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발굴한 사료가 있기는 한데, 새로 글을 쓸 여력이 없군요.
그래서 기존에 내가 쓴 글
내 책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의 "고구려에서 불교는 어떠했나(304-308) 편과
고구려 고분벽화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호태 님의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박사학위 논문(책으로도 나옴) 3장 2절 불교의 전생적 내세관 수용과 벽화 편을 소개할테니까 참고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글만이 아니라, 먼저 원전이 되는 두 책의 원문을 보기 바랍니다. 내 책은 초고를 올린 것이고, 전호태 님의 책에는 주)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두 다 그림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 에서
고구려에서 불교의 역할은 어떠했을까.
불교가 고구려에 정식으로 들어온 것은 372년의 일이다. 그 이전에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고구려 사회에서 불교가 하나의 발언권을 가지게 된 것은 372년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한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 평양에 9개 절이 세워지고, 각종 불상들이 만들어졌으며, 해외로 진출하여 이름을 떨친 여러 승려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불교가 전파될 시기 고구려는 급속히 영토가 증가하였고, 새로이 이민족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레기의 필요성에서 불교의 보급을 필요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처럼 임전무퇴(臨戰無退)로 대표되는 호국불교적인 역할은 고구려에서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시절 크게 발전하던 시기에 내세운 것은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한 고구려의 천하관, 천손의식이었지, 불교는 아니었다.
한국고대사에서 불교의 역할을 크게 본 것은 불교가 도입되면서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서구의 국가이론을 받아들여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가 도입되기 전의 역사는 국가도 아닌 시대, 즉 삼국시대가 아닌 원삼국시대로서 때로는 믿을 수 없는 시대로 본 적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개념이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의 도입으로 인해 한국사에 대한 인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잘못된 인식을 낳게 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늦어도 태조대왕대 고대국가가 완성되었으며, 위만조선의 경우는 이미 고대국가의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불교가 도입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대국가의 운영이념은 불교는 아니었다. 중국의 경우 불교 이전에 이미 고대국가가 형성되어 진(秦)․한(漢)제국을 만들지 않았던가.
이처럼 불교에 대한 과잉 기대와 평가는 고구려 사회에 대단히 큰 불교적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낳았다. 그러나 유물로 여러개의 불상과 절터 유적지가 남아있는 것은, 불교가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신앙되었기 때문에 잘 남아있던 것이지, 남아있는 유물이 많고 적음이 곧 당시 불교의 세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거칠부열전〉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혜량(惠亮) 법사는 신라의 첩자로 고구려에 밀파된 거칠부에게 자신을 신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한다. 고구려에서 불교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삼국유사』〈보장봉노보덕이암〉조는 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普德)화상이 절을 남쪽으로 옮긴 사연을 전하고 있다. 보장왕은 절을 도관(道館)으로 만들며 불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보덕화상이 남쪽으로 옮겨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후대에 가면 고구려에서 불교는 백제와 신라와는 달리 냉대를 받았다.
고분벽화에서는 유독 장천1호분의 벽화에만 불상과 보살상이 보인다. 그런데 혹자는 불교적 내세관이 고구려인의 내세관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장천1호분의 불상은 무덤의 중심주제가 아니므로, 불교적 내세관의 영향이 결코 큰 것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다. 장천1호분의 불상은 주인공을 보호하는 수호신령의 위치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앞방의 정면 천장 1단에 그려진 그림은 좌대에 앉아있는 사람을 향해 두 사람이 절을 하는 모습이다. 좌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많은 이들이 불상으로 본다. 이것이 고분벽화에서 유일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무덤내부에 불상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좌대에는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다. 5세기 중엽까지 중국의 불교는 북두칠성 신앙을 받아들여 체계적인 교리로 만들지는 못했다. 중국의 불교를 수입한 고구려에서 먼저 북두칠성과 불교를 연결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이것은 순수 불교적 자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좌대에 앉아있는 사람은 무덤 주인공이고, 절하는 사람은 그의 후손들로 보인다. 좌대 위 주인공 위에 그려진 부처의 얼굴이 진짜 부처라고 생각된다. 결국 이 그림은 부처가 무덤 주인공의 수호신령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내세관이 고분벽화에 크게 반영되었다고 또다른 증거는 연꽃이다. 그렇지만, 연꽃은 불교 이전에 태양을 상징하는 무늬였다. 태양을 상징한다는 것은 고구려의 고유종교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고구려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오회분4호묘의 경우를 보자. 여기에도 연꽃이 등장한다. 그러나, 연꽃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든 쉽게 불교의 영향을 찾기가 힘들다. 불교의 비천상, 불교의 음악을 연주하는 보살이 있다고 보지만, 차라리 그것은 『동명왕편』에 보이는 고구려 자체의 음악을 연주하는 신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와 유교, 도교, 고구려의 고유종교 사이에는 인간이기에 갖는 기본적인 공통의 요소들이 있다. 음악, 춤, 하늘세계에 대한 희망섞인 관념 등 그것이 표현되는 것의 차이가 크게 다른 것도 있지만, 표현되는 방식이 같은 것도 있다. 이것이 불교에도 있다고 먼저 불교의 것으로 보려는 시각은 고쳐져야 한다. 하나의 무덤내부에 그려진 벽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를 전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는 화장한 뼈를 단지에 넣어 묻은 무덤들이 부여지역에 중정리 1, 2, 3 호분을 비롯한 여러 무덤이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는 문무왕이 직접 무덤이 의미가 없다며,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신라에는 화장무덤이 여럿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와 같은 무덤들이 발견된 바 없다. 불교의 영향이 강했다면 고구려에서도 화장한 흔적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고구려에서 불교의 역할은 작은 것은 아니다. 고구려 후기 수도로서의 역할도 했던 대성산성 내부의 궁궐터에서는 작은 불상이 발견된 바 있다. 궁궐 내부에서 개인 신앙으로 불교가 숭배되었다는 증거다. 이것은 고구려의 신앙에서 부족했던 교리상의 약점을 불교가 보완해 주었기 때문에 믿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 사회에 살던 이민족들에게 불교는 고구려 천신신앙보다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계속해서 불교를 믿었을 가능성도 크다.
또한 정릉사(定陵寺)라는 평양지역에 있던 절의 존재와, 오매리 절골터에서 나온 금동판에 ꡒ왕의 영령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을 만나 천손이 함께 만나 모든 생명의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ꡓ
라는 문장은 불교가 천손이라고 여겨지는 고구려 최상위 지배층의 신앙생활에 까지 깊이 있게 영향을 미쳤던 증거다. 무속과 한국불교의 관계, 일본의 신도(神道)와 불교처럼 고구려에서도 양자간에 어떠한 관계가 정립되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또한 불교가 탄압받았던 이유도 고구려 불교의 특징과 함께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 전호태 박사논문 3장 2절 @
2.佛敎의 轉生的 내세관 수용과 고분벽화
1)불교수용과 王權
기록상 고구려에 불교가 公傳된 해는 372년이며, 전래자는 前秦王 符堅이 보낸 僧 順道이다. 부견은 前燕을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北中國을 통일한 직후 고구려에 승려 順道와 佛像, 經文 등을 보낸다. 이것은 부견 자신이 佛法에 심취했던 인물이라는 종교적 측면 뿐 아니라 당대 東아시아의 정치․외교적 관계에 대한 깊은 고려가 깔린 행위였으며, 따라서 고구려의 반응 또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고구려가 전진에 의한 불교의 공식적인 전래를 환영한 데에는 北中國의 지배자가 된 전진에 대한 외교적 반응이라는 측면 외에도 고구려 자신의 필요성이라는 측면도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는 소수림왕의 통치 초기는 太學設立, 律令頒布 등 국가체제의 재정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故國原王代에 前燕, 百濟와의 충돌에서 겪은 대내외적 위기의 경험은 통치기구의 동요와 사회 불안을 초래하였고, 이는 고구려 사회 전반의 재정비와 새로운 정신적 구심점의 설정을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한편으로는 정치체제의 재편이라는 제도적 측면의 권력행위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전반의 정신적 통합을 가능케 하는 보편적 관념체계의 수립 혹은 제시로 이에 답한다. 兩者는 상호 표리를 이루며 추구되는데, 소수림왕 즉위 초기 일련의 기록에서 이러한 면이 잘 드러난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고구려의 불교수용의 의미는 좀 더 명확해진다. 고구려의 공식적인 불교수용에는 국가권력의 필요라는 측면이 깊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이전의 중국이나 후대의 新羅와는 달리 불교수용에 이은 기록들이 僧 阿道의 입국, 佛寺의 창건 등 불교 전파에 관한 것들일 뿐 불교전래를 둘러싼 재래신앙이나 기존 보수세력과의 갈등에 대해서는 담고 있지 않아 눈길을 끈다. 이것을 傳來記錄의 부실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실제 공식적인 전래 단계에서는 더이상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곧, 불교의 공식적인 전래 이전에 이미 고구려 안에서 불교에 대한 나름대로의 일정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전래된 새로운 신앙체계로서의 불교와 기존의 전통신앙이 적절한 타협과 조절을 이루었다면 새로운 갈등이 초래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실제적인 전래가 小獸林王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을 전제로 하는데, 실제 이와 관련한 언급은 학계에서도 이미 여러 번 있었다. 학계에서 주목하였던 문헌기록과 아울러 당시의 정황적 측면을 함께 검토하면 아래와 같다.
현재까지 372년 이전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주장하는 논거로 자주 제시되는 기록으로는《梁高僧傳》에 전해지는 支遁 道林이 고구려 道人에게 보낸 편지를 들 수 있다. 만일 이 도인이 고구려인 승려를 지칭한 것이라면 그가 비록 이 당시 중국내에서 활약하였다 하더라도 적어도 4세기 전반기에는 이미 개별적인 형태로나마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외에도《三國史記》에는 고구려의 불교수용과 관련되어 참고할 만한 기사가 몇 군데 보이는데, 美川王이 後趙王 石勒에게 楛矢를 보냈다는 기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기사는《資治通鑑》의 後趙가 고구려와의 연합을 제의하는 기사와 함께 주목되는데, 후조에서 흥륭하던 불교가 고구려 사절에게 見聞되고, 일정량의 상품교역과 문화교류를 겸하던 당시의 사절교환과정에서 私的인 형태로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상정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北中國의 혼란으로 말미암은 流移民의 발생과 이들의 고구려에의 유입과정에서 이들이 지닌 문화의 일부로 魏․晋이래 중국에 유행하던 불교가 함께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고려된다.
이런 측면에 더하여 漢이래 중국의 강한 영향 아래 있던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한 樂浪과 재령강유역의 帶方을 통한 불교의 유입도 고려할 만하다. 실제 이같은 가능성은 357년경 제작된 안악3호분 벽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기 以前 대방군의 일부였던 재령평야가 바라보이는 구릉지대에 축조된 안악3호분은 무덤칸의 대규모 행렬도로 특히 유명하다. 앞방 안벽부분의 8각돌기둥의 머리부분 및 좌우 곁칸의 정면 무덤주인좌상이 위치한 帳房 위 양 모서리와 가운데에 각기 측면연꽃문이 그려졌으며, 널방천정 한가운데에는 활짝 핀 연꽃이 묘사되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벽화가 幽界美術임을 고려할 때, 이미 4세기 중엽 이전에 안악을 포함한 이 일대에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왜냐하면 불교문화적 요소가 내세관의 표현인 무덤칸 벽화의 일부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이전에 現世에서의 불교와의 접촉이 상당한 기간동안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양 및 안악을 포함한 舊漢郡縣地域에의 불교전래 및 수용이 4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고구려인의 불교와의 접촉은 직접적인 기록의 不傳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상황적 조건으로 보아 적어도 4세기 중엽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 구체적 영향은 고분벽화에도 반영되었음을 알아보았다. 따라서 소수림왕대의 불교의 公傳, 승려의 잇따른 입국, 계속된 佛寺의 창건이 기존 보수세력의 큰 반발 없이 진행된 것은 이전부터의 불교와의 非공식적이고 개별적인 접촉과 불교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4세기 당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의 성격은 어떤 것이며, 이에 대한 국가권력의 이해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또 소수림왕대 이후 보이는 국가의 적극적인 불교장려정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더하여 이들의 사회적 영향은 어떠하였으며 새로운 불교적 내세관의 확립과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먼저 국가권력의 불교 이해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살펴 보자.
소수림왕을 이은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일련의 영토확장정책과 불교장려정책을 병행한다. 이것은 소수림왕대의 율령반포를 비롯한 전반적인 정치체제의 정비 및 불교수용과 공인에 의한 정신적 구심점의 제시라는 兩軸的 통치방식의 연장이며 당대 고구려 국가권력의 불교에 대한 이해방식을 파악하는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故國壤王의 즉위초인 385년부터 고구려는 요동에 남아있던 중국세력의 축출을 시도하고, 이어 後燕의 慕容氏와 요하유역을 놓고 다툰다. 또한 幽州․冀州等 북중국일대의 유민을 招諭하면서 북중국으로의 진출을 기도하며, 보다 나은 생산력의 확보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佛敎崇信을 下敎하고, 國社를 세우고 宗廟를 수리하는 등 불교를 확산시키고 제례를 정비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이다. 고국양왕대의 이같은 흐름은 廣開土王代에도 그대로 이어져 광개토왕은 後燕등 주변세력과의 무력충돌을 계속하면서, 평양에 9寺를 창건하는 등 영토확장의 시도와 불교흥륭정책을 동시에 펴나간다. 이것은 국가권력이 정치과정과 불교홍포 등 종교․사상정책을 밀접히 관련시켜 이해하였음을 알게 한다.
4세기말 이후 고구려의 급속한 대외팽창은 통치영역내에 다양하고 異質的인 여러 형태의 사회를 포함시키게 하였고, 이들 사회가 보이는 分散性과 地域性은 고구려에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였다. 즉 고구려에는 새로운 통치지역을 포괄하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편제 및 지배방식이 요구되었으며, 동시에 이것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보편적인 관념체계의 제시가 필요하였다. 지방 및 지역집단의 編制는 律令의 탄력적인 운용에 의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지역이나 종족간의 문화․사회적 異質性의 統合과 왕을 정점으로 한 피라밋적 신분질서의 유지에는 강한 종교성에 기반을 둔 보다 보편적인 관념체계가 요구되었다. 이같은 과제에 직면한 국가권력의 눈길을 끈 것이 불교의 논리였던 듯하다.
불교는 인간의 근본적인 平等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三世因緣說과 六道輪廻說 등을 통해 宿世의 인연에 의해 現世가, 현세의 業과 숙세로부터의 인연에 의해 내세의 삶이 결정되며, 궁극적인 깨우침을 통해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世世의 삶은 轉生한다는 그 자체로서는 매우 합리적인 논리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같은 설명은 逆으로 현재의 신분체계 곧, 왕을 정점으로 하는 差別的 사회질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에 논리적 근거로 제시될 수도 있다. 나아가 필요에 의해 현실세계의 신분질서를 佛을 정점으로한 불교의 차별적 득도체계에 대비시켜 주장할 소지도 안고 있는 논리이다. 고구려 국가권력의 관심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 두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교리의 원용은 6세기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를 통해 중국문화와 접하고,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 아래에 있던 新羅에서 그 흔적이 보인다. 신라의 적극적 팽창기인 眞興王代에는 王과 貴族의 현재가 과거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자를 金輪, 銅輪이라고 불러 왕을 轉輪聖王의 現身으로까지 주장한 흔적이 보인다. 후에는 이러한 사고가 보다 진전되어 新羅佛國土論을 주장하는데에 이르기도 한다. 신라 뿐아니라 중국에서도 불교 교리를 현재에 원용시키는 모습이 보인다. 北魏의 경우, 高僧 法果가 皇帝卽如來說을 주장하고, 한 차례 廢佛을 겪은 후인 5세기 후반에는 大同 雲岡에 曇曜五窟을 개착하면서 북위 五代帝王의 얼굴을 불상의 얼굴로 조각하기도 한다.
그러면 고구려에서도 신라나 북위와 같은 시도가 있었을까. 국가에 의한 불교장려가 왕을 중심으로한 중앙으로의 권력집중, 왕권강화로 상징되는 국가권력의 증대 시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까. 이같은 의문을 염두에 둘 때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5세기 고구려의 사회적 과제에 대한 국가의 대응방식으로 이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5세기 고구려의 金石文에서 확인되는 高句麗的 天下意識의 성립과 전개이다. 전통적 東明神話를 기반으로 형성된 이 고구려 중심의 天下意識은 5세기를 전후로 고구려에 편입된 새로운 영토지배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 줄 뿐아니라, 왕권의 신성성 혹은 초월성을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왕은 天帝之子이며 日月之子인 東明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이러한 의식은 5세기의 東아시아에서 고구려의 힘과 지위에 의해 보다 확고히 고구려사회 안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國家祭儀의 체계화와 朱蒙信仰의 확산을 들 수 있다. 국가 주도의 제의의 체계화는 이미 고국양왕 9년부터 이루어지며, 주몽신앙의 확산은 이와 맞물려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적극적인 불교장려정책의 시행을 들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불교와 재래신앙의 갈등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佛法崇信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며, 평양에 9寺를 짓는 등 대규모 사찰을 조성하여 불교신앙의 확산을 도모하고 있다.
