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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가. 맘모나의 정체
나. 선악과의 비밀
다. 휘장을 찢는 십자가
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
마. 좁은 길
3. 결론
4. 한 줄 요약
5. 마무리
1. 서론 : 왜 인간은 끝없이 갈애(渴愛)에 끌려가는가?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원한다. 돈을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사랑받기를 원한다. 성공하기를 원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잠시 만족하지만, 그 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내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갈증은 더욱 심해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갈애(渴愛)는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대상을 붙들고 그것을 끊임없이 원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성경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탐욕과 집착,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구조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맘모나(Mamōnas, μαμωνᾶς) 역시 단순히 돈이나 재산이라는 물질적 의미만으로 축소해서 이해하기 어렵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맘모나는 인간이 의지하고 섬기는 세속적 부와 그것을 둘러싼 가치체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맘모나는 단순히 ‘돈이 많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소유, 명예와 권력, 인정과 쾌락 등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려는 인간의 집착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성경의 선악과 역시 이러한 인간의 내면 구조를 살펴보게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며, 취하고 버리고, 가까이하고 멀리한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것은 나에게 유익하다.” “저것은 나에게 해롭다.”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 갇히게 된다. 십자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성전 휘장의 찢어짐은 신약성경에서 근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열렸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징이다. 이를 내면적·상징적으로 읽는다면, 인간을 가로막고 있던 자기중심적 동일시와 집착의 장벽이 무너지는 사건으로 묵상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참된 나’라고 붙들고 있던 의식이 내려놓아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왔는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내면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맘모나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선악의 분별에 붙들린 의식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통하여 휘장을 지나 생명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2. 본론
가. 맘모나의 정체 : 불의의 재물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6장 9절에는 “불의의 재물”과 관련하여 맘모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되어 왔다. 실제로 본문은 재물의 사용과 청지기적 태도를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그러나 이 말씀을 내면의 관점에서 묵상하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왜 재물을 필요 이상으로 붙들게 되는가?
돈 자체가 인간의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돈은 삶에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돈과 소유물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돈이 많아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내가 중요한 사람이며, 권력을 가져야 내가 안전하고, 원하는 것을 가져야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재물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맘모나는 인간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확인하기 위해 붙드는 모든 외적 가치의 상징으로 묵상할 수 있다. 돈, 명예, 권력, 인정, 쾌락, 소유, 성공, 그리고 자기 의까지도 인간을 붙드는 맘모나의 형태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근본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물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과 재물에 종속된 사람은 다르다. 소유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주체적으로 그것을 다루지만, 소유물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히려 그것에 의해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맘모나의 문제는 결국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다.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무엇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 질문 앞에 서게 될 때 맘모나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 선악과의 비밀 : 좋아함과 싫어함의 구조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죄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로 읽혀 왔다. 그러나 상징적 독법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이분법적 분별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묵상하는 본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판단한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내 편이다. 내 편이 아니다. 얻어야 한다. 버려야 한다. 이러한 분별 자체가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판단과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분별의 기준이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붙들고, 자신에게 불편한 것은 밀어낸다.
좋아하는 것은 계속 가지려 하고, 싫어하는 것은 없애려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기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만나면 고통스러워한다. 그렇게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대상에 반응한다. 상징적으로 볼 때 뱀은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드러내는 존재로 읽을 수 있다.
뱀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더 가져야 하지 않는가?” “더 인정받아야 하지 않는가?”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나아야 하지 않는가?”이 질문에 붙들릴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을 외부의 대상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교는 욕망을 낳고, 욕망은 집착을 낳으며, 집착은 두려움을 낳는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끌려 다니게 된다. 이것이 선악과의 이야기를 내면적으로 묵상할 때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구조다. 좋아함과 싫어함을 넘어 무엇이 존재하는가? 그 질문에서부터 내면의 길이 시작된다.
다. 휘장을 찢는 십자가 : 몸과 마음의 죽음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기록한다. 전통적인 기독교 해석에서는 이 사건을 근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상징으로 이해한다. 이를 내면의 관점에서 묵상하면 휘장은 인간의 의식과 근본 생명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분리의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인간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나”라고 말한다.
- 자신의 생각을 바라보며 “나”라고 말한다.
-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며 “나”라고 말한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바라보며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은 변한다. 생각도 변한다. 감정도 변한다. 기억도 변한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떻게 영원한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십자가의 내면적 의미를 묵상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질문 앞에 서는 것이다. 십자가는 단순히 육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라고 붙들고 있던 거짓된 동일시가 무너지는 사건으로 묵상할 수 있다.
욕망의 죽음, 집착의 죽음, 자기중심성의 죽음, 자기 의의 죽음, 그리고 거짓된 자아에 대한 집착의 끝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한 방식이다.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아닌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에는 휘장이 더 이상 장벽으로 남지 않는다. 닫혀 있던 지성소의 의미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다.
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 : 종교와 욕망의 공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람은 근본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인정과 성공을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다. 기도하면서도 인정받기를 원하고, 헌신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싶어 하며, 종교적 행위를 하면서도 더 많은 소유와 성공을 갈망할 수 있다.
