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3일 토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터키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또한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가 되어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유배되었다가 5세기 초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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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루가 6,43-49)
Listens to my words, and acts on them. That one is like a man building a house, who dug deeply and laid the foundation on rock;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이 주님의 성찬례에 참여하면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훈계한다. 성찬례에서 나누는 포도주와 빵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선한 것이 넘치며, 그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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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금구’(金口)라는 별칭이 붙었듯, 성인은 교회 역사상 으뜸으로 꼽히는 설교자입니다. 그의 설교가 지닌 표현의 탁월성과 내용의 뛰어남에 대해, 그리스도교에 비판적 시각을 가졌던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기번도 그의 기념비적 저술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다음과 같이 찬탄합니다. “이 그리스도교 웅변가의 우아하고 풍부한 어휘를 자유롭게 다루는 솜씨, 수사학과 철학에서 얻는 장점을 감출 줄 아는 사려 깊음, 아무리 익숙한 주제라도 다양하게 그려 내는 은유와 비유, 끊임없이 쏟아 내는 개념과 이미지들, 미덕을 위해서만 불태우는 능력, 진실과 극적인 재현 능력으로 악덕의 어리석음뿐 아니라 비열함까지 파헤치는 재능에 대해서는 모든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위대한 설교자로서 자신의 수사학이라는 학식의 그릇에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도 왜곡하거나 희석하지 않고 온전히 담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크나큰 위안을 주었으며, 부자와 권력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며 거침없이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의 삶 또한 자신의 설교 내용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권력의 중심지에서 주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재능에 반해 발탁한 왕실에조차 비위를 맞추는 법이 없었고, 권력자들의 부패와 위선적 신앙을 끊임없이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음모에 밀려 쫓겨나고 유배 생활을 하였지만 결코 굴하지 않는 가운데 주님과 교회에 끝까지 충실했습니다. 그가 진정 위대한 설교자였던 것은 뛰어난 언변만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설교 한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그의 모범을 기려 봅니다. “나는 진정 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경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팡이요 보호자이며 잔잔한 항구입니다.”
인생이라는 집짓기
-최영균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인생이라는 집을 짓는 것에 대한 은유입니다. 인생이라는 집짓기는 모든 인간의 활동과 능력을 포함합니다. 어린 시절의 교육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누구나 삶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인생이란 집짓기의 기초를 놓습니다. 명예, 부, 권력, 아름다움은 훌륭한 집짓기의 기초재료인 것처럼 비춰지지요. 그러나 이런 기초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홍수가 들이닥치면 곧 집을 쓸려가게 만들 수 있는 약한 것들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 그들 인생의 집을 짓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견고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 우리가 머무를 때 우리의 삶은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부를 때 우리는....
-김찬선신부-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이 말씀은 일종의 나무람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실행하지 않음을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주님의 말씀도 실행하라는 것인데 실행하지 않으려면 주님이라고 부르지도 말라는 것인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려면, 영어로는 “Mr. Jesus!”, 우리말로는 “예수씨”하라는 말씀인가요? “예수 씨!”하는 것이 너무하다 싶으면 “예수님”하라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를 잘 모르고 저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저를 부를 때 “김 찬선 씨!”하고 부르듯 주님을 무관한 듯 부를 때는 “예수 씨!”하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하고 부를 때는 무관한 듯이 부를 수 없고, 관련이 있어도 친구처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 부르듯 한다면 “여보게”하고 부르겠지요. “주님!”은 친구 아닌 하느님을 사랑으로 부르는 것이며 친구 아닌 종이 겸손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과 사랑의 바탕 위에서 첫째는 기도할 때 부릅니다. 부르는 것은 나를 향하게 하는 것이고 부르는 것은 나와 같이 있자고 그러는 것이고 부르는 것은 나와 대화하자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그러기 전에 이미 내가 먼저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고 향하여 있는 것이고 내게 먼저 같이 있고픈 갈망이 있고 내가 먼저 하느님과 대화하고 싶은 것이지요. 이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은 기도가 아닌 잠꼬대와 같아 주님과의 대면과 대화는 전혀 발생하지 않겠지요.
둘째는 하느님 명령을 실천할 때 부릅니다. 영어에서는 상관이 무엇을 시킬 때 "Yes, Sir!"하고 대답하지요.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이 무엇을 시킬 때 “예, 주님!”하고 응답하고요. 그러나 이때의 “주님”은 주님을 부른다기보다는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주님”이기에 여기에는 우선 하느님 명령에 대한 무시가 없어야 하고, 다음으로 하느님 명령에 대한 거부가 없어야 하며, 하느님 명령에 대한 실천 의지는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하느님 명령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지 않고 “예, 주님!”하는 것은 매장에 있는 훈련된 직원들이 말끝마다 “예, 고객님!”, “예, 고객님!”하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니 되지요. 그런데도 제가 그러네요.
