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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해가 떠오르면(말4:1-3)-2021.1.10
새해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기대와 소망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금년은 비교적 코로나로 인해 차분하고 무겁고 어둡게 시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드시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절대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다. 진짜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퇴보하거나 침륜에 빠지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세상 것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고 내 영혼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까 염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면 믿는 자의 다름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르며, 행동이 달라야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생각을 하며, 믿음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뉴질랜드에서는 겨울이 되기 전에 양털 깎기를 한답니다. 양털이 수북하면 양들이 웅크리고 앉아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얼어 죽는 일이 있는데, 양털을 깎아주면 양들이 춥다고 뛰면서 겨울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금년 한해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펼쳐질는지 모릅니다. 절대 두렵다고 웅크리지 말고 당당하게 대처하여 거뜬히 승리하는 해가 되게 하십시다. 우리 안에 의로운 해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거든요. 물론 본문에서 말씀하는 의로운 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별칭이 많습니다. 족히 백여 개는 넘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은 길, 진리, 생명, 빛, 생명의 떡, 산돌, 어린양, 포도나무, 별, 왕, 주, 산성, 반석, 구원의 뿔 등 수없이 많지요.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로운 해로 비유합니다. 물론 의로우신 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예표이지요. 그런데 그 해가 그냥 해가 아닙니다. 의로운 해입니다. 해가 무슨 의로운 해가 있고 불의한 해가 있다는 말씀일까요? 의로운 해라고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강조함이요, 참 빛으로 오실 예수님의 속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말라기서 저자가 여호와를 해로 비유한 것은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임하시는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문학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의로운 해라고 말씀하는 것은 해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비추는 해라 할지라도 악인들에게 비추는 해는 풀무 불 같이 임하셔서 그들의 뿌리까지 태워버릴 것이요, 의로운 자들에게 비추는 해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에너지원이 될 것입니다. 이른바 의인들에게 비추는 해는 생명과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빛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본문1절은 동일한 해라 할지라도 의인에게 미치는 역할과 악인에게 미치는 역할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사실 말라기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에 성전을 재건하고 자신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고대했지만 여전히 고달픈 생활이 끝나지 않은 거예요. 그러자 그들은 다시 타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때 말라기 선지자가 등장하여 그들의 고난의 원인이 그들에게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의 날’이 도래하면 모든 수고를 하나님이 갚아주실 거니까 소망 중에 인내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라기서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에 나타날 반응은 의인과 악인에게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악인은 악인대로 벌하시고, 의인은 의로움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악인은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될 것이고 그들을 초개와 같이 불살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뿌리와 가지까지 남기시지 않겠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자기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신데 의인과 악인을 다루시는 방법은 전혀 다르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비추시는 해라 할지라도 악인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불이 될 것이나, 의인에게는 생명과 성장을 도모하는 치유하는 빛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성품의 양면성이에요. 여기서 ‘여호와의 날’은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날’인 거예요. 예수님은 의로운 해이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1장78절은 예수님을 ‘돋는 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해는 빛을 공급하는 에너지이지요. 그리고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빛의 최고 에너지는 태양입니다. 모든 만물은 태양이 없으면 살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되시는 예수님이 안계시면 인간은 물론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습니다. 태양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을 신처럼 숭배합니다. 해마다 년초가 되면 해돋이를 하지요. 문제는 단순한 해돋이가 아니에요. 떠오르는 해를 향해 한 해의 소원을 비는 무속적인 의도를 가지고 찾는 것이지요. 해가 복을 준다고 여기는 우상숭배의 심정으로 찾는 거예요. 전국적으로 해돋이가 좋은 곳은 관광명소가 되어 인산인해를 이루지요. 대표적으로 정동진이나 포항의 호미곶, 경주 토함산이나 제주 성산의 일출봉, 강릉 경포대 같은 곳이 해돋이의 명소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절대 태양이 우리에게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에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은 하나님이 제일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그들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부인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우상숭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장23절을 통해 우상숭배의 정의를 내려줍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다시 말해서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장25절의 말씀을 빌려 보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에요.