이처럼 5세기의 고구려에서 고구려 중심의 天下意識이 성립, 전개되고, 주몽신앙의 확산과 불교의 관념체계 전파가 동시에 추구된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4세기 이래 고구려의 성장과정에서 제기된 제반 과제 가운데 이념적 측면의 대응은 왕권의 신성성과 佛의 권위를 함께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왕권의 신성성과 초월성이 불교교리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 즉 현세의 왕권을 宿世因緣의 果報로 이해하고, 나아가 왕은 ‘佛의 절대적 권위를 현세에서 구현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주장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실제 천하의식을 바탕으로 왕권의 절대화를 추구하던 5세기의 고구려에서 이러한 논리가 주장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무덤칸의 내부가 ‘王’字文과 연꽃문으로 장식된 桓仁 米倉溝 將軍墓가 始祖 東明聖王墓로 추정되는 점은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끈다.
왕권과 불교와의 관계에서 눈길을 끄는 또하나의 사실은 평양 9사의 창건과 평양천도이다. 평양 9사의 창건에서 평양천도까지는 30년 가량의 時差가 있으나, 평양천도를 위한 준비의 일환이던 大成山城과 安鶴宮의 축조가 이미 4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것으로 보아 9사의 창건도 이와 관련된 행위로 보인다. 9사의 창건은 왕권을 불교교리와 연관짓던 사고와 관련된 듯하다. 長壽王에 의한 평양천도는 여타의 정치․경제적 목적 외에 佛寺로 둘러싸여 佛力의 보호를 받는 새로운 王都로의 遷都라는 의미도 함축한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평양천도 이후, 40여년만에 행해지는 大臣强族의 제거는 이같은 형태의 왕권강화 시도에 반대하던 세력, 곧 집안에 기반을 둔 전통적 보수세력의 도태와 관계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전과는 다른 시대의 개막, 즉 불교교리의 원용을 통해 강화된 王者의 권위, 동명신화 및 천하사상에 의해 획득한 왕권의 신성성이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사회의 전개라는 해석도 가능할 듯하다.
이같이 고구려에 수용된 불교교리가 지니는 합리적이면서 二元的인 측면 처음부터 국가권력의 눈길을 끌어 왕을 정점으로한 국가지배질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에 이용된 것으롤 보인다. 동시에 불교는 고구려사회 諸계층의 현실인식을 논리화시키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개인의 사회에 대한 이해가 현실을 주어진 그대로 수용하게 하는 차원이었다면, 불교는 이것을 業說과 因果論에 의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인식으로 유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세의 길흉화복이 祖上神 및 諸神과의 관계성에 의해 결정되며 때로는 이것조차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제는 개인의 善業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가 제시됨으로써 고구려인의 사회인식과 활동이 좀 더 적극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불교의 輪廻轉生觀은 현실의 강한 신분적 제약이나 사회적 차별의 극복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일반 民의 입장이나 귀족의 입장 모두에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지배층의 입장에서 불교는 자신의 현세에서의 위치를 정당시해주며 현세의 지위와 富는 내세를 보장받기 위한 경쟁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해주므로 수용할 만한 종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국가에 의한 불교장려는 불교를 비교적 빨리 고구려사회 전반에 확산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4세기 이래 계속된 華北胡族國家群의 佛敎崇信과 화북지역의 불교화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이같은 흐름을 배경으로 성립한 고구려인의 새로운 불교적 내세관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 것일까. 앞 시기의 계세적 내세관과 새로운 불교적 내세관의 실질적이고 구조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재래의 계세적 내세관은 이후 과연 어떤 형태로 섭화되고 남게 될까. 새로운 내세관의 성립은 결국 어떤 의미를 지닐까.
2)벽화와 轉生的 來世觀
(1)연꽃과 불교
불교적 의장에 번번히 쓰일 뿐 아니라 佛의 상징으로도 잘 알려진 연꽃이 불교 성립 이전부터 이집트․인도․중국 등지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받고 건축, 기물, 의복 등에 도안․장식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집트에서 水蓮은 태양과 같이 생명의 근원이자 再生을 상징하는 식물로 인식되었다. 연꽃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그린 대영박물관 소장의 한 파피루스문서는 이집트인의 이같은 연꽃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 가운데 하나이다.(圖3-1) 인도에서도 연꽃은 신성한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어 Veda에는 여러 神과 동물들이 연꽃과 관련하여 노래되었다. Mahavarata의 天地創造說話에서는 창조의 神 Brahma가 광명의 神 Visinu의 배꼽에서 피어난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인도나 이집트에서 연꽃을 생명탄생과 관계된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은 꽃의 開花가 태양빛의 존재 여부와 밀접히 연결되는 蓮의 생태 때문이다.
이집트, 인도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연꽃이 태양이나 그 상위의 존재인 天帝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쓰일뿐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태양과 생명창조를 연계하여 인식하지 않은 때문이다. 중국에서 연꽃을 생명창조와 관련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은 연꽃을 빛의 상징이자 生命의 根源으로 보는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이다.
본래 인도인의 토속신앙에 뿌리를 둔 빛과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연꽃인식이 불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불교성립기부터이다. 불교는 성립기부터 인도 고유의 토속신앙적 요소를 가능한 자연스럽게 교리 내에 溶解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의 일부로 수용된 연꽃에 대한 인도인의 토속적 관념은 불교교리와의 적극적 결합을 통해 오히려 불교교리의 설명을 위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연꽃에 대한 기존의 관념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원용된다. 불교교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비유의 도구로 거론되는 경우와 불교교리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의 하나로 자리잡는 경우가 그것이다. 연꽃이 비유의 도구로 쓰인 대표적인 용례로는 ‘迦葉의 미소’로 잘 알려진 釋迦說法 중의 한 逸話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연꽃은 번뇌의 바다에서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에 이르른 수도자의 모습에 비유되었다. 유사한 비유는 불교경전 속에서 자주 보인다.
佛敎에서의 연꽃에 대한 기존 관념의 위의 두 가지 원용방식 가운데 보다 중요시되는 것은 연꽃인식이 불교교리의 일부로 자리잡은 경우이다. 대표적인 것이 연꽃을 빛과 생명의 상징, 혹은 근원으로 보는 인도 토속적 연꽃인식의 수용이다. 창조의 神 브라흐마를 탄생시킨 광명의 神 비쉬누와 같이 佛은 無量의 빛을 내는 존재로 인식되고, 佛에서 나온 빛은 연꽃으로 표현된다. 이 연꽃 하나하나에서 佛이 탄생한다는 無限創造의 관념이 불교에서 성립되는데, 이러한 관념 성립의 기본 매개고리가 연꽃에 대한 기존인식이다. 불교에서도 연꽃은 빛․생명․창조세계의 기본도구이자 그 근원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빛의 상징이자 생명의 근원인 연꽃은 淨土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여 흔히 天上寶蓮의 약칭인 天蓮 혹은 寶蓮이라 한다. 佛의 臺座로 쓰이는 大蓮이나 天人들이 佛을 공양할 때 흩뿌리는 연꽃은 모두 이 天蓮이다. 불교에서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능력은 淨土의 蓮에만 있는 고유한 특성이며 정토의 모든 존재는 이 天蓮에서 난다고 설명한다. 創造神을 낳는 地母神의 태반과 같은 존재이던 蓮이 불교에서는 그 위치가 보다 격상된 것이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보다 발전되고 체계화된 연꽃인식은 大乘佛敎 성립 이후 불교교리의 일부로서 불교와 함께 東아시아에 전래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 1세기경부터 중국의 畵像石墓나 銅鏡에는 고유의 神像에 본을 둔 佛像이 새겨지는데, 대개 手印, 肉髻, 蓮花座 등의 특징 有無로 중국 전래의 神像과 구별되었다. 이전에는 天帝를 상징하거나 태양을 나타내는 존재였던 연꽃이 이제는 佛과 관련된 존재로 중국인에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전래 이후, 중국에서는 연꽃을 천제나 태양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는 기존 관념과 직접 佛을 나타내거나 정토세계의 여러 존재를 탄생시키는 불가사의한 존재로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이 병존하며 상호영향을 주게 되었다. 酒泉嘉峪關丁家閘五號墓 무덤칸 천정에 그려진 연꽃은 무덤칸 천장고임부 동측과 서측에 東王父와 西王母가 각각 묘사된 것으로 보아 하늘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天帝를 표현한 것으로 중국 전래의 연꽃인식을 반영한 경우로 해석되며, 三國期 夔鳳鏡에 보이는 연꽃은 佛을 탄생시키는 존재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중국에서 석굴사원이 본격적으로 조영되는 4세기 중엽경의 유물․유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표현된 연꽃이 반드시 불교적 표현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하겠다. 漢代까지 형성된 기존의 연꽃관념이 불교와 관련 없이 개별적으로 표현될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연꽃인식이 佛敎의 天蓮이라는 보다 확대된 개념의 일부로 흡수되어 들어가는 것은 5세기 중엽경 北魏의 석굴사원 조영기 전후인 듯하다. 왜냐하면 5세기에 일어나는 新天師道의 北魏國敎化, 太武帝의 廢佛令, 廢佛令撤回와 佛敎再興, 雲岡石窟 開鑿과 같은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 재래의 여러 神들은 도교의 神이나, 불교의 神으로 모습이 바뀌며, 연꽃은 더이상 天帝나 태양을 상징하기보다는 佛에서 발하는 빛을 나타내거나 淨土化生의 母體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진 불교가 동방의 고구려에 公式 傳來되는 것은 기록상 372년이다. 그러나 前秦 이전부터 활발하였던 고구려와 북중국의 여러나라간의 人的․物的 交流라든가, 고구려 道人에게 보내는 東晋僧 支遁道林의 편지, 고구려 세력권 안에 있던 낙랑군의 역할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에의 실제적인 불교전래는 前秦의 승려 파견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357년경 제작된 안악3호분 벽화 중의 연꽃표현은 불교와의 관련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렇다면 안악3호분에 그려진 연꽃은 과연 불교와 관계된 표현일까. 혹 불교의 天蓮槪念의 구체적 표현은 아닐까. 안악3호분 이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는 연꽃표현과 안악3호분의 그것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하에서 고분벽화에 연꽃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안악3호분 이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연꽃표현의 사례를 표현기법, 벽화 안에서의 위치와 비중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의미를 이해해 보기로 하자.
(2)고분벽화의 연꽃표현
가.4세기의 연꽃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축조연대가 뚜렷하고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벽화와 함께 墨書銘이 발견된 安岳3號墳이다. 357년경 축조된 안악3호분의 벽화는 방대한 규모와 세련된 필치로 말미암아 발견 당시부터 세인의 눈길을 끈 작품이다. 주인공의 國籍에 대한 논란에 관계없이 작품의 규모,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고분벽화가 제작되는 것은 안악3호분벽화가 그려지는 4세기 중엽 훨씬 이전부터인 듯하다. 안악3호분 벽화 외에 4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평양, 안악지역의 고분벽화로 편년상 학자간의 異見이 거의 없는 것으로는 高山洞20號墳, 台城里1號墳, 鳳城里壁畵墳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연꽃이 표현된 벽화고분은 태성리1호분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발견된 4세기 제작 벽화고분중 연꽃표현 고분은 안악3호분과 태성리1호분 2기인 셈이다. 백회가 심하게 떨어져나가 龕室과 널방 일부에만 벽화가 남아 있는 태성리1호분의 경우, 연꽃은 널방 네 벽모서리에 그려진 자색기둥의 머리부분을 장식하였다. 기둥머리의 연꽃은 측면에서 본 형태를 간결히 묘사한 것으로 형식적으로나마 꽃술이 투시되었으나 받침줄기 등은 그리지 않았다. 벽모서리 기둥머리 외에도 연꽂이 그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벽화가 그려진 부분이 떨어져나가 알 수 없다.
벽화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안악3호분에는 무덤칸 곳곳에 여러 가지 형태의 연꽃이 그려졌다. 앞방과 회랑에 세워진 8각돌기둥머리에는 태성리1호분의 것과 달리 꽃잎이 아래로 제껴진 상태의 연꽃측면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무덤주인부부초상이 자리한 앞방 서쪽 곁칸에는 연꽃과 연봉오리가 그려졌다. 연꽃은 무덤주인부부가 앉은 서쪽 곁칸 오른벽과 앞벽 장방 덮개의 중앙에, 연봉오리는 장방덮개의 양 모서리를 장식하였다. 여주인 장방덮개의 연꽃은 꽃잎형태만 나타낸 반면, 남주인 장방의 연꽃은 좌우에 꽃받침까지 표현하였고, 장방 양 모서리의 연봉오리는 내부에 숨겨진 두 개의 타원형 씨앗과 같은 것을 상정하여 이를 투시하였다. 널방 천정 한가운데에는 활짝핀 연꽃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16장의 꽃잎이 8엽겹꽃의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꽃잎 바깥부분이 넓고 잎 끝이 뾰족하다. 꽃잎마다 5개씩의 암․수꽃술을 나타내어 실물과 같은 느낌을 주고자 하였으나, 꽃잎 바깥부분의 2重弧線, 꽃잎과 꽃잎 사이를 나눈 수직선이 꽃심 건너 수직선과 이루는 對稱性, 직선과 호선이 어색하게 맞닿아 이룬 꽃잎의 모양 등에서 오히려 도안적 느낌이 강하게 전달된다. 안악3호분 및 태성리1호분벽화에 표현된 연꽃의 형태와 무덤칸 안에서의 위치를 정리하면 표3-3)과 같다.
표3-3) 4세기 고분벽화의 연꽃표현
이처럼 연꽃은 고구려의 초기 고분벽화에 속하는 안악3호분 및 태성리1호분벽화에서부터 나타나며 그 형태도 여러 가지이다. 평면연꽃, 측면연꽃, 연봉오리가 무덤칸 천정, 벽, 기둥에 고르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이미 4세기 중엽경에는 연꽃표현이 소개와 수용의 기간을 거쳐 어느 정도 일반화되고 있음을 뜻할 수도 있다. 만일 이어지는 시대, 곧 5세기에 이같은 연꽃표현이 계승․발전되어 보다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면 이것은 앞시기부터의 연꽃표현의 수용과 보급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하에서 5세기 고분벽화에서는 연꽃표현이 어떠한 양상을 띠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5세기의 연꽃
가)집안계열 고분벽화의 연꽃
5세기로 편년되는 40여기의 벽화고분 가운데 연꽃그림이 남아있는 고분은 30기 가량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집안지역의 것과 평양지역의 것이 표현기법과 내용구성에서 여러 가지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데, 연꽃표현의 경우 그 相異性이 보다 뚜렷하다. 앞의 30기 가운데 집안계열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15기이며, 이 가운데 2기는 평양지역에 소재한 벽화고분이다. 지리상 평양권에 속하는 연화총과 천왕지신총 벽화를 집안계열로 분류한 것은 벽화의 연꽃이 형태상 평양계열보다는 집안계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절에서는 집안계열 고분벽화의 연꽃표현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舞踊塚壁畵>
5세기 집안계열 고분벽화 가운데 제작시기가 비교적 앞서는 것으로 벽화에 표현된 연꽃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연꽃은 꽃이나 봉오리가 독립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잎과 줄기를 수반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널방 천장고임 제1층부터 천정석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묘사․배치되었다.
연봉오리는 널방벽과 잇닿은 천장부 평행고임 제1층 윗부분과 제2층 아래부분에 걸쳐 측면연꽃과 교대로 일정 간격에 1개씩 그려졌다.(圖3-2) 연봉오리는 안악3호분 벽화의 것과 같이 봉오리 내부에 각 1개씩의 타원형 씨앗을 품은 2개의 작은 봉오리가 담겨진 모습을 하였으며 밑부분에 끝이 휜 두 갈래 꽃받침을 지녔다. 일부 연봉오리에는 꽃받침 아래로 끝이 두 갈래 갈고리꼴 받침줄기가 더하여졌다. 각 연봉오리 아래에는 垂直 等間隔으로 작은 원점을 찍어 연봉오리가 하늘세계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였다. 이들 연봉오리는 평행고임 제1층에 일정한 간격으로 묘사된 세모꼴불꽃무늬나 연봉오리 사이로 배치된 측면연꽃보다는 조금 작으나 평행고임 제3층 이상의 神獸․仙人들과 거의 같은 크기로 표현되었다.
측면연꽃은 평행고임 제1층과 제2층에 걸쳐 묘사된 연봉오리 사이에 등간격으로 배치되었을 뿐아니라 평행 및 평행삼각고임 각 층의 天上存在들 사이사이에도 한 송이씩 그려졌다. 대개의 경우 이 연꽃들은 神獸․仙人들보다 크다. 천정석과 잇닿은 평행삼각고임 제5층 측면에는 일체의 천상존재가 생략되고 8송이의 측면연꽃만 표현되었다. 연꽃은 연봉오리와 같은 형태의 꽃받침과 받침줄기를 지녔으며 꽃술과 꽃잎맥이 투시되었고 꽃잎 끝이 뾰족하고 날카롭게 표현되었다. 연봉오리와 달리 꽃받침만 달린 연꽃은 보이지 않는다.