어느 책에서인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간 없을 때 시간 있고, 바쁠 때 더 많은 일을 한다.”
이 글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골똘히 생각했지요. 그러면서 ‘아하~’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없을 때에는 어때요? 스스로 시간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바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을 하겠지요. 그 결과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즉, “시간 많을 때 시간이 없고, 한가할 때 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라고 말이지요.
학창 시절에 시험공부 할 때가 떠올려 집니다. 시험 준비를 일찍부터 하면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서 늦장을 부리다가 결국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시험 준비를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약속시간에 가장 늦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 가장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가장 늦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까우니까 빨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늦장을 부리고, 그 결과 멀리 사는 사람보다도 약속시간에 더 늦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많다는 안일한 마음도, 한가하고 여유 있다는 착각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새벽 묵상 글에 저에게 박카스 주신다는 할머니를 썼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할머니께서 그저께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사실 올해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제가 매달 봉성체를 하러 나갔지요. 그런데 지난주 봉성체를 하면서 “할머니, 다음 달에 또 뵐게요.”라고 말씀드렸는데, 제가 한 이 말은 지킬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주님만이 아시고 주님에게만 맡겨진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금이라는 이 현재만이 우리의 시간이라는 진리만 남습니다. 그런데도 안일한 마음으로 대충대충 살아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말씀의 실행은 지금 이 현재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현재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주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결코 나쁜 나무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나쁜 열매도 맺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주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사랑은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에게 치료약이 된다.(칼 메닝거)
<좋은 나무로 서기 위해>
-양승국신부-
당도가 아주 높고 품질 좋은 과일 생산해내기로 유명한 한 과수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일나무에는 보기만 해도 탐스런 알찬 과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지요.
오다가다 들른 우리 같은 사람은 그저 보기 좋다, 잘도 가꿨다, 하고 말지만, 좋은 과실수로 만들기 위한 주인내외의 노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 봄부터 정신없이 바쁘답니다. 쓸모없는 가지들은 가차없이 잘라내야 되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답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마다 퇴비며 비료를 주는데, 이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튼실한 과일이 주렁주렁 달리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일조량이 뒷받침 되야 하는데, 긴 장마라도 오게 되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1등급을 만들기 위해서는 흠이 하나도 없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일이 싸주어야 합니다. 새들의 공격도 막아야지, 병충해의 공격도 막아야지...
우리 역시 좋은 결실을 수도 없이 맺는 좋은 나무로 성장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좋은 나무로 선다는 것, 그냥 말로만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알찬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그냥 내버려둬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로 서기 위해 다른 무엇에 앞서 ‘말씀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언행일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생활화, 말씀의 내면화, 일과 기도의 조화, 생각과 삶의 동일화...
예수님께서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시며 그들의 부족함을 신랄하게 고발한 대상들이 있었는데,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치명적인 결점 하나가 바로 언행의 불일치, 일과 기도의 부조화, 말씀과 생활의 이원화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들은 말은 얼마나 번지르르 잘 했는지 모릅니다. 좋은 생각,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삶이 뒤따라주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지닌 본질적인 측면 한 가지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활활 불타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점점 동심원을 그리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김정미 수녀-
일본에 갔을 때 오래된 절의 진입로에 즐비한 상가 사이를 지났다. 좁은 길 양쪽에 작고 고만고만한 상가가 늘어섰는데 그중 작은 공간 하나가 투명한 비닐을 친 채 공사 중이었다. 일본의 공사현장은 어떤가 궁금증이 생겨, 나는 일행에서 빠져 그 작은 공사현장 출입구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위생장비를 갖춘 두 명의 인부가 양 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작은 솔과 쓰레받기를 들고 구석구석 꼼꼼하게 시멘트 바닥의 먼지를 쓸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연로하신 부모님의 방을 정돈하는 모습, 또는 불공드리듯 예를 올리는 것처럼 경건하고 철저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작업을 넋을 놓고 지켜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의 공사는 ‘공기를 얼마만큼 단축하여 일사천리로 순식간에 이루어 내는 것’이 자랑이다. 그러느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 가장 중요한 기초 작업이 허술하거나 생략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그러니 그 집들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지은 집과 같다. 큰물이 들면 곧 무너져 버린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신앙을 따르는 우리에게 ‘성전의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의 사정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기초 위에 그에 걸맞은 충성스러운 집이 들어섰는가? 한번 지어진 집을 정성스레 쓸고 닦으며,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꼼꼼하게 원인을 살피며 그에 필요한 보수공사를 ‘주님과 함께’했는가?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 일찍 일어남도, 늦게 자리에 듦도, 고난의 빵을 먹음도 너희에게 헛되리라.”(시편 127,?1-2) 하신 말씀이 내 삶의 좌표가 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오늘,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이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마음 애지중지.
