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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한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권위와 영광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이 아기에 대해 여러 가지 말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정사(政事)란 영어로는 ‘government’인데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먼저 죄를 다스리시고 마귀를 지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둘째는 “기묘자라, 모사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두 단어를 연결시켜서 ‘기묘한 모사라’라고 해야 합니다. 영어성경들도 Wonderful이라는 말과 Counsellor라는 두 단어 사이에 콤마를 찍어서 각각 독립된 명칭으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히브리어로는 ‘펠레 요에쯔’라고 하여 두 단어 사이에 콤마나 연결사 같은 것이 없습니다. Wonderful은 형용사입니다. 그러니까 ‘기묘자라, 모사라’라고 번역하기보다는 “기묘한 모사라”라고 함이 더 옳습니다.
셋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여호와’라고 하였는데, 바른 발음이 아닙니다. 자음으로만 된 네 글자에 주님이라는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서 읽어보면 ‘여호와’가 된다는데, 그렇게 하여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하나님의 이름이 밝히 나타나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유일한 이름은 ‘예수’뿐입니다(행 4:12). 우리가 그 이름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거듭 강조합니다(요 1:12; 2:23; 3:18; 20:31; 행 3:16; 10:43; 요일 3:23; 5:13).
넷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것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이슬람교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라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라고만 압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역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다섯째는 “평강의 왕”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자 천군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면 참 평강을 얻지만, 거절하면 참 평강을 모르고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여럿 중에서 둘째인 ‘기묘한 모사이신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는 기묘한 분이십니다.
1) “예수님은 기묘한 모사다.”라는 말의 첫째는 ‘기묘’라는 말입니다. 사사기 13장에 여호와의 사자가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나서 그들이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그 사자에게 묻기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자가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17-18)라고 대답하였다고 번역했는데, 여기의 기묘라는 말도 이사야 9:6의 기묘와 같은 형용사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은 기묘하니라.”라고 해야 옳습니다. 또한 이 말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워 씨름하고 나중에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라고 하자, 그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는 이름은 알려주지 않고 야곱에게 축복만 하고 떠났던 일을 연상케 해 줍니다. 그의 이름이 기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자가 바로 그리스도셨습니다. 기묘하다는 말은 우리 인간들의 지혜로는 쉽게 깨달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쳐준다고 해도 누가 그분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기묘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고 그 기묘함의 속에 깊이 들어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2)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기묘하다고 설명합니다.
① 시편 107편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로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라는 말씀이 네 번(8, 15, 21, 31절)이나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② 또한 시편 139:14에서는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기합니까? 짐승들이나 새나 물고기들이나, 식물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신기한지요? 더 나아가 천체의 별들이 어떻게 운행하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감탄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씨가 아닙니까?
③ 이사야 29:14에는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의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이 무엇일까요? “인생 지혜자들 중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질” 참으로 기이한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그 일,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 부활하시는 일, 승천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 더 나아가 장차 큰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는 일, 이 모두가 얼마나 신비롭고 오묘합니까?
3)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기묘하다고 설명하는 말씀은 여러 번 나옵니다.
① 명령 한 마디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지고, 명령 한 마디에 귀신이 쫓겨가고, 명령 한 마디에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기이히 여겼겠습니까?
② 예수님의 교훈도 기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에 성전에서 선생들과 말씀할 때에도 선생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7)고 했습니다.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도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서 참으로 기이하다고 느껴보십니까? 이것을 못 느낀다면 그 사람은 아직 바른 신자가 못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③ 고난주간에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넉아웃(Knock Out) 당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4) 그런데 ‘기묘’라는 말을 영어성경들은 모두 원더풀(Wonderful)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원더풀이라고 하면 그 말은 너무도 좋다, 너무 멋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 하나하나가 이렇게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①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선한’이란 말이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보기에도 매우 좋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만 좋을 뿐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욥 38:4-6)라고 물으시고는 이어서 “그때에 새벽의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너무도 아름답고 선하고 멋있어서 새벽의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기묘하신 분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모든 말씀이 이렇게 우리들에게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줍니다. 우리가 오늘도 이런 기쁨과 감격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은혜와 복을 주시는 주님께 예배하고자 모이지 않았습니까?
2. 그리스도는 모사(謀士)이십니다.
1) ‘기묘한 모사’의 ‘모사’는 지혜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① 잠언 8장은 지혜를 예찬하는 장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1절은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라는 말로 시작하여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고 하였고,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합니다.
