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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강화역사관 집결(강화대교 건너가자마자..개별차량 집결지)
09:00 강화역사관, 갑곶돈대
10:30 고려궁지, 용흥궁, 성공회강화성당
12:00 강화고인돌
13:00 황청리 은성횟집 032-933-8088 해물매운탕/강화유스호스텔 앞
14:30 전등사
16:00 정수사
17:00 분오리돈대 일몰감상 (시간과 날씨를 보고 결정)
1. 버스
1)압구정동
인덕원참새/방앗간/밥줘/들바람/남해대교/똥구랑땡/동행인/초록빛바다/낮은나무/프로메테우스/맵시/레오/카메노/은사시나무/이종원/hajima/pony/모카/나라맘/칠공주동행인/산드라/무심해/행복통신/스카이/영공/영공친구/나눔/pretty woi/정연오/밥줘친구/덜깬주/덜깬주동행인
2)당산
김사랑/반딧불이/칠공주/오우가/핑크빛향기/머식이/신나라/머러리맘/향기야/형아/신영웅/동행/동행/명수기
현재 45명 마감
2. 개별차량
강바람/동행인/코리아맥가이버/콩깍지/고운이/동행1/2/3/4/5/꽃님이/moon/동행인/노자/조아/까불이/미니공주/예천사랑/무심천/집사람/rosebell/권경문/아내/동행인/날씬이/어린청룡
개별차량 26명 마감
이종원 016-219-6001
똥구랑땡 011-8855-9981
명수기 018-2443-6172
배상수 016-9570-0500
강화도 개요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서해로 합류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제4기(홍적세∼충적세)이후 염하(鹽河: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바다)에 침식당하면서 침강작용에 의하여 섬이 되었다. 현재의 강화군은 11개의 유인도와 1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1969년에 본섬인 강화도와 김포군 사이에 강화대교(길이 694m)가 놓여 육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강화도는 서울 근교의 사적(史蹟) 답사지로 매우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찾는 곳이다.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선사시대∼고려, 조선에 이르는 시기의 유적지들과 함께 근대 이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 간추린 역사
선사시대
하점면 장정리에서는 구석기가 수습된 적이 있다(연세대 박물관 소장). 그리고 동면 동막리, 화도면 사기리, 하점면 부근리 등 여러 곳에서는 간돌도끼, 돌화살촉, 빗살무늬토기편 등도 발견되었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삼국∼조선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이었다(교동도는 고구려의 高木根縣).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또 군사상의 특별 행정구역으로 진(鎭)이 설치되어 혈구진(穴口鎭)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년)에 강화현(江華縣)이 되었다가 1232년(고종 19년) 7월에 강화로 천도한 뒤 명칭을 승격시켜 강도(江都) 또는 비도(泌都)라 하였다(1270년 5월에 개경으로 환도). 금속활자의 주조, 대장경 조판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조선 태종때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일시 피난한 적이 있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왕자들이 강화도에 피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포로가 되자 남한산성에 피난해 있던 인조는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 효종 즉위 후부터 북벌계획이 추진되면서 숙종 때까지 강화도에는 각종 방어시설이 만들어져 요새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19세기에 들어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강을 따라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이유로 강화도에서는 제국주의 열강과 군사적인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운요오호(雲揚號)사건(1875년) 등이 그것이다.
특산물과 인심
강화도에서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로 소급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재배는 한국전쟁 때 개성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당시 개풍군 사람들이 강화에 많이 정착하였다. 근래에는 인삼재배가 줄고 있다고 한다. 화문석도 강화의 명물로 꼽힌다. 이는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쓴《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강화도는 일제강점 때 화학섬유 공업이 발달하기 전에는 이름난 인조견의 산지이기도 했다.
강화 여인들은 예로부터 억척스럽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고 강화사람들은 배타적인 기질이 있다는 말을 듣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의 몇 가지 사례에서 말미암은 듯하다. 당시 일본 상인들이 많이 들어왔으나 강화 사람들은 그들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일본인은 오로지 여관업자와 고물상 두 곳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화에서 인천까지 발동선을 운항하는 삼신상회 주주의 한 사람이 강화 출신이었는데,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나카(田中) 기선회사가 다시 뱃길을 개설하였으나 사람들이 타지 않아 결국 3개월 만에 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화의 옛이름 "갑비고차"의 유래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 ‘갑비’는 고유어 ‘갑’을, 고차는 ‘곶, 곶이’를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현재 강화읍 소속의 갑곶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면 갑곶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갑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을 ‘갑석(甲石)’, 두 배를 ‘갑절’, 겹창을 ‘갑창(甲窓)‘이라 하는 것처럼 둘(2)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강 하류의 조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 강화의 동북단에서 둘로 갈라져 강화의 북단과 강화·김포 사이의 염하로 나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
’고차‘는 ’고즈, 고지‘로 변하여 곶이 된다. 곶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해온 한자음으로 강, 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나, 내륙에서 벌판을 향해 길게 뻗어나간 지형에서 온 지명형태소 이다. 즉 갑비고차란 현대어로는 ’갑곶, 갑곶이‘가 되며, 두 갈래로 갈라진 물(바다, 강)가에 있는 곶으로 된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대에 불려지는 혈구, 해구, 강화라는 지명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 사라지고 물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갑곶돈대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몽고와 줄기차게 싸울때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다. 조선 인조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이 돈대는 숙종 5년 (1679)에 축조 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산성, 문수산성 등을 점령하였다. 동년 10월13일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주하였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 동종을 가져가려 하였다가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등을 약탈하고 조선궁전 건물은 불을 질러 소실 되었다.