-김찬선신부-
눈을 깨니 비가 옵니다. 비가 소리로 옵니다. 이파리를 두드리는 소리, 수도원 마당을 두드리는 소리, 이 소리가 마치 제 마음을 두드리는 듯합니다. 이 소리가 제 속마음을 일깨우는 듯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는 콩 심은 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난다는 속담이 생각나고,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는 말씀을 듣고는 Poker Face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종종 제 마음을 숨기지 못해 낭패스러운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그 Poker Face를 부러워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이 들으면 대단히 싫어하겠지만 정치인들은 싫어도 대단히 좋아하는 척 얼굴을 바꾸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눈 깜짝 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들처럼 속마음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 태연하게 행동하려 해도 번번이 실패합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언짢은 마음을 그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실패하고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무리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저의 부자연스러움을 그가 느끼지 못할 리 없지, 그러니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내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바꾸자하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내 마음을 감추기보다 내 마음과 솔직하게 마주하고 내 마음을 추스르고 토닥이고 바꾸니 마음도 편안하고 표정도 행동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니 그렇게 안 좋던 사람, 아니 아주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새벽, 마음을 두드리는 비 소리를 들으며 다시 제 마음과 마주합니다. 내 마음을 감출 수 있다 생각하고 내 마음을 속일 수 있다 생각하고 그래서 내 마음을 감추려고 하고 내 마음을 속이려 했던 내가 마음에게 미안했습니다. 마치 장애를 가진 자식을 부끄럽게 여겨 손님들이 집에 오면 너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고 하는 부모처럼 내 마음을 부끄럽게 여겨 감추고 속이려했던 저는 나쁜 사람입니다.
위선하지 않음은 속마음대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도 되지만 속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애지중지해야겠습니다.
억지로라도 실천하기
-전삼용신부-
오늘 예수님은 나쁜 나무가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며 안에 들어있는 것이 나오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본질을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의 본질이 좋은 나무면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숭이는 원숭이의 행동을 하고 사람은 사람의 행동을 하며, 똥파리의 행동은 꿀벌의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인간을 심판하실 때 사람들이 한 행동을 두고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그런 척 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심판은 그 사람이 양이냐 염소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겉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있느냐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흉내를 내더라도 원숭이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선 겉으로 잘 보이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본질을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이런 심판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원판 불변의 법칙’을 주장합니다. 이는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을 많이 접해보면 어렸을 때 형성된 성격이 거의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사람이 그렇게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편이나 혹은 가까운 사람이 빨리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저도 기도하면서도 ‘때가 되면 회개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사람이 그렇게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결혼하면서부터 아버지의 술 담배를 끊게 하시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연세에도 변한 건 없습니다. 아버지도 담배는 여러 차례 끊으려고 노력하셨지만 실패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협심증이 생기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 담배를 줄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이 줄이셨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예 변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매우 교만한 아이였습니다. 사실 이런 말 하면 우습지만 못하는 것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공부, 운동, 노래 등 모든 것을 잘 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친구들은 저를 ‘전 교만’이라 불렀습니다.
제가 커서 사제가 되어 첫 보좌를 했던 성당에 다시 찾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자 분들이 저를 보시고 옛 기억을 하시며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이 어르신들이 참 겸손했던 신부님으로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린 줄 알면서도 제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해 주시는 분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어렸을 때의 저와 비교하며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켜 나가느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성당 가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러나 주일미사를 하지 않고 오면 어머니께서 밥을 안 주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녀와야 했는데 매주 미사는 안 하고 주신 헌금으로 오락실에서 오락만 하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저희 어머니도 성당에 안 다녀온 것을 대번에 알아차리셨고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다음부터는 주보를 가져오라고 하셔서 일찍 성당에 가 주보를 챙긴 다음에 다시 오락실로 가서 오락을 하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들켜서 또 크게 혼났습니다.
결국 저는 처음엔 억지로 시작해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사제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억지로라도 성당에 다니도록 해 주신 어머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성당에 가지 않았다면 그 때 배웠어야 했을 교리를 비롯하여 복사를 하면서 얻었던 많은 것들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성당을 다니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종교선택의 자유를 준다고 성당 나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준다고 자녀들이 예의 없이 행동하는 것까지 그대로 내버려두겠습니까?
