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강렬한 색채의 장식성은 물론이고 발상적으로 그의 그림에 그림자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글 | 박용숙(미술평론가)
[2009. 11. 14 - 11. 30 한원미술관]
[한원미술관]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49-12 T. 02-588-5642
곽기수의 추상에 관하여
곽기수의 작품을 보면 그가 기술의 장식성에 얼마나 깊은 영감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인상주의 창시자들이 성당의 스테인글라스에서 어떤 영감의 원천을 이끌어 냈던 것처럼 그의 장식미술에 대한 경험도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곽기수는 청주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후 프랑스로 건너가 정식으로 장식미술을 연구하였으며 그 경험을 다시 회화작품에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 곳 대학에서 조형연구에 몰두한 바 있다. 이런 과정이 그의 작품에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실 미술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의 장식이다. 그러나 발상적으로 그 장식성이 원시적인 심성이나 영적인 활동과 깊이 연계되었다는 점 때문에 장식은 오늘의 현대미술과도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다. 우리 고분시대의 벽화만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그 밀폐된 컴컴한 공간속에서 행해졌던 제의나 예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게 모르지만 그 벽화에 남아 있는 그림이나 징식에서 심상찮은 침묵의 의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강렬한 원색의 장식, 예컨대 넝쿨이나 꽃 그림, 단청문양에는 인(뼈가루)이 섞인 탓으로 어둠속에서도 이상한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태양광선이 차단된 굴속에서 그것들은 분명히 영혼의 잠을 일으키고 있다. 태양광선이 차단된 굴속에서 그것들은 분명히 영혼의 잠을 일깨우는 시그날처럼 고독한 자의 시선을 놀라게 만드는 것임에 분명에 한것이다. 곽기수의 작품들이 벽화의 문맥을 따른다는 것은 그의 강렬한 색채의 장식성은 물론이고 발상적으로 그의 그림에 그림자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림자가 없는 세계는 로고스가 아직은 그 몸체를 들어내지 않은 세계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그것은 이미 들어 냈으면서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로고스의 세계이기도 하다. 벽화시대의 화가들이 그림자를 그리지 않았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작 가 노 트
나는 자연물을 매체로 해서 인간의 탄생부터 정열적인 삶과 죽음까지 표현했다. 하지만, 나에게 또다른 변화가 오게 되었다. 깊이추상의 그림은 난이도가 심했고 색채는 너무도 강렬하고 선들은 무척이나 거칠었고 일반적으로 개념에서의 접근시키기에는 어려운 것 같았다. 나의 깊이 추상은 어떤 공간과 색채와의 어떤 방법이든 가능했던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음악적인 요소와 자연의 진리의 단면적인 모습이었다. 여기에서의 여러 색채들은 우리 우주에 다 존재하는 모든 색채들이었다. 반면에 전통적인 회화에서 훌륭한 작품들은 많은 색채가 절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나의 깊이 추상 미술에서는 절제보다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색채를 다 모으는 작업들이었다. 이것을 보안하고 연결되어 온 것이 구도추상이다. 여지껏 해왔던 그 위에 구도추상이라는 새로운 추상으로 끌어냈다. 구도추상은 깊이추상에서 복잡함을 감안한 것이고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곳, 한공간으로 몰아 넣으면서 구도적인 면을 지향하는 것이다. 색채는 한층 압축시켜야 하고 여러 선을 하모니있게 만들어 주게 되었다. 넓은 공간과 작은 공간들이 필요로 하는 선들은 예전과 달리 절제가 필요했고, 색채는 더욱더 내면적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왜냐면, 명상적인 것에는 적절한 엄숙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절한 구조물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