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진실게임
9월 15일은 한국전쟁의 인천상륙작전 64주년 기념일이다. 유엔군사령관 매카앗서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더라면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의 승리로 끝나고 오늘 날 한반도 전체는 공산주의 세습독재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그만큼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작전에서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1950년 9월 14일 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불을 켜서 상륙함정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Clark·당시 39세)와 한국 해군 대위 연정과 육군 대령 계인주를 주축으로 한 특공대원들이었다고 클라크 대위의 유고(죽은 뒤 발견된 글)가 밝혔다.
그런데 당시 27세였던 한 한국인이 팔미도 점등 작전에 자신이 핵심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최규봉(89세)이란 분인데, 조선일보는 6·25 전쟁 발발 60주년 기념 특집기사로 연재한 ‘나와 6·25’ 씨리즈에서 최씨가 말한 내용을 2010년 5월 17일자에 실었다. 이 글에서 최씨도 클라크 미해군 대위가 인천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의 지휘관임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클라크의 수기는 신빙성이 높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클라크는 수기에서 한번도 최규봉이란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다. 그의 수기에는 오직 연정 대위와 계인주 대령만이 팔미도 점등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 팔미도 점등 전후 사정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도 너무나 다르다. 점등 시간도 다르고, 다른 두 미군 장교가 팔미도에 갔었다는 얘기도 클라크 수기에는 없다. 뿐만 아니라 클라크 대위 등이 인천상륙작전 직후 기함 매킨리호 함상에서 매카앗서 장군을 만났다는 기록도 클라크 수기에는 없다. 등대에 달았다는 미국 국기(성조기) 얘기도 없다.
이 역사적 작전에서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1950년 9월 14일 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불을 켜서 상륙함정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Clark·당시 39세)와 한국 해군 대위 연정과 육군 대령 계인주를 주축으로 한 특공대원들이었다고 클라크 대위의 유고(죽은 뒤 발견된 글)가 밝혔다.
그런데 당시 27세였던 한 한국인이 팔미도 점등 작전에 자신이 핵심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최규봉(89세)이란 분인데, 조선일보는 6·25 전쟁 발발 60주년 기념 특집기사로 연재한 ‘나와 6·25’ 씨리즈에서 최씨가 말한 내용을 2010년 5월 17일자에 실었다. 이 글에서 최씨도 클라크 미해군 대위가 인천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의 지휘관임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클라크의 수기는 신빙성이 높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클라크는 수기에서 한번도 최규봉이란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다. 그의 수기에는 오직 연정 대위와 계인주 대령만이 팔미도 점등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 팔미도 점등 전후 사정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도 너무나 다르다. 점등 시간도 다르고, 다른 두 미군 장교가 팔미도에 갔었다는 얘기도 클라크 수기에는 없다. 뿐만 아니라 클라크 대위 등이 인천상륙작전 직후 기함 매킨리호 함상에서 매카앗서 장군을 만났다는 기록도 클라크 수기에는 없다. 등대에 달았다는 미국 국기(성조기) 얘기도 없다.
- 클라크 사후에 출판된 수기 “인천의 비밀” 표지.
“1950년 9월 14일 밤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날 오후 7시쯤 우리의 고성능 무전기에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매카앗서 사령관의 암호명령이 들어왔다. 우리 특공대는 6명. 클라크 해군대위와 클라크혼 육군소령, 포스터 육군중위 등 미군 3명과 계인주 육군대령과 연정 해군소령, 그리고 나였다.
우리 특공대는 팔미도에 있는 적 2개 분대를 급습, 팔미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등대를 켜는 작은 부품이 보이질 않았다. 1시간40분 만에 가까스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품을 손으로 더듬어 찾아낸 뒤, 드디어 15일 오전 1시 50분쯤을 전후해 등대불을 밝혔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팀장인 클라크 대위가 등대에 성조기를 걸자고 했다. 적이 아닌 우리 특공대가 등대불을 켰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일종의 약속이었다.
