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써 본다. 제헌절을 전후하여 아내의 재가를 얻자 이런 저런 이유로 김삿갓처럼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푸른 파도가 펼쳐지는 동해바다를 따라서 망양의 하얀 모래를 밟아도 보고, 흰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를 가슴에 안으며 강원도로 미끄러져 간다. 바다가 보이는그린 캠퍼스 국립삼척대학교가 건립한 해신당공원에도 들렸다. 처녀총각의 애절한 사연과 남근의 전설로 유명한 갈남 2리의 공원은 영상수족관을 비롯 어촌의 옛 모습과 체험공간 등 어촌 생활사를 전시하였으며 애랑과 섶넘이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이 있어 관광객의 발을 머물게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번의 여행 목적지는 영월이다. 애달픈 단종과 방랑시인 김삿갓의 고장을 두루 섭렵하고팠기 때문이다. 단종의 유폐지는 청령포이다. 청령포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다. (청령포 지방기념물 제5호)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소재하고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에 깊은 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뒤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서 300척, 남북 470척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는 이곳에서 유폐생활을 시작하셨다. 고도(孤島) 아닌 이 절묘한 고도, 이 곳처럼 절묘한 지형도 드물다.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이 영월 근교에 이르러 300도 정도의 곡선을 그리는 곳이다. 따라서 3면이 강물인 그 속은 숲이 우거지고 뒤에는 육륙봉의 험난한 산이 서 있어 유폐시키기 알맞었을 것이다 제한 구역 끝머리 제1봉 중턱에 세워진 망향탑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아리게 한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1.5미터 정도 높이의 작은 탑, 그러나 그 탑의 의미는 어느 탑보다 애처롭다. 어린 몸으로 이 이상 높게 쌓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단종은 여기에 오르면서 돌을 하나씩 나르면서 서낭당을 만들려고 탑을 쌓았다고 전한다. (청령포의 이모저모) 어린 단종은 여기에 올라 설 때마다. 산너머 멀리 있는 그의 비인 정순왕후와 한양을 못내 그리워하였다니 어찌 눈시울이 뜨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앞에 놓고 아비규환의 세계를 생각하면 삶이 무엇이고, 영욕이 무엇이관대 하는 아픔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한 두번 억울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세상 시름 다 잊고 한 번 쯤 이런 곳에 올라 한 걸음 뒷발치에서 조용히 삶을 관조해 보는 여유야말로 이 세상 괴롬 다 잊게 하지 않겠는가? 망향대에서 정면에 바라보이는 곳이 노산대이다. 단종은 수시로 이 곳에 올라 시를 짓고 읊었다 한다. 또한 노산대는 단종이 목숨을 거두었을 때 그를 따라 온 신하와 궁녀들이 낙화처럼 몸을 던져 절개를 지킨 곳이기도하여 한참동안 눈을 감아 본다.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어제시 (御製詩)>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어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망향탑과 노산대를 오르는 바로 앞에 아주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높이 30미터, 둘레 5미터, 지상 1.2미터 쯤에서 두 가지로 갈라져 유배생활 할 때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으니 600년 이상을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는 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니 더욱 숙연해 진다. (천년기념물 349호 관음송) 단종이 기거하던 집을 향하여 90도로 절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주위의 모든 소나무가 단종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 있어 경이로움을 더해 주었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독자인 원자로 태어나 이름은 홍위였다. 출생 하루만에 어머니 권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홍위는 할머니 뻘인 세종의 후궁 양씨의 정성 속에 자라는 비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종 즉위 (145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으나 1453년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등과 결탁하여 왕실의 위기라는 명분을 걸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청령포 지방기념물 제5호)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소재하고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에 깊은 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뒤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서 300척, 남북 470척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는 이곳에서 유폐생활을 시작하셨다. 고도(孤島) 아닌 이 절묘한 고도, 이 곳처럼 절묘한 지형도 드물다.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이 영월 근교에 이르러 300도 정도의 곡선을 그리는 곳이다. 