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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신과 인간에 관한 절박한 물음!
그리고 그에 대한 인문학적 답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직전 24가지 질문을 남겼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에서 시작하여 ‘종말은 언제 오나’에 이르는 이 질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신과 인간에 관한 절박한 물음이다. 고(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한 이 숙명적인 문제들을 철학자 김용규가 진지하게 성찰한다. 신학과 철학에 대한 지은이의 깊은 통찰에는 신의 존재 여부, 종교와 과학의 관계, 영혼의 존재와 역할, 지구의 종말 등 신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또한 최근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지은이의 단호한 일침은 과학과 종교의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우리 시대 인문주의의 정수다.
이병철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신과 인간에 관해 묻다
삼성그룹을 창건한 이병철 회장은 1987년 타계하기 직전 가톨릭교회 정의채 신부에게 네 쪽짜리 질문지를 보냈다. 이 질문지에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등 단아한 필체로 쓰인 24개의 질문이 담겨 있다. 이 질문들은 하나같이 어투가 도전적이고 호흡이 긴박하지만, 동시에 내용이 신중하고 순서가 정연하다. 찬찬히 살펴보면 신과 인간에 관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궁금증이 포함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은 이병철 회장이 남긴 신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는 책이다. 이 질문들은 삼성그룹이라는 굴지의 기업을 만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이기에 특별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앞둔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도 하기에 보편적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절박하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일이 헛되고 죽음 후에 찾아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삶의 마지막 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답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문제들. 이 책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이 숙명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삶의 의미를 곱씹고 그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한다.
신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김용규가 그 질문에 답하다
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헤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13편의 문학작품을 실마리 삼아 철학의 길과 삶의 해법을 제시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흥미진진한 지식 소설 《알도와 떠도는 사원》 등 대중과 소통하는 철학 교양서를 집필해온 철학자 김용규.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으로서의 신을 이야기한다. 철학의 본분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기에, 신을 이야기함으로써 가치들이 소멸하고 삶이 공허해진 현대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아닌, 철학자인 그가 신과 인간의 관한 이병철 회장의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인 이유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견지하는 것은 ‘인문학적 관점’이다. 기독교 특정 종파의 관점이나 신학적 경향을 지지하지 않고,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신과 인간, 종교, 과학 등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을 논의한다. 종교적 문제들의 개념을 정리하고 논리를 분석하며, 그에 대해 독자들이 어떤 입장을 가질 수 있는지까지 설명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종교적 담론들을 거부감 없이 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들은 신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은이의 통찰에서 신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종교해악론에 일침을 가하고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다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종교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이에 발맞춰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종교의 종말》의 샘 해리스, 《주문을 깨다》의 대니얼 데닛,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 등을 위시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교가 인류에게 해롭고 불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종교해악론과 종교말살론을 주장하며,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과학자인 이들의 주장은 정말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일까?
지은이는 이 책에서 종교해악론을 펼지며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부당한 공격에 일침을 가한다.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과 종교의 부작용을 이유로 종교해악론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마치 생화학무기, 원자폭탄 등 과학이 가진 위험성을 근거로 과학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고 과학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쟁과 테러가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 외에도 지은이는 새로운 무신론이 가진 많은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며 과학과 종교의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이 같은 논의는 균형 잡힌 시선으로 합리적 길을 찾는 우리시대 인문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지은이 인터뷰
▶ 고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은 모두 직설적이고 호흡이 긴박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질문들이 “내용이 신중하고 순서도 정연하다”고도 하셨는데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 회장이 남긴 질문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 무신론자가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서, 또는 치기 어린 호기심으로 던진 물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 하나하나가 무신론자든 기독교인이든,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만한 것들이지요. 신중하게 골랐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질문들이 기독교 조직신학 체계에 맞춰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의 순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우연이라 보기가 어렵지요. 아마 이 회장의 질문을 누군가가 다시 정리했거나, 아니면 이 회장 자신이 기독교 신학체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 24가지 질문 중 대답 내용이 중복되는 열세 번째 질문과 기독교·유대교·불교 등 종교의 특징을 묻는 열한 번째 질문을 제외한 22가지 질문을 다뤄주셨습니다. 이 중 답변하는 데 가장 고심했던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이 회장이 남긴 질문 하나하나가 답하기에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만큼 크고 무겁습니다. 그래서 모두 고심하면서 답했어요.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답하기에 어려웠던 것은 기독교 밖에서 뿐만 아니라 안에서조차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천국과 지옥의 문제에 대해서는 교파와 신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고 논쟁이 매우 뜨겁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이런 질문에 대해 모두가 만족할 만한 답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 데이비드 밀스 등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한 단호한 일침이 인상적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왜 문제인가요?