갑곶돈대는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나는 강화 53돈대중 하나입니다. 고려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고와의 줄기찬 항쟁을 벌일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갑곶'의 유래는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사가 월곶 해안에 이르러 거센 물살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아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의 갑옷을 한 데 꿰어 다리를 만들어도 강을 건널 수 있으련만"하고 탄식한테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 극동함대 600여명의 병력이 이 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들은 35일 동안 강화에 체류하면서 사람과 가축을 살상하고 금, 은, 무기, 도서 등을 약탈하다가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 부대에 패주하였다
강화역사관
강화역사관은 강화도에 위치한 각종 전적지와 유적을 둘러보는데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역사관은 1988년 9월 문을 연 곳으로 강화와 인천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해 꾸며 놓았다.
-선사·통일시대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 등 모두 4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전쟁과 관련된 유물등이 전시돼 있다.
1. 제 1 전시실: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선조들의 생활흔적이 전시되고 있다.돌도끼,돌칼.유문토기,지석묘등을 볼 수 있다.
2. 제 2 전시실: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전시실. 팔만대장경 제작과정이 생생히 기록돼 있고 그외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3. 제 3 전시실:북방민족 침략사를 볼 수 있는 전시실로 몽고침입에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국난극복사를 볼 수 있다.
4. 제 4 전시실 :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강화도 조약 체결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면서 3.1운동이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이 전시돼 있다.
강화 비석군
총 67기의 강화비석군이 있는데 조선시대 때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군수 등의 영세불망비와 선정비, 그리고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등이다
강화동종
이 종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37년(1711) 강화유수(江華留守) 윤지완(尹趾完)이 주조(鑄造)한 것을 그후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동종이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한국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옆띠를 몸체의 중앙에 돌려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하여 놓았고, 어깨부분은 턱이 져 있다. 그리고 어깨에서 훨씬 떨어져 꽃무늬로 장식한 독립된 4개의 유곽(乳廓)을 형성하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乳頭)를 배치하였다. 특히 옆띠로 구분한 하반부에는 종구에 한가닥의 꽃무늬 옆띠를 돌려 구연대(口緣帶)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무늬띠와 가운데 옆띠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장문(長文)의 명문(銘文)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이 명문에는 주종(鑄鐘) 관계와 개주(改鑄) 관계 등의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종(高宗)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종각(鐘閣)은 260여년전에 강화성(江華城)의 남문(南門) 동쪽에 건립하였던 것을 강화국방유적(江華國防遺蹟) 복원정화사업(復元淨化事業)과 함께 현재의 장소로 옮겨 보존(保存)하고 있다.
총중량이 3,912kg에 높이가 198cm이고 구경(口徑)이 138cm에 달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 동종으로는 거종(巨鐘)에 속한다.
강화 갑곶리의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제78호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강화도 역사박물관 옆에 서 있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2.1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을 해 있었던 곳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도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탱자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조정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령(樹齡)은 4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4.2m, 지상부의 줄기 둘레는 2.12m이다. 3갈래로 갈라졌으며 가슴높이의 지름은 10㎝, 14㎝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로 7.9m, 남북으로 8.3m이다. 운향과의 낙엽관목이며 3m 정도 자란다. 가지는 다소 편평하며 녹색이고 길이 3-5㎝의 굳센 가시가 있다. 잎은 호생(互生)하며 3출엽(出葉)이고 엽병(葉柄)에 날개가 있다. 소엽(小葉)은 두껍고 도란형 내지 타원형이며 끝이 둔하거나 파지고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5월에 피고 희며 꽃받침잎과 꽃잎은 5개씩이고 수술은 많으며 자방에 털이 있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3㎝정도로서 향기가 좋으나 먹을 수 없고 약용으로 한다. 묘목은 귤나무의 태목(台木)으로 하고 성목(成木)은 남쪽에 있어서 산울타리로 이용하고 있다.
이 나무의 유래(由來)는 몽고군이 침공하였을 때 고려의 고종(高宗)께서 28년간 강화에서 정무(政務)를 살피셨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조선조(朝鮮朝) 인조(仁祖)의 가족이 강화도에서 전란을 피하였다. 이러한 전란(戰亂)을 계기로 하여 성(城)을 튼튼히 쌓고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성(城) 밑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한다. 성(城)은 무너져 없어졌으나 그 밑에서 적병(敵兵)의 발뿌리를 노리던 탱자나무의 일부는 남아있다. 따라서 국토방위(國土防衛)의 유물(遺物)이기도 하다.
문수산성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20만 3511㎡이고, 둘레는 약 2.4km이다. 1694년(숙종 20) 구축한 것으로, 강화 갑곶진(甲串鎭)과 마주보는 김포 쪽에 위치하여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도 입구를 지키는 성이다. 명칭은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에서 유래하였다.
취예루(取豫樓) ·공해루(控海樓) 등 문루와 암문(暗門)이 각 3곳에 있었으며, 취예루는 갑곶진 건너편 해안에 있어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1812년(순조 12) 대대적으로 중수하였고,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軍)과의 일대 격전지였다. 이때의 격전으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었다. 지금은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없어지고 마을이 들어섰으며,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다.
갑곶순교성지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 그리고 연평도·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서 관원들에게 잡히게 된다. 그래서 이곳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라고 말 할 수 있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 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병인)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회장과 천주교인으로 최인서와 함께 있다가 잡혀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진무영으로 호송되어 효수당한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이곳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이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순교자현양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고려궁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해 있는 고려궁지(高麗宮地)는 고려가 몽고의 침략시 항전하던 궁궐터다. 지금으로부터 760여 년 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1213∼1259 재위)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가치를 높이는 등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이곳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고려사절요에 최우가 이령군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궁궐의 풍모는 송도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
각 건물의 명칭을 전부 송도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모두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고려궁지는 정문인 승평문과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고 동쪽에는 광화문이 있었다.