따라서 3면이 강물인 그 속은 숲이 우거지고 뒤에는 육륙봉의 험난한 산이 서 있어 유폐시키기 알맞었을 것이다 제한 구역 끝머리 제1봉 중턱에 세워진 망향탑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아리게 한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1.5미터 정도 높이의 작은 탑, 그러나 그 탑의 의미는 어느 탑보다 애처롭다. 어린 몸으로 이 이상 높게 쌓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단종은 여기에 오르면서 돌을 하나씩 나르면서 서낭당을 만들려고 탑을 쌓았다고 전한다. (청령포의 이모저모) 어린 단종은 여기에 올라 설 때마다. 산너머 멀리 있는 그의 비인 정순왕후와 한양을 못내 그리워하였다니 어찌 눈시울이 뜨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앞에 놓고 아비규환의 세계를 생각하면 삶이 무엇이고, 영욕이 무엇이관대 하는 아픔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한 두번 억울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세상 시름 다 잊고 한 번 쯤 이런 곳에 올라 한 걸음 뒷발치에서 조용히 삶을 관조해 보는 여유야말로 이 세상 괴롬 다 잊게 하지 않겠는가? 망향대에서 정면에 바라보이는 곳이 노산대이다. 단종은 수시로 이 곳에 올라 시를 짓고 읊었다 한다. 또한 노산대는 단종이 목숨을 거두었을 때 그를 따라 온 신하와 궁녀들이 낙화처럼 몸을 던져 절개를 지킨 곳이기도하여 한참동안 눈을 감아 본다.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어제시 (御製詩)>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어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망향탑과 노산대를 오르는 바로 앞에 아주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높이 30미터, 둘레 5미터, 지상 1.2미터 쯤에서 두 가지로 갈라져 유배생활 할 때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으니 600년 이상을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는 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니 더욱 숙연해 진다. (천년기념물 349호 관음송) 단종이 기거하던 집을 향하여 90도로 절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주위의 모든 소나무가 단종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 있어 경이로움을 더해 주었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독자인 원자로 태어나 이름은 홍위였다. 출생 하루만에 어머니 권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홍위는 할머니 뻘인 세종의 후궁 양씨의 정성 속에 자라는 비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종 즉위 (145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으나 1453년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등과 결탁하여 왕실의 위기라는 명분을 걸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청령포의 이모저모) 어린 단종은 여기에 올라 설 때마다. 산너머 멀리 있는 그의 비인 정순왕후와 한양을 못내 그리워하였다니 어찌 눈시울이 뜨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앞에 놓고 아비규환의 세계를 생각하면 삶이 무엇이고, 영욕이 무엇이관대 하는 아픔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한 두번 억울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세상 시름 다 잊고 한 번 쯤 이런 곳에 올라 한 걸음 뒷발치에서 조용히 삶을 관조해 보는 여유야말로 이 세상 괴롬 다 잊게 하지 않겠는가? 망향대에서 정면에 바라보이는 곳이 노산대이다. 단종은 수시로 이 곳에 올라 시를 짓고 읊었다 한다. 또한 노산대는 단종이 목숨을 거두었을 때 그를 따라 온 신하와 궁녀들이 낙화처럼 몸을 던져 절개를 지킨 곳이기도하여 한참동안 눈을 감아 본다.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어제시 (御製詩)>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어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망향탑과 노산대를 오르는 바로 앞에 아주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높이 30미터, 둘레 5미터, 지상 1.2미터 쯤에서 두 가지로 갈라져 유배생활 할 때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으니 600년 이상을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는 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니 더욱 숙연해 진다. (천년기념물 349호 관음송) 단종이 기거하던 집을 향하여 90도로 절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주위의 모든 소나무가 단종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 있어 경이로움을 더해 주었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독자인 원자로 태어나 이름은 홍위였다. 