작전이 성공한 뒤, 유엔군 함대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에서 매카앗서 사령관을 만났는데, "바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그 성조기를 나에게 달라고 했다. 정전 후, 미국은 내게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성조기를 돌려 달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미국의 한 유력 언론사 측에서는 10만달러를 줄테니 넘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성조기를 끝내 돌려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 나중에 매카앗서 장군에게 돌려줬다. 그러자 장군은 감사 편지와 함께 자신의 친필 사인을 담은 대형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는 매카앗서 장군 기념관이 있다. 최씨가 그곳에 성조기를 하나 보내고 그것이 팔미도 등대에 걸었던 것이라고 편지에 썼다면, 그 편지를 받은 매카앗서 장군 기념관 관리자는 그 말을 믿고 장군이 싸인한 사진과 편지를 보내주었을 수도 있다.)
조선일보 2010면 9월 13일자 기사는 또 이렇게 보도했다.
“1950년 9월 15일 오전 0시 30분 인천 팔미도 등대. 첩보부대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 켈로(KLO:·Korean Liaison Office) 소속의 한국·미국 부대원 6명이 기진맥진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하다는 신호를 알려야 할 등대의 불을 자정까지 켜야 했지만, 장치를 작동시킬 나사 하나를 수 시간째 못 찾고 있었다. 모두들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땅바닥에 누워 있던 27살 한국인 대원의 손에 손톱만한 나사가 잡혔다. "이거다!" 이 대원은 급히 나사를 이용해 장치를 작동했다. 이 청년이 바로 최규봉(대한민국KLO기념사업회 명예회장)씨다.
그날 오전 1시 50분 마침내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잠시 후 군함 261척과 7만명 규모의 연합군이 월미도로 밀려들었고,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다. 그는 ‘팔미도에 불이 들어왔을 때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최씨 등 KLO부대원들은 매카앗서 장군의 지시를 받아 팔미도에 잠입, 인민군 15명을 물리친 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켰다."
<지휘관 클라크 대위의 수기 내용>
사후에 출판된 클라크 대위 수기에서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카앗서 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인천에 대한 정보를 먼저 수집하기 위해 8월26일 토오쿄(東京)의 미극동군 사령부 G-2(첩보부)에서 일하고 있던 클라크 해군 대위(당시 37세)를 호출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천 앞 바다의 자연 조건(수심, 간만의 차이, 뻘밭의 넓이 등등)과 인천 및 월미도의 적 병력 규모, 그리고 적이 항만 해저에 기뢰를 매설했는지, 또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두 뱃길에 항해등은 작동하고 있는지 등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클라크 대위는 일단 같이 일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토오쿄에서 대구로 날아갔다. 거기서 그는 전에 G-2에서 같이 근무했으며 영어가 유창한 한국 해군대위 연정(당시 30세)과 한국 육군 방첩부대장을 지냈고 역시 G-2에도 근무한 바 있는 계인주(당시 42세) 대령을 차출해서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국에서 작전할 때 필요한 쌀 등 식료품과 한국돈 100만원도 마련했다. (당시 원-달러 환율은 1800 대 1이었다고 한다.)
클라크 대위와 두 한국군 장교는 8월말 일본 사세보 군항에서 마침 한국전선으로 가는 영국 해군 함정에 편승, 9월 1일 아침 인천 앞바다 덕적도 근처에 도착했다. 앞으로 2주일간 클라크 대위의 작전을 지원해줄 한국 해군 함정 한 척과 덕적도 근해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함정(PC-703호)의 선장은 후에 해군참모총장이 된 이성호 중령, 행정장교는 현시학 소령(나중에 미국주재 한국 공사가 됨)이었고, 역시 후에 해참총장이 된 함명수 소령은 해군첩보부대 소속이었다.
- 인천상륙작전 직전 영흥도 주변에서 활약한 두 한국군 장교와 민간인 협조자들이 클라크 대위(맨 오른쪽)와 함께 영흥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허리에 권총 찬 사람이 연정 해군대위, 그 오른쪽이 계인주 육군 대령.
영흥도를 주요 거점으로 하고 클라크 특공대는 인천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토오쿄의 사령부로 타전했다. 클라크는 인천 항구로 들어가는 좁은 해협인 비어수로 등 세 군데에 있었던 항해등이 적에 의해 모두 파괴되어 있다고 본부에 보고함과 동시에 팔미도에 있는 등대가 아직 작동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보고했다. 그는9월 3일 밤 연정 등 한국인 특공대원들을 데리고 팔미도에 들어가 보았다. 등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있었다. 적군이 팔미도에 없다고 판단한 클라크 일행은 곧 그곳을 떠나 영흥도로 돌아갔다.