이후 1270년 몽고와의 굴욕적인 화해가 성립되면서 개성으로 환도한 뒤 몽고의 강요로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곳에 행궁과 강화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으로 헐리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이었던 명위헌(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과 이방의 집무처였던 이방청(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6호) 그리고 강화동종(보물 제11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장년전과 규장외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이 때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도 약탈해 갔다.(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지금 이곳에는 터만 남아있다.
현재 총 관리면적 2,279평의 이 궁터는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도에는 3개의 궁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각 정궁, 행궁, 이궁, 가궐이 그것이며, 지금은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할뿐 그 외에는 밝혀진 바가 없다. 고려궁지의 인근에는 오읍약수터와 관청리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는 고려궁지 대형 주차장 옆 30m 지점에 있다. 그리고 약수터는 고려궁지 입구에서 왼쪽으로 고려궁지 담을 끼고 시멘트 포장된 오르막길을 5분여 걸어서 강화산성 북문을 지나 다시 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물맛이 아주 좋고 또
산책삼아 걷기에 좋아 인근의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강화유수부 동헌- 인천유형문화재 25호
이 건물은 강화 유수부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 건물이다.
조선 인조 16년(1638)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으며,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尹淳)의 글씨라 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8칸, 측면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1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화유수부-이방청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강화 유수부내 육방(六房)중의 하나인 이방청으로 조선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개수하고 괘홀당이란 당호를 게시하였다. 1945년 해방이후 지방법원(등기소) 사무실로 임시 사용한 적이 있으며, 1977년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규장각
임진왜란 직후 국가의 중요자료를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강화도가 서울에서 멀지 않고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외규장각은 정조5년(1781) 강화부 행궁 내 연초현을 철거하고 건립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2월에 완공하여, 4월부터 서적, 의궤 등이 봉안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왕실의 기록보존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변화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다가 고종3년 (1866)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소장되어 있던 각 무기와 서적들이 약탈되었으며 건물은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사설] 프랑스에 끌려다니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외규장각 도서는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 의식절차를 꼼꼼히 정리한 儀軌의궤 191종 296권으로 실록과 함께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산이다.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영구임대 또는 문화재 교류방식’으로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나 프랑스 내 반대가 거세지면서 지금까지 반환교섭은 제자리를 맴돌아왔다.
1차대전 종전 후 체결된 베르사유조약 245조는 전쟁 중 독일군이 빼앗아간 문화재의 완전 반환을 규정했다. 당시 프랑스는 1870년 普佛보불전쟁 때 프러시아가 뺏어간 문화재까지 遡及소급해 돌려받았다. 프랑스는 2차대전 후에도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들을 돌려받았다. 자기 것을 챙기는 데는 열심인 프랑스가 조선에서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움켜쥐고만 있는 것을 세계가 어떻게 볼 것인가.
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였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웠던 이유는 당쟁으로 인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규장각을 새로운 정치기구로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 수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규장각은 왕권의 상징이자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든다. 그것은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정조는 이렇게 귀중한 물건들을 왜 강화도에 보관했을까? 강화도는 이미 고려시대 몽고군에 맞서 40년간 항쟁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 난리가 일어날 때 국왕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개펄이 있어 천연의 요새다. 정조는 이런 강화도야 말로 최고의 안전지대라 믿고 외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할 때 병력은 군함 7척에 군인 1460명이었다. 이들 앞에 수대에 걸쳐 외성과 내성을 쌓고 거기에다 돈대까지 쌓은 강화도는 의외로 허무하게 무너진다. 당시 정규군은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 프랑스군은 무력으로 손쉽게 강화를 점령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문화수준에는 감탄한 나머지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용흥궁
용흥궁은 조선 말 철종이 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집이다. 철종은 1850년 즉위하여 1863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의 제25대 왕이다. 서민으로 지내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여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 힘을 썼지만, 당시 주위의 간신들의 방해와 자신의 병으로 인해 정치를 다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만약 철종이 왕에 등극하지 않고 일반 백성으로 강화도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철종이 1850년에 왕으로 등극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가자 철종이 살던 집을 용흥이라 하고 1853년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바꾸어 개축했다고 합니다. 이후 고종 광무7년(1903)에 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하였고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좁은 골목에 대문이 있고 조선시대의 살림집의 유형을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
(참고자료) 궁과 궁궐 그리고 잠저
우리가 흔히 섞어서 쓰는 '궁(宮)' 과 '궁궐(宮闕)' 은 그 규모나 용도가 엄연히 구별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과 같은 곳은 궁궐에 속하며 이들을 5대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동별궁, 창의궁, 어의궁, 용흥궁, 선희궁 등은 '궁'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궁궐'은 아니다. 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이거나 또는 왕족들이 살던 집이다.
'궁' 은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주거(住居)를 담당하는 곳이고 '궐' 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사무를 보고 일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곳이다. 그래서 '궁궐' 하면 '궁' 과 '궐'이 합쳐져 일상적인 생활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도 볼 수 있게 복합적으로 구성된 곳을 말한다.