종전의 무신론자들은 자기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9ㆍ11사태 이후 등장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달라요. 그들은 종교는 망상이고 온갖 전쟁과 테러의 온상이기 때문에 없애버려야 한다는 종교해악론 내지 종교말살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은 이렇게 생각해보면 바로 드러납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류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당대의 첨단무기로 전쟁과 테러를 자행했고, 그 첨단무기들의 생산에는 항상 당시 첨단과학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과학은 해로운 것이며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하지요. 어떻습니까? 과학이 가진 위험성 때문에 과학을 아주 없애버려야 할까요? 또 과학이 없어진다고 해서 전쟁과 테러도 함께 없어질까요? 아니지요! 설령 다소의 위험과 부작용이 염려된다고 해도 과학 역시 인류가 보존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지요. 과학이든 종교든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측면을 최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합리적입니다.
▶ 도킨스 등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한 논의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목소리 또한 날카롭습니다. 현실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교회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덕에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했지만, 온갖 부작용도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지요. 따라서 교회는 이 목적에 합당할 때만 정당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화형에 처하려는 대심문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사역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어떠한 사역도 허용된다. 그리고 교회의 성스러운 사역을 위해서라면 어떤 불의도 허용된다. 그래서 그는 재림한 그리스도를 처형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간단히 ‘교회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것이 11세기에 신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을 피로 물들인 십자군의 논리였고, 16세기 유럽의 가톨릭이 중남미 각국에서, 17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한 온갖 만행 뒤에 숨은 진실이었지요. 또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반복하고 있는 숱한 과오들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행복한 때는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있을 때다”라는 파스칼의 말이지요.
▶ 2010년에 출간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과 이 책에서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현대 사회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신이란 무엇일까요? 스콜라 신학의 문을 연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는 신을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선성’ 등등, 요컨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정점(頂點)’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신이 죽고 진리가 사라졌습니다. 가치들이 소멸하고 세계가 공허해졌지요. 무신론과 허무주의가 횡행하고 삶의 이정표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을 잃었지요.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는 ‘가치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근본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힐링’이 아니지요.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신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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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며 모든 피조물은 '존재물'이다. 그는 아무런 형체도 없고 무소부재하며 모든 것의 숨결이며 물질이 아닌 모든 것의 근원이며 완전한 존재다.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하나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29
●신의 존재 증명은 이성의 문제도 경험의 문제도 아니다. 신앙의 문제다. 신앙은 그 자체가 '신념'이자 '가치체계'이며 동시에 '문제해결 방법'이다.
● 신은 모든 존재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으로서 그것들을 통해 태초부터 종말까지 자신의 존재를 '부단히 그리고 분명히'드러내고 있다. 단지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을 뿐이다. 신은 무한하기 때문이고 불가시적이기 때문이며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신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 결코 끝나지도 않고 끝낼 수도 없는 모험의 전형적 예가 '신의 존재 증명' 같은 형이상학적 또는 신학적 과제들이다. 칸트는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에게 신은 그가 규정한 '진리의 섬'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다.
● 존재물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p.50-52
2.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 해석과 현대 천체물리학의 우주발생론이 적어도 외관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둘이 갈라지는 결정적 분기점이 있다.
●빅뱅에 의해,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 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그 우연은 의식이 있어야 가능하며 그 의식은 곧 신이다. (프리먼 다이슨. 유진 위그너. 존 휠러)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 하나님은 당연히 미래사를 아신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자유의지로 죄를 범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미래사를 예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하거나, 아니면 사람이 자유의지로 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자유의지론>의 딜레마다.
●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양립주의>를 주장한다.
" 인간은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이다. /다윈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진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신의 창조물이다. (진화하는 창조. 창조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진화되고 있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 과학이 종교가 되거나 종교가 과학이 될 필요가 있을까?
