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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를 가서 금각사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교토를 다시 방문해야한다는 뜻이 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작년에 교토를 갔을 때는 금각사를 들르지 못했습니다.
교토에서의 일정이 워낙 짧아서이기도 했지만 알고보면 사전 정보를 얻을 때 '금각사를 꼭 들러야 할 곳'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전 여행자들의 비교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심치않게 등장하던 여행자들의 평인 "금각사보다 개인적으로 은각사가 더 좋았습니다."라는 말이 큰 작용을 했었던 것입니다. 실제 제가 만났던 후배도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평들과 함께 여행 동선상에서도 1박 2일의 교토여행이었기에 선택과집중의 과정에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던 순위에서 뒤로 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금각사보다 은각사가 더 좋았어요." 이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평이라는 것을,,,,
금각사를 은각사와 비교를 하다니.....
두 절은 비교 불가인 곳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절의 역사적 유래를 안다면 금각사를 어디 은각사랑 비교를 하는 것인가?....하는 생각마저 들게하던 곳이었습니다.
1397년 <요시미쓰>는 상국사 북쪽 산기슭에 황금빛 찬란한 금각의 북산전을 조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8년에 완공하고 자신의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10년 뒤인 1408년, 요시미쓰가 51세로 세상을 뜨자 북산전은 요시미쓰 아내의 거처가 되었고 10년 뒤 그녀가 죽자 그의 아들인 4대 쇼군이 1420년 몽창국사를 권청, 개산으로 하여 녹원사라는 사찰로 조영한 것이 오늘의 금각사입니다.
이 <요시미쓰>라는 인물이 한마디로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만들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은 왕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을 쥐고 흔드는 것은 장군<쇼군>이었고, 요시미쓰는 바로 쇼군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쇼군이란 장군인데 뭐랄까 왕만 되지 않았을 뿐이지 쿠테타를 일으킨 군인이 왕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만 있게 하고, 모든 권력은 장군(쇼군)이 쥐고 흔드는 방식인 것이 일본 막부시대의 정치 모습인데 쇼군도 왕처럼 대대로 세습이 된 것이 일본입니다.
<무로마치 요시미쓰>라는 인물은 무로마치 3대쇼군으로 1358년에 태어나 11세인 1368년에 막부의 쇼군이 된 인물입니다.
할아버지인 초대 쇼군이 막부를 세운지 30년. 22세때 1379년부터 친정을 시작했고, 안정된 정치력으로 지방의 쇼고 다이묘들을 하나씩 장악하여 좌내신까지 겸했습니다. 그가 머무는 곳은 다이묘들이 바치는 꽃이 사계절을 장식하여 '꽃의 어소'라 불렸을 정도로 지방 다이묘들이 충성을 할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요시미쓰는 1394년 공가의 몫인 태정대신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라 무가와 공가 모두를 통솔하는 정도까지 되었는데 그때 나이 37세 였습니다.
요시미쓰는 38세에 아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며 '꽃의 어소'를 주고 자신이 지낼 처소로 지금의 금각사 땅을 매입했습니다.(그러나 태정대신 자리는 지키며 공가와 무가를 모두 통솔, 어느 역사가는 그가 천황자리까지 넘본것으로 의심하기도 함 -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일본의 쇼군들 중에는 왜 왕을 제거하고 친히 왕이 된 쇼군은 없었는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함.)
금각사는 원래 서원사가라는 가마쿠라시대 귀족의 별장겸 씨사였던 곳이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몰락과 함께 쇠퇴로 서원사가 별장과 사찰은 황폐해 버려진 서원사가 터를 1397년 매입하여 새 별저로 조영한 것이 오늘의 금각사입니다.
북산전은 어느 저택보다도 권세를 자랑하는 화려한 저택으로 지어졌습니다.
요시미쓰는 독창적인 작정 솜씨를 발휘하여,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멋진 정원석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섬과 연못가에 있어 '호소카의 석'등 다이묘의 이름을 따서 불리고 있습니다.