이때 신앙과 욕망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면에서는 함께 작동한다. 예수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근본 하나님과 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중심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문제다. 종교적 행위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 행위가 자기 의와 결합하면 인간은 자신이 더욱 의롭다고 믿게 될 수도 있다.
그때 종교는 생명의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자기 확인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외적인 행위의 많고 적음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인간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이다. 자기 자신을 더욱 붙들게 하는가? 아니면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게 하는가? 타인을 판단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하는가? 소유를 더 붙들게 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근원을 의지하게 하는가? 이 질문이 두 주인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마. 좁은 길 : 마음 너머의 지성소
예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이 좁다고 말씀하셨다. 좁은 길이 어려운 이유는 길이 험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따라가는 길은 넓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하고, 싫어하는 것은 제거하면 평안하며,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과 함께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명의 길은 이러한 조건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도 바라보고,
싫어하는 것도 바라본다. 칭찬도 바라보고, 비난도 바라본다. 성공도 바라보고, 실패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그때 인간은 마음의 움직임을 자신 그 자체로 붙들지 않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좁은 길의 시작이다.
좁은 길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통과하는 길이다. 그 길의 끝에서 인간은 마음 너머를 묵상하게 된다. 성경에서 지성소는 근본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가장 거룩한 공간이었다. 상징적으로 묵상하면 지성소는 외부의 특정 장소라기보다 인간이 모든 외적 의존과 자기중심적 집착을 내려놓고 근본 생명을 향하는 깊은 내면의 자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을 단순히 죽은 후에 가는 장소로만 바라보지 않고, 근본 생명이 드러나는 현재적 실상으로 묵상할 수도 있다. 천국은 욕망이 충족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욕망에 끌려가지 않는 자유의 상태다. 무언가를 더 얻어야만 평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이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3. 결론 : 생명의 빛으로 돌아가는 길
인간은 오랫동안 맘모나를 붙들고 살아왔다. 더 많이 소유하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더 많은 인정을 받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자신의 존재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욕망은 충족될수록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얻으면서도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맘모나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인가를 더 가져야 내가 완전해진다”는 의식이다. 선악과 역시 이 구조와 연결하여 묵상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붙들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며, 끊임없이 대상을 판단하고 비교하는 동안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의식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십자가는 그 구조를 끝내는 길이다. 십자가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길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길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길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소유해야만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복음서의 증언을 내면적으로 묵상할 때, 그것은 인간을 근본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키던 장벽이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표징이 된다. 그러므로 좁은 길은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길이 아니다. 참된 나를 가리는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길이다.
몸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몸과 마음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 너머의 생명을 발견하는 길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평생 붙들고 있던 것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었다. 내가 평생 지키려고 했던 것은 변하는 몸과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 너머에 변하지 않는 생명의 빛이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맘모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돈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선악을 초월한다는 것은 분별력을 없앤다는 뜻도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체를 파괴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변하는 것을 참된 근원으로 착각하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때 좁은 길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길만이 아니다. 그 길은 생명의 빛으로 돌아가는 길이 된다. 그리고 그 빛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드러나고 있다.
4. 한 줄 요약
맘모나와 선악의 분별에 사로잡힌 마음의 휘장을 십자가로 넘어설 때, 인간은 변하는 몸과 마음 너머의 근본 생명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5. 마무리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더 많은 재물과 더 많은 인정,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성공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얻을 때마다 또 다른 갈망이 생겨났고, 인간은 그 갈망의 끝없는 반복 속에서 살아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맘모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맘모나는 단순히 돈이나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붙들고 있는 모든 집착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된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으며, 인정일 수도 있고, 자기 의일 수도 있다.
선악과 역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무엇을 싫어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 모든 판단의 중심에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욕망과 집착에 붙들려 있었는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십자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을 견디는 사건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길이다. 욕망과 집착, 자기 의와 두려움에 붙들려 있던 겉 사람의 구조가 무너지고,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실상을 바라보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에 휘장이 찢어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준다.
더 이상 생명을 외부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 더 이상 근본 하나님을 멀리 있는 대상으로만 찾을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천국을 미래의 어느 장소로만 기다릴 필요도 없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모든 집착이 잠잠해지고, 자기중심적인 분별이 내려놓아질 때, 인간은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 길이 좁은 길이다.
좁은 길은 무언가를 더 얻는 길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길이다.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며, 누군가의 인정이 있어야만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는 길이다.
그렇게 하나씩 내려놓을 때, 인간은 비로소 알게 된다. 생명은 밖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빛은 멀리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길은 무엇인가를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가려져 있던 것을 걷어내는 데 있다.
맘모나를 내려놓고, 갈애를 바라보고, 선악의 분별에 붙들린 마음을 넘어,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여, 휘장 너머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욕망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빛을 바라보는 존재로 깨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된다.
내가 찾던 생명은 처음부터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찾던 빛은 처음부터 꺼진 적이 없었다. 다만 욕망과 집착이라는 휘장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이제 그 휘장이 걷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변하지 않는 생명의 빛이 드러난다.
그 생명의 그 빛(근본)!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