궁궐에는 또 잠자고 생활을 하는 주거 공간과 업무를 처리하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사무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 왕은 낮에는 '궐' 쪽에서 정사를 보고 밤에는 주무시는 '궁' 쪽으로 옮겨 간다. 왕비가 계신 침전이 있는 곳이든 사랑하는 후궁이나 궁녀의 숙소가 있는 곳이든 모두 궁쪽에 모여 있기 때문에 그 속으로 간다. 궁궐 내이지만 왕도 출퇴근을 하는 것이다.
안동김씨의 전횡
안동김씨 세력연장을 위한 철종의 즉위 배경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 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뻘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강화도령-철종 임금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사이의 셋째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 김조순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경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았다.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국구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000호의 여주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주어 구활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작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三政救弊)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서 최제우(崔濟愚) 가 동학(東學)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수용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으며,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하나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1865년(고종 1) 4월 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禧陵)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건립된 동서길이 10칸, 남북길이 4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서쪽에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음 관청리에 위치한 강화성당은 초대 주교인 코프에 의해 1900년에 건립되었다.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목수가 시공하였고 사용된 목재는 백두산 소나무, 기와와 석재는 강화도산이며 제대, 세례대, 축대 등의 공사는 중국인 석공이 맡았다고 한다.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회의 하나로 가톨릭도 아니고, 일반 프로테스탄트도 아니 중간 위치에서 양쪽을 포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영국교회를 모교회로 한다.
성당이 위치한 강화읍 관청리 언덕은 고려중기 몽고군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에 천도하고 내성을 축조한 남쪽 성터의 일부분으로 강화읍 시가지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경사지의 주변대지를 배모양으로 축성하고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하여서 흡사 강화읍과 남산을 향해 항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이고 보다 낮은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에는 초대,제2대, 3대 주교의 기념비가 있다.
내삼문도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인데 서쪽칸이 종각으로 활용되고 있고 종은 우리 식의 종을 주조하였으나 십자가 문양이 돋을새김으로 되어있다.종각 옆에는 높은 쌍둥이 보리수 나무가 심어져 있고, 성당 왼쪽에는 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성당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팔작지붕의 합각 아래 "天主 聖殿"이란 현판이 보인다. 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를 얹었고 용마루 양 끝에는 십자가를 올려놓아 이곳이 성당임을 알려준다. 정면은 쌍여닫이문으로 유리가 끼워져 있으며 기둥에는 창조주와 가르침에 대해 깨우치는 주련을 달아 놓았다.
-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
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시다
- 宣仁宣義聿照拯濟大權衡 -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
삼위일체 천주는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 神化周流츉庶物同胞之樂 -
하느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은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다
-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내부공간은 장방형의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바실리카 양식의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제대 뒷편의 문은 한지를 바른 4분합문이고 사방 고창에 의해 내부공간은 비교적 밝다.
제대 후면 중앙기둥에는 '萬有之原' (하느님을 표현한 것으로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는 창조의 근원이시다)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회중석 왼쪽 뒷면에는 소제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감실이 모셨다. 가톨릭 감실이 24시간 불을 밝히는 것과 달리 이 곳은 불이 없었다. 회중석 오른 편에 있는 말씀을 봉독하는 독서대의 모습이다. 고창은 쌍여닫이로 외부 유리와 내부 한지의 2중창이다. 기둥에는 예수의 수난에서 죽음 부활을 그림으로 나타낸 '14처' 액자가 걸려 있다.
중앙에는 상대적으로 큰 화강석의 세례대가 놓여 있는데 전면에 '重生之泉'(거듭나는 샘물) 뒷면에는 '修己洗心 去惡作善' (몸을 닦고 마음을 씻어내고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행동을 하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 #1
한국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찰스 존 코프는 1890년 제물포에 상륙하자 곧바로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한옥으로 병원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병실도 온돌방이었다고 하지요.
새로운 병원은 성누가병원이라고 명명됐습니다. 하지만 내과전문의 엘리 바 랜디스는 한국과는 관계가 없는 이름이라고 반대했습니다. 한문을 배운 그는 ‘기쁨으로 선행을 베푸는 병원’이라는 뜻으로 낙선시병원(樂善施病院)이라고 따로 써붙였던 것으로 전합니다.
성공회는 기독교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한 현지 문화에 융통성있게 적응하는 것을 선교이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성공회의 토착화 노력은 9년 뒤 강화성당을 한옥으로 지으면서 더욱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게 되지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마크 내피어 트롤로프 신부의 주도로 1899년 가을 터를 닦기 시작하여 1900년 11월 완공되었습니다. 강화성당은 기독교 예배공간에 한국의 전통적 예배공간이었던 불교 사찰의 구조를 과감히 받아들였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높직한 언덕에 자리잡은 강화성당은 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뱃머리에 해당하는 서쪽에 외삼문을 앉혔습니다. 세파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주를 상징하려 했다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로 갈 때 탄다는 불교의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삼문에 들어서면 내삼문이 나타납니다. 이 또한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절집의 구조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삼문은 종루를 겸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영국에서 들여온 종이 1945년 일제에 징발된 뒤 1989년 만들었다는 지금의 종은 당좌(撞座)에 돋을 새김된 십자가가 아니면 절의 범종과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본당이 세로로 앉혀져 있는 것은 큰법당과 가장 큰 차이점일 것입니다. 정면에서는 2층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의 삼각형 합각이 바라보이지요. 다만 내부는 천장이 높은 중앙부 양쪽으로 날개가 달린 바실리카 양식입니다. 로마의 공공건물에서 유래되어 나중에는 기독교 예배공간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지요.
하지만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고 씌어 있는 현판의 작명원리는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큰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이나 아미타부처가 있는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다르지 않습니다.‘삼위일체이신 천주는 만물의 창조자(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와 같은 기둥글(柱聯)도 사찰의 그것과 내용만 다를 뿐 형태는 똑같습니다.
