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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베를린 전투(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5월 소련군이 독일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킨 전투이다. 제3제국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자살했고 히틀러에 의해 후임 대통령에 임명된 해군 원수 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하는 플렌스부르크의 독일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
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했고, 이에 따라 독일군은 벨로루시에서 철퇴하여 비스와 강을 경계로 소련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진 소련군의 남부 공세 때문에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물러났고, 이때 독소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와 핀란드는 소련과 강화를 맺고 소련군 측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공격하였다(라플란드 전쟁). 이러한 동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접근했다.
소련군은 1944년 가을을 끝으로 공세를 중지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 이후의 반격 작전과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강박감에 의해 공세종말점을 억지로 넘어가면서까지 진격을 고수하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에 역습당해 참패하고 탈환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전훈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이것을 가지고 전세를 오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동부에서는 우리 독일군이 소련군을 패퇴시켰음. 그러니까 서부에서만 영미군을 패퇴시키면 독일은 다시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 문제로 진격이 둔화된 서부의 영미 연합군에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는 독일군의 최후의 공세였다.
이것은 상당히 도박적인 작전이었는데 당시 기갑 웨이브로 무자비한 파상 공세를 펴던 소련군에 맞서고 있던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 부대를 빼내어 투입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전선의 총책임자였던 총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항의했다. 심지어 아르덴 대공세가 실시되기 전에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마저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슈페어는 일반인이라 군사적인 것은 잘 몰랐지만 동부전선은 중요했는데 히틀러의 전략은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하고 서부전선에 올인한 셈이며 이게 성공했다면 제3제국의 수명이 조금은 더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도 없었고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인 독일군은 참패했고 공세가 실패한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이미 붕괴된 동부전선에 더욱 더 거대한 전력 공백을 초래했다.
한편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는 한편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서방 연합군의 피해도 적진 않았지만 소련과 붉은 군대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수준이었고 서방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전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더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에 따라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의 몫이 되었다. 독일 서부를 순조롭게 진격하던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엘베 강 인근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이것이 유럽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이후 젤로 고지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문서 참조.
(베를린의 국민척탄병과 국민돌격대의 최고 총사령관이자 제3제국의 수장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
병력 대부분이 소년과 중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즈음엔 독일 전역에서 젊은 남성들이 거의 전부 동원된 상태라 징병 연령이 15~60세라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3개월 간의 대규모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4월, 스탈린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등 전선군 사령관들을 모스크바로 소집해 베를린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사령관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베를린 공략을 맡고 싶어했지만, 스탈린은 특정 사령관에게 베를린 공략을 맡긴다고 하지 않고 그냥 "베를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전선군이 베를린 공략을 맡을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전선군 사령관들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들의 사령부로 돌아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이 경쟁에 이길 생각만 했다.
베를린 주위에 포진한 소련군은 3개 전선군으로 구성되었고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투기 7,500대, 각종 화포 40,000문 등 거대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3:1 ~ 4:1의 전력 차이가 나고 있었고, 그나마 저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병자, 지상전투에 숙달이 덜 된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에서 차출한 병력, 그보다도 못한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소련군에 숫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에서도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 연합군이 담당한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이 베를린 방면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렸다가 동부전선으로 복귀시키는 힘든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베를린 전투에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 사진 속 포로 대다수가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 장병들이다. 1,000여명의 해군을 포함해 꽤 많은 수의 해공군 인원들이 방어 전투에 육전대로 투입되었다.)
젤로 고지 전투
(젤로 고지를 돌파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T-34/85 중형전차)
사령부에 돌아온 원수들은 서둘러 공세를 준비하였고, 4월 16일 북에서 남으로 제2벨라루스(로코솝스키), 제1벨라루스(주코프), 제1우크라이나(코네프) 전선군들은 일제히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작전들을 통틀어 '오데르-나이세 작전'이라고 한다.
북쪽의 로코소프스키 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25일 제틴을 탈취하고, 베를린의 동북쪽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의 코네프 군은 독일의 쇠르너 군을 쉽게 돌파하고 4월 25일 동진하던 미군과 엘베 강 연안의 레크비츠(Leckwitz)에서 조우했다. 이로서 독일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로코솝스키 군도 영국군과 엘베강 연안에서 만났다.
(다리를 건너는 미군을 소련군이 도와주는 이 사진은 선전용 사진이다.)
(엘베 강에서의 미군과 소련군. 서로 헬멧과 모자를 바꿔 썼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소련군)
문제는 전선 중앙에 있던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군이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점 작전에서 패주한 후 젤로 고지로 후퇴하여 포진하고 있던 독일의 비스툴라 부대였다. 이 부대는 독소전쟁 초반부터 수비의 달인이라고 알려져 있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3월 말에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지휘하고 있었으며, 병력 수는 소련군이 거의 10:1로 압도적이었으나 지형 면에서는 소련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쉬웠던 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이 훨씬 유리하였다.
하인리치는 공병 부대를 투입해 오데르 강의 연안의 저수지를 역류시켜 진격로를 습지로 만들어 놓았고, 이 뒤로 참호와 벙커, 대전차호로 이루어진 세 겹의 방어선을 만들어 놓고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조성된 인공적인 습지뿐만 아니라 봄철의 해빙까지 겹쳐 도로가 진창이 되는 바람에 소련군의 진격은 한층 어려워졌다. 하지만 주코프는 누구보다 베를린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한 진격으로 이를 돌파하려고 하였다.