평면연꽃은 널방 천정석에만 보인다. 널방 천정석면을 가득 채우며 묘사된 이 대형연꽃은 중심부 백회가 떨어져나가 날카로운 꽃잎 끝만 남아 있다.
꽃․잎․줄기가 함께 그려진 경우는 평행삼각고임의 삼각석 밑면에서 찾을 수 있다.(圖3-3) 널방 천장고임부 각 삼각석 밑면에 한 포기씩 그려진 蓮의 한 가운데 줄기 끝에는 꽃받침이나 받침줄기가 없는 연꽃 한 송이씩 달렸고 양 옆줄기는 끝이 두 갈래로 나뉘어 그 끝에 연잎이 달렸다. 연줄기에는 등간격의 짧은 가로띠를 그려 넣어 마치 마디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줄기를 포함한 蓮의 묘사는 무용총벽화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들 蓮․연꽃․연봉오리 사이에는 각양각색의 天上神獸․仙人이 그려졌는데, 이들 중 일부는 연봉오리가 달린 연줄기를 손에 잡거나 부리에 물고 있다.
무용총의 앞방과 널방 네 벽, 앞․널방 사이의 이음길벽에는 생활풍속도 계통의 벽화가 그려졌으며 연꽃이나 연봉오리는 표현되지 않았다. 널방 안벽에 묘사된 무덤주인이 승려로 보이는 2명의 삭발손님과 대화하는 장면은 뒤에 논의될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연꽃의 성격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通溝12號墳壁畵>
통구12호분은 무덤길 입구에서 연결되는 독립된 두 개의 무덤칸이 한 봉토 아래 있는 벽화고분이다. 연꽃은 남․북 두 개의 무덤칸 모두에 표현되었다.
연봉오리는 무용총에서와 같이 독립된 형태가 아닌 줄기와 잎이 있는 蓮의 일부로 표현되었는데, 꽃받침은 무용총벽화의 갈고리꼴의 투박한 꽃받침 대신 봉오리 밑부분에 바짝 붙은 사실적인 형태로 묘사되었다. 봉오리 안의 암․수꽃술이 투시되었고 꽃술 끝에는 좌우로 더듬이와 같은 것이 뻗어 나온다.
측면연꽃은 고임부 각층 측면에 9개의 꽃잎을 지닌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꽃잎은 紅色이며 날카로운 잎끝은 검게 채색되었다. 무용총 벽화의 꽃잎선이 곧고 뻗뻗한 것에 비해 통구12호분 벽화의 연꽃잎은 중턱과 끝이 부드럽게 휘었다.
평면연꽃은 南室壁 윗부분에 일정간격으로 표현되었으며 천장고임부에는 보이지 않는다. 꽃잎 끝이 뾰족하며 紅․黃․黑色을 사용하였다. 꽃심에 구멍이 있고 쇠녹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꽃의 중심은 帷帳걸이용 못이나 고리가 박혔던 자리였던 듯하다.
잎․꽃․줄기가 하나로 된 蓮은 평행삼각고임의 삼각석 밑면에 그려졌다. 가운데 줄기에 연봉오리가 달린 것과 연꽃이 핀 두 종류가 있다. 제1층 삼각석의 蓮은 양 옆줄기에는 연잎, 가운데 줄기에는 연봉오리가 달린 모습이며, 제2층 삼각석의 경우에는 활짝 핀 9엽연꽃을 가운데 줄기에 단 형태이다. 제3층 삼각석에 그려졌던 蓮은 연꽃의 일부만 식별된다.
<三室塚壁畵>
삼실총은 거의 같은 크기의 무덤칸 세 개가 이음길에 의해 ‘ㄷ’자꼴로 이어진 특이한 무덤칸 구조로 잘 알려진 벽화고분이다. 무덤칸 벽화의 연꽃표현이 무용총이나 통구12호분 벽화에서보다 다양하다.
연봉오리는 독립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통구12호분 벽화에서와 같이 蓮줄기에 달린 형태로도 나타난다. 형태는 여러 가지로 꽃봉오리 상태에서 꽃잎이 피어나는 순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도 있고 몸체가 가는 물방울꼴도 있다. 앞의 무용총이나 통구12호분 벽화에서 보이지 않던 표현방식으로 神獸의 꼬리 끝을 연봉오리꼴로 나타낸 경우도 있는데, 봉오리 내부를 세 부분으로 나눈 방식이 무용총의 것과 유사하다.
측면연꽃은 제2실 천장고임부와 제3실 네 벽 및 천장고임부에 보인다. 제2실과 제3실 평행고임 제2층에 같은 간격으로 그려진 연꽃은 꽃잎에 꽃술이 투시되고 꽃받침과 받침줄기를 지닌 점은 무용총벽화의 연꽃과 같으나 무용총의 경우보다 표현이 간략하며 꽃잎이 살찌고 부드러운 형태를 하였다. 같은 층에 있는 어떤 연꽃은 꽃잎의 끝만 나타내고 꽃의 몸체는 선이 고르지 않은 타원으로 나타내었고 꽃술이 투시되지 않은 채 둔중한 느낌의 선으로만 꽃잎을 나타낸 경우도 있다. 제3실벽의 연꽃은 각벽에 1인씩 배치된 仁王形 力士의 가랑이 사이에 위치하였다. 연꽃의 기본형은 천장고임부의 것과 같으나 꽃의 몸체 중턱 아래 좌우로 모두 6개의 변형꽃받침이 달려 차이를 보인다. 꽃받침은 식물의 수염뿌리와 같은 형태로 표현되었다.
평면연꽃은 제3실 천장부 삼각고임 밑면에 그려졌다. 삼각고임 제1층 및 제2층 삼각석밑면에 그려진 평면연꽃은 8장의 원꽃잎 안과 바깥으로 각 8장의 꽃잎이 더하여진 24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졌으며 꽃잎마다 3~5개의 꽃술을 지니고 있다. 꽃잎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우나 꽃잎 몸체는 비교적 넓으며 꽃심은 二重同心圓으로 구분되었다. 세 개의 무덤칸 모두 천정석에는 별자리가 그려져 무용총과 차이를 보인다.
줄기․잎․꽃․봉오리를 모두 표현한 蓮은 제2실과 제3실 천장부 평행고임 제2층에서 다수 발견된다. 세 개의 줄기에 잎과 꽃 혹은 꽃봉오리가 달린 점은 앞의 무용총 및 통구12호분 벽화의 蓮과 같으나 줄기가 부드럽고 가는 선으로만 표현되고 연잎의 잎맥 역시 짧은 선 몇 개로만 나타낸 점이 조금 다르다.
삼실총의 蓮에서 특이한 것은 가운데 줄기 끝에 연꽃이나 연봉오리가 아닌 새로운 표현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제2실 천장부 평행고임 제1층, 삼각고임 제1과 제2층 등에는 蓮줄기 끝 연꽃 속에 頂光을 지닌 어린아이나 어른의 얼굴을 묘사한 것이 여럿 보이는데,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蓮花化生이다.(圖3-4) 1人化生과 男女2人化生의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연화화생은 삼실총벽화에서 확인되는 새로운 연꽃표현으로 불교적 天蓮 개념의 구체적 표현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연꽃표현과 관련하여 삼실총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칸벽 仁王形 力士의 소매끝 장식무늬이다. 제2실 남벽과 제3실 南․西․北壁 力士의 반소매 끝동은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마치 역사의 팔뚝이 연꽃 가운데에서 뻗어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삼실총벽화에서 연꽃의 표현은 보다 다양해져 옷소매를 장식하는 무늬로 활용되기도 하며 化生의 주체로 그려지기도 한다.
<米倉溝將軍墓壁畵>
5세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가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출현이다. 환인․집안지방의 대표적인 연꽃장식 벽화고분으로는 米倉溝將軍墓와 散蓮花塚, 長川2號墳을 들 수 있으며, 널방이나 널방고임부 전체를 연꽃으로 장식한 山城下332號墳, 山城下983號墳, 山城子龜甲塚 등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미창구장군묘벽화에서 연꽃은 널방벽과 고임부, 천정석에 측면연꽃과 평면연꽃 형태로 그려졌다. 측면연꽃은 널방벽과 고임부를 장식하였는데, 널방벽의 측면연꽃은 각벽에 5행11열로 행과 열이 서로 교차되게 표현되었다. 꽃잎 끝이 뾰족한 9엽연꽃으로 꽃받침과 받침줄기를 지녔다. 가운데 꽃잎의 중간에는 弧線을 긋고 그 아래에 검게 원점을 찍어 사람의 눈동자처럼 보이게 하였다. 잎맥과 꽃술이 투시된 점 등 세부표현은 다른 집안계열 연꽃과 같다. 고임부의 연꽃은 줄기․잎․꽃이 모두 표현된 蓮과 측면연꽃의 중간형으로 변형측면연꽃으로 부를 수 있다. 한가운데 버들잎꼴의 연봉오리가 있고. 그 아래를 씨방과 같은 것이 받치고 있으며, 씨방의 안에는 위의 연봉오리와 세부표현은 같으나 길이가 짧아 씨와 같이 보이는 것이 들어 있다. 씨방의 좌우로는 버들잎과 같은 것이 물결모양으로 3개씩 뻗어 나갔고, 그 아래로는 연줄기와 같은 것이 좌우로 뻗어나가면서 같은 모양의 다른 연꽃의 줄기와 이어진다.
평면연꽃은 천정석에 그려졌는데, 9엽의 대형연꽃이었으나 백회가 거의 떨어져나가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다.
<散蓮花塚壁畵>
산연화총 벽화에서 연꽃은 무덤칸 벽과 천장부를 장식하는 유일한 장식무늬이다.(그림3-1) 연꽃은 측면연꽃과 평면연꽃의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
(그림3-1)산연화총 무덤칸 측면 투시도
었다.
측면연꽃은 널방천장부에 列과 行을 바꾸며 일정간격으로 배치되었다. 꽃잎 끝이 날카롭고 꽃술과 잎맥이 투시되었으며 꽃잎선을 따라 흐르는 가늘고 긴 꽃받침과 끝이 세 갈래로 나뉜 세련되고 정리된 모습으로 나타난 듯하다.
평면연꽃은 널방벽을 장식하였으며 역시 열과 행이 교차하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꽃잎 끝이 과장되게 뾰족하고 날카로와 마치 주위를 찌를 듯하다. 기본형태가 삼실총벽화의 것과 같으나 잎맥, 꽃술, 꽃잎 끝이 보다 정리된 깔끔한 선으로 표현되었다. 천정석에도 대형평면연꽃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으나 백회가 떨어져나가 알 수 없다.
<天王地神塚壁畵>
천왕지신총은 앞에서 연화총과 함께 집안계열로 분류된 벽화고분이다. 연꽃은 벽화의 일부만 남아 있는 널방벽과 천장부에서 연봉오리와 측면연꽃의 형태로 표현되었다.(圖3-5) 널길, 앞방, 이음길 벽화는 백회가 떨어져나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연봉오리는 널방 안벽 무덤주인부부의 좌상, 주변의 시녀, 夫婦가 기거하는 가옥 사이의 공간에 흩뿌려졌다. 물방울과 같은 형태로 내부는 양 끝이 휜 Y자선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뉘었으며 무용총 벽화에서와 같은 꽃받침, 받침줄기, 몸체 안의 세부표현 등은 생략되었다. 장천1호분 벽화의 연봉오리와 표현방식이 유사하다.
측면연꽃은 널방벽화의 배경이 되는 龜甲文 안의 받침줄기 있는 연꽃과 천장부 고임기둥 밑면을 장식한 평양계열식 연꽃의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천장부의 연꽃은 봉오리 상태에서 약간 핀 정도의 것으로 5개의 꽃잎이 간결한 선에 의해 그 외형만 묘사되었으며 꽃 밑으로 ‘S’字꼴의 가는 선을 잇대어 꽃줄기를 나타내었다. 꽃의 표현방식이 안악1호분이나 복사리벽화고분의 것과 가깝다.
귀갑문 안의 연꽃은 귀갑문과 함께 널방벽면을 거의 메우고 있다. 안벽의 부부생활도로 보아 다른 벽면에도 중심부에는 생활풍속이 묘사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널방 자체는 일단 연꽃귀갑문으로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꽃은 대부분 8개의 꽃잎을 지녔으며 두 갈래 갈고리꼴 받침줄기를 달았다. 꽃잎 끝은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꽃술과 잎맥이 투시되어 5세기 집안계열 연꽃표현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長川2號墳壁畵>
장천2호분은 산연화총과 달리 앞방과 널방벽화 대부분이 잘 남아 있어 5세기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벽화고분의 하나이다. 앞방벽 액자꼴의 틀 안은 돌기호선문 및 ‘王’字文의 결합무늬로 장식되었으며, 연꽃은 널방문 및 벽과 고임부에 장식되었다. 연봉오리는 보이지 않고 蓮․측면연꽃․평면연꽃만 묘사되었다.
측면연꽃은 널방고임부 각층에 列과 行이 교차되게 배열되었다. 무용총이나 삼실총류의 꽃받침과 받침줄기를 지니고 있는 반면, 잎맥과 꽃술은 투시되지 않았다. 고임부 제 1, 2, 3, 4층 각벽에 각 4, 5, 8, 7송이씩 그려졌다.
평면연꽃은 이음길 천정과 널방 네 벽에 그려졌다. 이음길 천정을 장식한 것은 8葉紅蓮이며 널방벽에 그려진 것은 8엽 2겹, 곧 16엽홍련이다. 널방 왼벽과 앞벽.안벽에는 각 81송이씩의 연꽃이 열과 행을 교차하여 배치되었다. 널방문으로 말미암아 좌․우로 나뉜 오른벽에는 보다 적은 숫자의 연꽃이 그려졌다. 꽃잎 끝이 뾰족하고 두 갈래 꽃받침 및 받침줄기가 묘사된 점 등 기본 표현양식이 무용총과 같다.
蓮은 이음길 좌우벽에 그려졌다. 백회가 떨어진 부분을 고려할 때,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꽃줄기 끝의 연꽃은 5엽측면홍련으로 꽃잎 끝이 부드럽게 아래로 휘어 꽃이 시든 듯한 느낌을 준다.
<長川1號墳壁畵>
앞방과 널방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연꽃표현이 발견되는 벽화고분이다. 연봉오리, 측면연꽃, 평면연꽃 등의 기본형태 외에도 화염연꽃, 化生연꽃과 같이 다른 고분벽화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은 연꽃표현도 보인다. 널방벽 및 고임부는 순전히 연꽃으로 장식되었으며 앞방 고임부 각층 佛․菩薩․飛天 사이의 공간을 장식하는 것도 모두 갖가지 형태의 연꽃이다.(그림3-2)
(그림3-2) 장천1호분 앞방 안벽 人物圖 및 천장고임부 禮佛圖
연봉오리는 앞방 오른벽과 앞방 고임부에서 볼 수 있다. 앞방 오른벽 百戱伎樂圖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물들 사이에 점점이 배치되어 마치 앞방 오른벽벽화의 배경이 된 듯한 느낌을 주며, 앞방 고임부의 禮佛圖, 菩薩圖, 飛天圖에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연봉오리는 주로 꽃받침이나 받침줄기를 지니지 않은 물방울꼴의 몸체로 나타난다. 무용총 벽화에서와 같이 내부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으나, 내부에 꽃씨와 같은 타원형 점이 없다. 고임부의 연봉오리는 天空을 떠오르는 상태로 표현되었으며 오른벽의 일부 연봉오리는 꽃으로 피어나는 도중의 형태를 띠었다.
측면연꽃은 앞방벽과 천장고임부, 널방문 등에서 발견된다. 앞방 오른벽의 것은 연봉오리 사이로 띠엄띠엄 3엽이나 5엽연꽃으로, 앞방 고임부 및 널방문에서는 5엽에서 13엽에 이르는 꽃잎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연꽃은 꽃잎 끝이 뾰족한 것과 뾰족한 끝부분이 떨어져나가 끝이 둥근 것, 잎맥과 꽃술이 투시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꽃받침과 받침줄기를 모두 갖춘 것과 꽃받침만 있는 것, 받침줄기가 갈고리꼴이 아닌 가는 더듬이꼴로 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평면연꽃은 널방문과 벽 및 고임부에 그려졌으며, 꽃심은 紅色이나 白色으로 채색되었다. 널방 내부는 열과 행을 이루며 규칙적으로 배열된 연꽃으로 가득 찬 느낌을 준다. 꽃잎끝이 뾰족하며 꽃술은 작은 점으로 표현되었다. 무덤칸 고임부의 연꽃이 평면형으로 묘사된 벽화고분으로는 장천1호분 외에 산성하332호분과 傳東明王陵이 있다.