당시 강화도의 조선사람 대부분이 익숙했을 불교 사찰의 분위기는 분명 기독교라는 새로운 서양 문화에 대한 이질감을 크게 줄여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공회의 이런 움직임을 아름답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19세기말 성공회의 해외선교는 복음의 전파보다, 현지의 영국인들을 보호하고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적이 강했다는 시각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비슷한 시기 천주교가 제주에서 고유의 가치체계와 토착종교를 부정하는 특권적인 교세확장으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과는 크게 비교됩니다. 제주에서는 결국 1901년 민란이 일어나는데, 그 과정은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지요.
이제는 형편이 좋아져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를 상대로 해외선교에 나서는 상황에서 강화성당은 ‘약자의 문화’를 어떻게 배려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김상용 순절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7대손 김매순(金邁淳)이 건립하였다. 김상용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으나 청나라 군이 이곳마저 함락하자 남문루(南門樓)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하였다. 김상용은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고,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광해군 때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632년(인조 10) 우의정이 되고 1637년에 순국하였는데, 위패는 충렬사(忠烈祠)에 봉안하였다. 원래 순의비는 옛 남문 터에 있었으나,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사업 때 현재의 위치로 비각(碑閣)을 옮겨 세우던 중 1700년(숙종 26)에 당시 강화유수였던 김상용의 종증손인 김창집(金昌集)이 세운 구비가 발견되어 신·구비를 나란히 세웠다.
김상용순절비 구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세자와 종묘사직을 받들고 원로대신들로 하여금 강화도로 피난을 먼저 보냈다. 인조 자신도 강화도로 피란하려 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항전을 하게 된다. 청군이 1637년에 강화도에 들어오자 김상용은 강화문 남문에 올라 화약 상자를 쌓아놓고 좌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르려 하였으나 모두 물리치고 서손 김수전과 종자 한 명과 함께 담배대에 불을 붙여 화약 상자를 터뜨리고 자결하였다. 그에 앞서 사람들이 "배를 마련하였으니 대피하십시오"라고 권하자 김상용은 "전하께서 적에게 포위당해 계시어 안후를 알 수 없고 종묘사직과 원손께서 모두 여기 계시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죽을 뿐이요. 어찌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요"라고 하며 응하지 않고 스스로 화약을 폭발시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김상용 순절비 신비
이후 그의 죽음을 놓고 이견이 분분하였으나 영조 34년(1758)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러 선비들의 주청으로 정려문이 세워지고 강화 충렬사, 양주 석실서원, 정주 봉명서원, 안변 옥동서원, 상주 서산서원, 정평 모현사에 배향되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河岾面)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支石墓].
1999년 4월 26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고려산(高麗山:436m) 북쪽 봉우리인 시루미산 끝자락 부분의 능선인 하점면 부근리 밭 가운데 있는 사적 제137호인 강화지석묘(江華支石墓)를 중심으로 300m 이내에 있는 고인돌군이다. 하점면 부근리의 고인돌군은 16기(基)의 북방식·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해 있다.
이 가운데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지석묘는 하점면 소재지로 향하는 도로변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밭 가운데에 1기가 독립해 있는 것으로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 고인돌이다. 북방식 고인돌의 구조는 4장의 굄돌로 직사각형 돌방[石室]을 구축하고 그 위에 뚜껑돌[蓋石]을 얹어 놓는 형식으로, 이 고인돌은 돌방의 짧은 변을 이루는 2장의 굄돌이 현재 남아 있지 않는데 과거에 파괴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지석묘는 화강암 계통의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전체 지상 높이 260cm, 길이 710cm, 너비 550cm로 남한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에서 남쪽 약 50m 지점에 강화지석묘와 비슷한 크기의 대형 고인돌로 추정되는 받침돌이 하나 비스듬하게 남아 있고, 북쪽 150m 정도 떨어진 솔밭에는 북방식 2기와 남방식 1기의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 무덤군을 이룬다. 강화고인돌 유적은 2000년 11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인돌의 의미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덩 유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만주,일본, 유럽,북아프리카 등 전세계에 분포한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나 거석(巨石)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로, 중국은 석붕(石棚)·대석개묘(大石蓋墓), 기타 지역에서는 돌멘(Dolmen)·거석(Megalith)등으로 부른다.
시대적으로 보면 우리는 청동기시대에, 일본은 죠몽(繩文) 후기에서 야요이(彌生) 중기까지, 동남아시아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서유럽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 많이 나온다. 인류가 거석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남기게 된 것은 구조물을 축조하기 위한 재료로서 거석을 이용하였다는 점 외에도 거석에는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거석에는 정령이 있으며 이같은 정령에 의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인식하에 거석을 숭배하는 의식이 바탕에 자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거석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 또는 거석을 숭배하는 것을 만물숭배신앙(Animism)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선돌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요소이며 조상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고인돌은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고 거석문화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대인류의 무덤으로서의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것이다.
또한 더러는 자기 영역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강성한 힘을 외부에 표시하는 표석 상징물이기도 하고 더러는 종족이나 집단·사회의 모임장소이기도 하고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선돌(立石), 열석(列石),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墓) 등 다양한 형태로써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고인돌은 다른 어느 민족이나 나라보다 활동전역 전역에 걸쳐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으로써 넓고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한반도에만 하더라도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동강유역과 전남지방에서 가장 밀집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전남지방의 경우 2천2백여곳에서 모두 1만 9천여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으며 대동강 유역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과 황해도 일대에 1만여기가 있다. 또한 전북에서도 고창지역의 1천 2백여기를 포함하여 1천 8백여기에 이른다.