이 건립에 막대한 자금은 명나라에 보낸 무역선을 통해서 였습니다.
명나라에 무역선을 보내서 무역을 하게 되면 품목에 따라 5배에서 20배의 수익을 얻는 자금 마련 수단이었는데 그런 무역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건축비용을 충당한 것이었습니다.
중국과 교역하는 무역선은 이미 천룡사, 동복사, 상국사를 지을때 자금조성을 위해 했던 일인데 요시미쓰는 아예 국가간의 관무역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이를 위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1368년 몽골인들이 북방초원으로 쫓겨나고 명나라가 건국되자 일본에게 왜구 문제 처리와 함께 조선처럼 황제와 왕의 관계라는 책봉 체계에 들어올 것을 요구했습니다.
요시미쓰는 과감히 이에 응해 1401년 명나라 황제에게 상표문을 올려 황제를 받드는 예를 보였고, 이에 명나라는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 그를 일본국왕에 임명한다는 책봉문과 함께 거북이 손잡이가 달린 금인을 내려주었습니다.
황제는 옥새 , 주변국 국왕은 금인을 사용하는 의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 때 요시미쓰는 새로 지은 북산전 금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습니다.
이를 두고 메이지시대 일본의 황국사관론자들은 이런 태도를 굴욕적이라고 비판했는데.
그러나 여기서 일본 국왕이라고 한 것은 일본 덴노(천황)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것.
그의 공식 직함인 태정대신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들에게 물려준 쇼군이라는 직위를 빌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관직엔 없으니 국제적으로는 통용될 수 있는 일본국왕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대외적으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요시미쓰는 일본의 덴노(천황)은 명목상 중국의 황제와 동격이라는 명분과 함께 외교권은 덴노(천황)이 아니라 무가가 갖는다는 실리도 챙겼고. 이후 일본의 외교권은 언제나 막부가 쥐게 되었습니다.(쇼군자리에서도 물러난 상태에서 이를 받아들였으니 굴욕적이지 않다는 용의주도함이랄까....)
이런 일본여행 수기를 올릴 때 '천황'이라는 단어를 쓰면 입에 거품 물고 달려드는 댓글러들이 있더라구요.
아마 일제 강점기때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받다보니 천황이란 단어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어 그러는 것이야 충분히 이해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본을 가장 싫어하고 또 가장 우습게 보는 나라이죠.
대한제국을 강탈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정책을 펴고, 과거의 죄악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기는 커녕 아직도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받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독도 분쟁에 휘말리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아직 우리에게 일본을 누를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 국민은 친절한거 맞습니다. 그러나 국민성 자체가 강한 민족에게 약하고 약한 민족에게는 강한 국민성을 갖고 있죠. 아무래도 사무라이 문화가 1천년 이어져 내려오다보니 무술에 강한 사람에게 강한체 하다가는 칼맞아 죽으니 상대가 강하면 고개 딱 꺽고 머리를 조아려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오랜세월 살아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일본에 대한 감정이 한국사람으로 좋을 수가 없는 것은 한국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일것입니다.
이런 저런 역사적 관계들을 생각할 때 일본인들의 행태가 이쁘지 않은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시대가 아니라 이전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나오는 그저 단어로서의 '천황'이란 단어는 그럴 일이 아니라서 유홍준 작가님도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역사속 인물을 이야기 할때 당연히 천황이라는 단어를 붙여 썼습니다. 그래야 쇼군과 구분이 된다는 점도 있고, '천황'이라는 단어를 쓴다하여 그게 무슨 친일을 하는것도 아니라서 그랬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 사실이나 의미도 모르는 일부 몰지각하고 무식한 댓글러들이 "천황이란 단어를 바꿔주세요" "일왕이라고 불러 주는 것만도 다행이네요" 등등. 심지어는 "친일파세요? " "쪽발이세요?" 까지 하는 댓글러까지 있던데......