우리의 삶과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일은 영상 기술자들이 3차원 영상을 만드는 방법과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즉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두 개의 2차원 영상을 나란히 겹쳐놓음으로써 실사에 더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3차원 영상을 얻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동요도 나란히 겹쳐놓음으로써 진리에 더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 우리를 자유롭게 살게 하려는 '신의 사랑' 때문이다. 이것이 신이 자연에는 자연법칙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악이 허용되는 까닭이다.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인,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 악이란 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행위다. 선의 결핍에서 오는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빛을 내뿜는 기구들(횃불과 전등 등)은 만들 수 있는데 어둠을 뿌리는 기구는 왜 만들 수 없을까? 그건 빛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이지만 어둠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빛을 차단함으로써만 어둠이라는 현상을 만들 수 있다.
<악의 평범성>, 우리 모두는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 고난이란 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먼저 내리는 고통과 불행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만 신이 인간에게 악을 허락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p.172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 죄란 신에게로 등을 돌리는 일이며 빛을 등지면 보이는 것은 어둠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우리가 죄와 악을 저지르는 가운데서도 참고 기다리며, 자기를 희생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다. 즉,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쥔 성서는 성령의 영향 아래 전혀 오류 없이 쓰인 원문서가 아니다! 신의 육성을 녹음한 녹음테이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성령에 의해 끊임없이 구현되는 신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가 무오성이 아닌, 구원의 메시지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 성서를 신의 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과 세계 구원에 헌신하고 봉사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서가 신의 말이라는 증거다.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 <과학적 진리>는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진리>는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삶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에 대한 진술이다.
● 종교가 하는 일은 결국 신앙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삶의 방향을 바꿔주는 것이다. 타고난 본성을 따라 사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가치를 좇아 사는 '가치 중심적 삶(기독교에서는 신중심적 삶이라 한다)을 살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 제노사이드의 피해를 입은 게 종교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 자체는 종교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일어난 불행한 사건들이었다. 문제는 이데올로기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 기독교의 '영혼론'과 과학의 '알파 활동론'은 예정론과 자유의지론, 창조론과 진화론이 그렇듯
양립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이 영혼이라는 '원리'를 창조해 인간에게 불어 넣아주었다는 것도 옳고 자연이 진화 과정에서 알파활동이라는 '기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것도 옳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11.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 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 당신은 예수가 가르친 이중예정론을 수용하면서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선포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리를 철회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신의 진리를 알고 실행하는 사람은 -설령 그가 '교회 밖에' 있다고 해도- 구원받는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보편적 구원론)
12.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 루터는 지옥이 '특별한 장소'라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세계의 장소가 아니다. 지하세계의 장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존적 경험, 곧 죄와 하나님이 없는 존재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의 경험이었다.
● 천국과 지옥에 대한 합의된 교리가 기독교 신학 안에는 없다! 그 대신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해답을 찾으려 한다.
● 인간은 실로 믿는 기계이고 우리의 체험은 그런 믿음들의 깊이와 질에 영향을 준다. (…) 그 믿음들은 우리의 신념이고, 우리에게 신앙을 주고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13.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신앙이란 원칙적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자손 번성, 부귀영화, 무병장수 같은 세속적인 복과는 무관하다. 신의 교훈은 세속적인 복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적인 복, 곧 신의 나라와 그의 의에 마음을 쏟으라는 것이다.
14.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 대다수의 부자는 탐욕적이다. 죄인이란 신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온갖 탐욕을 자기 지옥으로서 짊어지고 사는
●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움켜쥐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혐오하는 자기중심주의, 현세 중심주의의 본질이다. 또 그들이 가진 참을 수 없는 성욕, 끈질긴 재물욕, 무한한 현세 욕이 바로 마음의 부자이다.
15.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 선행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 내지 증거가 선행이다.
16.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서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으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고 있지 않은지 부단히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만 숱한 대심문관들이 도사리고 있는 교회와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화형 시키고 인민을 위해 인민을 학살하는 광기와 야만성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17.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폴란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과 등)
● 공산화와 천주교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 세계 각국이 공산화된 데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 외교. 군사 같은 외적 요소가 작용한 것이다. 특히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구 러시아)의 세력 경쟁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18.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과 참모습을 입증해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또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확실하다. (…)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다.
19.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 교황은 신이 아니며, 교리는 신의 말씀이 아니다. 기독교의 교리란 본디 타 종교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들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해 방어하려고 만든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설령 신의 말씀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 해도 교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교황 무오설도 예외가 아니다.
