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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독일로 간 한국 看護 女性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기간; 2017.06.27~09.03)
1960~70년대 독일로 가 僑民 1세대를 형성한 韓國 看護女性들의 이야기로 1960년대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의 敗亡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에 성공하였다.
사회보장제도의 강화에 따라 부족한 看護人力을 외국에서 구할 때 한국에서도 많은
간호여성들이 가족의 安定과 개인의 발전을 위해 獨逸 行을 선택했다.
分斷國家 韓國에서 또 다른 분단국가 獨逸, 특히 분단의 도시 베를린으로 가 병원생활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뿌리내려 獨逸市民社會의 一員이 된 한국간호여성들의 문화적·정치적
경계를 넘은 삶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反芻해 본다.
*派獨 看護師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失業問題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해 해외인력수출의
일환으로 한국정부에서 獨逸(西獨)에 파견한 간호사이다.
1960년대 한국은 심각한 失業難과 경제개발정책에 필요한 外貨不足問題를 해결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반면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었으며, 특히 看病人과 같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看護人力의 부족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1966년 독일 마인츠 대학병원의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대규모 간호사 파견이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韓國海外開發公社가 간호인력의 모집과 送出을 담당하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만여명의 간호사가 독일에 파견되었다.
낮 선 땅 西獨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져 말도 통하지 않는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屍身을 닦는 일이었으며,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屍體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派獨 看護師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한 1천만 마르크 이상의 外貨는 한국경제개발에 크게
寄與 했다.
*1964년 12월 西獨을 공식 방문한 朴正熙 大統領 일행은 뤼브게 西獨大統領과 함께 鑛夫들을
위로∙격려하기 위하여 탄광에 갔으며, 강당에는 300여명의 우리 광부와 50여명의 간호사가
모여있었다.
朴正熙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가 壇上에 올라서자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춰 愛國歌를 부르기
시작하였으나 후렴부분의 “대한사람…”에서는 울음소리가 애국가 제창을 대신하였다.
밴드의 애국가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演壇으로 걸어 나가
"여러분을 萬里他鄕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 합니다…."
구석 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가지 못하고
연설문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즉석연설을 이어갔다.
"鑛員 여러분, 看護師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生前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後孫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그리고 뤼브게 서독대통령도 따라 울었다.
*6∙25전쟁 이후 가난에 시달리는 低開發國家(後進國)로 1960년대 初半 國民所得이 $100도
되지 않는, 필리핀의 2/3수준에 불과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의 하나인 貧困國으로
1960년대~1970년대 韓國의 부족한 外貨를 벌어들인 集團들이 있다.
越南戰에 1965년~1972년까지 派兵된 年間 48,000여명(延人員 32만여명)의 派越將兵을
시작으로 그에 따른 韓進商社 등 駐越美軍의 用役業體와 勤勞者, 1만여명의 派獨看護師,
7,900여명의 派獨鑛夫, 1970년대 中東地域에 진출한 建設業體와 근로자 등이 벌어들인
피땀 어린 外貨가 朴正熙大統領의 經濟開發計劃의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2만 8천여弗(2016년)로 세계 13위의 經濟大國을 이루는 土臺가 되었다.
2017. 07. 31 景福 34 孤 山 朴 春 慶
국경을 넘어-독일로 간 한국 看護 女性 사진
(01)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은 유서 깊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서울의 대표적
문화중심이 되고자 2002년 5월 慶熙宮 앞에 개관하였다.
(02) 展示를 열며
(03) 1960~70년대 韓國
(04) 1960~70년대 獨逸(西獨)
(05) 女性이 대량으로 海外에 파견된다.
東亞日報 1966년 9원 1일자 기사로 3년계약에 月 120~150弗의
보수를 받는다.
왼쪽 사진은 1970년대 九老工團 여성근로자-타일工 기술교육을 받는
여성들(1978년)-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造成初期(1967년)이다.
(06) 女性들의 獨逸行 선택
(07) 看護員 모집공고 -조선일보, 1966년 8월 14일자-
(08) 간호원 면허증. 왼쪽 1962년, 오른쪽 1975년.
(09) 英文 간호원면허증(1966년)-건강검진표(1970년)-이력서(1970년)
(10) 旅券–국제공인 예방접종증명서(國際公認 豫防接種證明書)
(11) 독일어 시험지 -1971년
한국해외개발공사에서 실시한 3개월 集中過程의 독일어 수업 때 치른 시험지.
(12) 간호여성을 위한 독일어 교재-독일어會話
(13) 獨逸語 연수 수료증 -1966년
독일에 입국하기 전 해외개발공사에서 독일어 硏修를 마치고 받은 수료증.
