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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溫度」] ㉖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과 그의 대표적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은 문장에 있어서 창의력과 사고력이 가득 차서 넘쳐흐를뿐더러 고금을 뛰어넘어 통달했다. 일시에 평평하고 원대한 산수(山水)에다가 그윽하고 깊은 감회를 소통하고 분산시키는 듯한 그의 시는 송(宋)나라 화가 미불(米芾)의 방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다.
미불(米芾, 1051–1107), 축소첩(蜀素帖: 행서로 556자를 71행에다 자유롭게 쓴 지본)
*미불(米芾, 1051–1107)은 중국 송(宋)대의 저명한 서예가이자 화가로, 본명은 黻(부)이며, 후에 芾(부)로 개명하고, 자는 원장(元章)이다. 그는 산시성 타이위안(太原)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후베이성 양양(襄阳)으로 이주하였고, 해악외사(海岳外史)라는 호를 지니고 있었다.
미불(米芾)은 학교 서기(校书郎), 서화 박사(书画博士), 예부 어좌(礼部员外郎)를 역임했으며, 채양(蔡襄), 소식(苏轼), 황정견(黄庭坚)과 함께 송사대가(宋四家)로 불리며 그 명성을 떨쳤다. 그는 흔히 미남궁(米南宫)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서화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마른 나무, 대나무, 돌, 산수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미부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에서 높은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고대 서예가들의 글씨를 모방하여 진짜처럼 재현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张季明帖》(장계명帖), 《李太师帖》(리태사帖), 《紫金研帖》(자금연첩), 《淡墨秋山诗帖》(담묵추산시帖) 등이 있으며, 《蜀素帖》(촉소帖) 또는 《拟古诗帖》(의고시帖)는 “천하 제팔행서”로 알려져 있으며 후인들에게 “중화 최초의 미帖”로 칭송받고 있다.
송(宋)나라 화가 미불(米芾) 작품
마음이 가는 대로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 뛰어난 자태가 넘쳐나 기이하고 괴이한 모습이 세상 어떤 물건과도 비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찍이 읊은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水碧沙明島嶼孤(수벽사명도서고)
짙푸른 물 청명한 모래 외로운 섬에
鵁鶄身世一塵無(교청신세일진무)
해오라기 신세 티끌 한 점 없구나
그의 시품(詩品) 역시 오묘한 경지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자랑하는 것을 꺼려서 그 시를 밖으로 잘 내놓지 않는다. 마치 송나라의 청백리 포용도(包龍圖·포청천)가 웃으면 황하의 물이 맑아진다는 말에 비유할 만큼 많이 얻어 볼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매우 아쉽고 한탄한다. 일찍이 내게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준적도 있다. 문장을 논할 때는 매우 광대하고 광활하여 가히 볼 만하였다.”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 박지원(朴趾源)
我兄顔髮曾誰似(아형안발증수사)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
每憶先君看我兄(매억선군간아형)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울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今日思兄何處見(금일사형하처견)
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
自將巾袂映溪行(자장건몌영계행)
스스로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감상〉
이 시는 홍국영(洪國榮)의 핍박을 견딜 수 없어 개성 외곽에 있는 연암에 숨어 살 때 선형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과정록(過庭錄)』권(卷)1에 의하면, 정조 11년(1787)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이 향년 58세로 별세하여 연암협(燕巖峽)의 집 뒤에 있던 부인 이씨 묘에 합장하였는데,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 감동하여 극찬한 바 있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연암(燕巖)은 고문사(古文詞)에 있어서 재사(才思)가 넘치고 고금에도 통달하였다.「燕巖古文詞(연암고문사) 재사일발(才思溢發) 橫絶古今(횡절고금)」
당시 지은 평원(平遠)한 산수(山水)에 깊은 감회를 소산(疏散)시키는 듯한 그의 시는 대미(大米, 송나라 미불米芾을 가리킨다.)의 수준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고, 마음이 내킬 때 쓴 그의 행서(行書)와 해서(楷書)는 뛰어난 자태가 넘치며, 너무도 기묘하여 어떤 물건과도 비교할 수 없다.「時作平遠山水(시작평원산수) 踈散幽迥(소산유형) 優入大米之室(우입대미지실) 其行書小楷(기행서소해) 得意時作(득의시작) 逸態橫生(일태횡생) 奇奇恠恠(기기괴괴) 不可方物(불가방물)」
일찍이 읊은 시에, ‘푸른 물 맑은 모래 외로운 섬에, 교청처럼 맑은 신세 티끌 한 점 없다네’하였다.「甞有詩曰(상유시왈) 水碧沙明島嶼孤(수벽사명도서고) 鵁鶄身世一塵無(교청신세일진무)」
이것으로써도 그의 시 품격이 오묘한 지경에 도달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다만 긍신(矜愼)하여 잘 내놓지 않으므로, 마치 하청(河淸)에 비유된 포룡도(包龍圖)의 웃음과 같아서 많이 얻어 볼 수 없으니, 동인(同人)들이 못내 아쉬워한다.「亦知其詩品入妙(역지기시품입묘) 但矜愼不出(단긍신불출) 如包龍啚之笑比河淸(여포룡비지소비하청) 不得多見(부득다견) 同人慨恨(동인개한)」
일찍이 나에게 오언(五言)으로 된 고시론(古詩論)을 기증하였는데, 폭넓은 문장력이 볼만하였다.「甞贈我五言古詩(상증아오언고시) 論文章(논문장) 頗宏肆可觀(파굉사가관)」.”라 말하고 있다.