저는 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예의를 지켜야하는지 모를 때부터 부모님이 하라니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이해를 못하더라도 우선은 그것대로 실행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실천을 통하여 조금씩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나갈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종교교육을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을 놓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방치하는 것은 마치 아이에게 자동차 운전대를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운전을 배우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아 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당한 것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더 지나면 ‘덕’이 되고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키려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실천해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실천해 보아야 하고 실천해 보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만큼 자신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선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무엇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말라면 판단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면 미워하지 말며, 걱정하지 말라면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면 두려워하지 말고, 십일조를 내라면 십일조를 내는 식으로 먼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성경을 수십 번 읽어 지식만 풍부한 사람보다 더 단단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해간다면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사람 흉내를 내는 원숭이에서 참 사람이 되어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수행자"
-이수철신부-
영원한 수행자로 살라고 선사된 인생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모든 신자들 역시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은
구차한 설명 없이 누구나 자명하게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열매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나무’대신 ‘사람’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고정 불변의 것일까요?
문득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과 독하고 모진 사람 등 분명히 나눠지는 듯합니다.
타고나길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다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해묵은 논쟁이, 아니 영원한 논쟁이 생각납니다.
예능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타고 나는 사람들 같습니다.
하여 천품(天稟), 천성(天性), 천운(天運), 천재(天才) 같은 단어도 있고
유전 탓이냐 환경 탓이냐의 논쟁도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 마음이 변한 ‘변질’이 아닌
원래의 본마음인 ‘본질’이 들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참 어렵고 복잡한 신비의 인간입니다.
성경 역시 인간을 정의하는데 있어
‘하느님의 모상’ 이라 정의하는 긍정적 측면과
‘타고 나길 악하기 때문’이라 정의하는 부정적 측면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결론하여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고
다만 선악이 공존하는 가능성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숙명론에서 벗어나
선사된 시공 안에서 위대한 자유를 펼쳐갈 수 있는 인생의 장이 열립니다.
바로 여기서 절실히 부각되는 게 수행의 필요성입니다.
영원한 수행자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좋은 사람으로 변모해가기 때문입니다.
흔히 나이 사십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
주어진 수행에 충실했는지 자문해 보라는 말입니다.
어느 수도승이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세상을 도울 수 있을까요?”
성녀의 본질을 꿰뚫는 짦은 대답이 평생 화두로 삼을 만합니다.
“참으로 좋은 수도승이 되십시오(Be a really good monk).”
저절로 타고난 좋은 수도승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부단한 수행 과정을 통해 좋은 수도승이, 좋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사실 이 일보다 더 중요하고 큰일도 없을 것입니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듯이
노력하지 않고 큰 위업을 이룬 천재들 하나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이 단연코 강조하는바 실행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 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 있어
마침내 좋은 사람이 되고 반석 위에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인 사도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부단한 수행의 노력의 열매가
‘하느님의 작품’인 참 좋은 사람, 사도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을 통한 변화와 치유, 자유입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깨달음이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좋은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성숙, 성장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 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 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좋은 환경도
부단한 수행의 노력으로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결국 그 인생 맨 땅위에 집짓기로 끝나버립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좋은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튼튼한 인생 집의 기초를 마련해 주십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저는 아침마다 수영을 합니다. 지난 5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5달째 들어서네요. 그런데 이번 9월에 들어서면서 5월부터 쭉 다니던 수영장을 바꾸었습니다. 바꾼 이유는 시설이 그리 좋지 않았고 또한 거리도 성당에서 가깝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힘들어서였습니다. 사실 수영장을 다닌 지 얼마 안 되어서 연수반에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연수반 사람들은 보통 5~6년 정도 수영을 하신 분이라, 초짜인 제가 함께 하기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제가 박태환도 아니고요). 또한 연수반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수영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다보니 아침마다 하는 운동이 즐거움의 시간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9월을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동네의 수영장으로 옮겼지요.
그런데 새롭게 시작했지만 이 수영장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전의 수영장은 한 레인에 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여기는 한 레인에 15명이 넘지요. 그러다보니 한 바퀴 돌고 오면 정체되어 한참을 기다릴 때가 많고, 따라서 저에게 별로 운동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 하나, 전 수영장이 더 나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수영장을 가든 불만이 없을까요? 어떤 수영장을 가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서 운동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니, 지금의 수영장이 별로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수영장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옮겼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제는 항상 내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긍정적인 마음을 갖춘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나무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무의 뿌리라면, 이 뿌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나의 긍정적인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 나갈 때, 가장 튼튼하고 건강한 뿌리를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뿌리를 간직하고 있을까요? 부정적인 마음, 또한 남 탓만 하는 마음으로 나의 뿌리를 형편없는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의 모습. 그 모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내 뿌리를 구성하는 내 마음을 사랑을 실천하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남의 탓을 하지 맙시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집시다.
