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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베를린 전투(1945년)
하켄크로이츠가 추락하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독일군 시신이다. 소련에서 촬영, 합성한 선전사진이다.)
(Sd.kfz 250에 끼어 죽어있는 독일 민간인, 베를린 전투의 중요한 사진으로 취급된다.)
(나치 독일의 상징인 독수리를 밟고 올라선 소련군)
(베를린 시내로 진입하는 소련군의 T-34/76 전차)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 중인 소련군)
(강 건너를 주시하는 소련군)
독일군은 계속 저항했다. 항복을 택하기엔 너무 늦었다.
(포로가 된 독일 국민척탄병)
아돌프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의 탈출 요청도 거부하고 자신은 베를린에서 죽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버텼다. 또한 좀 더 많은 병력과 주민들을 보존하기 위해 후퇴해야 한다는 측근들이나 현장에 나간 지휘관들의 말을 무시하고, 모든 독일인들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에 항명하는 지휘관들은 모두 해임되었다. 연이은 패배에 히틀러는 후퇴의 후자만 나와도 병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
(건물에 사격하는 소련군의 SU-76 경자주포)
(베를린의 소련군)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IS-2 중전차)
한소련군은 베를린에 본격적으로 진입해 소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최후까지 처절하게 저항하며 싸웠지만, 소련군의 물량 공세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물 하나하나를 청소하면서 느리긴 했지만 계속 진격하기 시작했고 독일군은 점점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티어가르텐 중앙으로 몰리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칼 되니츠에게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총리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 달라고 했다가 찍혀서 이미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도 총통 몰래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어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그녀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 자살 직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측근들에 의해 화장되었다.
총통 벙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군은 계속 중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4월 30일에 나치 독일의 심장이자 베를린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도달하였다. 총통 벙커가 있는 총통 관저도 제국의사당에서 가까운 곳 지하에 있었다. 제국의사당 구역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무장친위대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였다. 이들은 몇 안되는 티거 2, 3호 돌격포, 4호 전차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벌였다. 제국의사당 내부는 이 사단의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육박해 오는 엄청난 수의 소련군에 맞서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제국의사당을 방어했다.
(종전 직후 촬영된 동물원 대공포탑, 사진으로만 봐도 매우 튼튼하게 생겼다.)
사실 일개 건물에 불과한 제국의사당이 이렇게 의외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의사당 내부와 주변의 병력들이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티어가르텐을 사이에 두고 불과 2km 떨어진 베를린 동물원 자리의 일명 '동물원 대공포탑(Zoo flak tower)'의 화력 지원도 컸다. 이 대공포탑은 독일군 최강의 대공포였던 12,8cm FlaK 2연장 4정(총 8문)과 많은 중·소구경 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의 대구경 대공포가 다 그랬듯이 12,8cm FlaK 또한 여차하면 대지 사격이 가능했는데, 어떤 소련군 전차든 종류나 각도를 막론하고 2~3km 내에서 한방에 고철로 만들 수 있었다. 방어력 또한 강화 철근 콘크리트로 벽/천장 두께만 2.4m/1.5m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진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소련군이 실전에서 사용했던 가장 화력이 강한 곡사포 203mm B-4로도 흠집조차 낼 수가 없었다.
베를린이 거의 다 점령된 상태에서도 소련군은 이 요새의 사각을 피해 다녀야 했는데 제국의사당은 그 사각에 고스란히 들어올 뿐더러 사이에 있는 티어가르텐(공원)이 상태여서 은·엄폐가 될 리가 없었으므로, 대공포탑이 건재한 이상 제국의사당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끝내 파괴는 못하고 4월 30일에 소련군이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으며, 대공포탑이 항복하자마자 제국의사당이 함락되었다. 이후 1948년 이 대공포탑을 영국군이 폭파시켰는데, 원래 1947년에 폭파시킬 계획으로 언론사 기자들을 다 모아 놓고 다이너마이트 25톤을 모아 터뜨렸지만 멀쩡했다! 이를 지켜본 한 영국 기자는 '역시 Made in Germany'라는 기사를 썼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인 1948년, 4개월에 걸쳐 내부 구조를 일일이 다 약화시킨 뒤 다이너마이트 35톤을 세심하게 배치하여 폭파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해당 위치는 현재 원래대로 베를린 동물원으로 복구되었다. (실제로 저런 콘크리트 요새는 현대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하여 당시 존재하던 기술력으론 지진폭탄이나 신형 전함의 함포사격, 열차포 정도를 동원해야 파괴할 수 있지 소련군이 현장에서 사용하던 곡사포, 자주포로는 쉽사리 파괴하는게 불가능했다.)
제국의사당 내부의 독일군이 전멸함으로서 의사당은 함락되었다. 이들이 전멸한 직후 소련군은 결국 나치 독일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가 5월 1일 오전, 한밤중이었다. 소련군은 국기를 게양할 당시에도 독일군의 방해를 상당히 받았다. 물론 깃발만 꽂는다고 그 순간부터 전투가 끝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국의사당과 그 주변에 있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은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을 했다. 특히 국기 게양 직후 제국의사당 반대편에 있던 크롤 오페라하우스의 독일군이 티거 2 중전차를 이끌고 반격까지 시도할 정도로 교전이 치열했다. 제국의사당 주변 독일군의 소탕은 국기를 게양한 날의 낮이 되어서야 일단락되었다.