〈주석〉
*袂(몌) : 소매 몌, *映(영) : 비추다 영.
*포룡도(包龍圖) : 송(宋)나라 때 용도각대제(龍圖閣待制)를 지낸 포증(包拯)을 가리키는데, 성품이 워낙 강직하여 그가 조정에서 벼슬하는 동안에는 귀척(貴戚)이나 환관(宦官)들도 감히 발호하지 못하고 그를 무서워하였으며, 그가 하도 근엄(謹嚴)하여 웃는 일이 없으므로, 심지어는 사람들이 일컫기를 ‘그가 웃으면 황하수(黃河水)가 맑아질 것이다.’고까지 하였다. 당시 포대제(包待制) 또는 염라포로(閻羅包老) 등으로 불렸다.
―『청비록 3(淸脾錄 三)』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청비록(淸脾錄)』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좋은 시를 찾아 모으는 일을 즐거워했던 이덕무는 박지원의 시가 많지 않다는 점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덕무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왜 박지원은 시를 많이 짓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박지원이 시는 격식과 법칙, 운율과 성률에 구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데 크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이런 까닭에 아버지는 종종 시 한두 구절을 짓다가 그만두시곤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박지원은 마음속 하고 싶은 말을 자유분방하게 쏟아내는 데에는 시보다는 산문이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문 작업에 전력을 쏟았고, 이로 인해 현저히 적은 분량의 시만 남겼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조선은 ‘시의 시대’라기보다는 ‘산문의 시대’였다. 그 까닭은 첫째는 시보다는 산문이 더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뛰어난 시인보다는 탁월한 문장가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왔기 때문이고, 셋째는 시는 옛 시의 격식과 법칙 그리고 운율과 성률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산문은 고문(古文)의 형식과 문체 그리고 소재와 주제를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문장에서는 거대한 혁신이 일어났다. 시에서도 혁신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혁신의 깊이가 얕고 범위가 좁았다.
그렇다면 시와 산문에 대한 박지원과 이덕무의 태도는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
박지원은 ‘산문의 시대’를 주도할 문장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 시를 버리고 산문에 집중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반면 이덕무는 산문은 물론 시에서도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 시와 산문 모두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이덕무는 비록 산문에서는 박지원을 뒤따랐지만 시에서만큼은 박지원도 따라올 수 없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다.
「詩의 溫度」/ 저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 편역 <한정주>역, 출판사: 다산초당, 출간일: 2020.02.17.
✵이덕무(李德懋, 1741~1793) : 북학파(北學派) 실학자(失學者)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형암(炯庵)·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서자(庶子)로 태어났고 어려서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총명하여 가학(家學)으로 문리(文理)를 터득했다.
병사(病死) 후 정조가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영처시고嬰處詩稿〉·〈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기년아람紀年兒覽〉·〈사소절士小節〉·〈영처문고嬰處文稿〉·〈청비록淸脾錄〉·〈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영처잡고嬰處雜稿〉·〈관독일기觀讀日記〉·〈앙엽기盎葉記〉·〈입연기入燕記〉·〈열상방언洌上方言〉·〈예기고禮記考〉·〈편찬잡고編纂雜稿〉·〈협주기峽舟記〉·〈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寒竹堂隨筆〉 등이 있다.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 : 조선 후기 문신이자 문학가이며 북학사상 바탕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이며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열상외사(洌上外史)로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백탑(白塔) 근처로 1768년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득공(柳得恭)·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때를 전후해 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해 자주 토론했다.
저서로는 『열하일기(熱河日記)』, 작품으로는 「허생전(許生傳)」·「민옹전(閔翁傳)」·「광문자전(廣文者傳)」·「양반전(兩班傳)」·「김신선전(金神仙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등이 있다. 1910년(순종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열하일기(熱河日記) :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이 청(淸)나라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見聞錄). 핵심 사상은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 연암이 걸어간 44일의 기록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 조선의 한 선비가 말 위에 올라 압록강을 건넜다. 그의 이름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호는 연암(燕巖)이다. 1780년(정조 4년) 음력 5월, 그는 청(淸)나라 황제 건륭제(乾隆帝)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자제군관(自弟軍官)이라는 직함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한양(漢陽)을 떠나 의주, 압록강, 심양, 연경(燕京‧베이징)을 거쳐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 지금의 청더)까지 — 총 26권 10책에 담긴 이 방대한 기록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으로 느낀, 조선을 바꾸고 싶었던 한 남자의 치열한 사유(思惟)의 산물이다.
1. 떠남 — 압록강을 건너며
1780년 5월 25일, 박지원은 한양 집을 나섰다. 사절단의 정사(正使)는 그의 친척인 박명원(朴明源)이었고, 박지원은 공식 직책 없이 수행원 자격으로 합류했다. 어찌 보면 어정쩡한 처지였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그는 자유롭게 보고 기록할 수 있었다.
