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꿈은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하면서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하늘에 대한 도전은 끝없이 이루어졌다.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보다 무려 120년 앞선 1783년 11월 21일,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는 필라트르 드 로제에, 프랑수와 로랑 아를랑데 후작부인을 기구에 승객으로 태우고 인류 최초로 줄을 묶지 않은 유인비행을 했다. 이 기구로 파리 상공에서 약 25분 동안 9㎞를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피에 형제의 기구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 비행선이다. 몸체에 수소나 헬륨 등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채워 넣은 다음, 그 부력을 이용하여 하늘로 떠올라 프로펠러로 하늘을 나는 기구가 비행선이다.
인류 최초의 비행선은 1852년 프랑스의 앙리 지파르가 제작한 것으로, 그는 증기기관으로 프로펠러를 추진하는 방식의 비행선을 만들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비행선, 전동기로 동력을 얻는 비행선으로 진화되었다.
비행선의 백미는 1900년 7월 2일, 독일의 백작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에 의해 발명되었다. 그는 알미늄으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두꺼운 천을 감싼 다음 여러 개의 수소 주머니를 채운 길이 128m, 지름 12m의 초대형 비행선을 하늘에 띄워 올렸다.
체펠린 백작은 거대한 비행선에 수소를 가득 채우고, 16마력짜리 엔진 2기로 프로펠러를 회전시켜 30m 상공에서 시속 27㎞로 20여 분 간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에 성공하기 3년 전의 일이다.
체펠린 백작은 비행선을 활용하여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비행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은 군부였다. 체펠린 비행선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용으로 징발되어 독일군의 런던 폭격에 동원되었다.
적국(敵國)의 도시 위를 유유히 비행하면서 폭탄을 미친 듯이 투하하여 독일 비행선은 ‘베이비 킬러(baby killer)’라는 악명을 떨쳤다.
비행선의 가공할 위력에 연합군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행선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 가치를 주목받았지만,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이유 조약 등에 의해 한 동안 비행선 개발이 억제되었지만,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국제조약 따위가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1919년 7월 영국이 제작한 비행선 R-34가 시속 100㎞가 넘는 가공할 만한 스피드로 대서양 왕복 횡단 비행에 성공하면서 세계 각국은 당대의 최신 기술을 총동원하여 비행선 제작 경쟁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비행선은 과학기술의 총아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비행선의 크기도 더욱 대형화 되었고, 엔진 성능도 개량되어 북극 탐험 등 장거리 운송에 투입되었다.
처음에는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를 채워 넣고 비행하던 비행선은 폭발 위험성 때문에 폭발 위험이 없는 헬륨으로 대체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유럽 각국의 제재를 받았던 독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선 개발에 대한 제재가 풀리자 비행선 개발에 본격 뛰어들었다.
1928년 체펠린 백작의 후계자인 후고 에케너 박사가 ‘그라프 체펠린 호’를 개발하여 이 비행선은 9년 동안 590회의 상업 비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체펠린 비행선의 백미는 1931년부터 제작에 돌입한 인류 최대 규모의 힌덴부르크 호 였다.
독일의 전 대통령인 힌덴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비행선은 길이 245m, 직경 41.2m로 축구장 세 배 정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였다.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타이타닉 호’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여객기 중 점보기로 불리는 보잉 747 기종이 70여 m, ‘하늘 위의 궁전’ 혹은 ‘꿈의 비행기’라 불리는 에어버스 사의 A380 여객기가 길이 73m, 높이 24m라는 점과 비교하면 이 비행선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균 시속 120㎞로 지상 300m에서 1000m 상공을 날아다니는 초호화 비행선 내부에는 승객을 위한 객실과 식당, 승객을 위한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 산책용 통로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독일 권력을 쥔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국력을 전 세계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이 비행선의 꼬리 부분에 나치 문양인 갈고리 십자가(하켄크로이츠)를 새겨 넣었다.
힌덴부르크 호는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몸통에 새기고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스타다움 상공을 유유히 비행하면서 ‘떠오르는 독일’의 상징 같은 역할을 했다. 한 달 뒤 힌덴부르크 호는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 나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힌덴부르크호. ‘떠오르는 독일’의 상징과도 같았던 힌덴부르크호는 수소 가스 폭발사고로 처참하게 폭발하여 비행선 시대의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힌덴부르크 호의 운은 1937년 5월 6일까지 뿐이었다. 이날 힌덴부르크 호는 승객과 승무원 96여 명을 태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목적지인 미국 뉴저지 주를 향했다.
힌덴부르크 호는 설계 당시 헬륨 가스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치 독일이 재무장을 가속화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헬륨의 대량 생산국이었던 미국은 독일에 헬륨 판매를 금지시켰다.
이렇게 되자 힌덴부르크 호는 폭발 위험성을 알면서도 헬륨 대신 수소를 채워 넣고 비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비극을 부르는 도화선이었다.
힌덴부르크 호가 62시간을 비행한 끝에 기착지인 뉴저지 주(州)의 레이크 허스트 해군비행장 상공에 도착했다.
착륙 준비를 위해 고도를 지상 20m 정도로 낮추던 오후 7시 10분 경, 갑자기 비행선 뒤쪽에서 불꽃이 튀면서 폭발음이 들렸다.
이어 연쇄적으로 수소가스 주머니가 터지면서 거대한 비행선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폭발했다.
이 사고로 승객 13명, 승무원 22명과 지상요원 1명 등 모두 36명이 숨졌고 61명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비행선 선장 막스 프러스도 전신화상을 입고 사망했다.
현장에 있다가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시카고 라디오 방송국의 허브 모리슨 기자는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외쳤다.
“비행선에 불이 붙었습니다.…끔찍합니다.…세계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원인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참사 이후 비행선에 대한 폭발 위험성이 부각되었고 체펠린 비행선을 생산하던 독일에서도 비행선 운영 회사인 체펠린 사를 해체하여 비행선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힌덴부르크 호의 명칭 선정 과정에서 비행선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로 바꿀 것을 요구했으나 후고 에케너 박사는 이를 거부하여 미운털이 잔뜩 박혔다.
이 와중에 힌덴부르크 호가 폭발 참사를 일으키자 이 기회에 체펠린 사를 해체하면서 비행선을 이용한 상업비행 시대는 막을 내렸다.
후일담에 의하면 1970년대를 풍미한 영국의 록 그룹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은 초대형 비행선을 발명한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체펠린의 영문 이름이 제플린이다. 이들은 작명 과정에서 ‘제풀린’이란 이름 앞에 대형 기구를 뜻하는 ‘Lead Balloon’의 Lead를 Led로 고쳐 ‘레드 제플린’이라고 팀 명칭을 정했다는 것.
어쨌거나 록 그룹 ‘레드 제플린’은 고전 블루스 곡을 20세기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재탄생시켰고, 멤버들의 연주 실력이 천재적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레드 제플린은 훌륭한 예술가가 아니라 위대한 장인”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