지난 초여름 몹시 더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일 미사 중이었는데 많은 교우들이 참례하는 것이 아니기에 큰 성당에 에어컨을 켤 수 없어 선풍기 몇 대만을 돌려야 했습니다. 한낮의 열기로 달구어진 성당은 해가 진 바깥보다도 훨씬 더웠습니다. 저는 살이 별로 없어 한겨울 추위에는 엄청 힘들어 하지만 여름 더위는 남들보다 조금 더 견딥니다. 그런데 미사 중에 옆에 있는 복사 녀석이 어찌나 땀을 흘리는지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향해져 있던 선풍기를 그 아이 쪽으로 돌려주었고, 전 더위를 참으며 그렇게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수녀님이 와서 어제 그 복사 아이가 미사 끝나고 엄청 자랑을 하더랍니다. “엄청 시원했고요, 기분 좋았고요….” 거참! 지난 여름 내내 저는 미사 때 복사가 안 오기만을 기대하며 지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복사들에게 선풍기를 양보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미사 드린 날도 거의 없었습니다. 선풍기 양보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내 몫의 빵을 떼어줌의 자그마한 실천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랍니다.
내 곳간에 무엇이?
-방순자 수녀-
수녀원에 오기 전 잠깐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직장 동료들은 누군가 새 옷을 입고 오거나 머리 모양 하나, 표정만 달라져도 오늘 무슨 일(something)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저 작은 건수 하나라도 있으면 모든 것을 거기에 연결시켜 말하곤 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는 변함없이 이성간의 사랑 얘기다. 수녀원에 와서 처음 본가에 휴가를 갔을 때 가족과 친척들이 하는 얘기는 거의 돈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수녀원에서 한동안 듣지 않던 것을 들으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어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온통 쇠고기, 촛불 이야기였다. 그러다 한 가지가 휩쓸고 가면 새로운 관심사가 뜨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은 또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린다. 사람이란 이렇게 지금 어디에 내 마음이 가 있는지에 따라 그것만을 말하게 되어 있다. 오늘 예수님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고 하시며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선한 곳간이 되기 위해 선하신 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4-5 참조) 내 곳간이 선하신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다면 내 입에서는 언제나 하느님 얘기가 넘쳐 날 것이고 ‘나’라는 나무에서는 ‘하느님 사랑’이라는 선한 열매가 열릴 수밖에 없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루카 18,19) 그렇다면 내 곳간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 지금 나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지금도 내 곳간 관리를 정신 차려 해야겠다.
사랑의 덧셈과 뺄셈 -김찬선신부-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양다리를 걸친다는 말이 있고, 두루 잘 지낸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느 한 쪽과만 관계나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같지만 하나는 부정적인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한 쪽과만 관계와 거래를 해야 할 사람이냐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냐에 달린 것이겠지요.
걸레와 같다는 말이 있고, 모두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루 사랑한다는 면에서 같지만 하나는 부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입니다. 이 역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할 사람이냐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냐에 달린 것이겠지요.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와 한 몸을 이루기에 다른 관계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수도자는 반대로 모두를 사랑해야 하기에 어느 한 관계와 사랑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양보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같이 나누는 사랑으로만 모두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 사랑을 함께 이루는 사랑으로만 모두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덧셈과 뺄셈이 동시에 가능하기에 우리가 하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나누는 것이요, 우리가 하는 사랑이 합쳐져 하느님을 사랑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을 내어놓는다. -장훈철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몇 주일전 프랑스 작가 장지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주 짧은 이 책은 40년 동안 프랑스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으로 바뀌게 한 늙은 양치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엘제아르 부피에’ 이 늙은 양치기는 해발 1200미터 의 황량한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없어서 이 땅이 죽어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땅이 누구의 소유인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두 번이나 힙 싸일 때도 그 늙은 양치기는 계속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몇 십년이 지난 어느 날 정부의 산림 감시원이 양치기의 노력을 모르고 이 고산지대에 저절로 천연 숲이 생겼다고 놀라 정부에 보고했고 정부 대표단이 시찰하러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아랑곳없이 양치기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전쟁으로 숲이 망가지는 위협도 있었고, 잘못 심은 나무들은 떼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노력에는 그 어떤 어려움도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한지 40년이 지나 1947년 엘제아르 부피에는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그 양치기 덕분에 처음 12가구가 살던 이 마을은 이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은 글을 맺었습니다. “한사람의 오직 육체적, 정신적 힘만으로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선한사람은 선한마음을 내어놓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지어 홍수에도 끄떡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한 주일을 마감하는 오늘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가식적이며, 드러난 것에 예민해진 우리 자신을 잠시 돌아봤으면 합니다. 이익이 앞서는 현실을 탓하면서도 나도 그 안에서 허우적대며 앞장섰던 마음을 양치기 목동의 세상을 선한마음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다른 이의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세상을 향한 착한 마음을 이제 숨기지 말고 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모두를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시작인 'credo - 저는 믿나이다 라는 뜻은 ‘core(마음)와 dare(주다)의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각과 말과 행위의 중심인 인간의 마음은 생각으로나 말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낼 때가 진정한 믿음을 고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 심는 양치기의 선한 노력이 세상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였듯이 우리의 작지만 선한 마음의 시작이 바로 생명을 창조하는 하느님의 손길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새벽을 열며
옛날에 곧잘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이라고 시작하는 ‘꿈에’라는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꿈에까지 나타난다는 노래이지요. 정말로 그런 것 같아요. 정말로 자신의 가슴 속에 깊이 간직된 것은 이런 식으로 꿈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저도 그저께의 꿈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꿈도 꾸지 않고 잘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만큼 푹 잔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저께 꿈을 꾸게 되었는데, 글쎄 제가 군대를 다시 간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도 실제 군대에 있었을 때 제 후임병들이 모두 저의 고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임병에게 기합을 받고 있었지요. 저는 이 사실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아니 어떻게 내가 군대를 다시 간 거야? 이것은 꿈이야 꿈……. 빨리 일어나야 해. 이건 꿈이니까…….’
