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좋은 아침]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는
단 한 그루의 보호수
단 한 사람의 손길
단 한 마리의 추격
단 한 가지의 진실
단 한 마디의 거리
단 한 계절의 온기
단 한 시절의 패배
단 한 소절의 의미
단 한 자리의 물길
단 한 가닥의 변명
단 한 번의 장난
단 한 권의 자살
단 한 짝의 마음
남아도는 실마리가 없어서
우리는 뜻 모를 병명으로 떠돌고 있었습니다.
(후략)
―이기리(1994∼)
누군가로부터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때의 시간은 거리다. 당신과 나 사이, 우리 ‘사이’의 지면을 널찍이 펼쳐 이별을 유예하자는 말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이 보이지 않게, 마음이 보이지 않게 서로에게서 멀어져 보자는 말이다. 이별은 잠시 미뤄졌을 뿐 오고 있다.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로, 언제라도 무성해질 수 있는 이별 한 톨이 심어져 있는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이기리 시인은 시간을 가지자는 말이 ‘변성기’처럼 온다고 한다. 원래의 목소리와 앞으로 지니게 될 목소리 사이, 울퉁불퉁한 시간처럼 불안정하게 나올 목소리! 이별을 앞둔 연인들은 이 목소리를 통과해야 한다.
이별이 도사리고 있는 그 초원은 “비좁”기 때문에 단 하나의 무엇만을 지니고 있다.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사랑과 이별 사이, 연인들이 나눠 가질 수 있는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고루 보인다. 보호수, 손길, 추격, 진실, 거리, 온기, 패배…. 이것을 세는 단위가 기이해서 아름답다. 단 한 권의 자살이라니! 사랑으로 얻은 “뜻 모를 병명”들이 서늘하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이기리(1994∼)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 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 너, 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선생님에게 장래 희망을 말했다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진흙이 지구처럼 묻은
검은 모서리를 가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2020 제39회 김수영문학상 대표 당선작
제목이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웃음’은 누구의 웃음일까? 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시 속에서 웃음은 대체로 폭력과 조롱의 상황에서 등장한다. 친구들이 신체를 희롱하며 웃고, 교실에서 집단적으로 야유하며 웃고,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폭력이 웃음과 결합한다. 즉, 이 웃음은 따뜻하거나 순수한 웃음이 아니라, 폭력과 결탁된 웃음인 셈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그 웃음’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는 폭력에 노출된 아이가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며, 그 웃음을 ‘낯설게’ 끌어안아 새로운 웃음으로 바꾸려는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시의 전반부가 직접적 폭력과 조롱이라면, 중반부인 ‘불 꺼진 화장실~’부터는 불안이 환각적 이미지로 증폭된다. 고통이 단순히 회상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어가 만들어낸 초현실적 장면으로 바뀐다. 여기서부터 고통이 ‘언어 실험’으로 변환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는데 후반부인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부터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이동한다.
폭력의 구체적 묘사는 사라지고, 우주적 이미지, 다른 세계의 노래 같은 추상적·상상적 언어가 펼쳐진다. 이는 고통의 기억을 끌어안되,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인데. 그래서 이 시를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폭력의 공유·모방에서 → 환각적 이미지 변환(화장실 장면) → 우주적 확장(다른 행성의 노래)으로 이어지면서 ‘고통’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언어실험으로 전환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형만 시인)
✺어제오늘/ 이기리(1994∼)
좋아하는날씨 속에서
잠들고 싶었다
커피를 마시다가
거실 바닥에 컵을 내려놓고
소파에 누우면
컵 모양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물 자국이
바닥에 고여 있었다
가만두거나 맨발로 밟거나 휴지로 닦아도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화장실에서 무슨 대폭발이 일어나듯
쿵, 거대한 소리를 내며 욕조에 떨어진 샤워기
그것을 불쌍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으므로
벽에 오래 걸려 있을 거란 믿음 자체가 없었으므로
몸은 언제나 역겨움의 결정체였다
마땅한 결과였다
흐르는 몇 년 속에서
죽고 싶었다
죽을 결심을 하다
아무에게나 따귀를 맞아 깨어나고 싶었다
봄날을 거역하는 속도로
느닷없이
차분히
세수할 때는
저절로 눈을 감게 되고
숨을 참고
이 얼굴을 씻는 물은 조용하게 모여
어느 아름다운 시절로 유유히 흘러 찰랑일 것이다
전화기와 액자, 다이어리, 그리고
늦은 들판에서 눈을 씻지 못하는 양들의 발에도
식별 불가능한 지문이 묻어 있겠지만
한낮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소파에 옆모습을 흘린 채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문학과지성사, 2022. 중에서
✵이기리(1994∼)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20년 제 39회 김수영문학상을 비등단작가 최초로 수상하게 되었다. 그해 민음사에서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를, 2022년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를 출간했다. 2021년 부터 노애드에서 영화 에세이를 연재 중이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동아일보 2026년 08월 29일(토),〈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시인)〉》,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