줄기와 잎, 꽃이 하나로 표현된 蓮은 화생연꽃과 화염연꽃의 형태로만 찾아진다. 화생연꽃은 三室塚 벽화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장천1호분 벽화에서는 앞방벽 상단 및 고임부에 2인화생의 형태로 표현된다. 널방 고임부 1층에는 본래 2人化生을 그렸다가 다시 백회를 입히고 평면연꽃을 그렸음이 떨어져나간 백회의 밑층을 통해 확인된다. 삼실총의 경우 꽃이 완전히 핀 후 꽃잎이 아래로 제껴지면서 童子나 老人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비해, 장천1호분에서는 꽃잎끝의 날카로운 부분이 떨어져나가 끝이 둥근 여러 장의 꽃잎에 싸인 채 남녀 어린아이가 얼굴을 내미는 점에서 兩者의 표현방식이 서로 구별된다. 화염연꽃은 앞방 오른벽 상단부에 화생연꽃과 교대로 行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측면연꽃의 날카로운 잎끝부분을 생략하고 그 윗부분에 화염을 표현한 연줄기 연꽃의 형태로 나타난다. 화염연꽃은 장천1호분 벽화에서 처음 보이는 연꽃표현이다. 화생연꽃 및 화염연꽃의 꽃잎형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무덤칸 안 측면연꽃의 뾰족한 꽃잎 끝은 연꽃의 성장과 함께 떨어져나가는 부분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같이 꽃잎의 끝과 몸체를 나눈 것은 아닐까.
이같이 장천1호분 벽화에서 연꽃은 어느 고분벽화에서보다도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며 무덤칸 벽화에서 지니는 비중도 높다. 화염연꽃과 2인화생연꽃은 특히 눈길을 끄는 새로운 표현으로 벽화를 구성하는 제반요소와 함께 그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5세기로 편년되는 집안계열 벽화고분의 연꽃표현을 벽화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작품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았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山城下332號墳, 麻線溝1號墳, 山城下983號墳, 山城子龜甲塚壁畵 등을 포함하여 벽화에 그려진 연꽃의 형태, 벽화에서의 표현위치, 무덤칸 안에서의 비중 등을 일괄 정리하면 표3-4)와 같다.
표3-4)에서도 알 수 있듯이 5세기에 들어서면 고분벽화의 연꽃은 앞시기보다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며 표현위치도 무덤칸벽과 고임부 등 무덤칸 전면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무덤칸 벽화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차 높아져 두 방무덤의 경우 널방 전면을 연꽃으로만 장식하는 연꽃장식 벽화고분도 나타난다.
집안계열 주요 고분벽화의 연꽃표현방식에 나타난 특징 가운데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자연계의 연꽃관찰에 근거한 연꽃묘사 경향이다. 줄기․잎․꽃을 함께 표현한 通溝12號墳壁畵의 蓮은 실재하는 蓮과 매우 가깝다.
실재하는 蓮을 염두에 둔 흔적은 연꽃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꽃잎의 끝을 날카롭게 표현하고 잎 끝으로 집중되는 잎맥은 짧은 반직선을 반복하여 긋고 꽃잎 끝부분을 검게 처리하여 나타내는 透視法을 적용하여 암․수꽃술을 묘사하고 가능한 한 꽃받침을 그려넣는 점 등이 그러하다. 舞踊塚, 麻線溝1號墳, 長川2號墳 등의 무덤칸 벽화에 보이는 연꽃이나 연봉오리에 달린 실제보다 굵은 꽃받침, 두 갈래 갈고리꼴의 받침줄기는 연꽃이나 연봉오리를 줄기에 달리지 않은 독립적 존재로 표현하는데 따라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되었다.
실재하는 연꽃을 염두에 두며 묘사한 때문에 집안계열 고분벽화의 연꽃은 앞으로 살펴볼 평양계열 고분벽화의 것과 달리 장식적 문양화의 경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5세기 후반기로 편년되는 산연화총 벽화의 연꽃잎 끝이 지나치게 뾰족하고 날카로와 과장된 표현을 보이는 데서 장식무늬화의 단초를 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면 같은 5세기 평양계열 고분벽화의 연꽃은 어떤 형태로 어떤 곳에 표현되며 무덤칸 벽화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변화를 보이는가.
나) 평양계열 고분벽화의 연꽃
5세기로 편년되는 평양계열 벽화고분 가운데 연꽃이 표현된 벽화고분은 15기 가량이다. 백회가 떨어져나가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몇몇의 벽화고분 중에도 원래 벽화 가운데 연꽃이 표현되었을 수도 있으나 검토대상에 넣기는 어렵다. 이하에서 연꽃이 표현된 5세기 평양계열 벽화고분 가운데 벽화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것을 중심으로 연꽃표현 형태 및 무덤칸 안에서 연꽃표현이 차지하는 비중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德興里壁畵墳壁畵>
덕흥리벽화분은 墓誌銘에 의해 무덤축조 시기가 확인되는 몇 안되는 벽화고분 가운데 하나이다. 七寶供養等 현실세계의 佛敎行事와 관련된 벽화가 무덤칸 내부에 그려지고 있다. 연꽃은 널길 좌우벽과 널방벽, 앞방과 널방 천장고임부 등에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연봉오리는 널길 왼벽 및 널방 왼벽에 그려진 蓮의 일부로 표현되었다. 물방울꼴의 연봉오리는 점선 끝의 줄기에 달렸으며 내부는 끝이 휜 ‘Y'字꼴 선으로 나뉘었다.
측면연꽃은 널길벽과 널방벽 및 고임부에 보인다. 널길 좌우벽과 널방 왼벽 및 앞벽의 연꽃은 蓮池에서 피어나는 순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운데 줄기의 것은 활짝 핀 10엽연꽃이며 좌․우줄기의 것은 꽃이 져 꽃잎이 아래로 제껴지고 솜털 같은 꽃술을 드러낸 상태의 연꽃이다. 10엽연꽃은 측면에서 보이는 형태로 측면 5엽 위에 덧붙여 그리는 방법으로 표현한 점이 특이하다. 집안계열과 달리 꽃술과 받침줄기는 따로 나타내지 않고 연줄기와 연결부분에 둥근 매듭꼴의 짧고 굵은 弧線을 더하였을 뿐이다.
평면연꽃은 앞방과 널방 천정석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앞방 천정석의 것은 8엽의 대형연꽃이며 꽃잎 끝부분만 남았고 중심부는 백회가 떨어져나가 남아 있지 않다.
이처럼 덕흥리벽화분의 연꽃은 蓮의 일부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방 고임부에 꽃잎을 도안화한 장식무늬가 있으나 연꽃표현의 한 형태로 보기는 어렵다. 눈길을 끄는 것은 蓮池에서 나는 蓮을 벽화로 그렸다는 점이다. 칠보공양행사와 관련한 해석이 요구된다.
<安岳1號墳壁畵>
안악1호분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무덤칸 천정고임부는 불꽃무늬, 日月像, 도안화된 각종 연꽃무늬로 장식되었다. 연꽃은 꽃의 측면과 평면형태로만 표현되었으며, 연봉오리는 보이지 않는다.
측면연꽃은 평행고임 제1층과 제2층 각 삼각선 밑면에 꽃잎을 표현하는 정도의 묘사로 나타냈다. 꽃잎 안에 잎맥이나 꽃술 등은 나타내지 않았다.
평면연꽃은 삼각고임 제1층과 제2층 각 삼각선 밑면에 한 송이씩 그렸다. 제2층 삼각석 가운데 동․서측 삼각석 밑면에는 日像․月像을 배치하였다. 꽃잎이 심하게 도안화되어 끝에 나선형 더듬이가 달린 둥근 톱니바퀴나 수레바퀴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둥근 바퀴가 회전하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이다. 집안계열의 것에 비해 씨방이 넓으며 실물적 표현과 거리가 있다.
<伏獅里壁畵墳壁畵>
복사리벽화분에서 연꽃은 안악1호분과 달리 천장고임부가 아닌 널방벽면에서만 발견된다. 연봉오리와 측면연꽃 모두 무덤주인부부의 초상이 있는 널방 안벽에 그려졌다.
연봉오리는 안벽을 위와 아래로 나눈 붉은색 가로기둥 위편을 장식하는 문양의 일부로 표현되었다. 내부를 ‘Y'字꼴 선으로 구획한 물방울 모양의 아래 좌우에 꽃받침을 나타내는 선을 더한 모습이다.
측면연꽃은 무덤주인부부가 앉아 있는 장방 덮개를 장식하였다. 꽃은 꽃잎의 외형을 나타내는 간결한 선에 의해 표현될 따름이다. 연꽃표현방식이 안악1호분과 별 차이가 없다. 천장고임부의 질서정연한 별자리 배치로 보아 천장부에는 연꽃을 그려 넣지 않은 듯하다.
<星塚壁畵>
성총은 무덤칸의 규모가 작고 벽화의 필치가 서투른 점 등에 비추어 고구려 지방귀족이 묻힌 묘로 추정된다. 벽화의 주제는 四神이다. 연꽃은 널방벽과 천정석에 그려졌다. 널방벽의 것은 측면연꽃과 화생연꽃이며 천정석의 것은 평면연꽃으로 8개의 꽃잎을 지녔다.
널방벽의 연꽃은 벽면 중심부를 채운 四神을 비껴 벽 윗부분의 약간 치우친 곳에 그려졌는데, 오른벽․앞벽․왼벽․안벽의 차례로 그 모양이 변하여 안벽에서 화생연꽃 형태로 변화가 완결된다.(圖3-6) 꽃잎이 길고 그 끝이 뾰족하나 필선이 둔하여 나무뿌리와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외형은 실물세계의 연꽃을 따라갔으나 실물연꽃과 같은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오른벽의 연꽃은 꽃잎이 반쯤 핀 상태이며 꽃 주위에 더듬이꼴 나선문이 있다. 앞벽의 것은 형태가 오른벽과 거의 같으나 꽃잎이 더 크고 두터우며 중앙의 꽃잎을 높이 솟은 죽순처럼 표현한 점이 조금 다르다. 왼벽의 연꽃은 꽃이 져 꽃잎이 아래로 제껴진 상태이다. 꽃잎에 꽃잎을 가로지르는 굵은 호선을 여러 개 그어 넣어 나무뿌리 같은 느낌을 준다. 안벽의 것은 왼벽의 것과 기본 형태가 같으나 연밥부분이 넓어졌으며 그 속에서 合掌한 인물이 태어나는 화생연꽃이다.
평면연꽃은 천정석에 가득차게 그렸으나 꽃잎 끝의 뾰족한 부분만 일부 남았다.
<龕神塚壁畵>
감신총 벽화는 仙․佛 混合的 경향을 짙게 풍기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연꽃은 앞방벽과 천장부에 그려졌다.
앞방 西龕 오른벽 인물좌상의 평상 밑에 그려진 연꽃은 마치 蓮華座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활짝 핀 꽃의 평면을 1/3 가량만 붉고 굵은 선으로 나타내었다. 씨방이 매우 넓고 꽃잎은 타원에 가까운 二重의 弧線으로 처리하여 도안에 가깝다. 앞방 안벽 위 천장부 연결부분의 마주보며 나래치는 암수 朱雀, 혹은 봉황 사이에도 위와 같이 꽃의 1/3만 나타낸 연꽃이 있다. 서감의 것과 달리 꽃잎 끝이 뾰족하고 잎맥과 꽃술이 보이며, 씨방 내부는 여러 개의 작은 원점으로 장식하였다. 꽃표현이 집안계열과 통하나 씨방이 넓고, 꽃잎을 단엽으로 처리한 점 등은 뒤의 龍岡大墓나 德花里1號墳 등 평양계열 고분벽화의 연꽃표현에 닿는다. 장방형 앞방의 천장 중앙부 천정석에 그려졌던 대형의 평면연꽃은 백회가 떨어져나가 둘레의 꽃잎 끝부분만 일부 남아 있어 그 형태상 특징을 알 수 없다.
<龍岡大墓壁畵>
용강대묘는 앞방과 널방벽화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아 벽화의 全貌를 알기 어려운 벽화고분이다. 연꽃은 앞방 앞벽, 널방 왼벽과 널방 천장부에 측면과 평면형태로 표현되었다.
앞방 앞벽 윗부분의 소슬과 동자주 사이의 구획된 공간에는 연봉오리에 가까운 커다란 측면연꽃 한 송이가 그려졌다. 본래는 네 벽을 돌아가며 이처럼 구획된 공간마다 한 송이씩 표현되었으나 대부분 훼손되었다. 연꽃은 봉오리진 상태를 벗어나 꽃 피기 직전의 모습을 하였으며 꽃받침과 받침줄기를 지니고 있으나 집안계열의 갈고리꼴이 아니다. 세련되고 부드러운 필치로 봉오리가 벌어지는 순간의 꽃모양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평면연꽃은 널방 왼벽 윗부분에 형성된 앞방벽 위 끝부분과 같은 형태의 공간에 그려졌다. 꽃잎 안에 마름모꼴 同心圓을 반복 표현하여 꽃의 깊이를 나타내려 하였으며, 二重圓으로 구획된 씨방 안에 원형으로 10개의 구슬문을 배치하는 등 실물 연꽃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집안계열 벽화의 연꽃표현과 크게 대비된다.
용강대묘의 연꽃은 무덤칸 벽면의 건물 및 城郭圖, 인물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표현되었다. 또한 연꽃은 무덤칸 윗부분을 장식하는 주요 제재이기도 하다. 필치가 세련된 점과 실물표현에서 크게 벗어난 도안적 표현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傳東明王陵壁畵>
傳東明王陵은 처음 발견 당시에는 벽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정밀조사에 의해 널방 전면에 연꽃문이 장식된 연꽃장식 벽화고분임이 확인되었다. 널방벽과 천장부에 그려진 연꽃은 모두 6엽2겹인 12엽연꽃의 평면형태이다. 列과 行을 바꾸면서 규칙적으로 교차․배열되었으며 현재 남은 것은 104송이이다.
연꽃은 굵고 힘있는 선에 의해 간결히 표현되었다. 씨방 안에는 크고 둥근 씨앗 하나만 그려졌고 꽃잎 안은 꽃술을 상징하는 구슬문으로 장식되었으며 꽃잎과 구슬문 사이는 굵은 타원형선으로 구획되었다. 꽃잎 끝은 복숭아 끝모양과 같다. 안꽃잎 사이로 바깥꽃잎이 표현되었다.
傳東明王陵壁畵의 연꽃은 내리1호분 널방 고임부에 그려진 연꽃과 기본형태가 같다. 內里1號墳의 연꽃이 8엽2겹으로 6엽2겹인 전동명왕릉의 것보다 꽃잎이 많을 뿐 복숭아꼴 꽃잎, 구슬꼴 꽃술, 연씨가 하나인 씨방 등에서 양자가 동일하다.
전동명왕릉 벽화는 현재까지 평양권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5세기 평양계열 연꽃장식 벽화고분이다.
<安岳2號墳壁畵>
안악2호분은 널방벽과 고임부에 散華功德飛天像, 여인의 供養行列, 사원의 丹靑과 같이 장식된 기둥 등이 그려져 불교적 분위기가 짙게 깔린 벽화고분이다. 연꽃은 널방벽과 고임부에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연봉오리는 널방 앞벽과 왼벽 위 끝부분에 보이는 飛天의 손에 쥐어진 點線의 연줄기 끝에 달려있다. 간결한 선으로 물방울꼴로 표현되었고 내부는 곡선형의 ‘Y'字꼴 선에 의해 구분되었다.
측면연꽃은 널방 천장부 삼각고임의 삼각석 밑면과 천정석 각 모서리에 외형만 나타내는 간결한 선으로 표현되었다. 삼각석 밑면의 연꽃은 가느다란 꽃줄기를 지녔으나 천정석 밑면의 것은 이마저 없다. 연꽃을 간단히 형태만 표현한 점에서 安岳1號墳 및 伏獅里壁畵墳의 연꽃과 표현방식상 맥이 닿는다.
평면연꽃은 널방 고임부 삼각석 밑면과 천정석의 중심부에 한 송이씩 그려졌다. 삼각고임 제1층 밑면과 천정석의 연꽃은 꽃잎이 모두 4겹인 複葉연꽃으로 비교적 넓은 씨방안에는 작은 연씨들이 여러 개 표현되었다. 표현방식이 北魏 石窟寺院의 천정부 明窓을 장식하는 연꽃문과 많이 통한다. 상호 영향관계를 염두에 두어볼 만한 현상이다.
삼각고임 제2층 밑면과 천정석의 연꽃은 제1층의 것과 달리 單葉이며 씨방도 내부를 三等分하여 방향에 따라 한 면 혹은 두 면을 붉게 칠하였다. 씨방을 삼등분하여 한 두 면씩 채색하는 것은 계절 및 방위와 관련된 듯하나 확실치 않다. 삼각고임 제3층 밑면에는 寶輪을 그렸다.
삼각고임 밑면의 평면 및 측면연꽃 외에도 평행고임과 삼각고임 정면에는 도안화한 蓮葉唐草文이 장식되었다. 연엽당초문은 안악2호분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蓮 표현인데, 중앙아시아나 북중국을 통하여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같이 안악2호분의 천장고임부는 다양한 연꽃표현으로 장식되어, 무덤칸에서 천장을 쳐다보면 마치 寺院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圖3-7) 연엽당초문과 규운문으로 장식된 평행받침, 연꽃과 寶輪文으로 꾸민 삼각고임, 천정석의 화려한 4겹꽃잎의 연꽃은 일면 같은 시기의 北魏 석굴사원 천정장식을 연상시킨다. 이와 관련한 제반 측면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雙楹塚壁畵>
쌍영총은 앞방과 널방 사이의 이음길에 세워진 두 개의 8각돌기둥과 벽화의 세련된 인물묘사로 잘 알려진 벽화고분이다. 연꽃은 앞방과 널방 고임부 널방벽 위 끝부분 등에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널방 왼벽에는 僧侶의 인도를 받아 供養行事를 치르러 가는 부인과 시녀들의 행렬이 그려졌다. 앞방과 널방 고임부의 주요 장식무늬는 구름무늬와 별자리그림 및 연꽃무늬이다.
