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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1895 |
을미사변, 을미개혁 |
청, 일본에 패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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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
독립협회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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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대한제국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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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
청, 변법자강운동 실시, 무술정변으로 실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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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대한제국 국제 반포, 경인선 개통 |
청, 의화단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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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
한일의정서 맺음 |
러일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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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경부선 개통, 을사늑약 체결, 통감부 설치 |
일본, 러일전쟁에서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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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국채 보상 운동, 신민회 조직,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퇴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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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의병, 서울 진공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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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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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
한일 합방 조약 체결, 국권 피탈, 조선 총독부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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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
105인 사건 |
신해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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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일제 토지 조사 사업 실시 |
청 멸망, 중화민국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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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안창호, 흥사단 조직 |
1914.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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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3·1운동,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중국 5·4 운동, 간디의 비폭력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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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 개인 선정 5대 주요 사실 >
우선순위 |
중요 사실 |
선정 이유 | |
1 |
1897 |
대한제국의 성립 |
고종은 자국의 이권이 외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국호와 연호 등을 바꾸며 자국의 보호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여러 외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립 국가임을 선포하는 등 자주적인 행동을 보여주며 최고 책임자로써 조선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2 |
1896~ 1898 |
독립협회 개최 활동 |
독립협회는 민족의 독립과 민권의 확립을 위해 투쟁한 단체로서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전하려는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며 창립되었다. 계몽운동과 신문 발행 등 자국민의 실력향상에 이바지 하였다. |
3 |
1905 |
을사늑약 체결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이 결과로 대한제국은 독립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말살 당했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가속화 되었다. |
4 |
1907 |
헤이그특사파견 |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5 |
1919 |
3·1운동 |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1. 대한제국의 성립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국민의 대일감정이 극단적으로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한 기회를 이용하여 국왕을 궁궐로부터 러시아 공사관으로 데려갔다.(아관파천) 그리고 친러 내각이 성립하게 되었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1년 동안, 정치는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이권 획득은 열강을 자극하여 이익의 평등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에 국민의 비난이 심해져 고종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라고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국내외에 독립 제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외형의 체제와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문제가 많았다. 외국 공사관의 보호에 의지하려고 했고 일본이 무서워 한 나라의 황제가 자유를 잃고 이권은 계속 빼앗기고 있었다.
2. 독립협회의 창립과 활동
황제와 대신들이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전하려는 고식적인 길을 취하고 있을 때,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것은 일반 국민이었다. 특히 서양의 자유주의 사상을 배운 신 지식층이 주를 이루었다. 독립협회는 가입이 개방적이었고 운영방식이 민주적 이여서 모든 일이 과반수이상의 다수결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관료 중심에서 일반시민들까지, 서울에서 지방까지로 확대되었다. 신 지식층을 선두로 하고 새로이 성장한 시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으며 발전해나갔다.
활동으로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이는 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왕실과 정부대신들에게도 호응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상징적 산업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사회·정치 운동도 전개하였다. 민중의 계몽운동으로 토론회 개최와 기관지 간행을 실시했다. 특히 비공식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읽히기 위해 순 한글로 신문을 펴내었는데 큰 계몽적 역할을 하였다. 독립협회의 목표로는 자주독립 옹호, 민권의 신장, 국가의 자강 이룩이며 한국 근대화의 기본적인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3. 을사늑약 체결
일본은 곧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일진회’라는 친일단체를 조직케 하여 보호조약의 필요를 선전케 하였다. 일본의 강요가 아닌 요청에 의한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일진회와 맞서 헌정연구회가 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본은 원로 이토를 파견하였고 불법적인 절차를 밟아 조약을 성립시켰다. 이것이 광무 9년 11월에 체결된 한일 협약이며 보통 을사조약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의 내용으로는 첫째,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통리·지휘한다. 둘째,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못한다. 셋째, 일본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둔다. 이는 외교권의 완전한 박탈과 사실상 주권 상실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상소문과 연설이 끊이질 않았고 민영환이 자결했으며 각 지역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하였다.
