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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주변씨 첨추공파 거촌문중 원문보기 글쓴이: 변형석
근래 중국 고고학 연구의 진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그 중 가장 놀라운 발표는 그동안 부단히 중국 화하족의 근원이라고 역설했던 상나라를 동이족이 건설했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는 점이다. 상 왕조가 동북에서 기원한 민족이 건립한 국가라는 주장은 큰 틀에서 동이의 훙산문화로 인식되는 샤자뎬 하층 문화와 상문화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훙산문명(신비의 왕국)’의 장에서 설명했으므로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은나라는 사해 · 흥륭와문화(기원전 6000~5000년)를 거쳐 훙산문화(기원전 4500~3000년), 샤자뎬 하층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나라라고 설명한다. 즉 기후가 변화하여 적응이 어렵게 되자 샤자뎬 하층 문화를 누렸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남하하여 중원의 상문화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제시하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ㆍ상 조상의 탄생 신화는 동북 민족이 공유한다.
ㆍ상의 선공(先公)과 선왕(先王)은 대부분 북방 지역에서 활약했다.
ㆍ샤자뎬 하층 문화와 상문화의 토기에 친연성이 있다.
ㆍ상인의 후예에는 동북과 관계된 사적(事績)이나 동북 지역에 대한 추억이 많아 양자의 문화에 동일한 습속이 보인다. 두 문화 모두 동북 방향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양 문화의 주요 건축물은 모두 동북쪽에 건설되었다.
ㆍ양 문화는 모두 도철문(獸面文)을 주요 장식 문양으로 사용했다.
중화 오천 년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뉴허량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유물인 옥웅룡(玉熊龍)을 크게 조각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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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갑자기 상(은)의 원류를 중국의 동북방에서 발달했던 훙산문화 혹은 샤자뎬 하층 문화와 연계시키는 것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동북문명’이 중국 문명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훙산문화와 샤자뎬 하층 문화의 후예가 중국 중원으로 옮겨 하나라를 격파하고 새로운 국가 즉 상(은)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무리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 「은본기」 기록을 보자.
은나라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제곡(황제의 증손자라 함)의 둘째 부인이다. 간적 자매가 목욕하러 가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했다. 그가 설이다.
세 사람이 목욕하러 갔을 때 검은 새(玄鳥)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삼켰더니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은나라의 건국신화가 난생설화임을 말해준다.
사마천이 적은 상나라 시조인 설[契, 은설(殷契)이라고도 불림]은 요순시절우(禹)의 치수를 도운 덕에 상(商, 허난 성의 옛 지명)이라는 곳에 봉지와 자씨(子氏)를 받았다. 그래서 상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겼다. 상토(相土, 설의 손자)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에까지 넓혔다. 그리고 왕해(王亥, 7대)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하여 부를 쌓았다.
은나라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이 새의 알을 삼켜 낳았다는 신화는 중국 동북 지역의 민족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화이다. 이들 내용은 부여, 고구려, 만주족에게서도 보이므로 중국 측은 상인의 기원이 동북 지역과 관계있다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한다.
중국은 상나라의 선공, 선왕들의 도읍지 및 주요 활동 지역이 북방 및 동북 지역과 관련 있다는 자료를 제시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순자』에 “설현왕(契玄王)은 소명을 낳았으며 지석(砥石)에 살다가 상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회남자』는 “요하는 지석에서 나온다”라고 적었고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지석은 산의 이름이다. 새외에 있는데 요수(遼水)가 나오는 곳이다. 요수는 남해(南海)로 들어간다.” 진징팡은 이 기록에 근거하여 지석은 요수의 발원지로서 현재 네이멍구 자치구 적봉 시 인근(훙산문화의 근거지)이라고 설명했다.
훙산문화의 발원지인 네이멍구자치구의 츠펑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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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현왕’이라고 불렀는데 이 칭호는 『순자』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료인 『국어』와 『시경』에도 보인다. 그런데 현(玄)은 북방색이다. 『여씨춘추』에는 “하늘에는 아홉 개의 분야가 있다. ······ 북방을 현천(玄天)이라 한다”라고 적혀있다. 진징팡은 이들 기록에 따라 설은 현왕, 즉 북방의 왕이라고 했다.