연봉오리는 앞방 천장부 삼각고임 제2층과 널방 안벽 윗부분에서 발견되었다. 앞방의 것은 봉오리 좌우로 더듬이꼴 나선문으로 표현된 瑞氣가 어렸고, 봉오리 안에 씨방이 될 구슬문과 잎맥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짧은 반직선이 그려진 모습을 하였다. 널방의 것은 꽃병에 꽂힌 蓮의 일부로 표현되었는데, 서기가 어렸으며 봉오리는 곡선형 ‘Y’字꼴 선으로 내부가 구획되었다. 널방 평행고임 제2층의 별들도 외형은 원형이나 내부는 弧線에 의해 연봉오리와 같이 三分되어 표현상 연봉오리와의 친연성을 보인다.
측면연꽃은 이음길 좌우 팔각돌기둥의 기둥머리와 주춧돌을 장식하는 문양의 형태로 나타난다. 기둥머리의 연꽃은 복엽으로 마름모꼴에 가까운 꽃잎 안에 잎맥이 표현되었고 주춧돌의 것은 안꽃잎이 한 겹 더 있는 3겹꽃잎의 연꽃으로 꽃잎 안에 구슬문을 넣은 형태로 그려졌다.
평면연꽃은 앞방과 널방 천정석에 대형으로 그려졌다.(圖3-8) 앞방 천정석의 연꽃은 꽃잎 끝이 찌를 듯이 날카롭게 뻗었고 꽃잎에 잎맥과 꽃술이 표현되는 등 집안계열식 연꽃표현방식과 씨방에 커다란 구슬문을 넣고 씨방을 둘러싼 끝이 둥근 안꽃잎 내부에 그려진 한 개씩의 구슬문으로 꽃술표현을 대신하는 등 평양계열식 연꽃표현방식이 함께 사용되었다. 꽃잎을 3겹으로 한 것은 이미 散蓮花塚에서 시도된 바 있다. 연꽃표현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평양계열식 표현을 더한 경우이다.
널방 천정석의 연꽃은 앞방의 것에서처럼 집안․평양계열 연꽃표현방식이 평면적으로 결합된 형태가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꽃잎은 씨방 둘레의 안꽃잎까지 8엽5겹이다. 바깥 꽃잎 끝은 뾰족하나 몸체는 부드럽고 둥근 맛을 내는 弧線으로 처리되었으며 잎맥은 있으나 꽃술은 생략되었다. 더듬이꼴이나 구슬꼴 꽃술이 표현되던 자리에는 꽃봉오리꼴 8엽3겹의 꽃잎을 그려 넣었으며 씨방부분이 좁아지고 씨방을 둘러싼 둥근 안꽃잎 역시 크기가 축소되었다. 안꽃잎 속의 구슬문은 생략되었다. 이같은 형태의 연꽃은 5세기 집안 및 평양계열 연꽃그림 가운데 보이지 않던 것으로 두 계열의 연꽃표현방식이 綜合․止揚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쌍영총 벽화에서는 이러한 연꽃표현 외에 연잎과 인동넝쿨을 결합시킨 蓮葉忍冬紋도 보인다. 또한 蓮을 화초처럼 꽃병에 심은 표현도 보인다. 이것이 天上花의 일종일 수도 있으나, 天上蓮 표현방식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앞방 평행고임 제2층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표현이 보이는데, 꽃병에 심긴 모습은 아니다. 널방 평행고임 제2층 별자리 사이를 장식한 구름무늬 가운데에는 연봉오리 형태를 한 것도 있다.
이같이 쌍영총 벽화에서 연꽃은 무덤칸벽과 고임부뿐 아니라 이음길 돌기둥에 이르기까지 무덤칸 안에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앞방과 널방 고임부에서는 연엽당초문 등 복합문양의 형태에 다양한 흐름이 접합되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위에서 살펴 본 것 외에도 연꽃이 그려진 5세기 평양계열 벽화고분에는 八淸里壁畵墳, 大安里1號墳, 水山里壁畵墳, 德花里1號墳, 德花里2號墳, 高山里1號墳 등이 있다. 이들을 포함한 5세기 평양계열 벽화고분에서의 연꽃표현형태, 연꽃모양의 무덤칸 안에서 위치, 비중 등을 간결히 정리하면 표3-5)와 같다.
앞의 분석과 표3-5)에 정리된 내용에서 드러나는 5세기 평양계열 벽화고분에서의 연꽃표현상의 특성은 아래와 같다.
첫째, 연꽃표현의 도안화경향이다. 5세기초의 德興里壁畵墳에서부터 연꽃은 자연계의 실물을 묘사하기보다는 세부표현을 생략하고 외형을 적절히 변형시킨 형태로 표현된다. 꽃잎끝을 복숭아꼴로 나타내고 잎맥과 꽃술을 그려넣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잎맥은 꽃잎에 半타원형의 굵은 띠를 넣거나 꽃잎 끝부분을 검게 나타내는 것으로 대신하며 꽃술은 구슬문꼴로 표현되기도 한다.
둘째로 초기에는 무덤칸벽에 주로 나타나던 연꽃이 점차 무덤칸 고임부에도 표현되고 무덤칸 벽화, 특히 고임부 벽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같은 흐름 속에 나타나는 것이 傳東明王陵과 같은 전형적인 연꽃장식 벽화고분이다.
셋째로 5세기 평양계열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이같은 특징은 앞서 살펴보았던 집안계열 고분벽화가 보여주는 흐름과 공통되는 점도 있으나 몇 가지 점에서 대비된다. 가장 두드러진 대비점은 연꽃표현방식의 차이이다. 집
안계열이 실물연꽃 관찰을 바탕으로한 실물묘사에 치중한 데 비해, 평양계열에서는 연꽃표현의 도안화를 통해 연꽃을 장식무늬화하는 경향을 보여 5세기 중반경에는 두 계열에서 표현한 연꽃이 그 외형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연꽃장식 벽화고분인 散蓮花塚과 傳東明王陵 벽화의 연꽃을 대비시켜 보면 그 차이는 명확히 드러난다.
또 하나는 연엽당초문과 같은 복합문양의 출현빈도이다. 집안계열이 蓮의 구성요소만으로 이루어진 문양표현을 고집하는 데 비해, 평양계열에서는 중앙아시아나 북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연엽당초문 등의 복합문양을 5세기 중엽 이후 거의 모든 고분벽화의 장식무늬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같은 고구려 안에서도 집안과 평양 두 계열의 문화전통 및 외래문화요소의 수용태도가 상이하였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로 생각된다.
5세기 집안과 평양계열로 나뉘어 전개되었던 연꽃표현을 둘러싼 이같이 상이한 흐름도 5세기말경에는 지양되고 통합되는 경향을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雙楹塚壁畵는 이같은 새로운 경향이 잘 드러나는 경우이다. 쌍영총 앞방 천정석에서 연꽃은 두 계열의 독자적 표현요소를 모두 갖춘 형태로 표현되며, 널방 천정석에서는 제3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집안․평양 두 계열의 연꽃표현방식이 교묘하게 변형되고 결합되어 나타나는 이 새로운 형태의 연꽃은 5세기 집안․평양계열로 나뉘어져 있던 고구려문화의 두 물줄기가 하나로 되려는 시도의 결과물로 생각되며 이러한 점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쌍영총 벽화에서 보여준 이러한 지양․통합의 시도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지 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쌍영총과 같은 시기로 편년되는 몇 기의 벽화고분 가운데 쌍영총식 연꽃표현이 시도된 경우는 아직 확인되지 않으며, 오히려 쌍영총과 같은 시기로 편년되는 安岳2號墳의 경우 연꽃은 평양계열의 장식적 문양화 경향을 보다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6세기 이후로 편년되는 집안․평양지역의 몇 기 안되는 벽화고분에서는 평양계열의 연꽃표현이 몇 가지 측면에서 공통점과 상이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6세기 이후 고분벽화에서 연꽃은 어떤 형태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지니며 표현되는지 살펴보자.
다.6~7세기의 연꽃
가)집안계열 고분벽화의 연꽃
6세기 이후로 편년되는 벽화고분은 10여기 정도이며, 이 가운데 坪井里1號墳과 湖南里四神塚에서는 연꽃그림이 발견되지 않는다. 백회가 떨어져나간 천장부에 연꽃이 그려졌을 가능성은 있으나 현재로는 알 수 없다. 집안계열로 분류되는 벽화고분은 通溝四神塚과 五盔墳5號墓, 五盔墳4號墓 등 3기이며 벽화의 주제는 四神이다.
<通溝四神塚壁畵>
통구사신총 역시 벽화의 주제는 四神이다.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가 화려한 사방연속무늬를 배경으로 그 위에 四神을 묘사한 것과 달리, 통구사신총에서는 四神이 빠른 속도로 흐르는 구름을 헤치고 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연꽃은 널방고임부에 장식된 다양한 문양 가운데 하나로 인동과의 복합형태로 나타난다. 연봉오리, 측면연꽃이 인동과 결합되어 그 일부가 되어 나타나며, 삼엽꽃도 보인다. 삼엽꽃은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 벽화에서도 발견된다.
연봉오리는 삼엽꽃과 함께 평행고임 제1층의 인동당초문을 구성하는 일부분으로 나타난다. 연봉오리는 내부가 끝이 휜 ‘Y’字꼴 선으로 구획되었으며 삼엽꽃은 두 갈래 인동엽 속에서 피어나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 삼엽꽃은 연봉오리가 피어나는 5엽연꽃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과도기의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측면연꽃은 천정석 네 모서리에 인동잎에 감싸인 형태로 나타난다. 뒤의 오회분4호묘벽화의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통구사신총벽화에서 연꽃은 독자적인 형태로 표현되지 않으며 빈번히 표현되지도 않는다. 널방고임부의 문양도 거의 인동당초문 일색이며 연꽃은 장식무늬 요소의 하나로 나타나는 정도이다.
<五盔墳5號墓壁畵>
오회분5호묘는 벽화의 線이 치밀하고 채색이 화려하며 내용이 풍부하여 발견 당시부터 눈길을 끈 벽화고분이다. 연꽃은 널길벽 및 널방벽과 천장고임부에 측면 혹은 평면형태로 표현되었다.
측면연꽃은 널길벽과 널방벽에 보인다. 널길벽의 연꽃은 守門力士의 발 밑에 蓮花座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연꽃은 끝이 뾰족한 2겹꽃잎이 아래로 제껴진 모습을 하였고 꽃잎 내부는 半타원형 弧線과 더듬이꼴 꽃술로 장식되었다. 널방벽의 연꽃도 널길벽에서와 같이 蓮花座의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앞벽에 위치한 朱雀의 다리 밑에 있다. 이외에도 널방벽의 배경장식인 四方連續文 안에는 줄기가 달린 조그만 연꽃송이가 떠다니는 모습이 그려졌다. 3엽꽃도 여러 송이 보이는데, 天上花의 일종인 듯하다. 연꽃표현의 하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평면연꽃은 널방벽과 고임부에 일부 혹은 전면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널방벽의 연꽃은 龜甲文이나 菱花文의 변형으로 생각되는 뾰족부채꼴 사방연속무늬의 양 끝부분을 장식하는 문양으로 나타난다. 연속무늬는 귀갑문의 양 끝을 길게 뽑고 어깨참의 모서리 진 곳에서 끄트머리 사이의 직선을 물결모양의 곡선으로 처리하며 허리께선도 배가 약간 나온 꼴의 호선으로 처리하여 만든 무늬이다. 양 끝이 뾰족하고 몸체에 위․아래로 二重의 굴곡이 있는 부채와 같은 형태를 하였다. 연꽃은 무늬의 양 끝에 평면의 1/3가량씩 묘사되었다. 꽃잎은 12엽2겹이며 끝이 복숭아꼴로 처리되었으며 씨방이 넓다. 평양계열인 內里1號墳의 연꽃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꽃잎 안의 끝이 말린 더듬이꼴 꽃술은 비록 꽃잎마다 1개씩 표현된 점에서 앞시기와는 다르나, 집안계열식 표현이 여전히 연꽃의 묘사에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널방고임부 제2층 각 삼각선 밑면에는 인동문을 수반한 8엽2겹의 복엽연꽃이 한 송이씩 그려졌다. 꽃잎은 복숭아꼴이며 꽃잎 내부는 초승달 모양의 띠로 장식되었다. 비교적 넓은 씨방은 안원과 바깥원으로 구획되어 두 동심원 사이 공간에는 여러 개의 연씨가 흩어져 있고, 연꽃 주위로는 여러 개의 인동잎이 뻗어나왔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맛을 지녀 5세기 집안계열의 연꽃에서 풍기던 날카롭고 강한 느낌과는 다르다. 집안계열 특유의 실물묘사 경향이 약화되고 장식성을 염두에 둔 도안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도 오회분5호묘 벽화의 연꽃표현에서 눈에 띠는 변화이다. 인동문과 결합된 평면연꽃은 집안계열 고분벽화에서는 처음 나오는 것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것은 6세기에 이르면 집안계열에서도 이전과 달리 새로운 연꽃표현방식을 수용하게 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평양계열에서 이 인동연꽃은 眞坡里1號墳, 眞坡里4號墳, 江西大墓, 江西中墓 등 거의 대부분의 고분벽화에서 발견된다.
<五盔墳4號墓壁畵>
오회분4호묘는 무덤칸의 구조 및 규모, 벽화의 필치와 내용 구성방식 등이 오회분5호묘와 거의 같다. 연꽃은 널방벽 뾰족부채꼴 사방연속무늬 안에 측면연꽃 및 평면연꽃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널방고임부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회분5호묘에서 활짝 핀 인동연꽃이 그려졌던 고임부 제2층 삼각선 밑면에는 힘있게 꿈틀거리는 용이 자리잡고 있다.
측면연꽃은 天人을 떠받치는 伏蓮花座의 형태로 표현되거나 두 줄기 인동엽 사이로 피어오르는 줄기와 꽃받침이 있는 白蓮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인이 두 발을 디디고 선 伏蓮은 백련이며 아래로 제껴진 흰 꽃잎만 보이는데, 역시 두 갈래로 뻗어오른 인동잎에 싸여 있다. 仰蓮인 白蓮은 천인이나 다른 존재를 동반하지 않은 상태이며 꽃잎에 별다른 세부묘사가 더해지지 않았으나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도안화된 평면연꽃과 대조적이다.
이외에도 연속무늬 안에는 인동잎에 싸인 채 허공을 떠오르는 삼엽꽃이 여러 송이 보이는데, 혹 연꽃표현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어떤 연속무늬 안에서는 인동잎 사이로 커다란 삼엽꽃만이 한 송이 떠오르기도 한다. 5엽측면연꽃의 앞단계를 나타낸 것처럼 느껴진다.
伏蓮 위에 서있는 天人은 등에 붙은 날개를 빼고는 그 모습이 北魏 石窟寺院 중에 보이는 공양행렬도상의 인물들과 유사점이 많다.(圖3-9) 인동에 싸인 연꽃의 등장과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할 표현이다. 연속무늬 안에는 이밖에 화염과 9개의 꽃잎이 길게 뻗은 꽃부채꼴 식물도 보이며 이들 위로는 역시 한 두 송이의 삼엽꽃이 떠다닌다. 삼엽꽃, 5엽측면연꽃, 화염, 9엽꽃, 天人을 태운 복련 등 연속무늬 안의 각문양은 각각에 부여된 의미가 있고 상호간 일정하게 고리지어지는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6세기로 편년되는 집안계열 벽화고분은 3기에 불과하여 이를 바탕으로 연꽃표현의 시기별, 지역별 특성을 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 3기의 벽화고분의 무덤칸벽화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까닭에 아쉬운대로 6세기에 나타나는 집안계열의 대체적인 연꽃표현방식을 몇 가지만이라도 짚어보는 것도 가능할 듯하다. 통구사신총,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에서 드러나는 벽화 안에서의 연꽃표현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집안계열의 5세기식 연꽃표현방식의 후퇴를 들 수 있다. 오회분4호묘벽화에 보이듯이 측면연꽃의 두 갈래 꽃받침과 갈고리꼴 받침줄기는 이제 더이상 표현되지 않으며, 평면연꽃의 경우 꽃술은 꽃잎에 1개 정도씩 장식되고 잎맥 역시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둘째, 평양계열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꽃잎은 길고 뾰죽한 형태에서 복숭아꼴의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로 바뀌며, 씨방이 넓어진다. 전체적으로 연꽃의 장식무늬적 요소가 짙어지는 것도 평양계열의 영향인 듯하다. 오회분5호묘의 경우, 널길벽 守門力士 발 밑의 伏蓮花는 5세기 이래 집안계열식 표현요소를 상당한 정도까지 계승한 반면, 널방벽의 연꽃에는 반대로 평양계열의 영향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6세기에 이르러 평양계열의 영향이 집안계열에 의해 수용되던 과도기의 상황을 잘 반영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셋째, 연꽃이 독립적 형태로 표현되기보다는 인동문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통구사신총에서 연꽃이 인동문의 일부로만 표현되는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통구사신총의 인동연꽃문에서 연꽃은 종속문양이며, 앞시기 연꽃표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볼 경우 인동문 속의 꽃봉오리나 삼엽꽃은 연꽃의 표현형태가 아닌 인동문의 구성요소의 하나로만 이해될 수도 있다. 한편,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에서 연꽃은 독립적인 형태와 인동잎과 결합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넷째. 점차 고분벽화 안에서 연꽃이 표현되는 頻度가 줄어들고, 벽화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통구사신총에서는 널방고임부의 장식무늬 속에 그 구성요소의 하나로만 등장하며, 오회분5호묘에서는 널길벽, 널방벽 및 고임부에 모두 보이던 연꽃이 오회분4호묘에서는 널방벽에만 표현된다.