이외 지역에서는 1백 내지 2백여기 아래의 고인돌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유럽 전 지역에서 5만 5천여기가 발굴되었고 그중에서도 순수 고인돌은 수천기에 지나지 않고 동남아에서는 그나마도 수백기에 지나지 않는 점에 비해 보자면 고인돌이 3만여기에 이르는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가장 조밀한 분포권을 보여주는 고인돌의 전시장인 것이다.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자생설, 남방설, 북방설로 갈려 지지만 중심분포지가 우리나라이며, 형식도 다양하면서 북쪽에는 북방식, 남쪽에는 남방식이 많고 고인돌문화의 여러 유물이 대표적으로 발견되고 있기도 하여 고인돌문화의 중심지이자 남방·북방을 아우러는 '고인돌의 나라'임에는 이론이 없다.
고인돌은 단순한 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활용품이나 의례용·장신구 물품, 무기류·농기구 등이 쏟아져 나오는 고인돌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거니와 신석기 시대의 뗀석기(타제석기)·빗살무늬 토기 등에서부터 청동기시대의 동검 등이 다양하게 발굴됨으로써 당시 우리 조상의 사회·경제·문화를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역사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단초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고인돌문화는 생활유적의 범위를 넘어선다. 당시 시대인들에게는 지도자나 지배세력의 힘의 상징이자 영혼의 안식처였다. 싸우다 전사한 용사들을 추모하고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생활중심지나 바다·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에 세워진 고인돌은 당시사람들의 정신적 구심체이자 종교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이었고, 사회질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자연의 거센 힘앞에 여전히 약했던 인간이었던지라 영원불멸의 자연물인 돌을 신앙심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기념물을 축조한 것이기도 하다. 구릉위나 산중턱에 세워진 고인돌은 자기 영토의 표식이나 대외에 힘을 과시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우리 조상은 더러는 수십명이 더러는 수백명이 동원되어 10t에서부터 100t도 넘는 초대형 덮개돌을 옮겨 역사를 만들었다. 아울러 집단을 형성하고 집단끼리 상호 협동체계를 이루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
고인돌의 형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크게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 3종류가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잘 다듬은 판석 3~4매로 짜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상의 돌을 얹는 것으로, 책상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으로도 부른다. 대형 북방식은 요동반도와 한국 대동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세운다.
남방식 고인돌은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로 쌓은 무덤방[墓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碁盤式)으로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 지방에서만 보이며 무덤방은 없는 것이 많다.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을 괴었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구주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는 지석이 없는 남방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고인돌의 무덤방은 돌널형[石棺形]ㆍ 돌덧널형[石槨形]ㆍ 구덩형[土壙形]ㆍ독널형 [饔棺形]이 있으며, 평면은 긴 네모꼴이 대부분이다. 돌널형과 돌덧널형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보이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씩 형태가 다르다. 특히 돌널형은 일본 구주 지역의 지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마니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산.
마리산(摩利山)·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69.4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채화된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種徽)가 지은 《수산집 修山集》에 "참성단의 높이가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차례 개축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 130)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남서쪽 기슭에는 정수사법당(淨水寺法堂:보물 161)이 있고,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臺:인천기념물 29) 1기(基)가 있다.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주변에 문화유적지가 많아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고 있다. 1977년 3월 산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전등사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내에 위치한 전등사는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왕실의 원찰로서 眞宗寺(진종사)라 불리워 왔다. 지금의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으며,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全州)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와 객사(客舍)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摩利山)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보물 178호인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집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華麗精緻(화려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대웅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보물179호인 약사전을 비롯한 10동의 건물과, 11세기 중국 북송때 만들어진 보물393호인 범종, 유형문화재 26호인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 지방문화재인 7호인 대조루와 실록과 王室世譜(왕실세보)를 보관했던 장사각지와 선원보각지, 전설이 서려있는 나녀상,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 우는 나무 등 많은 고목이 있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가는것으로 꼽아야 하겠다.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보물 제 393호인 전등사 범종
중국 송나라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2차 대전때 일본군 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후에 이곳에 옮겨 놓았다. 종의 정상부에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고, 몸통에는 팔괘가 있다.
전등사에 전해지는 유물로 대표적인 것 중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한 중국의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163cm이며 밑 지름이 1m로 종루는 쌍용이 움크리고 있고 음통이 없으며 종 몸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종 몸을 살펴보면 종 몸의 상하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전등사 은행나무
배불숭유(背佛崇儒)의 정책을 폈던 조선에 들어오면서 전국의 사찰은 조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승려는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일에 사역을 나가야 했고, 사찰에서는 제각기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만 했다. 강화도에 있는 전등사에서는 매년 은행을 공물로 바치도록 명령했는데 절 어귀에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서는 열매가 가장 많이 달릴 때에 열가마니 정도 은행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바쳐야 한다고 관아에서 명령해 왔다. 전등사의 주지 스님과 그 밖의 스님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풍년이 들어야 열 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은행을 사드릴 재력도 없었다. 스님들의 걱정은 더 커졌다.
"은행이 많이 수확되도록 염불을 올립시다." 주지스님의 제의에 따라 은행나무 밑에 제단이 차려지고 3일 기도회가 열렸다. 이 소문이 절 아래 마을들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기도제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관가에서도 이 말을 듣고 신기하게 여기며 몇몇 포졸들을 파견했다. 주지 스님의 염불이 한창 진행될 때 포졸 한 놈이 스님에게 모독적인 언사를 했다. 곧 벼락이 치더니 포졸 한 놈이 꼬꾸라졌다.