출생 하루만에 어머니 권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홍위는 할머니 뻘인 세종의 후궁 양씨의 정성 속에 자라는 비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종 즉위 (145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으나 1453년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등과 결탁하여 왕실의 위기라는 명분을 걸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어제시 (御製詩)>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어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망향탑과 노산대를 오르는 바로 앞에 아주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높이 30미터, 둘레 5미터, 지상 1.2미터 쯤에서 두 가지로 갈라져 유배생활 할 때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으니 600년 이상을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는 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니 더욱 숙연해 진다. (천년기념물 349호 관음송) 단종이 기거하던 집을 향하여 90도로 절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주위의 모든 소나무가 단종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 있어 경이로움을 더해 주었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독자인 원자로 태어나 이름은 홍위였다. 출생 하루만에 어머니 권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홍위는 할머니 뻘인 세종의 후궁 양씨의 정성 속에 자라는 비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종 즉위 (145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으나 1453년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등과 결탁하여 왕실의 위기라는 명분을 걸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천년기념물 349호 관음송) 단종이 기거하던 집을 향하여 90도로 절하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주위의 모든 소나무가 단종을 향해 절하듯이 굽어 있어 경이로움을 더해 주었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독자인 원자로 태어나 이름은 홍위였다. 출생 하루만에 어머니 권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에 홍위는 할머니 뻘인 세종의 후궁 양씨의 정성 속에 자라는 비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문종 즉위 (145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경복궁에서 즉위 하였으나 1453년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등과 결탁하여 왕실의 위기라는 명분을 걸고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단종이 기거하시던 곳) 단종의 보필 신하인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허수아비 상왕으로 올려 놓는 등 국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 2년 충성스런 신하들이 단종을 복위 하려고 뜻을 모았으나 동모자 김질의 배반으로 사전에 세조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죽이는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청령포에 유폐되는 비참한 역사를 낳았던 것이다. 그 해 여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의 처소가 유실되자 태조 7년에 건립한 동헌의 객사(客舍)였던 관풍헌으로 옮기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셨다 한다. 관풍헌은 지금의 복잡한 영월 읍내에 있다. 모두들 이 곳은 지나치고 가지만 한 번쯤 들러 옛날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관풍헌 옆에는 자규루가 있다. 원래는 세종10년(1428)에 영월 군수 신숙근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 하였으나 단종이 이 곳 객사에서 거처하시다 자신의 고뇌를 이 루각에 올라 애절한 자규시로 읆은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서 언제인가부터 자규루라 불리어졌다. <자규시 (子規詩)>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듯 봄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그 후에도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특별히 세종의 6번째 아들로서 이름이 유이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1457년 가을 복위사건으로 연루되자 단종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노산대군에서 서민으로 폐하는 한편 아예 후환을 없애려고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강요하여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슬프고도 애절한 이 땅의 한을 맺었다.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단종대왕능의 문인석과 마석) 옥체가 동강물에 던져지며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관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한 후 금강산으로 피신함에 지금도 충신으로 추모 받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지금의 능이 있는 동을지산에 매장한 것이다. 그 후 224년만에 숙종 7년 (1681)에야 비로서 대군으로 추봉 되었으며 , 다시 숙종 24년 (1698년) 왕위로 보위되어 단종이라하고 지금의 장릉(藏陵))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는 구구하다. 세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사약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약 등이란 애매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으니 실로 의구심을 더해 주고 있다. 