6세기 집안계열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이같은 현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6세기 평양계열 고분벽화에서는 연꽃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여기에서도 과연 이같은 현상이 보이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나)평양계열 고분벽화의 연꽃
6세기 이후로 편년되는 평양계열의 연꽃표현 벽화고분은 현재 5기 정도이며, 이 가운데 江西中墓는 7세기초까지 축조시기가 내려간다. 벽화의 주제는 四神이다.
<眞坡里4號墳壁畵>
진파리4호분은 널길벽의 아름다운 연못그림으로 잘 알려진 벽화고분이다. 벽화고분인 진파리1호분과 傳東明王陵이 주위에 있다. 연꽃은 널길벽과 널방벽 및 고임부에 인동잎과 결합된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벽화에서 지
(그림3-3) 진파리4호분 널길 왼벽 蓮池圖
니는 비중이 높다.
연봉오리는 널길과 널방 벽화에 보인다. 널길의 것은 산과 소나무로 둘러싸인 연못 위 허공에 떠있는데, 봉오리 위와 좌우로 인동잎이 뻗었고 밑으로는 여러 올의 수염털이 달린 모습을 하였다.(그림3-3) 이같은 형태의 연봉오리는 6세기 평양계열벽화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표현으로 같은 시기 중국 北朝 石窟寺院 장식이나 南朝의 塼築墳 磚刻畵에 보이며 百濟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王妃木枕의 장식무늬 중에도 나타난다. 이들 작품보다 제작 시기가 떨어지는 日本의 千壽國繡帳片에도 같은 형태의 연봉오리가 수놓아져 있다.(그림3-4) 이로 보아 이같은 식의 연봉오리는 중국의 석굴사원장식에서 시작되어 6세기 이후 東아시아권에서 일반화되고 애용되던 연꽃표현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림3-4) 진파리 4호분형 연봉오리 각종
①진파리4호분 ②백제무녕왕비목침 ③鄧縣南朝墓天人塼 ④天壽國繡帳
널방벽의 것은 널길벽에서와 같은 수염털연봉오리, 이것이 조금씩 꽃으로 되어가는 도중의 형태로 표현된 것 등 여러 가지이다. 이들은 빠르게 흐르는 구름과 함께 허공에 휘날리고 있다.
측면연꽃 역시 널길벽과 널방벽에 모두 나타난다. 널길벽의 것은 연못 한가운데에서 연잎 위로 인동잎에 싸여 瑞氣가 어려 있는 가운데 피어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연꽃위와 좌우로 아름다운 인동잎이 피어오르고 있으며 꽃잎은 몸체가 볼록한 꽃봉오리와 같은 형태로 묘사되었다. 중앙의 연꽃 좌우로 물 속에서 두 송이의 연꽃이 피어나고 있다.
널방벽의 것은 꽃송이만 허공에 떠있거나, 위와 좌우가 인동잎에 싸인 채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혹은 연잎과 인동잎을 모두 수반한 형상 등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꽃의 외형은 널길벽의 것과 동일하다.
평면연꽃은 널방과 고임부에서 발견된다. 널방벽의 것은 四面이 인동잎에 싸인 채 허공을 나르고 있는데, 8엽의 꽃잎은 복숭아꼴이며 꽃술은 구슬꼴로 표현되었고 씨방이 넓다. 측면연꽃과 달리 도안된 무늬으로서의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측면연꽃과 마찬가지로 수염털이 달렸다. 고임부의 연꽃 역시 기본형태는 널방벽의 것과 같다. 평행고임 제1층의 연꽃은 25㎝ 간격으로 한 송이씩 배치되었다. 인동잎에 싸인 채 흩날리는 형상이며 꽃잎은 8엽이다. 삼각고임 제1층과 제2층 각 삼각석 밑면에는 화면 가득 평면연꽃 한 송이씩을 그려 넣었는데, 꽃에 비해 인동잎이 작다. 꽃둘레의 인동잎은 팔랑개비꼴로 휘었다. 널방에서 천장부를 쳐다보면 천정석의 금빛 별자리와 함께 삼각석 밑면으로 대형인동연꽃만 보이도록 천장을 장식하였다.
<眞坡里1號墳壁畵>
진파리1호분 역시 힘있게 흐르는 구름과 휘날리는 인동연꽃으로 가득찬 벽면에 四神을 그린 점에서 진파리4호분과 벽화구성방식이 같다. 그러나 벽화의 필치는 진파리4호분에 비해 보다 세련된 면을 보여준다. 연꽃은 연봉오리, 측면연꽃, 평면연꽃 등의 형태로 무덤칸 각부분에 표현되었다.
연봉오리는 널방의 배경벽면에 보이는데, 진파리4호분과 같은 인동잎에 싸인 수염털연봉오리, 準연봉오리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측면연꽃은 널길과 널방벽에 보인다. 널길벽에서는 무덤칸을 지키는 四天王의 몸을 받치는 두 개의 蓮花盤으로 나타난다. 널길 좌우벽의 四天王은 머리에 2~3송이의 연꽃장식을 달고 있으며 두 발로 蓮花盤을 힘있게 딛고 서 있다. 연꽃의 꽃잎은 아래로 제껴졌으며 꽃술은 구슬꼴로 표현되었다. 꽃잎은 몸체가 넓고 길이가 짧은 복숭아꼴이다.
널방벽의 연꽃은 대부분 연봉오리처럼 인동잎에 싸인 채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수염털이 달렸으며 인동잎에 연잎까지 더하여진 것, 연꽃송이만으로 된 채 허공을 떠오르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안벽 玄武의 등 윗부분에 크게 그려진 화염연꽃이다. 연밥부분이 火焰寶珠의 형태로 표현된 이 화염연꽃은 불꽃 아래로 꽃잎이 있고, 꽃잎 좌우와 불꽃 위로 인동잎이 뻗어나와 빠르게 흐르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른다. 측면연꽃의 변형으로 생각된다. 연꽃 위에 불꽃이 더하여진 이와 유사한 표현형태는 5세기 집안계열의 長川1號墳 벽화에 출현한 적이 있다.
평면연꽃은 널방벽과 고임부에 보인다. 널방벽의 것은 진파리4호분 널방벽에 그려진 연꽃과 그 형태가 같다. 꽃 주위의 인동잎이 보다 힘있게 휘날리는 점이 진파리1호분 벽화에 보이는 보다 발전된 측면이다. 고임부에서는 삼각고임 제1층과 제2층 각 삼각석 밑면에 인동잎을 수반한 상태로 한 송이씩 그려졌으며, 천정석 네 모서리에 역시 인동잎과 함께 연꽃평면의 1/3가량씩 표현되었다. 천정석 중심부에는 東西로 日像과 月像이, 南北으로 꽃과 인동잎이 결합된 복합문양이 그려졌다. 남면과 북면의 장식무늬 중심의 8엽꽃무늬는 혹 연꽃문의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천정석 모서리와 삼각석 밑면의 인동연꽃은 진파리4호분에서와 같이 꽃에 비해 인동잎이 작다. 삼각석 밑면의 연꽃은 꽃을 둘러싼 5장의 인동잎 끝이 삼각꼭지점을 향해 있어 마치 천정석 중심을 향하여 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천정석 모서리의 것은 꽃둘레의 인동잎 끝이 한 방향으로 휘어 있어 꽃이 회전하는 듯한 효과를 내게 하였다. 인동잎과 교대로 日像과 月像의 회전돌기와 같은 것이 그려져 운동감을 높여준다. 회전돌기는 瑞氣의 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진파리1호분벽화에서 연꽃은 대개 인동과 결합한 형태로 나타나며 천장부는 인동에 싸인 연꽃을 중심으로 장식되었다. 진파리4호분에 비해 널방벽과 고임부에 그려진 인동연꽃의 운동성이 강하다.
<內里1號墳壁畵>
내리1호분 벽화는 백회가 거의 떨어져나가 널방벽과 고임부 일부만 남아 있다. 眞坡里1號墳, 眞坡里4號墳과 마찬가지로 널방 벽화의 주제는 四神이며 배경에는 구름이 빠른 속도로 흐른다. 그러나 흐르는 구름 사이로 연꽃이 그려지지는 않았다. 연꽃은 천장부 평행고임 제1층과 제2층에 나타난다.
평행고임 제1층에 장식된 것은 연꽃당초문이다. 唐草 줄기에 꽃봉오리와 삼엽꽃이 결합한 형태인데, 앞의 通溝四神塚에서 보았듯이 연꽃표현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강서대묘 널방 고임부에도 이와 같은 무늬가 보이는데, 內里1號墳과 달리 뚜렷이 연꽃형태로 묘사되었다.
평행고임 제2층 北面 중앙에 나타나는 것은 평면연꽃이다. 연꽃 좌우에는 콤파스를 이용한 5重의 同心圓文을 하나씩 그렸다. 환문총의 環文을 연상시킨다. 고임의 동면과 서면에는 일상과 월상을 배치하였다. 남면의 연꽃은 傳東明王陵에 그려진 것과 표현방식이 거의 같다. 꽃잎이 8엽2겹으로 늘어나고 꽃잎의 구슬꼴 꽃술을 둘러싼 半타원형띠 외에 꽃잎을 구별하는 선을 더한 것 등이 다를 뿐이다. 북면의 것은 남면의 연꽃이 문양으로 정형화되기 앞단계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잎 끝부분에 잎맥을 나타내는 수 십 개의 반직선이 그어졌는데, 이것이 반타원형띠로 바뀌면 남면의 연꽃이 되기 때문이다. 삼각고임의 삼각석 밑면에는 연꽃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으나 벽화가 남아 있지 않아 현재는 알 수 없다. 내리1호분에서 연꽃은 널방고임부에만 나타난다.
<江西大墓壁畵>
강서대묘 벽화에서 연꽃은 널방벽과 고임부에 인동과 결합한 형태로 묘사되었다.
연봉오리는 널방 앞벽과 천장부의 평행 및 삼각고임에 보인다. 널방 앞벽에는 암․수 朱雀이 부리에 물고 있는 인동 연줄기 끝에 달린 모습으로 나타난다. 연봉오리 밑에는 여러 올의 수염털이 달렸다. 평행고임 제2층에는 인동연꽃문양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나타난 수염털이 없는 물방울꼴의 연봉오리가 측면연꽃과 교대로 표현되었다. 평행고임 제2층 이상에서는 仙人과 祥瑞動物 사이에 수염털 달린 형태로 나타난다. 수염털 달린 삼엽꽃도 여러 송이 보이는데, 앞에서 지적했듯이 연봉오리와 측면연꽃의 중간형태이다.(圖3-10) 삼각고임 제1층의 瑞鳥들은 대개 널방벽의 朱雀과 같이 인동잎에 싸인 연봉오리를 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측면연꽃 역시 널방 앞벽과 천장부 평행 및 삼각고임 각면에 여러 형태
로 나타난다. 널방 앞벽 무덤칸 문기둥과 들보부분은 인동연꽃문으로 장식
되었는데, 들보 중심부에 꽃잎이 아래로 제껴지고 씨방부분이 드러난 측면연꽃이 그려졌다. 꽃잎 안에는 구슬꼴 꽃술이 묘사되었다.
평행고임 제2층의 측면연꽃은 꽃의 씨방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꽃봉오리가 한 송이 솟은 것, 세 송이 솟은 것, 금강석꼴 寶珠가 솟고 좌우로 인동잎이 이를 감싸고 있는 것 등이 차례로 보인다. 연꽃에 대한 특별한 인식에 근거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평행고임 제3층의 仙人들 사이로 나타나는 측면연꽃은 삼엽연꽃에서 한걸음 진전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꽃 밑둥에 여러 올의 수염털이 달렸다. 이 수염털은 꽃의 운동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中國 南朝 磚刻畵의 예로 보아 꽃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씨방에서 연봉오리와 같은 것이 여러 개 솟아난 모습의 연꽃이 대부분이다.
삼각고임 제1층에는 麒麟, 鳳凰 등이 그려졌으며 측면연꽃은 이들 사이에 花草와 비슷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연꽃은 인동잎과 함께 땅속으로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운 모습을 하였으며 씨방이 꽃봉오리 형상으로 그려졌다. 이를 靈芝草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표현상으로는 인동과 결합한 연꽃이나 여기에 투사된 관념은 영지초일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면연꽃은 평행고임 제3층 밑면, 삼각고임 제1층과 제2층 삼각석 밑면 및 천정석 네 모서리에 전체, 혹은 일부분씩 표현되었다. 평행고임 제3층 밑면의 경우 인동잎을 수반한 연꽃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한 송이씩 그려진 반면, 천정석 네 모서리는 인동잎 없는 연꽃이 1/4송이씩 묘사되었다. 삼각고임 제1층과 제2층의 연꽃은 각 삼각석 삼각 꼭지점부분에 1/3송이씩 인동잎과 함께 그려졌다. 삼각고임부 밑면의 것은 인동잎이 하나하나 바깥꽃잎 끝에 잇닿아 있어 마치 꽃받침인 듯한 느낌을 준다. 진파리1호분․진파리4호분과 같은 운동성이 나타나지 않고 장식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정석의 것은 단엽꽃이며 삼각석 밑면의 것은 3겹꽃잎연꽃이다. 모두 씨방이 넓고 꽃잎은 복숭아꼴이며 꽃술은 구슬꼴이다.
강서대묘 벽화에서 연꽃은 널방 고임부를 장식하는 중심요소이다. 대부분 인동잎과 결합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仙人이나 瑞獸 사이를 날아 다니는 수염털 달린 연꽃과 고임부 밑면을 장식하는 문양화된 연꽃의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江西中墓壁畵>
강서중묘 벽화에서 연꽃은 널방 고임부와 천정석에 인동과 결합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평행고임 제1층은 인동문으로 장식되었는데, 인동잎과 줄기 사이로 꽃봉오리가 나타난다. 앞의 예로 보아 연봉오리로 생각된다. 평행고임 제2층에도 이같은 식으로 연봉오리가 표현되었다. 제2층의 장식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짧은 弧線이 줄기와 잎, 봉오리 주위로 반복하여 표현되었다.
측면연꽃은 달리 보이지 않으나 평행고임 제2층 인동문 가운데 꽃봉오리와 교대로 그료진 목화송이꼴 꽃무늬가 혹 연꽃을 문양화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널방 돌문 근처의 깨어진 돌판에 그려진 5엽꽃문 역시 도안적으로 표현된 연꽃문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평면연꽃은 천정석 중심부와 네 모서리에 보인다.(圖3-11) 천정석 중앙의 연꽃은 12엽2겹꽃잎을 지녔으며 씨방이 넓다. 기본형태는 內里1號墳 널방 고임부 남면의 것과 같다. 꽃의 동․서면에 日像과 月像, 남․북면에 한 쌍의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日像․月像은 연꽃의 씨방보다 작게 그려졌다. 천정 모서리의 연꽃은 인동잎과 결합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각 모서리에 꽃의 1/4씩 그려졌다. 꽃잎은 복숭아꼴이며 구슬꼴 꽃술과 꽃잎선 사이에 2겹의 반타원을 더하였다. 二重同心圓으로 된 씨방 내부는 꽃씨를 나타내는 여러 개의 구슬문으로 장식되었다.
강서중묘 벽화에서 연꽃은 널방 천정석 벽화의 중심요소이다. 그러나 널방 천장고임부에서는 인동문의 일부로만 나타나며 주된 문양요소가 되지 못한다. 천장고임부를 장식하는 인동문 속에서 연꽃은 고유의 형태로 표현되지 못하고 단순화되고 문양화되어 나타난다.
이상에서 6~7세기 평양계열 벽화고분 가운데 무덤칸 벽화에 연꽃이 그려진 5기의 고분벽화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이 눈길을 끈다.
첫쨰, 인동연꽃표현의 일반화이다. 5세기말경 安岳2號墳 및 大安里1號墳壁畵에서부터 나타나던 연꽃과 인동의 결합이 6세기에 들어서면 연꽃의 기본표현방식으로 자리잡은 듯 5기의 고분벽화 모두에 인동연꽃이 보인다.