그런 사람은 아마 일제 강점기 시대상을 이야기 하면서 그 시대 조선인이 당했던 굴욕을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했던 천황이란 단어는 쓰지도 말자 "일왕"으로 쓰자고 누군가가 주장하는 글을 읽고 그것을 자기 의견화 해서 그런건가 싶기도 하고,,
왜 그런 단어들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게 되었는가를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니..
바로..
1401년에 있었던 바로 이 역사적 사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개인적으로 가져봅니다.
중국에서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강력해진 힘으로 조선에게 황제와 왕이라는 책봉을 요구했고, 일본에게도 요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황제이고 조선은 왕으로 책봉, 1401년에 요시미쓰도 받아들였죠.(물론 그는 일본의 왕이 아니었고, 쇼군도 아들에게 물려준 뒤라 쇼군도 아닌 상태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의 왕도 중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왕으로 책봉받았으니 일본 너희들도 천황이라고 하지말고 중국황제가 내려준 일본국 왕이라고 불러야지 천황은 뭐 말라비틀어진 천황이냐?"
그 댓글러들은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인건지.......??????????
14세기때 명나라 압력으로 중국은 황제, 조선은 왕으로 책봉된후 반금친명 정책을 쓰다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이 1636년 10만대군으로 칩입햤습니다.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패하여 청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인조가 삼배하고 무릅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아홉 번 소리나게 부딛치며 이마에 피가 흥건하게 나올 정도의 치욕을 겪으며 군신관계를 맺었던 병자호란이 있었죠.
우리가 중국에게 이렇게 당하면서 왕이라 불렀으니 일본 너희들도 천황이 아니라 왕이라고 써야하한다는 그런 이야기인 걸까요?
덴노가 한문으로 천황이라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그렇게 써왔는데 지네들 왕을 그렇게 불렀으니 그저 고유명사로 쓰이는 단어일 뿐이지 존경의 의미로 쓰는 것도 아닐진대 그게 그렇게 입에 거품물고 "단어를 바꿔라", "친일파냐", "쪽발이냐"까지..하면서 비난할 일인건지.....
왜 그렇게 써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누군가 그리 주장을 하니 그게 맞는 것같고 그렇게 주장해야 대단한 역사관을 가진 사람처럼 보여서 혼자만 애국자인척 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각설하고..(그래서 제가 쓰는 방법은 그냥 일본은 자기네들 왕을 일본어로 '덴노'라고 부르니 그냥 '덴노'라는 단어를 택해서 씁니다.)
요시미쓰는 북산전에서 정무를 보면서 덴노를 초대하여 21일간 연회를 열기도 하고, 명나라 사신을 맞기도 하고, 승려 1천명이 10일간 법화경을 독송하는 법화경 1만부 독송을 행하기도 한 곳이었습니다. 요시미쓰가 덴노(천황)을 북산전으로 초대하면서 그 화려하게 지어 놓은 곳은 보여주면서 얼마나 으시댔을까요...속 마음으로는 본인이 덴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려 하지 않았을까...
공가 무가 불가의 명사들과 렌가를 짓고 차를 마시고 시를 지으며 중국에서 들여온 도자기와 회화를 감상하기도 했고, 그것이 북산문화의 구체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시미쓰는 1408년 51세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북산전은 요시미쓰 아내의 거처가 된 후 10년 뒤 그녀가 죽자 그의 아들인 4대 쇼군이 1420년 몽창국사를 권청, 개산으로 하여 녹원사라는 사찰로 조영한 것이 오늘의 금각사인 것입니다. 녹원은 요시미쓰의 법호였답니다.
1층은 침전조 양식으로 어소 건물에 영향, 요시미쓰의 초상조각과 보관석가여래상이 모셔져 있음..
2층은 조음동이라는 이름으로 관음과 사천왕이 모셔져 있음. (무가사회에 새롭게 생기기 시작한 서원조 양식)
3층은 선종 양식으로 실내 한가운데 사리함이 모셔져 있고 구결정이라고 부름.