그러면서 고개를 마구 젓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얼마나 다행이던 지요.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너무나 싫었기 때문에 꿈에서도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꿈을 꿀 때, 그 꿈이 꿈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아무리 개꿈이라고 한들 그 순간에는 모두 현실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꿈이라고 그래서 빨리 깨어나야 한다고 막 외쳤을 때 정말로 현실로 되돌아오더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실제 삶에서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이나 시련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는 그 고통이나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씩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왜 나한테만 이런 고통이 주어지냐고 하면서 신세 한탄만 합니다. 하지만 신세 한탄만 한다고 해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아니지요.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 안에서 오히려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인 것처럼,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실천의 중요성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요.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주님께서는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셨지요. 문제는 우리가 그 행복의 길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억지로 끌고서 그 길로 들어가시지는 않거든요. 바로 우리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그 길이 어떤 길인지만을 가르쳐주셨고, 그 실천의 몫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그 길로 직접 걸어가고 있나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행복의 길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빠다킹 신부
진리 자체이신 분
-최혜영 수녀-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가 하며 그 답을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일 것입니다. 저 역시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진리가 마치 소유의 대상인양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도서관의 책을 다 읽으면 진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소위 훌륭하다는 사람을 만나면 진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참 많은 사람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으면서 진리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진리는 추상적인 어떤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곧 진리입니다. 박사학위 심사를 맡았던 어느 선생님께로부터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십시오[願人爾眞理使之爲聖]’라고 쓴 글씨를 선물로 받았는데,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라 늘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원래 하느님께만 해당되는 말인데,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혈로 깨끗하게 된 자들을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통해 하느님의 실재를 만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면의 기초공사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김경희 수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무가 좋아야 열매가 좋다는 것이죠. 나는 어떤 나무인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종종 좋은 열매를 맺고 싶지만 뿌리가 상해 있다면 겉보기에는 좋은 열매인 것 같아도 속이 썩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뿌리를 돌보아야 합니다. 뿌리를 돌보지 않으면 열매에 흠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누구 때문에 힘들다. 그 사람이 변하면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내 과거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자신을 만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만나야 합니다. 과거의 나도 ‘나 자신’이기에 그 모습을 대면하여 나를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나를 아들인 줄 알고 낳았는데 딸인 걸 아시고 태어날 때부터 배척받은 기억이 있다면 그 상처로 인해 타인을 깊이 신뢰하지 못한다든지, 아무것도 아닌데 소외감을 느낀다든지 하며 자신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때 상처난 나의 모습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사랑하며 빛으로 치유를 청하고 ‘나’를 사랑해 주고 어루만져 주고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내면을 반석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갈망으로 살아오면서 알 수 없었던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받은 어머니의 정서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기도 안에서 주님께 치유를 청하였습니다. 저는 일상생활 속에서 두려움을 만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루시아, 두려워하지 마라. 괜찮아질 거야.” 이렇게 나에게 용기를 줄 때 두려움 없이 통과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지켜보고 성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신앙인
-양승국신부-
돈보스코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활동가였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업적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일을 많이 했고, 일을 사랑했던 사람은 역사상 둘도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살레시오 회원들이 너무나 과중한 업무에 지쳐 돈보스코의 사무실에 찾아가면, 절대로 ‘그래, 푹 좀 쉬세요. 천천히 쉬엄쉬엄 하세요.’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되풀이되었던 말씀, “잘 알았어요. 그렇지만 우리 살레시안들에게 있어 일 빼고 나면 뭐있어요? 잠시 쉬었으니, 이제 일어납시다. 힘을 냅시다. 용기를 냅시다. 다시 일하러 갑시다. 열심히 일합시다. 저 하늘나라에 가면 영원한 휴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쓰러지면, 그때 우리 수도회는 큰 영광을 이룬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살레시오회 위에는 하늘에서 풍성한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이런 어록도 남겼습니다.