다시 말합니다. 태양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태양은 예수님이 아니에요. 단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이 태양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과 태양을 동일시하는 것은 절대 안됩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태양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라(Ra)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대 수메르 사람들은 태양신 ‘우투(Utu)’를 섬겼습니다. 또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수메르인들이 섬기던 태양신 ‘우투’를 이름만 바꾸어 ‘샤마시’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인도 사람들 역시 ‘야디트야’라는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절대 태양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그냥 해는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 창조해주신 피조물일 뿐이에요. 다행히 금년에는 거리두기와 집합금지명령으로 인해 해돋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쉽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부질없는 심리적 우상숭배로부터 모처럼 자유할 수 있는 기회라 무척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간혹 우리는 본질과 비 본질을 착각하고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도 예수님에 관해서는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알고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과 예수님에 관한 것을 알고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십자가를 우리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모든 십자가는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해 죽어야 할 죄수들의 사형도구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2천 년 전 갈보리 한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 중에 한 십자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좌우에 있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중앙에 세워진 십자가였습니다. 좌우에 세워진 십자가는 자신들의 죄로 인해 죽어야했던 십자가였지요. 그 십자가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오직 가운데 세워진 그 십자가가 내가 바라보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위해 세워진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만 내 영혼을 위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친히 나의 죄를 위해 죽어주셨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믿음의 본질과 비 본질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을 우리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면 죄입니다. 우리는 의로우신 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의로운 해가 떠오를까요? 2절을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입니다. 즉,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주의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요1: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해가 떠오르는데 어떤 자에게는 의로운 해가 되고, 어떤 자에게는 풀무불보다 더 뜨거운 심판의 불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과 악인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공의로 당신의 의를 나타내시고, 의인에게는 사랑으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거든요. 의로운 자에게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창궐한다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의로운 해가 우리를 치료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빛이 우리 심령을 비추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모든 죄악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의 육신에 비추면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주고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19편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던 그 옛날 그 불기둥처럼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안내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받는 것일까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치유함을 받습니다.
(1) 치유함을 받습니다(2절상)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사건과 사고와 질병이 가득합니다. 모두가 다 병들어 있습니다. 마치 치료를 기다리는 병원과 같지요. 그것은 자연계나 비 자연계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동일하다는 말이에요(롬8:19-24). 한마디로 세상이 온통 병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21세기는 지구가 정신병동이 될 것이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현대인들의 영적 질병은 심각합니다. 이른바 신경정신계통의 질병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주변에 우울증, 신경쇠약, 강박증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불면증을 앓고 있어요.