다음으로 중국 南北朝樣式의 영향이다. 眞坡里4號墳과 眞坡里1號墳의 널방벽화는 인동연꽃 뿐아니라 四神의 배경벽면 전체가 6세기 중국 磚刻畵에서 특히 즐겨 사용되던 표현방식으로 그려졌다. 또한 江西大墓 널방 천장고임부의 仙人․瑞獸 및 각종 형태의 연꽃은 北朝 石窟寺院의 불교장식 가운데 보이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인동연꽃문 안에서의 연꽃형태의 변형으로 말미암은 인동당초문화 경향이다. 연꽃이 忍冬과 결합되어 나타나면서 安岳2號墳이나 雙楹塚段階에 보이던 화려하고 복잡한 연꽃표현은 후퇴하고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의 연꽃이 화려한 인동잎에 싸여 표현되는 경향이 보인다. 江西大墓 널방 삼각고임에 나타나는 3겹꽃잎의 화려한 인동연꽃도 江西中墓에 이르면 다시 간결하게 도안된 연꽃으로 바뀐다. 이에 더하여 강서중묘 널방 천장고임부의 인동당초문에는 연봉오리나 연꽃이 사실상 본래의 형태를 잃고 인동의 原구성요소와 같이 표현되었다. 연꽃이 지니는 의미의 퇴색과 이에 따른 장식무늬화 경향이 맞물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겠다.
위에서 살펴본 6~7세기 집안 및 평양계열 고분벽화의 연꽃표현 형태와 위치, 무덤칸 안에서의 비중 등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표3-6)과 같다. 표3-6)에서 드러나듯이 6~7세기 고분벽화에서 연꽃은 집안과 평양계열 모두에서 인동과 결합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인동연꽃은 평양계열에서는 5세기 단계에 이미 나타나는 연꽃표현의 하나로 집안계열이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인동연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지기 이전의 보다 이른 시기부터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애용되던 연꽃표현의 하나이다.
5세기에는 비교적 뚜렷한 독자적 연꽃표현방식을 고분벽화에 적용시키던 집안계열이 6세기에 이르면 평양계열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고유의 표현법을 수정하여 나가는 것도 이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五盔墳4號墓․五盔墳5號墓에 보이는 집안․평양계열과 중국적 요소의 혼합은 이를 잘 반영한다.
6세기에 이르러 두 계열은 고분벽화에 중국 南北朝美術의 영향을 반영시키는데, 그 수용방식과 정도에서 집안과 평양은 차이를 보인다. 평양계열이 중국의 영향을 고분벽화에 거의 그대로 반영시키는 데 비해, 집안계열은 독자적인 표현법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중국식 표현을 덧입히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집안계열의 오회분5호묘․오회분4호묘 널방의 배경 벽
화와 평양계열의 眞坡里1號墳․眞坡里4號墳의 벽화가 이같은 차이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다양한 변화를 보이던 두 계열의 연꽃표현도 6세기 후반에 이르면 퇴색의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인동과 연꽃이 결합한 형태로 표현되면서 이미 조금씩 진행되던 현상이다. 6세기말 이후의 연꽃은 인동문의 일부로 溶解되어 앞단계의 모습을 거의 상실한다.
그런데 4세기 이래 집안과 평양계열에서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연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닌 존재로 인식되었을까.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빛, 혹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졌을까. 아니면 하늘세계를 장식하는 여러 요소의 하나로 이해되었을까. 지금까지의 검토를 바탕으로 이하에서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위에서 살펴본 고분벽화 안에서의 연꽃표현의 전개과정을 표현형태에 따라 계열별, 시기별로 나누어 정리하면 표3-7), 표3-8)과 같다.
(3)연꽃인식과 내세관
무덤칸 안에 그려지는 각종 그림이 죽은 자가 바라는 來世에서의 삶과 관련된 것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무덤칸 안에 죽은 자 生前의 각종 화려한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 경우에도 이것은 現世를 회고하기보다는 내세에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염원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연꽃도 이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꽃의 형태는 현실세계에 피어나는 연꽃을 본뜬 것이라고 해도 그 자체는 현세보다는 내세의 존재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담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고분벽화에 보이는 연꽃은 ‘來世에 존재하는 하늘연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하늘연꽃이 어떤 의미와 비중을 지니는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4세기의 安岳3號墳과 台城里1號墳壁畵에서 연꽃은 기둥과 벽면의 帳房,
널방의 천정 등을 장식하는데 쓰이고 있으나, 벽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눈길을 끄는 것은 안악3호분 널방 천정석에 그려진 연꽃이다. 벽화고분에서 무덤칸 천정석면에 표현된 제재는 흔히 죽은 자가 소망하는 天界나 淨土와 같은 특정한 세계나, 그러한 세계의 중심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에서는 죽은 자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지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해석을 수용하는 것이 보다 타당한 고분벽화의 예도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 불교가 중국에 자리잡기 以前에는 연꽃이 흔히 태양이나 天帝를 상징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안악3호분의 경우에도 천정석의 연꽃이 태양이나 천제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천정석의 연꽃을 대뜸 태양이나 천제의 상징으로 보기에는 이를 방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하기가 어렵다. 더하여 널방벽의 장방이나 기둥머리의 연꽃을 어떤 존재로 이해할 것인가하는 문제도 남는다. 천정석의 연꽃을 간단히 佛이나 불교적 理想鄕인 淨土의 상징으로 보기도 어렵다. 안악3호분의 앞방 및 널방벽화 가운데에는 연꽃장식 외에는 불교와 관련된 어떤 적극적 표현도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 불교수용 초기 중국에서 확인되는 연꽃에 대한 전통적 觀念과 새로운 認識의 混在 현상이다. 4세기경까지 중국에서는 연꽃을 천제나 태양의 상징으로 보는 기존관념과 佛이나 淨土를 상징하거나 천상의 존재를 탄생시키는 불가사의한 존재로 보는 새로운 인식이 혼재하고 이에 의한 표현이 銅鏡이나 畵像石墓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중국을 통해 수용하는 불교문화 속에 이같이 연꽃에 대한 혼재된 인식도 포함되어 있다가 안악3호분벽화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만일 이같은 시각이 허용된다면 안악3호분벽화의 연꽃이 지니는 의미는 모순 없이 설명될 수 있다. 즉 널방 천정석의 연꽃은 天帝나 佛, 혹은 이들이 대표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며, 기둥머리와 장방의 연꽃과 연봉오리는 당시까지의 일반적 동향을 염두에 둘 때, 불교문화적 요소로 인식되고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같은 해석이 타당한지는 속단할 수 없다. 5세기의 연꽃표현방식과 그 밑에 깔린 인식을 검토함으로써 이를 확인해 보자.
5세기 고분벽화의 연꽃표현방식에 대해서는 앞절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면 이같은 연꽃표현은 연꽃에 대한 어떠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일까. 5세기의 연꽃인식과 관련하여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舞踊塚, 三室塚, 星塚, 長川1號墳 등에 나타나는 化生의 주체로서의 연꽃 표현이다.(그림3-5) 삼실총과 장천1호분 무덤칸 천장고임부에는 연꽃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연꽃화생장면이 그려져 있다. 성총 널방벽화에는 연꽃에서의 天人化生이 꽃의 변화과정과 힘께 표현되었다. 무용총에서는 연꽃화생장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으나 天空을 떠오르는 연봉오리와 연꽃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표현하여 널방고임부의 仙人․瑞獸가 화생한 존재임을 알게 한다. 몇몇 고분벽화에 보이는 이같은 일련의 연꽃화생표현은 5세기에 이르면 연꽃이 化生의 주체로 비교적 뚜렷이 인식됨을 뜻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化生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 불교교리의 한 부분으로 소개된 개념이다. 따라서 고분벽화의 화생표현은 불교신앙의 확산이 이루어지는 5세기의 고구려에서는 죽은 자의 쉼터인 무덤칸에까지 표현될 정도로 불교의 화생이라는 개념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졌음을 알리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림3-5) 고구려 고분벽화의 蓮花化生圖
①무용총 ②삼실총 ③장천1호분
화생연꽃의 존재와 함께 주의를 끄는 것은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등장이다. 무덤칸 전체, 혹은 널방벽이나 고임을 연꽃으로 장식한 벽화고분으로는 散蓮花塚을 비롯하여 下解放31號墳, 長川1號墳, 傳東明王陵, 米倉溝將軍墓, 長川2號墳, 山城下332號墳, 山城下983號墳 등을 들 수 있다. 연꽃장식 벽화고분은 5세기 중엽경에 집안지역을 중심으로 다수 출현하는데, 이같은 현상은 죽은 자의 淨土化生 소망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해석된다. 연꽃을 정토세계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사고는 화생의 주체로서의 연꽃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화생연꽃 인식의 심화․발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化生의 주체, 淨土의 상징으로서의 연꽃인식이 비교적 다양한 종족과 사회를 포함하고 있던 고구려내의 지역이나 文化圈에 관계 없이 동일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화생연꽃의 출현빈도나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분포가 集安圈과 平壤圈 사이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화생연꽃표현의 경우, 집안권에서는 무용총을 비롯하여 三室塚, 長川1號墳 등 여러 기의 벽화고분에 빈번히 높은 비중을 갖고 표현되는데 비해, 평양권에서는 星塚 널방벽의 四神圖 한 켠에 조그마하게 그려졌을뿐 다른 예가 확인되지 않는다. 연꽃장식 벽화고분도 마찬가지로 10여기의 벽화고분 가운데 평양권에 분포하는 것은 傳東明王陵 1기뿐이며, 집안계열로 분류된 天王地神塚을 포함한 나머지 10기는 모두 집안권에 속한다. 이처럼 연꽃화생표현의 빈도와 연꽃장식벽화고분의 분포율이 平壤圈에 비해 集安圈이 현격히 높은 것은 집안권의 연꽃인식이 평양권보다 적극적이었으며, 내세신앙으로서의 불교수용이 이 지역에서 보다 일찍 이루어진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 5세기 두 계열 고분벽화에 보이는 무덤칸 안에서의 연꽃표현 확대의 방향이다. 평양계열의 고분벽화에서는 연꽃이 무덤칸 벽면에 주로 표현되었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칸 고임부로 확대되어간다. 이에 비해, 집안계열에서는 연꽃이 무덤칸 고임부에 즐겨 표현되다가 점차 무덤칸 벽면에도 그려지기 시작하며, 곧이어 연꽃장식 벽화고분으로 이행해가는 현상을 보여준다. 물론 이같은 흐름이 두 계열에서 일률적으로 진행되거나 모든 연꽃표현 고분벽화에 예외없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나 대체적인 흐름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두 계열이 보여주는 이러한 相異性은 두 권역이 연꽃을 인식하는 과정 및 태도가 다른 데에 말미암는 것으로 보인다. 集安圈이 불교의 연꽃인식을 중국에서의 전래 초기부터 來世生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에 비해, 平壤圈은 樂浪 이래의 전통적인 별자리신앙과 연꽃을 불교문화적 요소로만 보려는 경향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연꽃을 내세의 삶과 관련지어 인식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평양권에서 연꽃화생표현이 빈번히 나타나지 않고 연꽃장식벽화고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때문인 듯하다. 또한 5세기 평양계열 연꽃표현에 보이는 연꽃의 도안화 경향과 집안계열의 실물묘사적 움직임도 위와 같은 연꽃인식 태도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위의 연꽃화생표현의 등장 및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출현과 함께 5세기의 연꽃인식과 관련하여 살펴볼 것은 무덤칸 천정석과 그 주변부의 연꽃표현이다. 무덤칸 고임부 및 천정석에서 연꽃은 흔히 日月星宿․仙人․瑞獸 등과 함께 그려지는데, 연꽃과 다른 요소 사이의 구성방식이 고분, 시기, 지역에 따라 다르다. 무덤칸 고임부에서의 연꽃과 天界 여러 요소간의 구성방식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로 무덤칸 고임부에는 별자리와 日像․月像만을 나타내고 천정석 가득 평면연꽃을 그려넣는 유형을 들 수 있다. 角抵塚과 星塚이 이에 해당하는데, 각저총의 경우 널방고임부에 北斗七星을 비롯한 28개의 별자리 및 日像, 月像을 그려넣고 널방 천정석에는 대형연꽃을 표현하였으며, 성총은 널방 고임부에 고르지 않은 원으로 해와 달과 여러 개의 별자리를 나타내고 천정석에는 대형연꽃을 그려넣었다. 각저총의 널방벽에 연꽃을 비롯한 일체의 불교적 요소가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해, 성총 널방은 四神과 연꽃화생표현으로 장식된 것이 두 고분벽화의 차이점이다.
두 번째 유형은 무덤칸 고임부에 日月星宿와 함께 각종 仙人․瑞獸를 그려넣고 아울러 연꽃의 여러 형태를 표현하며 천정석은 커다란 연꽃으로 장식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다시 고임부에서 연꽃문이 차지하는 비중의 정도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日月星宿와 仙人, 瑞獸 등의 요소가 중심이 되는 경우와 연꽃이 主요소가 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무덤칸 고임부벽화의 보존상태가 나빠 두 번째 유형 안에서 다시 두 가지 세부유형으로 나누기 어려운 벽화고분이 많다. 이 두 번째 유형에는 5세기로 편년되는 집안계열 및 평양계열 벽화고분의 대부분이 해당된다. 집안계열에서는 舞踊塚, 三室塚, 蓮花塚 등이 이에 해당되며, 평양계열에서는 德興里壁畵古墳을 비롯하여 安岳1號墳, 龕神塚, 德化里1號墳과 德化里2號墳, 雙楹塚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가운데 무용총, 삼실총, 안악1호분은 고임부벽화에서 연꽃문이 主요소인 경우로 제1세부유형으로 분류되며, 감신총, 덕화리1호분, 덕화리2호분 등은 별자리나 별자리를 상징하는 仙人․瑞獸가 중심요소로 제2세부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덕흥리벽화고분과 쌍영총은 일견 앞방과 널방벽화의 구성방식이 달라, 일단 위의 두 세부유형으로의 분류를 보류한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무덤칸 고임부와 천정석을 연꽃만으로 장식한 경우이다. 연꽃장식 벽화고분은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무덤칸 벽면에는 생활풍속도나 四神圖를 그렸으나 무덤칸 고임부 이상을 연꽃으로 장식한 벽화고분도 있다. 집안계열의 米倉溝將軍墓, 長川2號墳, 평양계열의 傳東明王陵, 安岳2號墳 등이 이 유형에 속하며, 천정석그림이 확인되지 않는 散蓮花塚, 麻線溝1號墳, 山城下332號墳, 山城下983號墳, 通溝12號墳, 山城子龜甲塚 등도 이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長川1號墳은 앞방과 널방의 벽화구성방식으로 보아 세 번째 유형 가운데에서도 조금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므로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 이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구성되는 무덤칸 천장부벽화에서 연꽃표현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들 연꽃은 무엇을 상징하며, 당대의 내세관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주의되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중국의 불교수용과 전개과정에 나타나는 재래의 관념과 새로이 전래된 관념의 혼재현상 및 4세기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의 성격이다. 중국에서의 불교 수용 이후 연꽃은 전통적 天帝, 혹은 태양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 西方의 神인 佛이나, 佛이 주재하는 淨土를 나타내는 존재로 이해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조형물 안에 천제와 佛이라는 두 가지 관념이 함께 표현되기도 하며, 때로는 佛이 天帝와 동일한 존재로 이해된 듯한 사례도 보인다. 종교적 관념이 혼재하는 현상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4세기까지도 격의불교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중국의 불교이해 수준과 관련이 깊다.