“내가 살레시오 공동체들을 방문했을 때, 회원들이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힘들어할 때면 안심이 되었습니다. 일이 있는 곳에 마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의 목숨이 다해가는 임종의 침상에서도 돈보스코는 둘러서 있던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 일, 일을 하십시오.”
돈보스코는 본능적으로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웠습니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강조했습니다. 말보다는 실제를 중요시했습니다. 행동 없는 신앙을 믿지 않았습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복음도 믿지 않았습니다.
돈보스코의 제자였던 갈리에로 추기경은 시성시복 조사 과정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가 일생에 단 하루라도 휴가를 내어 쉬어본 일이 있는 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과 행동이 일치를 이루는 신앙인, 생각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신앙인, 결국 행동하는 신앙인, 살아 움직이는 신앙인, 실천하는 신앙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수행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수도생활이란 또 어떤 생활이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것일 수도 있겠지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의 머리와 가슴 사이의 간격을 좁혀가는 일, 따로 따로 노는 신앙과 삶을 조화시켜나가는 일, 말을 줄이는 일, 일단 움직이고 보는 일, 그만 앞뒤 재고 한번 뛰어 들어가 보는 일...
- 한종민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어떻게 당신을 따라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집을 지은 사람은 세상의 유혹과 박해라는 강물에도 굳건하게 서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 입니다. 그렇게 집을 지은 사람은 세상의 유혹과 박해라는 강물에 완전히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굳건한 기초 아래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의 사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만나는 세상은 강가에 자리 잡은 집입니다. 강가의 집은 어느 누가 봐도 참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집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홍수나 태풍이 불 때에는 불안하기만 합니다. 많은 비로 강물이 불어나면 그 집은 어느새 강 한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강에 태풍이 불면 강물이 불어나는 집이 강 가운데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계곡을 타고 부는 거센 바람에 그 집은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은 신자유주의라는 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 집입니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강은 무한한 경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모든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다시 말해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허용된 모든 수단은 “소외”로 나타납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그 신자유주의 안에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패배감 속에서 신자유주의라는 강물 속에 익사(溺死)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패배는 그 당대에만 이루어지는 패배가 아닙니다. 이 패배는 대(代)를 이어서 상속되는 악의 늪입니다. 그래서 가난과 부의 거리가 더욱 멀어져 결국에는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지고 부유한 사람을 더 부유해 집니다. 이 평행선은 마음에 까지 들어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마음까지 가난해 집니다. 마음까지 가난해진 사람은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자신이 당하는 “소외”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유하게 된 사람은 마음을 닫고 자신과 자신에 주어진 부(富)만 보고 살아갑니다. 그런 신자유주의 현실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은 좋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맺는 좋은 열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실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말씀은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참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사람 향기
-조성풍 신부 -
한때 같이 살던 신부님이 소임지를 옮기면서 선물하고 간 동양란을 키운 적이 있습니다. 그리 커다란 정성을 쏟지 못했는데도 어느 해 여름 다소곳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그윽한 향기를 내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방 안 가득히 퍼지는 난향을 맡으며, 그 향기가 백리를 간다 해서 ‘백리향’이라 하고, 또 천리를 간다 해서 ‘천리향’이라 한다는 꽃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또한 이처럼 꽃들도 제 향기를 내며 아름다움을 전한다면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꽃인 우리 사람들 또한 각자의 향기를 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생선을 싼 종이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는 향내가 납니다. 그럼 나를 싼 종이에서는 어떤 향기가 피어나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자신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이 소리 없는 향기 되어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자신이 맺는 삶의 열매를 통해 맡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아름답고 그윽한 삶의 향기를 열매 맺었으면 합니다.