아무리 좋은 신약이 개발되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들이 끝없이 생겨나기 때문에 치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의학의 발달로 육신의 질병치료는 약간의 도움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날로 더해가는 정신과 질병, 영적질병은 현대의학으로 치료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육체의 질병이든지 영적인 질병이든지 치유의 본질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지요. 영육간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질병은 인간이 지은 죄의 바이러스에요. 죄의 바이러스가 질병을 타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질병은 죄의 바이러스를 물리치면 됩니다. 죄의 바이러스를 해결하지 않으면 질병의 완전한 치유는 불가능해요. 잠간동안 건강한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 죄의 바이러스가 우리 안에 잠복되어 있기 때문에 금방 또 다른 질병에 감염되고 말거든요. 또 다른 질병이 모양을 달리하여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지금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잖아요. 변형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계속 생겨나고 있어요.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영국발 바이러스, 남아공 바이러스로 계속 변형되고 있어요. 얼마나 또 분화할는지 전문가들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지구촌이 긴장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병든 세상을 치료하러 오신 것입니다. 병든 땅을 치료하고, 병든 인간을 치료하러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치료하시는 광선을 우리에게 발하시면 모든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있어요. 예수 믿기만 하면 무조건 어떤 병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질병은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이른바 성도들도 질병에 걸린다는 말이에요. 감기도 걸리고 암도 걸려요. 다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에게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 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모든 질병의 근본을 고쳐주신다는 것이지요. 질병의 뿌리를 태워버리신다는 거예요. 질병의 뿌리가 무엇일까요? 질병의 뿌리는 죄악입니다. 죄를 태워버리면 질병은 더 이상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아요. 죽을병도 걱정이 없어요. 죽음으로부터 자유 함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짜 치료에요. 묻겠습니다. 감기에 걸리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험한 질병에 걸렸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 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진정한 치유는 자유 함에 있는 거예요. 여기서 치료한다는 말은 굳이 약을 쓰고 외형적으로 고쳐주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진정한 치료는 내적인 치료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가 다 치료받아야 할 공간이요, 치료받아야 대상입니다. 이 땅에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 교회도 치유를 받아야 하고, 가정도 치유를 받아야 해요. 그것은 사업장이나 직장, 이 땅 어디든지 치유가 필요한 곳이라는 말이에요. 물론 죄악의 당사자인 인간들은 두말 할 것도 없지요. 금년에 우리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영육간의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나가를 기도하십시다. 반드시 그런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일까요? 영과 육이 회복을 받습니다.
(2) 회복을 받습니다(2절하)
진정한 치유는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결과는 회복이요, 자유입니다. 치유는 자유를 찾는 통로요, 회복을 위한 과정이지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면 죄인이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외양간에 갇혀 있던 송아지가 뛰는 것 같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한번 외양간의 갇혀 있는 송아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외양간하면 가장 먼저 어떤 것이 생각나십니까? 일정한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자유 함이 없는 곳이지요. 또한 침침하고 답답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외양간은 더러운 분뇨 냄새가 나는 곳이요, 지저분한 것이 연상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자유가 없이 갇혀진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뭔가에 갇혀 있는 공간이지요. 어찌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곳은 아닐까요? 모든 인간들이 무언가에 붙잡혀 있고 묶여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에 묶여 있고, 어떤 이는 명예, 권세, 자기생각, 자기자리, 자녀에 묶인 자도 있고, 사랑에 매인 자도 있으며, 건강에 붙잡혀 사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분노에 잡혀 살고, 어떤 이는 걱정과 근심에 매어 있습니다.
모두 다 외양간의 송아지처럼 말입니다. 외양간은 자유를 없어서 자유롭게 뛸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외양간에 갇혀 있는 송아지가 얼마나 뛰어놀고 싶겠습니까? 그야말로 송아지입니다. 천방지축 뛰고 싶은 송아지란 말이에요. 송아지는 활동량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먹을 것도 많습니다. 그런 에너지가 충만한 송아지를 좁은 공간에 가두어 놓았으니 그 스트레스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송아지를 풀어서 따사로운 햇볕을 쬐게 하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데리고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송아지는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뻐 뛰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어둡고 침침하고 답답한 공간에서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초원으로 나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아닐까요? 사람이나 동물, 식물은 태양이 없으면 병이 들고 죽습니다. 그래서 광선은 최고의 소독법인 것입니다. 세균을 죽이고 건강하게 해주는 최고의 치료제란 말이에요. 그래서 최고의 치료법은 빛으로 하는 것입니다. 레이저 광선, 엑스 광선, 태양 광선은 빛으로 하는 치료법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태양을 쪼여야 합니다. 사람은 두말할 것 없구요.
그래서 유럽인들은 태양을 안보면 눈동자에 곰팡이가 핀다하여 일광욕을 좋아한답니다. 때문에 감옥 속에 있는 죄수들도 일정시간 빛을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하에 일터를 가진 사람들도 반드시 하루에 규칙적인 일조량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일조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일조권에 대한 소송이 많은 이유입니다. 이처럼 빛은 생명체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필수적인 에너지원이기 때문이에요. 그런 에너지를 태양이 공급하는 겁니다. 그 태양을 누가 만드셨나요?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때문에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영생을 얻고,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는 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승리를 얻게 됩니다.