공가, 무가, 불가의 만남이 이루어진 금각사를 북산문화의 상징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요시미쓰 시대의 문화를 북산문화라고 하는데 이 북산 문화가 꽃피울 당시에 일본 승려들은 지식과 높은 교양의 인텔리로 명과 조선의 외교문서 작성등 풍부한 문예활동을 했고, 여기에 왕실 귀족의 문화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이른바 공가(公家 구게)라고 합니다.
공가는 정치적 지배력은 미약했지만 그 권위와 품위에는 무가들이 따를 수 없는 그 무엇이 당연히 있었습니다.
특히 무가가 가마쿠라라는 먼 지방에서 따로 놀 때도 공가는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권위와 품위를 지켰다죠.
비록 권력은 무가가 쥐고 흔들었지만 왕의 문화 즉 공가의 권위와 품위는 늘 존재했던 겁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공가문화의 그 품위와 우아함을 배우고 흡수 했습니다. 막부중심의 무가문화, 선승들의 불가문화, 왕실들과 귀족들의 공가문화가 어루러지면서 문화의 쫓을 피운 것이 북산문화의 내용입니다.
금각사 금각의 3층 누각은 바로 이 북산문화를 잘 말해주는데 1층은 공가의 침전조 양식이고, 2층은 무가의 서원조 양식, 3층은 불가의 선종 양식입니다. 건물안에 공가, 무가, 불가의 양식이 어울어지게 만들 건물이라는 것이죠.
1467년 오닌의 난 때도 사리전만은 화마를 입지않고 건재 그후 500년을 잘 버텨왔는데
1950년 7월 2일 새벽, 금각사의 21세 학승인 '하야시 쇼켄'의 방화로 전소되었습니다. 이 때 금각 사리전 안에 있던 요시미쓰의 목조각상(당시 국보)관음보살상, 아미타여래상등 6점의 문화재도 소실 되었습니다,
'하야시 소켄'은 뒷산에서 할복자살을 시도했으나 응급조치로 살아났고,
그는 사찰이 관광객의 참관료로 운영되고 승려보다 사무관이 판을 치는등 사찰의 존재방식이 속물주의에 빠진 것에 염증을 느껴 반발심으로 방화했다고 자백했었습니다.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복역중 1956년 정신 분열증과 결핵으로 죽었죠.
그 후 모금 3천만 엔을 모아 재건에 착수. 다행히 메이지시대 대대적인 수리도면이 남아 있어 원형에 더 충실할 수 있었고,
소실때 모습이 아니라 창건 때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바로 이 금각건물인 겁니다.
군데 군데 금박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986년 문화재청이 7억 4천만 엔의 거금을 들여 금박 전체를 다시 붙여 수복 공사를 시행하여 1년 8개월 만인 1987년 10월에 완공. 이 때 사용한 순금은 20kg. 가로세로 10센티미터의 금박 20만 장을 접착력이 강한 옷칠로 붙여 만들었답니다.
제가 감동한 것은 요시미쓰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딱 이런 모습의 건물에서 지내면서 생활했다는 건데 이 건물이 눈으로만 보는 감상용이어야 할것 같은 곳에서 ,,,,,,,,,,,,
그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금각사 입구인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면 쭉 펼쳐지는 금각사 전경은 눈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의 풍경이었습니다.
보통 오래전 유적이 불타거나 허물어져 다시 지어진 것을 보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 것같아 별로 볼 맛이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인데 이 금각사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시미쓰가 살아 있을 당시의 원형으로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반가웠던 곳이었습니다.
그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었던가를 이 건물 하나로 이야기 해주는 듯 해서 였습니다.
화려한 건물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이 입체적으로 이 건물하나가 다 말해주는 듯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시미쓰는 이 화려한 건물에서 종무를 보면서 그는 "공가, 무가, 불가는 모두 다 내 밑인거야" 라는 ,,,,,"이 세상에 내가 최고인거야"라는 생각으로 머물지 않았을까......