(14) 해외개발공사 통지서-태극기-서독취업자를 위한 송금∙예금설명서
=해외개발공사 통지서 -韓國移民史박물관 소장
한국해외개발공사에서 발행한 독일 행 출국확정사실을 알리는 엽서.
=태극기
한국해외개발공사가 지급한 태극기로 한국 간호여성들이 독일에 입국할 때 사용했다.
=서독취업자를 위한 송금∙예금설명서
한국외환은행 저축개발부에서 발행한 송금 및 예금안내서.
(15) 金浦空港에서 出國 前 가족과 함께
=위: 1969년 원향옥 사진
=아래: 1973년 김현숙 사진
(16) 한복-버선과 고무신-장신구 (오른쪽부터)
=韓服: 우리나라에서 명절이나 행사 때 입는 한복은 독일에 가서도 특별한 날에 입는 옷.
=버선과 고무신: 한복에 맞춰 준비한 고무신.
(17) 주머니-구슬 백-한복 장신구-장식품(앞 왼쪽부터 시계반대방향)
=주머니: 한국에서 구입한 장식 주머니 -1970년대
=구슬 백: 1960~70년대에 유행했던 구슬 백은 手作業으로 만들어 값이 비쌌으나
간호여성들은 독일 행을 앞두고 특별한 날에 사용하기 위해 구입했다.
=한복 장신구(裝身具): 한복에 맞춰 마련한 주머니와 노리개 -1967년
=장식품: 한국의 결혼식 풍습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장식품 -1973년
(18) 전통인형 -1970년대 -은정희
고등학교 家事實習時間에 직접 만든 인형으로 독일에 갈 때 기념품으로 가지고 갔다.
(19) 病院 生活
(20) 간호복(看護服)
(21) 간호의료용품(看護醫療用品) -1970년대 -派獨勤勞者기념관 소장
간호사들이 사용했던 진료가방, 주사기, 진료용 가위, 청진기.
(22) 個人生活
(23) 國際結婚과 兩性平等
(24) 결혼식 한복(왼쪽)-피로연 한복 -1970년 -조용자
1970년 결혼식을 위해 故國에서 어머니가 보내주신 한복으로, 결혼식 때 입을 색동저고리에
붉은 치마 한복과 피로연을 위한 분홍색 한복을 따로 보내주셨다.
사위를 위해 남성한복 한 벌도 함께 보내주셨다.
(25) 滯留權을 위한 署名運動
(26) 소매가 잘린 간호사복 -1970년대 -한국이민사박물관
독일 내 외국인 간호여성들의 강제추방에 항의하기 위하여
看護服의 한쪽 팔 부분을 잘랐다.
(27) 68운동과 新社會運動
(28) 촬영도구(撮影道具) -1970년대 -알리 귄터-마그라프
알리 귄터-마그라프씨와 故 김정숙씨의 傳統婚禮 장면을 촬영하고 上映하는데 사용된
캠코더, 編輯機, 映寫機 등 촬영도구들이다.
(29) 전축(電蓄) -1972년 -김영
1971년 11월 12일 베를린 템펠호프空港에 도착하여 간호사생활을 시작했던 김영씨가
1972년 큰마음 먹고 구입한 전축으로, 당시 古典音樂을 감상하기 위한 축음기는 간호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김영씨가 처음 구입한 古典音樂 音盤은 베토벤 음악이었으며, 1984년까지 이 전축을
사용했다.
(30) LP레코드판-기차표
=LP레코드판 -1960년대
왼쪽부터 바하-챠이콥스키-베토벤의 음악 LP(Long Play)Record 판이다.
*派獨 간호사들이 어려움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클래식 음악을 선택한 것은 그들의
知的 水準이 높고 趣味도 高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큰 사진은 당시 가장 名聲이 높았던 ‘도이취 그라마폰’에서 제작한 LP레코드판이다.
LP레코드판은 아날로그 音源 貯藏裝置인 蓄音機 音盤의 標準 중 하나로 1948년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개발했으며, 33⅓RPM의 연주시간 25~30분의 演奏가 가능하여 얼마 있지
않아 음반산업 전체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그전에는 한쪽 면의 연주시간이 약 5分인 78RPM의 SP레코드판(Standard Playing Record)을
사용하였으나 LP레코드판 등장 이후 1961년부터 제작하지 않았다.
*LP레코드판을 보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高校 3학년 때 같은 반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구 尹君 집에 가면 전축과 LP레코드판이
많이 있어 친구와 같이 클래식 음악을 듣던 생각이 난다.