(제국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꽂는 소련군 장병)
제국의사당 구역을 지키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제국의사당을 방어하던 부대가 전멸하고 나머지도 격렬한 시가전으로 전부 소모되고 몇 안되는 잔존 부대만 최후의 티거 2 2량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이 티거 2 2량의 전차장이 각각 티거 2 항목에도 나와있는 카를 쾨르너 SS 기갑원사(SS-Hauptscharführer)와 게오르그 디어스(Georg Diers) SS 기갑하사(SS-Unterscharführer)이다.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들은 성공적인 분투를 하였으나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티거 2에 자폭으로 최후를 주었다. 여기까지 남아있던 대다수의 장병들은 사살되거나 소련군에게 붙잡혔고 소수의 스칸디나비아 의용군들만이 살아서 엘베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항복한 독일군 장성급 포로, 제일 왼쪽 인물이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다.)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직후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이로서 공식적으로 베를린 전투가 끝났다. 헬무트 바이틀링은 소련군의 요청에 따라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방송을 하였다.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방송차량이 다니며 바이틀링의 항복 명령을 전달했다. 이 명령을 듣고 항복한 병사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항복하지 않고 서부로 탈출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전투를 계속했다. 베를린 시내의 잔존 독일군의 완전 소탕은 첫 항복 조인식이 열리던 5월 8일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제국의사당 점령을 축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 제3충격군 제79군단 제150이드리츠카야 소총병사단 병력)
(전투 종료 후 찍힌 독일 국회의사당 내부, 벽마다 소련군이 해 놓은 낙서로 빼곡히 차 있다.)
(독일 국회의사당 함락 장면의 기록화, 이 건물이 소련군 수중에 떨어진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히틀러의 벙커를 점령한 소련군)
(베를린 전투 직후에 촬영된 총통 벙커 내부)
히틀러가 죽은 직후인 5월 1일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이 제150 소총병사단 병력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면서 사실상 베를린은 소련군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제국의사당이 넘어가기 직전에 독일 국방군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한스 크렙스 장군이 소련에게 협상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바실리 추이코프 상장의 사령부로 찾아갔지만, 추이코프는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만이 유효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협상 결렬 후 추이코프는 크렙스에게 들었던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스탈린에게 전했다. 괴벨스는 공군 중사로 전선에 나갔다가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양아들 하랄트 크반트를 제외한 자기 자식들을 모두 독살한 뒤 아내와 함께 동반 자살했고, 협상이 실패한 뒤 돌아온 크렙스와 그의 사관학교 동기인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대장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택했다. 나머지 잔존 병력과 인사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소련군에게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베를린 전투가 종료된 직후 수많은 피난민과 잔존한 9군 병력들이 베를린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로 향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엘베 강에 도달한 이들은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를 동원해 도강을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소수의 기갑 차량은 전부 이들의 후미 엄호를 맡았다. 이 방어전은 5량의 티거 2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엘베 강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붉은 해일이 되어 밀려오는 소련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이들은 몰려오는 소련군을 상대하며 자신들의 목숨을 수많은 피난민의 목숨과 맞바꾸었다.
종료
(베를린에서 붉은 깃발을 걸고 있는 소련군 병사)
(독일이 항복했다는 신문을 보고 있는 프랑스계 캐나다 여성)
(브란덴부르크 문의 반파된 동상에 붉은 깃발을 거는 소련군 병사)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 해군 장병들을 촬영중인 미국 육군)
(소련군의 감시 하에 이동 중인 독일군 포로들)
(5월 7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카이텔 OKW 사령관)
(독일의 2번째 항복이 이루어진 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
(독일 병사들에게 전쟁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
소련군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아직도 골목 등 일부 지역에서 항복을 거부하는 패잔병들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외곽 지역에선 한 명이라도 더 서방 연합군 점령지로 보내기 위해 저항하는 독일군 잔여 부대와 소련군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이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5월 8일에는 서방 연합군에, 9일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전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유럽 전선은 종결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소련과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의 5월 9일 전승 기념 행사에 미국, 서유럽 정, 관계 인사들도 초청받아 참석하고 있다.
(전투 종료 후 히틀러 벙커 근처의 부서진 의자에 앉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여 있는 소련군
(불타는 제국의사당 앞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독일군)
이 전투에서 소련군 병사 8만 여 명이 작전 기간 동안 전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30,000여 명이 베를린 시가전에서 운명을 달리했으며, 그 외 28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중에서도 시가전인 만큼 기갑 전력의 피해가 특히 커서 전투 기간 동안 약 2,000대에 달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 한편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이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의 피해도 심각해 4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피난을 가다가 소련군에게 접수된 독일 민간인들)
나치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나 동부전선에 잔존해있던 독일군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있던 독일군은 대체로 베를린 전투의 전후로 며칠 안 있어 전부 항복했지만 우크라이나 방면군을 비롯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항복 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가기 싫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5월 11일까지 계속 전투를 벌였다. 이 외에도 독일군이 점령한 채 고립돼서 남은 지역인 미수복 지구의 독일군이 한동안 더 버텼다. 심지어 덴마크 보른홀름 섬에 주둔한 독일군은 항복 후 4개월이 넘게 지나서야 항복을 했다.
베를린 시내에서 교전이 벌어질 당시 난데없이 코끼리와 얼룩말 등의 동물들이 시내를 뛰어다니는 일이 있었다. 교전 과정에서 베를린 티어가르덴 구역에 있는 동물원 우리가 부서져 우리 안에 있던 동물들이 뛰쳐 나온 것이다. (한국에서 이대영은 이를 소재로 한 디오라마를 제작하기도 했다. 다만 전투 전에 동물들을 살처분하여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는 게 정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논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