요시미쓰는 천황자리까지 노렸을것이라고 의심 받았던 사람이니 오죽했을까요.
그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건물을 지어 생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하는 곳이었습니다.
금으로 입힌 건물에서 생활할 생각을 하다니요. 이 안에서 거주하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다 대단한 존재인 것이라고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요.
금각사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경호지와 함께 펼쳐지는 광경은 참으로 멋집니다.
금각의 환상적인 구조에 대해 유홍준 작가님은 이렇게 표현을 하셨네요.
"금각은 금빛 찬란함 때문에 대단히 화려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그 형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벽면의 창살, 난간의 기둥, 층층이 이어지는 지붕의 선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아주 간결하여 날렵해 보인다. 그리고 지붕 꼭대기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 한 마리가 곧 날아오를 듯 날개짓하며 상승감을 붇돋아준다.
그런 경쾌한 느낌이라면 건물이 가벼워 보일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3층 누각 건물이 통째로 그림자 지면서 수면 아래위로 대칭을 이루고, 가볍게 일렁이는 물결에 그림자가 흔들리며 환상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름이 경호지, 즉 거울 못이라고 한다.
구조를 보아 일본의 누각은 대개 2층인데 금각은 3층이다. 짝수의 연속감이 아니라 홀수의 안정감이 있다. 1,2,3층의 체감률을 보면 1층과 2층은 높이와 폭이 똑같고 3층만 급격히 좁혀져 건물 몸체의 폭이 반으로 줄어 들었다.
이런 구조를 도면으로 그려놓고 보면 언밸런스한 체감률이라고 하겠지만 1층은 금박을 입히지 않고 목재의 검붉은 빛을 그대로 남겨두어 마치 2층 건물의 기단부 같은 느낌을 주고, 3층은 넓은 난간을 사방으로 두르고 있어 다양한 구성이 미묘한 변화의 아름다움을 일으키며 비례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직 절묘한 디자인이라는 찬사가 나올 뿐이다."
경호지는 장수를 상징하는 학섬 거북섬, 부처님 세계를 상징하는 수미산 바위, 그리고 추상적인 형태미를 보여주는 중국의 유명한 정원석이 태호 괴석등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작은 못쪽은 인부들이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는 없었을테고 지금처럼 후대들이 이렇게 볼 수 있도록 늘 유지 보수를 위한 노력들을 해왔을것 같습니다.
석가정이라는 노지 다실은 17세기 세로 지은 것입니다.
석가정이라는 이름은 저녁에 여기서 바라보는 금각이 아름다워 저녁 '석'에 아름다울 '가'자를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부동당은 서원사 시절부터 있던 유적. 가마쿠라 시대에 조성된 부동명왕이 모셔져 있습니다. 비불로 봉인되어 정해진 날짜에 며칠만 공개한다는데 오늘 부동당에서 무슨 행사가 있나봅니다.
요시미쓰가 이곳에 머물던 시절에도 이런 백조 몇마리쯤은 경호지에 이렇게 유유히 헤엄치며 놓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게하는 장면입니다.
연못 중간에는 섬을 이렇게 다리로 연결해 놓고 그 안아 작은 신사를 지어 놓았습니다.
금각사는 한마디로 멋진 곳이었습니다.
연못과 어울어진 산책로도 좋고..
건물과 어울어진 주변 경관이야 말할 것도 없고..
탁 트인 경관과 어울어진 금각은 명성이 자자 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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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첫댓글 우와
대단한 열정이세요
최고입니다
간사이 지방 여행하면서 주제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 17군데 돌아보기'로 잡고 여행을 했는데
주로 오래된 절 이나 신사인데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고 가면 그냥 '오래된 건물인가보네' 하는 정도일뿐 감흥이 덜할 것 같아 여행가기전 일본 역사 공부좀 할겸 DVD도 보고 책도 몇권 읽고 갔답니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여행 가기전 많은 준비를 해서 가는 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