집 짓는 사람
-강영구신부-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대에게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과일나무는 과일나무대로, 갖가지 곡식은 곡식대로 결실을 맺으며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을 견디어 낸 것들만 튼실한 결실을 맺어 탐스럽고 향기롭습니다. 대지(大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들이 고난의 세월을 견딜 수 있고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튼튼한 기초 위에 하나 둘씩 벽돌을 쌓아 가면 훌륭한 집이 됩니다. 신앙인들에게 튼튼한 기초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요한1,1)입니다. “말씀” 위에 인생의 기초를 놓고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는 “말씀”을 꽃피우고 “말씀”을 열매 맺고, 끝내 자신이 또 다른 “말씀”이 됩니다. 대지(大地)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와 같이, 튼튼한 기초 위에 지어진 집과 같이 “말씀” 위에 인생을 세운 사람도 흔들리지 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말씀”을 외면하게 됩니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비바람에도 무너지고 맙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멀리 바라볼 것 없이 당신 발밑을 살펴보시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있습니까? 당신은 튼튼한 기초 위에 인생을 세우고 있습니까?(一明)
- 허인신부-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의 말입니다. 영국의 식민지지배를 받은 인도의 지도자로, 그리스도교국가인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드러낸 말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비판을 받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늘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현대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예비신자는 줄고, 냉담자는 늘고 있다고, 걱정들을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교회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유럽교회의 현실이 곧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왜 교회가 이런 위기를 겪게 되었겠습니까? "현대의 물질문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에, 구원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들었다. 주5일근무제로 상징되는 여가를 즐기려는 경향이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은 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내 탓이 아니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우리의 심정이, 이런 이유를 찾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특별히 은총을 더 받고, 그래서 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어 복 받는" 그런 삶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지금까지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나누고,
나 자신만 생각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는, 그래서 좀 더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 믿어 복 받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심정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야 함에도, 예수 믿어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 받기 위해서 주님, 주님하고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우리에게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 하고 질책을 하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현대 교회의 위기는 밖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범적인 삶을 살지 못해서, 우리 선조들의 삶을 이어받지 못해서,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순교로 지켜온 신앙의 뿌리에 우리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해서 생긴 현상들입니다
신앙생활은 남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희생하는 것이라는 사실, 남보다 더 봉사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 - 제2의 본성
-박상대 신부 -
누구든 “사람은 본디 선(善)한가, 악(惡)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本性)이 어떠한가를 묻는 질문이다. 사람은 선천적으로(a priori) 선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면 성선설(性善說)을 따르는 것이고, 선천적으로 악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하면 성악설(性惡說)을 따르는 셈이 될 것이다.
문제는 태어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람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게 태어나 선인으로 살고, 악하게 태어나 악인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선하게 태어난 인간이 악인이 되고, 악하게 태어난 인간이 선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이 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의 경우 무엇이 된다는 것은 학습(學習)과 체득(體得)에 의하여 후천적으로(a posteriori) 형성되는 성품을 말한다.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BC 540-?)는 ‘되어가는’ 과정에서 본성을,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본성에서 유출되는 ‘됨’을 주장하였다.
이 두 철학자의 깊은 진리를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종합하여 주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13세기 스콜라철학은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는 입장을 취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산상설교에 비해 짧게나마 루가가 보도하는 평지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와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오늘 가르침은 각각 알아듣기 쉬운 예화, 즉 나무와 열매, 그리고 창고의 비유와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제시된다. 이 가르침으로 루가복음의 평지설교는 일단락된다. 마태오복음도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7,21-27)로 산상설교를 끝맺고 있다.
오늘 복음의 전반적인 구조는 ‘본성->행위->말’의 전개과정을 따르고 있다. 이는 본성에서 행위가 유출된다는 뜻으로서, 본성은 행위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만, 행위와 말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행위와 말의 일치를 예수께서는 요구하신다. 이는 ‘말->행동->본성’의 역구조로도 이해할 수 있는 흐름으로써 말과 행위는 서로 다를 수 있는바, 말을 듣고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어떤 행동을 하던 그 행위는 결국 본성을 밝혀주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행위(行爲)는 본성(本性)을 따르고, 본성은 행위에 의해 밝혀진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자.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 - 나쁜 나무’와 ‘선한 마음의 창고 - 악한 마음의 창고’의 비유를 통하여 본성과 행위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며,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의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기 마련이다. 여기서 창고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결국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행동, 즉 입 밖으로 나오게 되는 셈이다.(45절)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속담이 원론적으로 틀린 데는 없지만 어쩐지 김새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본성과 행위의 관계가 이렇다면 너무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선한 본성에 의해 평생 선인으로 살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악한 본성에 의해 평생 악인으로 산다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는가 하는 말이다. 이는 억울하다 못해 절망적이지 않는가? 아무도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구별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억울한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을 가르쳐 주신다.
사실 예수께 있어서 사람의 본성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악한 본성으로 태어나든 선한 본성으로 태어나든 중요한 것은 행동이고, 나아가 행동과 말의 일치다. 누구든 말과 행동의 일치를 도모한다면 악한 본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를 좋은 성품으로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 행동이 당장은 악한 본성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48절) 그러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맨땅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49절)
예수님의 가르침(평지설교)을 따르고 실행하는 훈련은 결국 더 나은 성품(性品), 즉 제2의 본성을 구축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탓하고 주저앉아 더 선한 제2의 본성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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