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에서 영화 <워터프론트> 한 편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영화, 워터프론트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뉴욕 항구는 살인과 폭력, 부정과 갈취 등이 만연했던 무법천지였습니다. 경찰, 공무원, 정치인, 깡패와 조폭들, 선적회사들이 서로가 얽혀서 끼리끼리 부두를 말아먹었습니다. 이런 어두운 현상을 세상에 까발린 이가 뉴욕의 <선>지의 말콤 존슨기자였습니다. 그는 이 보도로 플리쳐상을 받았습니다.
평소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추방된 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엘리아 카잔 감독이 이 보도 내용을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소설가인 버드 슐버그에게 각본을 의뢰하고 본격적으로 영화화에 나서면서
할리우드 영화사들을 찾아 나섰으나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노동자와 노조에 관한 영화는 잘못하면 말썽만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사진, 깡패 두목의 졸개였으나 점차 회개하는 테리>
그는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같은 명작을 제작했던 샘 스피겔을 찾아갔습니다. 스피겔은 즉석에서 오케이 했고 드디어 이 작품은 그 빛을 보게 됩니다. 카잔은 이 영화에서 부두 노동자들의 악조건을 리얼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촬영을 하다가 깡패들의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마치 파라마운트사가 영화 <대부>를 찍을 때 마피아들의 위협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워터프론트>는 카잔의 절정기 작품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폭력적이면서도 따스한 감성을 살려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영화는 등장 배우들의 연기도 하나같이 탁월했습니다.
주인공 말론 브랜도는 물론이고 리 J. 콥, 칼 말덴, 로드 스타이거, 에바 마리 세인트 등의 명배우들이 출연해서 브랜도의 연기를 한층 돋보이게 했습니다. 영화에서 시정잡배에 불과한 말론 브랜도가 서서히 도덕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깨어나는 모습은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진, 사랑하게 되는 테리와 이디>
이 영화의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한 유명한 레너드 번스타인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잔잔한 멜로디가 깔리다가 갑자기 천둥번개가 번쩍이고 벼락이 치는 듯이 강력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음악은 주인공 테리(말론 브랜도 분)와 이디(에바 마리 세인트 분)의 사랑의 장면에서는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감상적으로 흐릅니다. 겨울 항구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그해 아카데미 작품, 감독, 남우 주연(말론 브랜도), 여우 조연(에바 마리 세인트), 각본, 촬영 및 편집상을 받았습니다. 명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 중의 하나가 바로 <워터프론트>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 줄거리 ]
뉴욕 부두노조를 장악하고 있는 갱 두목 자니(리 J. 콥 분)가 졸개 테리(말론 브랜도 분)에게 노조 비위를 고발하려는 조이를 아파트 옥상으로 불러내라고 시킵니다.
자니의 부하들이 조이를 아파트 아래로 밀어 떨어트려 죽이자 조이를 혼내주는 것으로만 알았던 테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오른쪽 진, 공원에서 테리와 이디>
테리는 유망한 권투선수였으나 내기 시합에 관계된 자니의 변호사인 형 찰리(로드 스타이거 분)의 요구로 일부러 져준 뒤로 자니의 졸개로 전락했습니다.
테리의 유일한 낙은 아파트 옥상의 비둘기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테리는 조이의 여동생 이디(에바 마리 세인트 분)를 알게 되면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립니다. <사진 아래, 깡패 두목 자니(오른편)>
한편 이 지역 담당 신부 배리(칼 말덴 분)는 노동자들에게 단결해 노조의 비리를 폭로하라고 호소하나 허너같이 자니가 두려워 이를 피합니다. 테리와 이디는 만남을 거듭하면서 서로 사랑에 빠집니다. 이디의 사랑과 배리 신부의 가르침을 통해 테리는 서서히 양심과 자존을 찾게 되니다. 그리고 테리는 배리 신부의 조언에 따라 이디에게 자신이 조이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테리가 삐딱하게 나가자 자니는 찰리에게 테리를 제거하라고 지시합니다. 찰리는 테리에게 자니의 눈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사정하나 테리는 “형 때문에 내가 이런 날건달이 되었다”며 거부합니다. 테리가 이디를 찾아가 둘이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는 순간 아파트 아래 골목에서 테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뛰어나간 테리와 그를 쫓아온 이디를 향해 트럭이 질주해오나 둘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납니다.