9월 9일 밤 클라크 일행은 다시 팔미도에 상륙, 이번엔 등대 안에 들어가 보았다. 그는 기계에 찍힌 글을 보고 등대에 불을 밝히는 기계가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된 것이며 석유를 태워서 빛을 내는 석유등임을 알수 있었다. 석유통에는 기름이 반쯤 남아 있었고 등 자체도 별로 이상이 없었다. 그는 불을 붙여보았다. 불꽃이 별로 크지 않아 심지있는 부분을 깨끗이 닦아 불꽃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나 등대 불빛이 깜빡거리게 하거나, 불빛 비추는 방향을 바꾸게 하는 장치는 건전지가 낡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빛이 깜빡이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만 집중적으로 비추도록 고정시켜 놓고 불을 껐다. 그리고 토오쿄의 사령부에 "등대 사용 가능. 점등 시각 지시 요망"이라고 무전을 보냈다.
등대 점검을 마친 클라크는 장난끼가 발동하여 등대 문에다 ‘Kilroy Was Here! 9 September 1950’이라고 써놓았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중 미군들이 어떤 곳을 먼저 점령했을 때 뒤늦게 오는 군인들을 놀려주려고 장난삼아 ‘킬로이가 이미 다녀갔다’라고 쓰곤 했던 글이다. 킬로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가상의 군인 이름이다. 그러니까 ‘홍길동이가 먼저 다녀가네!’라고 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9월 14일 클라크 대위는 사령부로부터 다음날(15일) 0시30분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라는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이날 클라크 일행은 영흥도에 있었는데 이 섬을 다시 빼앗으려고 들어오는 인민군들을 피해 밤늦게 그곳을 떠나 작은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로 향했다. 그들이 팔미도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15일 0시30분, 등대 불을 켜야 할 시각이었다. 그러나 클라크와 연정은 팔미도 경비를 위해 미리 보낸 한국인 부하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오는 바람에 그들로부터 오인사격을 받는다. 그래서 시간이 지체되어 언덕 위 등대까지 올라가 등대에 불을 켰을 때는 이미 0시 50쯤 되었다. 클라크 대위는 20분이나 늦게 등대불을 켠데 대한 불안감을 안고 등대 밖으로 나왔다. 그 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그는 땅에 드러누워 곧 잠이 들었다. (최규봉씨는 등대 점등 장치의 나사못이 빠지고 없어 그 나사를 찾느라고 시간을 많이 허비해서 오전 2시 20분쯤에 점등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1시 50분쯤이라고 수정했다.)
얼마 후 연정이 클라크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등대에서 약 60미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손으로 가리켰다. 배의 종류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군함 6척이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두웠지만 군함들의 윤곽이 어슴프레 보였다. 함정들은 계속해서 줄을 이어 팔미도 등대 불빛을 항해등으로 삼고 인천항으로 들어갔다.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 1차 공격 즉, 월미도 점령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2차 공격은 다시 밀물이 되는 오후 5시 이후에 감행되어 밤사이에 인천을 거의 전부 탈환하게 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클라크는 망원경으로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 있을 기함(旗艦) 마운트매킨리호(號)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통배를 타고 연정, 계인주와 함께 매킨리호 쪽으로 접근해갔다. 기함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그의 해군 장교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매킨리호 함상에서 누군가가 메가폰을 입에 대고 "접근하지 말고 정지하라!"고 소리쳤다. 매킨리호에서는 클라크 등이 타고 있는 디젤엔진 통통선을 적의 자살 특공 선박으로 의심한 것 같았다. 클라크는 통통선 선장(李씨로만 밝혀짐)에게 엔진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기함으로부터 소형 상륙정 한 척이 접근해 왔다. 거기에 탄 해군소위가 기관단총을 클라크 대위에게 겨누었다.
"누구냐?" 소위가 물었다.