4월 16일에 소련군은 카츄샤 다연장로켓을 시작으로 10,000문이 넘는 각종 야포로 맹포격을 한 뒤 젤로 고지로 쳐들어갔지만, 습지 때문에 진격이 지체되었다.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심하게 느려지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무, 왜 이렇게 느립니까? 코네프 동무가 대신 베를린 가도 됩니까?"이라고 닦달했다. 주코프는 이 말을 들고 더욱 조급해져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예비 병력까지 투입하는 오판을 저질렀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를 하거나 조금만 기다렸다가 먼저 적진을 돌파한 다른 전선군의 도움을 받았으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곳에서 결국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 때문에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사망자가 1만 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적어도 3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병력 차이가 10:1인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이렇게 적군보다 더 큰 피해를 낸 것은 명백한 지휘 부실이며 주코프의 흑역사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거둔 마지막 승리다.
그러나 병력이 워낙 열세인 데다가 보급과 증원도 거의 없었던 독일군은 더 이상 소련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소련군은 3일 간의 맹공과 큰 희생 끝에 결국 이곳을 가까스로 돌파하여 주코프가 베를린 공략의 주공을 맡게 되었다.
포위되는 베를린
(베를린 근교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하는 독일군)
(베를린 시내에서 중심지를 향해 포격을 하는 소련군)
4월 21일 젤로 고지를 돌파한 주코프 지휘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 휘하 포병은 드디어 베를린을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 숫자는 서방 연합군의 폭격기가 대전기 내내 베를린에 투하한 폭탄보다도 더 많았다. 제1벨라루스 전선군이 동쪽에서 베를린으로 전진하는 동안 코네프 지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베를린의 남방을 우회하여 서진하였다. 주코프 군의 북쪽에서는 로코솝스키 원수의 제2벨로루시 전선군이 베를린 북쪽을 우회하여 베를린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베를린 근교에서 포격을 하는 소련군)
독일 중앙 집단군을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쇠르너는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바우첸에서 다시 선빵을 날려 코네프 군을 저지하려 했다. 쇠르너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히틀러는 이것을 보고 여기서 더욱 더 대담한 계획의 명령을 내려서 주코프 군까지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미 그럴 만한 역량이 없었고 그런 무모한 작전을 벌이다가는 소련군에게 포위 섬멸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런 상황을 보다못한 하인리치는 히틀러의 부관들에게 직언을 하여 이를 막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오데르 강변에 있던 부셰의 9군은 후퇴를 요청했지만 전선을 유지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결국 고립된다. 여기에 [코 방면의 쇠르너가 말빨로만 히틀러를 안심시키고 측면에서 소련군을 한방 먹인다고 허풍을 친 것도 히틀러의 오판을 도왔다. 한편 엘베강서 미군과 대치 중이던 벵크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무장친위대 장군인 펠릭스 슈타이너 대장에게 새로운 부대를 창설해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병력과 물자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허세에 불과했고, 히틀러는 제대로 보고도 받지 않은 채 이 부대가 이미 편제를 완료했다고 판단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슈타이너에게는 그 때까지도 한 줌밖에 안 되던 병력 밖에 없었고, 사방팔방으로 밀려드는 소련군에 맞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호헨리헨에 짱박혀 있던 하인리히 힘러는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무장친위대 병력 15,000~2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4월 23일에 열린 작전 회의에서 슈타이너가 공격하지 않았던 걸 알고 욕을 퍼부으면서 직접 헤르만 페겔라인을 파견한다. 참모진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슈타이너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도 되지 않았고 공격도 당연히 실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24일에도 슈타이너가 공격에 나서지 않자 히틀러는 "나는 전쟁에서 졌다!"고 소리쳤고, 탈출하느니 차라리 자살할 것이라 말했다.
('베를린은 독일에 남아있을 것이다' 표어와 그것을 비웃듯 지나가는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
이 와중에도 소련군의 각 전선군들은 베를린 포위 작전을 계속하였고 4월 23일에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을 최후의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4월 24일 주코프 군과 코네프 군이 베를린 남쪽에서 만나게 되자 이제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고, 이제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게다가 소련군의 포위를 저지해 보려던 쇠르너의 선빵은 소련군의 역습을 받아 박살났고, 이로써 베를린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그리고 4월 30일 히틀러는 권총 자살했다.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국민돌격대원들)
독일군은 사용 가능한 모든 장비를 다 동원했지만 제대로 된게 있을 턱이 없었고 급히 모은 국민돌격대에게 지급해 줄 소총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들에겐 그나마 수량이 좀 많았던 판처파우스트만이 지급되었다. 판처파우스트를 지급받은 인원들은 사진처럼 구덩이나 건물에 숨어있다 접근한 소련군에게 기습적으로 발사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이 때문에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군 전차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
베를린 시민들도 나치 독일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 정부는 병사들 사이에 퍼진 패배 의식을 막는답시고 민간인과 군인을 가릴 것 없이 패배주의자라며 거리에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남발했다. (전자인 민간인은 독일 드라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일행인 그레타가 술집에서 병사들에게 한마디 했다가 바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으로 묘사되었고 후자인 군인은 퓨리(영화)와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 묘사되어 나온다. 다운폴에선 아예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도 다 끝나갈 때조차도 민간인을 처형하는 그라이프 코만도(Greifkommando)가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