"이 은행나무에 제발 은행이 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주지스님은 이 은행나무에 향후 천년 만년 은행이 열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을 했다. 그러자 벼락과 뇌성이 울리면서, 은행나무에 달렸던 은행 알은 모조리 떨어지고 기도회를 드리던 제단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그 후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는 은행이 열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족산 가궐지
<고려 고종46(1259) 풍수도참가 백승헌의 진언에 의해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터이다. 당시 백승헌이 낭장으로 있을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를 요구 했을 때 가궐을 짓고 마니산 첨성대에 제사를 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한다. 건물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당시 이 가궐에는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 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 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 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게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 사고는 1930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 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삼랑성
정족산성은 주위가 가파른 절벽으로 천험한 요새다. 성의 시설물로는 문루와 동문, 서문, 북문지가 있다. 또한 성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고구려시대에 창건했다고 전하는 전등사가 있다.
고려 때에는 고종 46년(1259) 5월에 중랑장 벼슬의 白勝賢이 풍수설에 따라 삼랑성 안에다 가궐을 지었다. 조선 중기에 와서는 장사각(정족산 사고)을 지어 실록을 보관케 했고 원보각을 지어 왕실 족보를 보관하였다, 이들 실록과 족보는 병인양요 때에 아군이 잘 막아내어 프랑스군으로부터 약탈을 막았다.
그 뒤 전적과 실록은 서울로 옮겨져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이 밖에 성 안에는 군창과 군기고가 있었다. 삼랑성은 1739년과 1764년 및 조선 말기에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했다. 성의 동문 안에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를 대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양헌수장군을 기리는 승첩비가 있다"삼랑성"은 자연석을 쌓아 만든 석성으로 둘레는 약 2~3km, 높이 2.3m~5.3m에 이르는 규모로 삼국시대 석성 축조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각 중수되었다. 고려시대 때인 1259년에 이 성 안에 임시 궁궐을 지었으며,1660년에는 마니산 사고에 보존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내 사고지에 보관하기도하였다.
삼랑성을 통하는 문은 네 곳에 설치돼 있으며, 문루는 원래 없었으나, 조선 영조 15년(1739년)에 당시 강화유수 권적이 남문에 건립한 문루가 파손되어 1764년 퇴락한 문루를 중수했고 다시 파손된 것을 1976년 宗海樓(종해루)를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정수사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세웠고 조선시대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다시 지었는데,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라 고쳤다고 한다.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상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1957년 보수공사 때 숙종 15년(1689)에 수리하면서 적은 기록을 찾아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5년(1423)에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지만 원래는 툇마루가 없이 앞면과 옆면이 3칸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이것은 앞면 퇴칸이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쪽 창호의 가운데 문은 꽃병에 꽃을 꽂은 듯 화려한 조각을 새겨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강화도 마니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정수사는 639년(선덕왕 8) 회정대사(懷正大師)가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한 다음 이곳의 지세가 불제자의 삼매정수(三昧精修)에 적당하다고 판단되어 정수사(精修寺)를 창건하였다. 그 후 1426년(세종 8) 함허(涵虛)가 절을 중창하면서, 법당 서쪽에서 맑은 샘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절이름을 정수사(淨水寺)로 바꾸었다.
정수사 법당은 1957년 해체·수리 때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1424년에 창건되고, 1588년(선조 21)에 중창, 1689년(숙종 15)에 수리했음이 확인되었다.
정수사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집이다. 정면 툇마루 부분은 후대에 가설된 것으로 보이므로, 본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집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건물의 앞쪽과 뒤쪽 공포가 다른데 앞쪽은 2출목으로 외목도리를 받게 하여 1출목의 전형적인 주심포계 형식에서 벗어나 있지만, 뒤쪽은 1출목으로 조선 초기의 주심포 양식을 보여준다. 즉 기둥 윗몸에서 비교적 긴 헛첨차를 내고, 이 끝에 소로를 놓아 주상에 놓인 살미첨차를 받치고 있는 것이다. 기둥 위에 놓인 주두(柱頭)의 굽면은 고려시대의 주심포식 주두가 곡면(曲面)이었던 것과는 달리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에서와 같이 사면(斜面)으로 끊기고 굽받침도 없다. 또한 소첨차나 대첨차 밑면은 연화두형(蓮花頭形, 雙S字) 조각 없이 초각(草刻)되어 있다.
앞면의 가운데칸에는 꽃병으로부터 피어나는 꽃살무늬가 장식된 분합문(分閤門)이, 좌우협칸에는 넉살무늬의 4분합문이 달려 있다. 건물 내부의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고,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그 주위의 빗천장은 나중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에 보이는 앞퇴는 개목사 원통전이나 성불사, 응진전 등 조선 초기의 건물에서 볼 수 있다.
분오리돈대
조선시대에 축조한 강화 54돈대 중의 하나이다. 강화도의 남쪽 해안 중앙, 현재의 동막해수욕장 동쪽 끝에 있다.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이다. 강화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6) 청성부원군 김석주(金錫胄:1634~1684)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조하였다 한다. 실제로 축성을 지휘한 것은 당시의 강화유수(江華留守)였던 윤이제(尹以濟)이다. 강화돈대는 종래 53돈대로 알려졌으나, 1999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54돈대로 확인되었다.