의주(義州)에 도착해 압록강을 건너던 날, 박지원은 이렇게 썼다. "강을 건너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저 강 너머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의 여행은 처음부터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동 벌판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는 넓고 평평한 대지에 큰 충격을 받는다. 「호곡장론(好哭場論)」 — '좋은 울음터 이야기' — 라는 유명한 글이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탁 트인 요동 벌판을 보고 박지원은 갑자기 통곡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산과 강으로 꽉 막힌 조선 땅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저 광활한 평원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과 해방감 — 그것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라, 좁은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규였다.
2. 충격 — 청나라의 문물을 목격하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 대부분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멸시했다. 명나라를 섬기던 문화적 자부심이 있었고, 청나라는 그 명나라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런데 박지원이 실제로 목격한 청나라는 달랐다.
심양(瀋陽)과 북경(北京)에서 그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반듯하게 구획된 도시, 벽돌로 지은 튼튼한 건물들, 잘 닦인 도로, 번성하는 시장과 상업, 수레를 이용한 효율적인 운송 체계.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박지원이 특히 주목한 것은 수레(車)와 벽돌(磚)이었다. 조선은 산이 많고 길이 험해 수레가 거의 없었고, 집은 대부분 흙벽으로 지었다. 반면 청나라는 넓은 평야에 수레가 가득했고, 도시의 건물들은 견고한 벽돌로 가득했다. 박지원은 이것이 단순히 물질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와 경제 구조 전체의 차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허생전(許生傳)」의 문제의식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상업과 유통을 천시하고, 실질적인 경제 활동을 외면하는 조선 사대부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다.
"오랑캐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부끄러움은 배움을 거부할 때 온다."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의 정신
3. 사유 — 길 위에서 철학을 논하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견문록이 아니다. 박지원은 여행 중 만난 청나라 학자들 승려들 상인들과 나눈 대화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 속에는 당대의 학문적 논쟁과 박지원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가 담겨 있다.
특히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열하일기에서 가장 유명한 글 중 하나이다. 밤새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면서 느낀 극도의 공포와 그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박지원은 깊은 철학적 성찰을 끌어낸다. "공포는 마음에서 온다. 마음을 비우면 강물 소리도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 이 깨달음은 단순히 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두려움과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이다.
북경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학자들과 만난다. 당시 중국에서는 실증적인 학문인 고증학(考證學)이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문헌을 꼼꼼히 따지고, 실제로 검증하고, 객관적 사실에 기반해 학문을 하는 방법론이었다. 박지원은 이것을 조선에서 발전시키고 있던 실학(實學)과 연결 지으며 깊이 공감했다.
그는 글쓰기에 대해서도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 문단은 정통 고문(古文) 문체를 최고로 쳤는데, 박지원은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새로운 문체, 이른바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를 구사했다. 이것이 훗날 조선 문단에 큰 논란을 일으킨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4. 열하에서 — 황제의 여름 궁궐을 거닐다
1780년 8월 초, 사절단은 북경에 잠깐 도착했다가 곧바로 황제가 있는 열하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열하는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 청더(承德)로, 청나라 황제가 여름에 머무는 별궁(避暑山莊)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건륭제의 생일 잔치가 열릴 예정이었다.
열하에서 박지원은 눈이 새로운 충격을 받는다. 황제의 별궁 주변에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거대한 사원들이 줄지어 있었다. 청나라는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불교와 유교를 모두 포용하는 실용적인 정책을 썼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거대한 라마교 사원들이었다.
박지원은 사원 안에서 라마 승려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황제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수천 명이 모인 화려한 잔치, 각국에서 온 사신들, 다양한 민족의 복식과 음식 — 이 모든 것이 그의 눈에는 놀랍고도 생경한 광경이었다. 조선은 참으로 작은 나라였고, 세상은 참으로 넓었다.
흥미로운 것은 박지원이 이 모든 것을 단순히 감탄하며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청나라가 왜 강한가?"를 끊임없이 분석했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통치술, 실용적인 제도, 상업을 장려하는 경제 정책 — 조선이 배워야 할 것들이 바로 여기 있었다.
5. 귀환 — 그리고 조선을 향한 외침
1780년 10월, 박지원은 압록강을 다시 건너 조선으로 돌아왔다. 44일간의 청나라 여행이었지만, 그 44일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조선 사상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귀국 후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는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문제의식이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던진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 즉 '도구를 잘 활용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라'는 것이다. 이름과 명분에 집착하지 말고, 백성이 실제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 이것이 연암 박지원 실학사상의 핵심이었다.
그는 수레를 도입하자고 했다. 벽돌 건축을 하자고 했다. 상업을 장려하자고 했다. 양반들도 직접 일하며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들이었고, 기득권 세력의 심한 반발을 받았다. 하지만 역사는 박지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후인(箜篌引)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이덕무 「詩의 溫度」, 저자: 이덕무, 편역: 한정주(역사평론가), 다산초당, 2020.02.7.》, 《Daum, 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yil207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