자결을 하도록 사주 하였기에 이 곳 사람들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스스로 목을 메고 죽으셨다고도 한다, 한편,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자 개고기를 먹고 싶다 하시며 개를 한 마리 가져오게 하고 밧줄을 달라해서 밧줄로 개의 목을 맬테니 당겨라 하고서 그 밧줄에 자기의 목을 매어 죽었다고 귀띔하는 한 공무원으로부터 슬쩍 듣는 행운도 얻었다. 이 곳 동헌의 관풍루는 김삿갓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병연(炳淵),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철종14년 계해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했다.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 란시, 적에게 항복한 죄를 질타하며 김익순을 “너 이놈”이라고 부르면서 영월 관풍루 향시에서 빼어난 글 재주로 20세의 젊은 나이에 당당 장원에 급제하였다. 신랄하게 비판한 자가 바로 자기 조부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겠다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동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 유적지를 엊그제 태백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의미 깊게 둘러 보았다. 단종을 찾아 영월에 왔다면 결코 스치고 지나갈 수 없는 한 곳이 더 있다. 필자는 이 곳을 찾느라 충북 제천까지 다녀 왔고, 찾지못하여 포기하려다 제헌절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결코 놓칠 수 없어 이곳 저곳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으니 더욱 값지고 뜻이 있을 수밖에 청령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1킬로미터 지점이나, 강원도와 충북의 경계지점이어서 더욱 찾기가 애매하다. 그의 호는 관란이며 세종 5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단종이 유폐되자 이 곳에 내려와 단을 쌓고 그 옆에 움막을 지어 세상과 접촉을 끊고 묻혀 살았으니 바로 그 곳이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이다. 오늘 필자가 어렵게 찾은 바로 이 곳이다. 선생은 영월의 청령포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눈물 흘리며 문안드리던 서강의 상류지류인 주천강 절벽언덕루각이다.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관란정)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표주박과 함지박에 넣고 풀잎에 글을 써서 강으로 흘러 보내면 단종이 청령포 여울에서 드시고 빈박을 놓으면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는 아름다운 얘기와 충성심을 현판은 설명하고 있다. 실로 목이 메는 일이다. 살아서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고 뜻을 품고 숨어서 사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6분을 생육신, 역사 시험문제로 많이도 외웠던 이름들이다.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성담수 남효온 선생님이시다. 그 중에서 원호선생과 관란정에 얽힌 이야기가 바로 여기다. 한없이 맑고 수량 많은 서강 지류, 바로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을 굽이쳐 흐르니 1급의 동양화가 아닐 수 없으나, 이 정자에서 절벽을 따라 강가로 내려 가서 과일과 채소를 띄웠을 그 오솔길은 잡초로 우거져 있어서 더욱 쓸쓸하고 습쓸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부여 낙화암과 맞먹고 충주 탄금대보다 높다. 그러니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저 멀리서부터 짙은 S자를 그리면서 암벽에 한 껏 부딪쳐 흐르는 강줄기의 절경이 6백년 전의 옛날과 오늘이 마냥 함께 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이 땅과 저 하늘의 뜻을 알 것도 같은 그 무엇이 온 머리를 스치며 뜨거운 기운이 나의 온 몸을 휘감아 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린다. 때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이 슬픔이라도 더 하듯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이따금 뒤를 돌이켜보며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도 무거운지 … … 원호의 유허비에는 잘 이해되지도 않은 한자로 빽곡히 적혀 있는데 억지로 몇 자를 더듬어 풀이하면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간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원호선생님은 단종이 죽자 영월에서 3년상을 치루었고 세조가 벼슬을 주겠다고 몇 번이나 불렀으나 한사코 뿌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으니 과연 선비의 지조가 어떠 했음을 엿 볼 수 있어 가슴이 내내 뭉클해지며, 비가 쏟아지는 제천을 빠져 나왔다.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너에게 편지를 최신글 보기 | 삶의♡향기실 | 감동글 좋은글 | 행복한 이야기 | 오늘의 명언실 카페정보 너에게 편지를 골드 (공개) 카페지기 스카렛 회원수 58,504 방문수28 카페앱수15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 지혜 생활정보 단종과 김삿갓의 고장 영월로 가다. 대자연 추천 0 조회 31 03.09.22 15:14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0 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율 환자 환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