분오리 돈은 부천(富川)과 초지(草芝)의 외곽포대로서 망월돈(望月墩)·계룡돈 (鷄龍墩)·굴암돈(堀岩墩)·송강돈(松剛墩)·송곶돈(松串墩)과 함께 영문(營門)에 소속되었던 돈대이다. 따라서 영문에서 돈장(墩將)을 따로 두어 수직하게 하였다.
뒷산에서 해안으로 돌출되어 나온 산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하였는데, 좌우로 깊게 만곡(彎曲)된 갯벌을 이룬 포구를 끼고 있어 가시 범위가 매우 넓다. 동쪽으로는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석축함으로써 절벽을 이루고, 지형에 맞추어 석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반월형을 하게 되었다. 포좌는 4문이고 치첩(雉堞)이 37개소이다.
기록에 의하면 방형(方形)으로 둘레 84보라 하였는데, 현재 문루 안 포대둘레는 약 70m이다. 홍예문을 이룬 출입구는 북쪽 반월형의 호와 선이 맞닿는 부분에 있고, 최고높이는 4m, 폭은 12.8m이며, 돈대의 평균높이는 2.62m이다. 구조는 다른 돈대와 마찬가지로 내외를 석축한 협축의 석벽을 이룬다. 현재는 바다로 면한 포대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외벽의 30% 정도를 복원하였다.
동막해변
천혜의 갯벌 품은 강화도 본섬의 유일한 해수욕장. 우리나라 각 시대의 역사가 곳곳에 새겨져 있어 '국토박물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라고 불리는 강화도에서 낙조를 감상하기에 좋은 산은 마니산(468m)을 비롯해 하점면과 양사면의 경계에 솟은 봉천산, 하점면과 내가면의 경계에 솟은 낙조봉, 강화도의 부속섬인 석모도 상봉산과 해명산 등이다.
바닷가 명소로는 강화도 남쪽의 화도면 장화리에서부터 동막리에 이르는 해안도로가 으뜸으로 손꼽을 만하다. 도로변이나 인근 음식점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서도 편안하게 일몰을 감상할 수 있고, 분오리 돈대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석모도에서는 민머루해변이나 장구너머포구가 일몰 감상의 포인트이다. 활처럼 휘어진 해변은 물이 빠지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드러나 조개, 칠게, 고둥, 가무락 등이 다양한 바다 생물들이 많이 잡혀 아이들과 함께 갯벌체험을 즐기기에 아주 좋다. 2002년 강화 남부와 김포를 잇는 초지대교가 개통되면서 해수욕장과 갯벌을 찾는 발길이 잦아졌다. 역사의 섬 강화도 곳곳에는 유적지가 많아 마니산, 전등사, 선수포구 등 다양한 볼거리가 많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병인양요
(1)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금하면서 프랑스 신부들까지 포함하여 수천 명의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병인박해).
(2) 병인박해 때 페롱·리델·깔래 등 3명의 프랑스 신부는 지방에서 몸을 숨겨 살아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중국에 있는 프랑스 관리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는 중국의 톈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도 박해 사실을 알리고, 살아 있는 두 신부를 구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3) 전부터 조선과의 통상을 바라던 프랑스는 병인박해 때의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 하였다. 로즈 제독의 함대는 강화도를 침입하는 한편,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는 침략전을 벌였다(1896년).
(4) 프랑스 군대가 강화성을 점령하고 40여 일 간이나 한강 입구를 차단하여 쌀이 서울로 들어 올 수 없었다. 서울의 백성들은 서양 오랑캐들의 난데없는 공격에 공포감에 휩싸였으며 생활에도 큰 고통을 당하였다.
(5) 흥선 대원군의 서양오랑캐를 무찌르겠다는 굳은 의지와 양헌수가 이끄는 부대의 용감한 전투로 문수 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6) 패배하여 물러가게 된 프랑스 군대는 강화읍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우리 나라 서적과 무기, 금괴·은괴 등 많은 문화재를 마구 가져갔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병인년에 일어난 서양 세력과의 싸움이라 하여 병인양요(1866년)라 한다.
2. 신미양요
(1)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2) 미국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여 왔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쇄국 정책을 실시하던 흥선 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3)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이끄는 중앙군과 강화수비군이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뒤떨어지는 무기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웠다. 광성진과 갑곶 등지에서는 처절하게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고,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광성진에 불을 지른 후 퇴각하였다.
(4) 조선 조정에서는 ‘화의를 말하면 매국의 죄로 다스리겠다.’는 강한 자세로 백성들의 단합을 외치면서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세를 더욱 굳게 하자, 미군도 할 수 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이를 신미년에 있었던 서양 오랑캐의 난리라고 하여 신미양요라 부른다(1871년).
(5) 미국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 대원군의 단호한 쇄국 정책과 조선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6) 아직 봉건적 체제에 머물러 있던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세력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백성들의 국가 수호 의지 때문이었다.
첫댓글 강화도는 역사와 유적이 많기 때문에 공부하고 오면 도움될겁니다. 자료집은 사진, 지도 포함해서 총 29장입니다. 자료집은 버스에서 나눠드리겠습니다.
명수기님 전화 번호 변경이요~~~ 010-4306-8689
조금 바뀌었군요~~~KIN하루
아~ 다두님..오랫만이세요~~~ 푸하하하하~~ 오늘은 무척이나 추웠어요... 감기랑 친구 안하시고 잘 지내고 계시는거지요? 푸하하하하하~~~~
똥구랑땡 전화 번호 변경이요~~~~ 010-8884-5347
많이 바뀌었군요~~~KIN하루
잘 볼 께 요감 사 합 니 다
눈이 시리도록 다 읽어습니다. 올리신 대장님 수고 많이 했습니다. 낼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