②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드실 때에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예레미야서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다.”는 말씀이 두 번(10:12; 51:15)이나 거듭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그 솜씨가 얼마나 오묘합니까? 너무도 신비롭지 않습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지으신 분이 예수님이요, 그렇게 지으실 수 있음은 예수님이 바로 그 지혜이시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 왕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 3:12).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솔로몬이 이렇게 지혜를 받아 가지고 판결하니까 “온 이스라엘이 왕의 판결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왕상 3:28).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면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이런 두려움이 임해야 사람들은 죄를 짓지 못합니다. 이것을 경외한다고 말합니다.
2) 바울은 그리스도를 깊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가 마침내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의 이 고백들을 봅시다.
① 로마서 11:33에서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하였고,
② 고린도전서 1:21에서는 “하나님은 전도라고 하는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지혜로는 얼른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③ 고린도전서 2:6-8에서는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라고 말합니다.
3) 모사(謀士)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보면 “계책을 세우는 사람, 계책에 능한 사람, 계책을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어성경들은 모두 카운슬러(Counsellor)라고 하였습니다. 카운슬러라고 하면 우리는 ‘상담자’라고 번역하지요? 무슨 문제든지 어려운 것이 있으면 예수님께 찾아와서 상의 드리면 예수님은 그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지혜로운 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hrist is the Answer”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① 석가모니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네 가지 근본적 어려움으로 인해 고민하면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평생 고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출산의 진통은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입니다. 늙는 것은 결국 사망으로 가는 것인데 역시 죄가 들어옴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질병도 죽음도 모두가 죄와 상관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깨달아 회개하면 이런 문제들은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드디어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말씀합니다.
② 또한 우리는 의식주(衣食住)라는 눈앞의 어려움을 항상 만나 고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수님은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2-33).
③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얻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애를 씁니다. 그런 일들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역설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곧 그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이것이 기묘한 것이고, 그러기에 진리입니다.
4) 예수님은 해결책을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문제가 해결할 능력도 주십니다.
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하였고,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내가 감사한다.”(딤전 1:12)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능력을 주십니까? 물론 성령으로 주시는 것이지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행 1:8)고 하셨으니까요. 실제로 성령 받은 제자들이 얼마나 담대해졌습니까? 그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임하여 큰 기사이적을 일으켰습니까?
② 또한 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해서 주막집에 데려다 주었을 뿐 아니라, 주막 주인에게 그를 위한 치료비도 주면서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약속하기를 만일 치료비가 더 들게 되면 그것도 더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주막 주인이 되어 이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돌보아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힘으로, 내 재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다 주셨고, 또한 앞으로도 더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③ 야고보서는 그 첫머리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라고 말하고, 사도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빌 4:6-7).
3. 어떻게 하면 우리도 기묘한 모사들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들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어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묘한 모사이시니,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되라는 명령과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주신다는 약속이 함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1) 사모해야 합니다. 석가모니가 인생의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 얼마나 고심했습니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석가의 십분의 일 만큼이라도 애를 쓴다면 아마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자기가 잘하기는 쉽지 않고, 남을 정죄하기는 잘해도 자기를 책망하여 새사람이 되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교훈은 회개에서 출발합니다. 회개하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진리의 세계에 대하여 눈이 열립니다.
①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그 전도 제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② 또한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날에도 베드로는 “어찌할꼬?” 하며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8)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해야 성령을 받습니다.
③ 디모데후서 2:25에서는 “하나님이 혹시 거역하는 자들에게도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한다.”고 하였습니다. 거역하는 자라도 회개만 하면 진리를 알게 해 주십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신령한 선물을 주시되 기도라고 하는 어리석은 방법을 통하여 받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기묘함입니다.
①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는데도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라고 말씀하십니다.
② 예레미야 33:3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늘의 오묘하고 비밀한 일들을 보여주시겠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③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사실을 믿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세요. 모든 문제의 해답이 그분 안에 있지 않습니까?
4)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열심히 읽고 듣고 묵상하며 그 말씀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이 이루어주십니다.
① 주님의 말씀이 충만하다는 말을 성경은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곧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영(靈)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 6:63).
② 또한 주님의 사랑이 충만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하시지 않았습니까?
③ 나아가 진리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있으면 그 사람은 모든 일에 참 자유를 가진 사람이 됩니다(요 8:32). (2004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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