4. 헤이그 특사 파견
을사조약이 고종이 승인한 바가 아님을 말하며 열국의 공동보호를 구한다는 고종의 친서가 발표되고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참석하게 하여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서 외교권을 상실하고 있으므로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국제적으로 일으킨 영향은 컸다.
5. 3·1 운동
3·1 운동처럼 전국적인 대규모 독립운동을 마련해 준 계기는 민족 자결주의였습니다.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파리의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하여 독립을 호소하였고 한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2·8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고 커다란 자극이 되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했다.
발표자료.pptx 제 14장.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hwp
첫댓글 1919년은 무단통치 기간으로 우리 민족에겐 큰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먼저 사회문제를 인식하였고 그에 따라 대중적인 운동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3.1운동으로 인해 소위 문화통치를 이끌어냈고 3.1운동의 정신이 사라지지 않고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3.1운동의 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나가야 합니다. 또한 저는 3.1운동에서 가장 먼저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끌었던 학생들을 보며 진정한 학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들을 닮아 삶을 낭비하지않고, 열정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시간들을 보내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장세연 : 퇴고하세요.
수정했습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에 우리 민족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했고 전과는 다른 강경책과 회유책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바로 문화통치입니다. 문화통치를 받으며 우리 민족의 교육 범위도 보통교육에서 중등교육으로 확대될 수 있었고 언론이 일부 자유화 되는 등 무단통치에 비해 조선 사람을 풀어주는 듯 보이지만 이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회유책 가운데 우리 민족을 분열하려 했고 그 가운데 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친일파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3.1운동이 우리민족에게 큰 위기로 다가온 부분도 있지만, 조선의 평화적 저항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5.4운동을 보고 저는 이것이 세계를 변화시킬 작은 톱니바퀴의 회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변화는 아주 작은 계기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매일 실천하는 작은 일들이 미래의 나를 만드는 훌륭한 거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이다솜 : 퇴고하세요.
퇴고했습니다!
우리나라 국권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입에 담지도 못할 더러운 단어, 조센징이라 칭하며 무시하고 얕보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전체적인, 전 지역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회 소외계층 기생들까지도 3.1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심이 위대해 보였고 이에 일본은 무력으로 말살시킬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정치체제를 바꿔 말살시키려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려 했던 우리나라 민족들은 자기를 바치는 희생을 했다. 이러한 노력에 감사하며 앞으로 이러한 역사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14장은 국권을 침탈당한 암울했던 시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느낄 수 있었던 장이였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3.1운동은 비록 우리나라가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라는 더 힘겨운 수난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 의지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3.1운동은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협동한 뜻 깊은 운동이고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그리고 친일파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줬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3.1운동 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 운동은 우리가 결국 광복을 이뤄내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립 협회나 임시 정부, 학생 운동 등은 국민들이 자신의 위치에 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 입니다. 이러한 모든 민족 의식의 토대는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뿌리 깊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또 한번 깊이 느낄 수 있는 장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발전하는 키워드는 기술의 발전이나 이념의 발전이 아닌 민족국가로의 도약이었다. 민족의 제대로 된 정체성을 찾고 하나로 뭉쳐서 혼란스러운 국제정세의 흐름을 적절히 타야 비로소 근대국가로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그런 흐름에서 매우 뒤쳐졌었고 결국 나라를 외세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한번 정립된 민족성은 굳건히 남아 3.1 운동을 시작으로 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나라가 힘들거나 혹은 망했어도 민족구성원들의 정체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회생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번 장에서 배우게 되었다.
을미사변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킬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 제국주의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고종은 이러한 기척을 읽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일뿐 실질적인 국력의 성장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에는 일본에게 흡수되었다. 그 이후로 일제는 억압과 탄압을 일삼았고 우리민족은 그에 저항하여 3.1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3.1운동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우리민족의 저항의식을 보여주었고, 비록 흡수됬지만 아직 우리민족의 얼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항상 힘든일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견디어 낸다면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문성민 : 1) 이러한 3.1운동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우리민족의 저항의식을 보여주었고, 비록 흡수됬지만 아직 우리민족의 얼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 * 문장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 과제 수행 : 김지연 장세연 이다솜 이송민 임선영 이종덕 문성민 이상 총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