"나는 미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다. 사람 다치기 전에 총은 치워라!" 클라크가 대꾸했다. 소위는 기함으로 돌아가 함장에게 미해군 대위라는 자가 이상하게 생긴 작은 발동선에 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함장이 "그 자가 우리 해군 장교라는 걸 어떻게 믿을수 있나?"고 묻자 소위는 "우리 해군 장교모자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클라크가 먼저 기함에 승선, 신분이 확인되자 통통배에 남아있던 두 한국군 장교 연정 해군 대위와 계인주 육군 대령도 매킨리호에 올라갈수 있었다.
- 조선일보에 실린 이 사진에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팔미도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기함 '마운트매킨리'로 복귀하는'팔미도 6인방'.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유진 글라크 해군 대위, 연정 소령, 선원, 최규봉, 존 포스터 육군 중위, 계인주 대령, 클라크혼 육군 소령. /최규봉씨 제공"이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있었다. 최규봉씨는 이 사진 가운데에서 옆모습만 보이며 서있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클라크 대위의 수기에 의하면, 그가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후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 있는 군함 매킨리호로 접근할 때 사용한 작은 통통배에는 한국군 장교 두 명(연정, 계인주)과 이씨 성을 가진 민간인 협조자, 그리고 통통선 주인(한국인) 등 5명만 타고 있었다. 그리고 마운트매킨리호로 배에 올라 탄 사람은 클라크, 연정, 계인주 세 사람 뿐이었다. 그러므로 위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날 찍은 사진이 아니다.
사실은 매카앗서 장군도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고, 오직 클라크 대위의 직속상관들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65년에 출판된 매카앗서 장군 회고록 ‘Reminiscences’(회상)를 보면,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비밀이 적에게 누설되지 않았음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썼다.
"저멀리 바다 위에서 불이 하나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인천항구로 들어가는 길목인) 비어수로에 항해등이 켜져 있었다. 적은 우리에게 완전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적은 항해등도 끄지 않았다."
또 상륙 당일 매카앗서 장군을 바로 옆에서 취재한 미국 종군기자 칼 마이던도 TIME지(1950년 9월 25일자)에 이렇게 썼다. "인천 항구 쪽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도일 해군제독이 매카앗서 장군에게 '적이 (고맙게도) 항해등까지 켜놓았군요'라고 말하자 매카앗서 장군은 '(그 놈들) 예의 한번 바르군'이라고 말했다." 장군이 타고 있던 군함에서 팔미도 등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등대불이 항해등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클라크 수기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최규봉씨는 자기가 매카앗서 장군을 함상에서 만났고, “소원이 무어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이 끝난 후 클라크 대위는 미해병대 병력을 영흥도와 대부도에 좀 보내 그곳의 적을 소탕해 줄 것을 작전사령부에 특별히 부탁했다. 그는 그 두 섬에서 자기를 도와준 한국인 50여명이 적에게 학살되었다고 보고하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말했다.
클라크 대위는 인천상륙작전 후에도 연정과 함께 북한 서부해안 일대에서 한국 KLO유격대원 150여명을 지휘하여 해안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압록강까지 가서 중공군의 남하 사실도 가장 먼저 탐지해 본부에 타전했다. 그는 동부전선으로 이동, 원산지역에서도 중공군을 상대로 첩보작전과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클라크와 연정은 미군 최고 영예인 Silver Star(은성무공훈장)를 각각 받았다.
클라크는 1966년 중령으로 퇴역,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에서 살다가 1998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가 죽은 후 가족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가 쓴 수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전쟁 중 그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어서 가족들이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2000년 MHQ(Military History Quarterly/계간軍史) 잡지에 토마스 훌레밍이라는 군사전문 저술가가 유진 클라크 대위에 관하여 쓴 글을 클라크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우연히 읽고 고인이 남긴 수기를 토마스 훌레밍에게 보냈다. 훌레밍은 그 글을 읽고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있다고 판단, 유명한 출판 그룹 Penguin 계열사 Berkley 출판사를 통해 The Secrets of Inchon (인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2002년에 출판, 호평을 받았다. 시카고 썬 타임즈 신문은 "헐리우드 영화제작자들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스릴에 넘치는 실화다"라고 격찬했다.
워싱턴에서
조 화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