20.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 독신생활이 예수와 사도들의 권고이지 명령이 아니라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부작용이 그토록 심하다면, 가톨릭교회도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관건은 사제가 독신이야 아니야가 아니라 그들이 신과 이웃을 예수가 가르친 대로 잘 섬기고 있느냐 아니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1.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 기독교는 물질생활의 풍요를 가져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덕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덕에 저항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의 악덕을 치유할 원칙은 우리가 황금률이라 부르는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22.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 우주적 종말이든 생태적 종말이든 간에 지구의 종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언제 올지 모르는 지구의 종말을 우리의 삶 밖으로 밀어내 아예 망각하고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삶 속으로 끌어들여 매 순간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라고 교훈한 예수의 "종말론적 태도'는 그중 후자에 해당한다.
●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감은 비본래적 존재에서처럼 죽음의 넘어설 수 없음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때에만이 우연히 들이닥치는 여러 가능성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넘어설 수 없는 최후의 가능성 앞에 있는 여러 현실적 가능성을 이해하고 선택하게 된다. 이 앞질러 달려감이 실존의 극단적 가능성으로서의 자신의 과제를 열어 보이며, 그때그때에 이미 실현된 실존으로 굳어버린 모든 태도를 부숴버린다./ 하이데거
※신정론
1. 아우그스티누스 - 악을 신에게서 돌아선 인간의 죄 탓이라고 돌림
2. 이레에우스 - 악을 신의 구속사 안에서 성장과 진화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봄
3. 바르트 - 악을 죄와 분리해 선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한 축이라고 인정함
위의 것들은 신의 신성을 제한하고 훼손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섭리 = 신이 인간과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
1. 특별 섭리 = 신이 피조물을 직접 개별적으로 돌보는 의지. 예) 기적
2. 일반 섭리 = 자연법칙. →자연의 변화를 지배하는 과학법칙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자유의지(자유의지에서 악이 나온다. → 자연악. 인간악.)
· 자연악 ; 질병, 지진, 폭풍….
· 인간악 ; 탐욕, 잔인함, 불의함….
▶ 따라서 모든 악은 신과 무관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자연과 인간에게 있다. (선은 신으로부터 오고 악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온다)
▶ 신의 선 → 자유와 우연성을 허락하는 것이 강제하는 것보다 신의 사랑에 합당하다.
57-58-종교적 경험의 형태는 크게 '신비적 형태(환상, 마음의 소리, 괴이한 감정, 신비한 황홀경 등,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것)'와 '일상적 형태(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종교성이 점차 깊어져 나타나는 어떤 의식의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188-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가 인간을 죽일 권리를 가진 <초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살인을 했다고 고백했다. '초인 사상'이라 불리는 이 같은 사상에 사로잡힌 그는 스스로 자신을 높여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으려 시도했다. 바로 이것이 죄이고 노파를 죽인 행위는 죄 다음에 따라오게 마련인 악에 불과하다는 것이 도스토엡스키의 생각이다.
189 - 몸은 키를 더하면서 크지만 영혼은 겸허를 더 하면서 큰다.
190 - 왜 이성적인 지식인들이 더 끔찍한 죄를 지어 더 무서운 벌을 받는지에 대한 답 :
이성을 믿는 지식인들은 자만했고 신을 믿는 민중은 겸허했기 때문이다. 사회 개혁을 외치는 혁명가들은 타인의 희생을 종용했고, 스러진 자들을 돕는 민중은 자기희생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즉 겸허가 자만의 해독제다.
192 - 제노사이드(genocide) : 종족집단학살
주로 사자, 하이에나, 늑대, 침팬지, 등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서 일어난다. 그 대표적 동물이 인간이다.
196 - 구원론 = 다시 신을 향하는 것. 그럼으로써 도덕적 법률상 죄를 짓는 악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198 - 만물은 신의 신성을 닮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 토머스 아퀴나스
405 - 성직. 성장. 승리라는 이념이 이데올로기로 변한 데 문제가 있다. 이데올로기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왜곡하는 자기 폐쇄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이념이다.
406 - 그래서 양희송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설득의 방법으로 소개한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라는 세 가지 수사학 용어를 빌려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로고스 = 성서에 대한 '거룩하고 비판적인 읽기'
파토스 =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고통과 공감의 열정
에토스 = 실천을 통해 "일상에서 쌓아 올린 신뢰"
408 - 교회는 성화를 위해 존재한다.
422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이 없다고 믿는 진리….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