(3) 승리를 얻습니다(3절)
누구든지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광선을 받기만 하면 최후 승리를 보장받습니다. 어둠은 빛이 오면 자동적으로 해제됩니다. 빛과 어둠은 절대 사귈 수가 없거든요(고후6:14). 태양은 어둠을 몰리치는 권세가 있습니다. 흑암을 물리치는 권세가 있어요. 제아무리 어둠이 강력해도 한줄기 빛만 있으면 어둠은 자동으로 소멸됩니다. 어둠과 억지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힘들여서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억지로 빛을 찾으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영혼을 비추시는 빛을 환영하고 모셔드리면 됩니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빛은 참 빛이시고, 큰 빛이십니다. 그 빛 되신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로 영접하면 모든 어둠은 한방에 물러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어둠을 몰아내기 위함입니다.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리면 어둠은 물러가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날’에 의인과 악인의 처지가 역전이 됩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이요, 마지막 날입니다. ‘그 날’에는 의인이 악인의 위에 군림할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2절의 ‘의로운 자’를 말합니다.
그동안 악인들은 의로운 자들을 지배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의인들이 부러워할 만큼 형통했습니다. 의로운 자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도 그런 것들이었지요. 그들은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은 왜 저런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저렇게 못된 사람을 왜 데려가지 않으신지 모르겠다’고 투정합니다. ‘왜 저렇게 나쁜 사람은 잘사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더욱 위험한 생각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살아계시는 것일까?’ 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합니다. 말라기서3장14절과 15절을 보십시다. 그들은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13절). 그리고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합니다(15절).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14절)라고 반문합니다. 한마디로 믿음 없는 자들이 토해내는 부질없는 궤변들이지요.
물론 그래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달랐습니다(3:16).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런 자들의 소리를 들으실 터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여호와의 기념 책에 기록하셨다’고 고백합니다(16절). 이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날에 의인들의 손을 빌어 악인들을 밟아 버릴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거예요(4:3절). 믿으십니까? 여호와의 정한 날에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크고 놀라우신 일들을 말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시23:5).
분명히 그날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결과가 역전되는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편1편 기자의 고백처럼 될 것입니다. 시편1편6절입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망치 말아야 합니다. 혹은 악인들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함을 당할지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이기 때문입니다(마5:10).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요, 각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교회가 이 땅에서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억울하다고 불평하거나 탄식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한 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3절). 하나님의 정한 날에 하나님은 모든 원수들의 악행을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악인들이 의인들의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이 될 것입니다. 의인들이 악인들을 밟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말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모든 죄를 밟아버리고, 모든 질병도 밟아버릴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호와는 말씀하시고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금년 한해 예수님의 권세가 내 권세가 되고, 예수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며,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게 하십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안에서 승리하는 한해가 되게 하십시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악인들의 권세가 우리의 발바닥 밑에 있는 재와 같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위에 치료하는 광선이 일년 내내 머물게 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모든 심령위에 의로운 해가 항상 떠오르게 하십시다. 또한 이 민족과 열방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해가 지지 않고 떠오르도록 기도하십시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감히 어떤 사람이 의로운 해를 떠오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재주로 의로운 해를 떠오르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성전 삼고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주관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전부로 모셔 드리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면 됩니다. 즉, 주님이 내 심령의 주인 되어서 주님은 머리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지체가 되어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면 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지요.
그러면 주님이 내 심령을 비추어 내 영혼을 하나님의 보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또한 내 삶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 행하는 모든 것들 위에 결코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 주님만 바라보고 집중하고, 그분이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그분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멋진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 모두에게 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한 해가 되게 하십시다.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승리하십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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