 동자승은 불현듯 전생을 보았다.
동자승은 자신의 전생을 거울 보듯 보고 영원조사의 도력을 환히 알면서도 구렁이인 자기를 죽였다는 그 원한의 숙업을 어쩌지 못해 어느 날 밤 그만 일을 저지르게 됐다. 영원 스님보다 뒤늦게 자리에 들기 위해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자승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져 있었다.
영원 스님이 기척이 없는 것으로 미뤄 깊은 잠에 들었을 것이라 믿은 동자승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영원 스님 곁으로 다가가 도끼로 내려쳤다. 그 순간, 벽장문이 확 열리면서
『스님, 이제 숙업은 다 소멸됐습니다.』
하였다.
동자승은 들었던 도끼를 힘없이 놓았다. 그 뒤 동자승은 착한 일을하고 바르게 깨달으니 그가 곧 우운조사라고 한다.
스승을 제도한 영원조사는 전국을 전국을 운수행각하며 제자를 제접하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지리산에 들어가 절을 세우니 그 절을 세우니 그 절이 바로 부용, 청허, 청매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이 주석한 영원사다
첫댓글 도솔암에서 단술 한그릇 얻어먹고는 스님의 눈치때문에 석간수가 흐르는 샘터 뒷쪽으로 가야하는데 스님왈 (그곳은 통제구역이니 계곡으로 돌아가시요)
얌전히 예 하고 대답을 하였으니 그 순간이후로 고행의 연속이어라........ 때로는 공원법도 못본체하고 또한 약간의 고집도 필요함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삼각고지에서 삼정산으로 흐르는 능선을 몸으로 느꼈으니 나름 보람된 하루였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안내하신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대장님 덕분에 좋은 산행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고생은 하였지만 보람은 있었겠습니다......우리들 일상과 산행은 언제나 시행착오 가운데 전진과 배움이 있지 않나요.... 산대장님 알바비는 불로소득인가요... 뻥튀기기라도... 죄송하고요 우리님들 보내며 많이 합니다...
많이 기다리게하여 미안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산행 해 볼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