형 찰리가 자니 일당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면서 테리는 복수를 하려고 혈안이 되는데 배리 신부가 폭력을 쓰지 말고 부두노조 범죄조사위에 출두해 노조비리를 고발하라고 설득합니다.
테리는 조사위에 출두, 노조의 온갖 비리와 살인행각 등을 폭로합니다. 다음 날 아직도 자니의 영향력 아래 있는 부두에서 일자리를 못 얻은 테리가 분개, 자니를 찾아가 둘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테리는 자니의 졸개들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고도 일어서 일터로 향합니다. 다른 노동자들도 자니의 말을 무시하고 테리의 뒤를 따릅니다. <사진, "자니 너 나와" 하면서 자니에게 대드는 테리, 그의 졸개들에게 무참하게 얻어 맞는다>
[ 영욕이 교차했던 명감독 엘리아 카잔 ]
엘리아 카잔 감독은 할리우드 50년대를 대표하는 명감독이자 연극과 영화의 역사에도 남는 위대한 연출가이며 메소드(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역 그 자체가 되는 것) 연기를 도입한 선구자로 꼽힙니다. 1909년 9월 터키 이스탄불에 살던 그리스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식구는 어린 그를 데리고 1913년 미국으로 이민 갔으며 메사추세츠 주에 1926년 윌리엄스 대학교에 입학하며 다니다가 영화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뒤에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연출을 하다가 할리우드로 뛰어들어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신예 할리우드 스타들을 대거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덴의 동쪽>, <초원의 빛> 등이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은 빨갱이 소탕으로 대변되는 매카시즘 광풍이 거세게 불어 닥치는 중이었고, 할리우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카잔은 1952년 미국 의회 반미조사위원회에 출두해 자신이 과거 공산당원이었음을 고백했고 옛 동료의 공산당 활동을 밀고합니다. 카잔은 스스로가 공산당원이었으면서도 동료들을 배반하고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밀고라는 비겁한 길을 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후 많은 비판을 받습니다.
그는 모두 8명의 동료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는 공산당이 가난한 조합원들의 월급을 활동비라고 잔인하게 뜯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동정심 따윈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1954년 <워터프론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게 됩니다. 하지만 매카시즘 열풍이 끝난 뒤 숨통이 트인 할리우드는 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찰리 채플린, 존 휴스턴, 줄스 다신 등 재능 있는 영화계 인사들이 무고로 인해 미국을 떠나거나 영화계를 떠났고, 심지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때 입은 인적 자원의 피해로 1950년대의 미국 영화계는 심각한 침체기를 겪었으며, 당시 막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던 TV로 인해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할리우드는 196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나오고 나서야 겨우 다시금 활기를 찾게 됩니다. 이처럼 매카시즘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할리우드에서는 그 선봉에 섰던 엘리아 카잔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진, '에덴의 동쪽'에서 제임스 딘>
1999년 그가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아카데미는 그 선정의 대가로 상당한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그의 시상식 때 으레 쳐 주는 기립박수마저 절반도 쳐주지 않았습니다. 관객석에 앉아 있던 에드 해리스, 닉 놀테 등의 배우들은 냉담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배우 짐 캐리 같은 이들도 무표정한 표정으로 박수만 건성으로 쳐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기립한 사람들조차도 미소도 없이 진심으로 축하하듯이 쳐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훈훈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시상식장이 객석이나, 시상자, 수상자 모두 어색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시상식장 밖에서는 그의 수상이 부당하다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2004년, 많은 배우들을 발굴했고 명작들을 만든 명감독이었으나 죽을 때까지 동료들을 고자질했다는 배신자라는 오명이 따라 다니면서 영욕이 교차하던 일생을 끝마쳤습니다. <사진,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 시상식에서 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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