푸쓰녠이 은허 발굴을 주도했는데, 그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은설 사화를 실으며 “이러한 난생설화는 동북 민족과 회이(淮夷)의 신화”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논형』에 나오는 탁리국(부여) 시조 동명과 『위서』의 고구려 시조 주몽 그리고 고구려 호태왕비에 나오는 추모왕의 난생설화를 원문대로 실고 은과 부여 · 고구려의 시조 사화가 같음은 주목할 만하다고 발표했다. 상(은)나라를 동이족이 건설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근래 중국에서 출간된 『사기해독(史記解讀)』이나 갑골문 연구자인 멍스카이가 출간한 『하상사화(夏商史話)』에서도 은나라를 이인(夷人) 또는 동이족의 한 가지(分支)라고 쓰고 있다.
상문화의 기원이 동북 지역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인류학적으로도 지지받는다. 판지펑은 은허의 중소 귀족 무덤에서 출토된 상인의 인골은 대부분 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은허의 씨족 무덤 가운데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지고 있는 중형 무덤은 모두 세트를 이룬 청동 예기를 수장하고 있으나 노예가 배장(培葬)되어 있다. ······ 그들은 아마도 봉건 귀족으로 왕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혹은 그 자신이 왕족 성원이었을지 모른다. 은허에서 발견된 상나라 귀족들의 시신들은 대다수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면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다. 이것은 황허 강 중 · 하류의 토착 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위의 설명은 상족의 조상이 북방 지역의 고대 거주민과 많은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와 북아시아의 두 유형이 혼합된 인종 특징은 황허 강 유역 중 · 하류의 원시 거주민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족에게 동북 방향을 숭상하는 신앙이 있다는 것도 한 증거로 제시된다. 고고학자 양시장은 “상대 왕실과 귀족은 동북 방향을 존중했다. 그것은 그 선조의 기원지에 대한 추억과 존경을 표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쑤빙치도 훙산문화의 특대형 제사 유적과 그 주변에 분포한 상 · 주 교체기의 구덩이에 매장된 청동기군을 연계시키고 상 · 주 시대에 교(郊), 요, 체 등의 중요한 의례 활동을 이 일대에서 거행했다고 주장했다. 즉 상인이 동북 방향을 존중하였던 것을 이와 연계시킨다면 상의 기원이 동북 지역과 관련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 방향을 받들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쑤빙치의 설명은 상인이 중원을 차지한 후 각 지역의 수많은 문화적 요소를 받아들여 많은 변화를 일으켰지만 그 중심적인 문화 요소는 여전히 동북 문화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 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조정의 회합(會合)도 백색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백주에 가지기로 했다. 『예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색 희생물을 바친다. 반면에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다.”
동이족과 은나라, 이어서 한민족과의 연계는 사료뿐만 아니라 은나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물로도 알 수 있다. 은허(殷墟) 유적에서는 훙산문화와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옥기, 청동기는 물론 후대에 발견되는 토기들도 보인다.
훙산 옥기 중에서는 대표적인 곰, 호랑이, 용, 매, 제비 모양 옥기 등은 물론 옥선기(玉旋璣), 결상이식(玦狀耳飾)도 발견되며 한국인이 자랑하는 빗살무늬토기는 물론 덧띠무늬토기도 보인다. 놀라운 것은 그동안 북방 기마민족의 대표적인 유물로 부단히 이야기되어온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각배(角盃)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또한 역으로 훙산문화의 본거지라 볼 수 있는 츠펑 지역에서는 상(은)의 대표적인 유물인 중국식 동검 등이 발견된다. 이는 양 지역이 같은 동이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은)이 건설된 이후에도 양 지역에 부단한 연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사료에 나타나는 동이족을 모두 한민족의 동이족과 동일하게 간주할 수 없다는 설명도 있다. 기수연은 한(漢) 대 이후 동북 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둥 일대에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상(은)나라를 동이가 건설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들 중 상당수가 후대에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인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이들 모두를 한민족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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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글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