釋曇始의 遼東에서의 10년간의 포교 이전에 고구려에 소개되고 수용된 불교 역시 이른바 ‘格義佛敎’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佛敎를 믿어, 福을 구하라’는 고국양왕의 下敎에서 나타나듯이 支道林의 편지를 받을 정도의 승려가 고구려에서 출현하였다고 하더라도 4세기말까지 왕실을 포함한 고구려사회 일반의 불교 이해는 除厄招福的 관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사회가 老莊思想的 개념 뿐아니라, 神仙方術的 요소도 상당히 담은 격의불교 이해 수준에서 고분벽화라는 장의미술에 ‘연꽃’이라는 새로운 제재를 구성요소의 하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면, 연꽃이 벽화구성에서 지니는 의미와 비중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불교 이해의 수준이 바뀌어가는 데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연꽃이 무덤칸에 그려지는 초기 단계에는 중국에서와 같이 이에 대한 관념의 혼재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지역이나 문화권, 시기 및 이념정책의 흐름에 따른 영향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방식을 전제로 할 때, 먼저 의문이 가는 것은 고구려고분벽화의 연꽃표현에도 佛이나 정토에 대한 인식 외에 태양이나 천제에 대한 관념이 투사되고 있는가이다.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고구려의 재래신앙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始祖 東明聖王說話에 보이는 ‘天帝’라는 관념이다.《三國史記》등에서 朱蒙은 天帝之子로 불리며, 이후 고구려에서 河佰女와 함께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언급되는 천제는 하늘세계의 주재자를 뜻하는데, 그 神格이나 하늘세계의 다른 존재와의 관계는 명확치 않다. 왜냐하면 朱蒙이 혹은 ‘日月之子’로도 언급되어 천제와 日月의 관계가 명확치 않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천제가 日月의 상위개념으로 인식된 듯하나, 천제와 日月이 同一視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나름의 해석이 허용된다면 고분벽화 천장부 그림을 이 두 가지 관념과 관련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고구려에 불교가 수용되고 확산되는 초기 단계에 고구려인에게 있던 천제관념 및 천제가 주재하는 하늘세계와 새로운 외래의 종교에서 말하는 佛과 佛이 주재하는 淨土는 쉽게 구별되지 않고, 때로는 동일한 존재와 세계의 다른 표현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앞에서 보았던 벽화고분 널방 천정석의 연꽃그림과 천장부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개념상의 混亂과 이의 止揚과정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위의 첫 번째 유형에서 천정석에 그려진 연꽃은 天帝 및 그가 주재하는 세계를 상징하거나, 천제와 사실상 구별되지 않는 존재와 세계로서의 佛이나 淨土를 나타내는 경우로 해석된다. 각저총에서 널방 천정석의 연꽃은 日月과 모든 별자리를 거느린 하늘세계의 중심에 있는 천제와 그의 세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반면, 성총 널방 천정석의 연꽃은 널방벽 연꽃화생그림과 四神圖, 천장부의 각종 별자리와 日月그림으로 보아 천제, 혹은 하늘세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四神과 日月星宿는 재래의 별자리신앙에서 유래한 표현인 데에 비해, 연꽃화생은 불교적 관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총의 연꽃은 佛을 천제와 같은 존재, 곧 西方에서의 천제의 또다른 표현으로 인식하고, 하늘세계와 淨土를 구별치 않으면서 나타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번째 유형에서 천정석의 연꽃은 佛과 淨土를 상징하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천제와 하늘세계에 대한 관념을 다분히 담은 표현으로 이해된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벽화고분 가운데 제1세부유형으로 분류한 무용총, 삼실총, 안악1호분은 널방벽의 불교적 표현, 곧 僧侶說法圖 등과 널방 고임부의 체계적인 연꽃화생그림과 연꽃무늬 장식 등의 벽화구성상의 제재적 비중이 높은 것으로 보아 천정석의 연꽃에 천제와 하늘세계에 대한 관념이 그리 짙게 담겨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2세부유형에 속하는 감신총이나 덕화리1호분, 덕화리2호분의 경우, 무덤칸 고임부에 간단히 표현된 연꽃 외에는 달리 불교적 관념을 나타내는 표현이 보이지 않으며 널방벽화가 생활풍속이나 四神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천장고임부에 日月이 표현되었으며, 정밀하고 체계적인 28별자리 그림이나 仙界와 관련된 표현이 더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천정석의 연꽃은 내용상으로는 천제와 하늘세계에 대한 관념을 짙게 담은 佛, 혹은 정토의 상징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두 가지 세부유형으로의 분류를 보류한 덕흥리벽화고분과 쌍영총 무덤칸 천정석의 연꽃은 어떠한 존재로 해석할 수 있을까. 덕흥리벽화고분벽화는 앞방벽에 무덤주인 생전의 官吏生活圖 및 行列圖를, 천장고임부에는 별자리와 각종 仙人, 瑞獸를 배치하였고, 널방벽에는 연못과 七寶供養行事圖, 일상생활을 위한 건물들과 기구, 천장고임부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하였으며, 앞방과 널방 천정석에는 연꽃을 그렸다. 쌍영총벽화의 경우에는 앞방벽에 四神과 관리생활도, 천장고임부에 각종 무늬와 별자리, 널방벽에 四神과 공양행렬도, 고임부에 日月星宿를 그리고, 앞방과 널방 천정석에는 연꽃을 표현하였다.(圖3-12) 덕흥리벽화고분에서 앞방 천정석의 연꽃은 현실세계를 지배하고 日月을 비롯한 하늘세계 별자리를 주재하는 존재이자 그 세계의 상징으로 그려졌다면, 널방 천정석의 것은 불교행사를 비롯한 일상생활 제측면에 포괄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墓誌銘에서 ‘釋迦文佛弟子’를 칭한 것을 함께 고려하면, 앞방과 널방 천정석의 연꽃은 일단 佛과 정토세계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내용상으로는 하늘세계와 그 주재자에 대한 재래의 관념을 상당히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쌍영총 벽화의 경우에도 앞방과 널방 천정석의 연꽃은 佛과 정토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될 수 있으며, 여기에 기존의 하늘세계와 그 주재자에 대한 관념은 극히 미약하게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굳이 분류한다면, 쌍영총은 제1세부유형에, 덕흥리벽화고분은 제2세부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유형에서 연꽃은 두 번째 유형의 것과 달리 佛, 혹은 淨土를 상징할 뿐 天帝나 하늘세계에 대한 관념은 지니지 않은 표현으로 여겨진다. 적어도 널방고임부 이상은 모두 연꽃으로 장식된 淨土蓮花世界이다. 널방벽까지 포함하여 무덤칸 내부 전체가 연꽃으로 장식된 경우 무덤칸은 佛國土 자체이며, 연꽃은 불토이자 佛土에 존재하는 무수한 佛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장천1호분 무덤칸 천정석그림이다. 장천1호분벽화는 앞방벽은 생활풍속도로, 고임부는 佛․菩薩․天人․연꽃을 주요제재로 삼아 장식하였고, 널방벽과 고임은 연꽃으로 가득 채우는 등 佛敎寺院과 같은 느낌을 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앞방 천정석그림도 연꽃이다. 그런데 주의를 끄는 것은 널방 천정석의 日月星宿이다. 다른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예로 볼 때, 널방 천정석은 연꽃이 그려져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널방 천정석의 日月星宿圖는 연꽃으로 장식된 널방, 곧 淨土가 하늘세계에 존재하는 세계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며, 널방 천정석 벽화의 제재를 무덤에 묻힌 자의 생전의 지위, 신분과 관련 짓는 시각을 원용한다면 죽은 자가 日月에 비견될 수 있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장천1호분도 기본적으로는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5세기 벽화고분 무덤칸 천정석의 연꽃은 무덤칸 고임부의 여러 요소와 관련하여 검토할 때, 天帝와 하늘세계나 佛, 혹은 淨土를 나타내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과 상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무덤칸 고임부에 연꽃이 그려진 벽화고분을 유형별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살펴보면 몇 가지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첫째, 같은 5세기에도 후반기에 이를수록 佛, 혹은 淨土를 상징하는 연꽃에서 天帝와 하늘세계적 관념의 반영도는 낮아진다는 사실이다. 5세기 중엽 이후의 고분벽화 무덤칸 천장고임부 연꽃그림의 비중은 앞시기에 비해 훨씬 높아지며, 나아가 위의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벽화고분의 숫자가 늘어나는 반면, 벽화고분의 천장고임부그림에서 日月星宿․仙人․瑞獸그림의 비중은 낮아진다. 이러한 경향은 집안계열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두 번째, 집안계열과 달리 평양계열 벽화고분에서는 무덤칸 천장부그림에서의 연꽃그림이 지니는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널방벽그림에 四神이 그려지는 벽화고분의 경우, 천장고임부그림에서 日月星宿圖의 비중은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두 번째 유형의 제2세부유형에 속하는 벽화고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 평양계열 벽화고분 무덤칸 천장부그림에서는 日月星宿圖가 생략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408년의 덕흥리벽화고분에서 5세기 후반의 쌍영총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연꽃장식 벽화고분 외에 5세기로 편년되는 모든 벽화고분의 무덤칸 천장부에는 별자리가 그려지고 있다.
무덤칸 천장부 연꽃표현의 시기와 지역에 따른 이같은 차이는 두 지역에서의 불교신앙의 흐름에 일정한 相異性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집안지역의 고분벽화에서 연꽃에 대한 불교적 인식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에서의 국가적 차원의 불교흥륭정책이 집안을 수도로 하고 있던 4세기말에 시작된 점, 불교수용과 확산을 주도한 왕실과 귀족층의 기반이 평양천도후에도 일정한 기간 집안과 그 일원에 유지되었을 것이라는 점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5세기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는 연꽃인식은 6세기에 이르면 몇 가지 변화를 보인다.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化生시키는 존재로서의 연꽃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화한다는 사실이다. 오회분4호묘에서 연꽃은 살아 움직이며 天人을 탄생시키는 존재로 표현되며,(그림3-6) 진파리1호분에서는 인동연꽃이 火焰寶珠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강서대묘에서는 연꽃에서 金剛石 모양의 寶珠가 배출되고 있다.(그림3-7) 이것은 온갖 생명과 존재를 化生시키는 주체로서의 연꽃에 대한 인식이 6세기에 이르면 고분벽화에서 보다
(그림3-6) 오회분4호묘 널방 벽화중 天人化生
(그림3-7) 강서대묘 널방천장부 평행고임 제1층 忍冬蓮花紋中寶珠化生
구체적인 형상화의 시도가 이루어질 정도로 고구려인에게 수용․정착되었음을 의미한다.(圖3-13)
그러나 化生시키는 존재로서의 연꽃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면서, 연꽃으로 상징되는 세계, 곧 淨土에서의 내세삶에 대한 소망이 보다 절실하게 추구되는 것 같지는 않다. 6세기의 고분벽화에서 전반에서 후반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연꽃은 더이상 무덤칸의 벽과 천장고임부를 장식하는 중심제재로 선택되지 않는 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五盔墳4號墓를 비롯한 6세기 전반 이후로 편년되는 대부분의 고분벽화에서 연꽃은 무덤칸의 벽과 천장고임부의 장식적 제재의 하나로 표현될 뿐, 5세기에서와 같이 독립적일 뿐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제재로서의 위치와 비중을 지니지는 못하고 있다. 벽화고분의 널방 천정석 장식에도 4세기 고분벽화 이래의 전통적 제재인 日月星宿 외에 黃龍이나 靑龍․白虎와 같은 새로운 제재들이 선택되는 경향을 보이며, 오히려 연꽃은 인동연꽃의 형태로 천정석 모서리를 장식하는 무늬 정도로 등장하는 예가 많이 나타난다. 이 시기의 벽화고분 가운데 널방 천정석을 연꽃으로 장식한 사례는 江西中墓에서만 확인될 뿐이다.
五盔墳5號墓를 비롯하여 이 시기의 벽화고분 널방의 천정석에 즐겨 그려지는 黃龍이나 靑龍․白虎, 日月星宿는 기본적으로 5세기 벽화고분의 연꽃을 대신하는 제재로 죽은 자가 소망하는 내세가 어떠한 삶터로 인식되는지와 관련된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무덤에 묻힌 자의 生前의 지위, 신분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제재가 5세기 고분벽화의 연꽃이 주로 상징하던 佛이나 淨土와 관련된 존재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五盔墳5號墓와 通溝四神塚, 江西大墓 널방 천정석에 표현되는 黃龍과 같은 제재를 굳이 기존의 특정한 존재, 혹은 관념과 관련시켜 본다면 하늘세계의 중심적 존재로서의 天帝나, 천제로 상징되는 특정한 세계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죽은 자가 생전에 현실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王과 같은 높은 지위의 인물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위의 5세기 고분벽화 분석방법을 원용하여 강서중묘 널방 천정석의 연꽃이 나타내는 바를 해석해본다면, 널방은 四神으로 장식되고, 천장고임부는 장식무늬로 장식되었으며 천정석 중앙 연꽃의 좌우에는 日月, 위와 아래에는 鳳凰이 그려진 것을 함께 고려할 때, 天帝, 혹은 하늘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 널방 천정석을 별자리로 장식한 진파리4호분과 같은 경우, 천정석의 제재는 來世의 하늘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6세기 이후의 고분벽화에서 널방 천정석의 제재로 연꽃이 아닌 黃龍이나 靑龍․白虎가 선택되는 동시에, 化生시키는 존재로서의 연꽃에 대한 인식과 표현은 구체화하는 반면, 연꽃이 무덤칸 벽화의 중심제재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현상은 5세기로 편년되는 생활풍속계 및 장식무늬계 벽화고분 무덤칸 천장고임부에 새로운 제재의 하나로 神獸인 靑龍과 白虎가 더해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朱雀과 玄武가 가세하면서 四神으로 자리잡고, 벽화내에서의 위치와 비중을 늘려가면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일단, 고분벽화 제재구성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변화의 바탕에는 6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사회에서 진행되었던 종교․사상상의 일정한 변동이 깔려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과연 변동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느 정도의 변동이며 그 사회․문화적 의미와 영향은 어떤 것일까.
현재까지 6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고구려사회에서 어떠한 종교․사상상의 변동이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구체적인 문헌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한적이나마 당시의 종교적 흐름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기사가 몇 가지 있어 고분벽화 자료와의 해석상의 연결이 가능할 듯하다. 먼저 불교와 관련된 두 기사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551년(陽原王 7年) 僧 惠亮이 將軍 居柒夫를 따라 新羅로 亡命한 것과 관련한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平原王代인 576년(平原王 18년) 丞相 王高德이 僧 義淵을 중국에 보내 《十地論》등에 대해 알아 오게 하였다는 기사이다. 기사에 따르면 신라 眞興王은 혜량을 僧統으로 삼고, 처음으로 百座講會와 八關之法을 두게 하는데, 이는 僧 혜량 개인에 대한 평가 외에도 고구려 불교의 敎學 및 信行 수준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한 조치로 이해된다. 승상 왕고덕이 僧 의연에게 《十地論》,《智度論》,《地持論》,《金剛般若論》의 作者, 著論緣起, 靈瑞所有 등을 알아 오라고 하였다는 기사는 6세기 중엽 당시 일부 在家佛者의 불교교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매우 깊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 기사로 보아 이 시기에 이르면 승려 뿐아니라 일부 재가불자들의 불교 이해도 비교적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국가가 ‘崇信하면 福을 받을 수 있는 종교’로 백성에게 홍포하던 4세기말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불교 관련기사와 함께 눈길이 가는 문헌자료로는 5세기 이후의 고구려사회의 신앙일반에 대해 언급한 《周書》이하 《北史》, 《舊唐書》, 《新唐書》등의 관련기사이다. 577년까지의 對中관계기사를 담고 있는《周書》와 614년 高句麗․隋戰爭記事까지가 실린 《北史》는 佛法과 淫祀를 함께 섬긴다고 기록한 반면, 고구려 멸망 이후까지도 다루고 있는《舊唐書》, 《新唐書》는 淫祀가 많다는 것만 언급하고 있다. 이로 볼 때, 고구려사회에서 불교신앙이 배척되거나 약화되는 것은 7세기 이후의 일이며, 적어도 6세기 후반까지는 불교가 고구려 재래의 신앙행위로 이해되는 淫祀와 함께 사회적 영향력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周書》등에서 언급되고 있는 鬼神과 淫祀는 《三國志》와 《後漢書》에 기록된 고구려 재래신앙의 대상 및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392년(고국양왕9년)의 ‘佛法을 믿어 福을 구하라’로 시작된 불교신앙의 장려와 ‘國祀를 세우고, 宗廟를 수리케 했다.’로 상징되는 전통제의의 정비와 운영이라는 고구려의 종교․사상정책은 6세기 후반까지도 어느 정도 그 기조와 영향이 유지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면 몇 가지 문헌자료가 보여주는 이러한 흐름과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위와 같은 현상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먼저 僧 惠亮 및 王高德과 관련한 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사회에서의 불교 이해 수준의 향상이 불교의 轉生的 내세관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함으로써 오히려 불교적 내세삶에 대한 소망을 약화시켰을 가능성이다.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의 향상은 필연적으로 來世轉生과 來世淨土化生의 본질적 差異를 인식케 했을 것이고, 이같은 인식이 강조될 경우, 일반적으로 兩者의 차이를 그리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世俗人의 입장에서는 불교적 내세삶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崇信求福’的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성립한 5세기까지의 불교적 내세삶에 대한 인식, 곧 天界轉生과 淨土化生을 거의 구별하지 않는 사고와 佛敎를 숭신구복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현세를 輪廻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삶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태도 사이의 인식의 간격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6세기를 전후하여 在家佛者들 사이에 후자와 같은 인식이 확산되면서 불교의 전생적 내세관이 지니고 있던 매력은 크게 弱化되는 것이 아닐까.
다음으로《周書》등에 실린 기사를 고분벽화와 관련지어 검토해보자. 이들 史書의 기사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佛法을 믿으면서 ‘淫祀도 좋아했다’, 혹은 ‘鬼神을 섬기며, 淫祀가 많았다’는 부분이다. 《三國志》, 《後漢書》의 관련기사를 함께 생각하면, 고구려 재래신앙의 기본 줄기는 5세기를 포함한 그 전후 시기에 맥락이 이어지고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래신앙에는 2장에서 언급한 내세삶과 관련한 繼世的 사고와 그 변형으로서의 昇仙的 사고도 포함된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교 이해 수준의 향상으로 불교의 轉生的 내세관에 대한 기존 인식의 限界가 드러나고, 그 여파로 이에 쏠리던 관심이 약화되었다면, 그 영향은 내세관 구성의 틀과 표현의 場에 모두 미칠 수밖에 없다. 내세관의 내용과 그 표현의 장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계세적 사고와 승선적 사고를 부차적 요소로 삼고, 전생적 사고를 위주로 성립되었던 고구려의 불교적 내세관과 그 표현이 6세기에 이르러, 특히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5세기 생활풍속계와 장식무늬계 고분벽화에서는 벽화구성 제재의 하나일 뿐이던 四神이 6세기에 이르면 무덤칸 벽화의 중심제재가 되고, 연꽃을 비롯하여 불교와 관련된 제재들은 부수적 위치로 새롭게 자리매김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