특히 世界四大交響曲(베토벤의 ‘運命’, 슈베르트의 ‘未完成’, 챠이콥스키의 ‘悲愴’, 드볼작의
‘新世界로부터’)을 비롯하여 베토벤의 교향곡 英雄(#3), 田園(#6), 合唱(#9)과
피아노協奏曲으로 베토벤의 皇帝(#5), 챠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1812년 序曲’은
물론 오페라 ‘라 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구노의 ‘아베 마리아’, 파우스트의
‘兵士들의 合唱’, 아이다 중 ‘凱旋行進曲’, 그 외에도 ‘히브리 奴隸들의 합창’,
‘대장간의 합창’등을 즐겨 들었다.
*1950년대 말~1960년대에 가정집에 전축이 貴해 서울에서 古典音樂을 감상하려면
‘르네쌍스’, ‘디 쉐네’ 등 音樂鑑賞室에 가서 듣고 싶은 曲을 신청해 들었었다.
=기차표 -1969년
프랑크푸르트 마인츠에서 출발하여 서독의 여러 지역들을 여행할 때 이용한 기차표.
(31) 송금명세서-은행청장-송금통장-서적(왼쪽부터 시계반대방향)
많은 간호사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독일 행을 택했기 때문에 送金이나 貯蓄은 독일생활에서
가장 중요했다.
위의 서적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生의 한 가운데’와
하인리히 테오도르 뵐(Heinrich Theodor Böll)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다.
(32) 노동증명서-노동허가서
=노동증명서 -1981년
베를린 크로이츠區廳에서 1973~77년 각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과
그 후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한 경력을 증명하는 증명서로 독일에서
직장을 옮길 때 매우 중요하게 사용한 증명서이다.
=노동허가서 -1971년
獨逸勞動廳에서 1972.09.01~1973.08.31까지 병원근무를 승인한
노동허가서.
(33) 여성수첩-韓獨 문화교류협회 회원증-선녀골에서의 생활-디아콘 모임 뱃지-세계여성대회
참가사진(앞 왼쪽에서 시계반대방향)
=디아콘(Diakon)은 改新敎 사회복지서비스 단체이다.
(34) 産母수첩(왼쪽)-김순임 양육사진, 자녀교육용 자료(위)
=김순임 養育사진 -1980~90년대 -김순임
독일에 사는 英國人과 결혼하여 아이들에게 어떤 正體性을 심어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한국을 떠난 지 10여년만에 고향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한국의 外家를
소개하고, 사물놀이를 통해 한국문화를 접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된 후 2년간 한국에 머물며 한국사회를 체험하기도 했다.
(35) 정현옥 결혼 및 양육사진 -1970~80년대 -정현옥
1970년 베를린 시립병원 이비인후과 간호사로 근무하다 환자로 왔던
독일인 대학생을 만나 1975년에 결혼하였다.
1980년 한국의 친정을 방문하여 남편의 申告式을 했다.
(36) 독일통일과 베를린
(37) 공연 의상(公演 衣裳) -1985년 -안차조
‘工場의 불빛’ 공연 당시 입었던 女工의 옷과 頭巾이다.
(38) 남은 이들과 돌아온 이들
(39) 在獨 韓國 看護女性 25주년 기념행사
=在獨 韓國 看護女性 25주년 기념행사 포스터 -1990년 -在獨 한국여성모임
=한국간호여성 派獨25주년 기념행사 자료집 -1990년 -在獨 한국여성모임
=在獨 한국여성모임 30주년 소식지 -2006년 -在獨 한국여성모임
(40) 한인간호사 독일파견 50주년 기념자료집 -2016년 -在獨 한국여성모임
2016년 4월 프리드리히-에버트 財團, 베르디(Verdi), 在獨 한국여성모임, 韓獨協會가
공동 주최한 토론회 자료집이다.
독일에 온 한국 간호여성들의 50년 경험과 미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41) 김순임 씨 고향방문 사진
김순임씨는 1944년 전남 長興에서 태어나 光州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6년 파독 간호사로 프랑크푸르트 시립병원 간호사, 1970년 베를린병원으로 옮겼다.
1979년 영국출신 대학동료와 결혼, 그 후 이혼했다.
사진 속 장소는 分斷都市였던 베를린의 역사적 遺産인 障壁 앞이다.
김순임 씨는 어릴 때 배웠던 우리 童謠를 두 子女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42) 기념사진
(43) 相互文化社會의 여성들
(44) 韓國으로 歸還
(45) 간호사신문 -2016년 5월 5일자
派獨 看護師 50주년 기념행사 및 특별전시회 –대한간호협회
(46) 韓國에 돌아 온 看護女性들
(47) 박정숙 여사의 회고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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