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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신준봉
관심
2001년 6월 29일 손영래 당시 서울지방국세청장(가운데)이 6개 신문사에 대한 검찰 고발 사실을 발표하기에 앞서 국세청 국장들과 함께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1회 참담했던 책 장례식
나는 한때 펜을 검으로 여겼다. ‘펜을 검으로 여긴다’는 말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대표작 『말』에 나오는 문장인데, 서른이 넘어 뒤늦게 작가가 된 나는 한동안 저 말을 무슨 신조처럼 떠올리며 지냈던 것 같다. 그렇게 된 데는 아무래도 신산스러웠던 내 가족사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 한다. 옛날 오기를 부릴 때는 삼무자(三無者)라고 해서, 나는 나라 혹은 이념도 없고 아비는 물론이요 스승도 없노라고 큰소리치고 다녔다.
나라가 없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나의 몫을 인정해 주지 않는 대한민국을 내 나라로 여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젊은 나는 한탄하곤 했다. 나처럼 월북한 아버지를 둔 불온한 사람들은 공무원이 될 수도 선출직에 나설 수도 없었다. 1980년에야 전두환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된 연좌제의 폐해다. 아비가 없으니 생활은 파탄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말고는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인생의 스승, 학문의 스승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단독자, 독학자였다. 대신 내게는 검 같은 펜이 있었다. 과거 나는 한 인터뷰에서 말은 부드럽게 하더라도 글은 독하게 써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게 말의 속성이고,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펜은 쓰는 사람도 다치게 하는 면도날이었다
사르트르처럼 결국 펜의 무력함을 깨달았다는 점을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는지. 겪어 보니 펜은 전능한 검이기보다는 그것을 지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면도날인 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01년 책 반환 행사는 내가 이전에 휘말렸던 어떤 논쟁이나 싸움과도 달랐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일이 그렇게까지 됐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발단은 그해 6월 29일 DJ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였다. 아침에 TV를 켰더니 방송 3사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발표를 생중계하고 있었다. 그해 2월부터 132일간 23개 중앙 언론사를 세무조사한 결과 6개 신문사를 조세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짜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 가운데 대표적인 보수 매체인 중앙·조선·동아 3개사에 각각 800억원가량씩 합계 2541억원의 세금을 추징한다는 내용이었다. 덩치 큰 방송사들은 검찰 고발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언론사도 당연히 세무조사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뭔가 몰아가는 방식이 나쁘다고 봤다. 정작 검찰 고발 대상이 된 신문사들은 하나같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2001년 11월 3일 '이문열 돕기 운동본부' 사람들이 소설가 이문열씨의 경기도 이천 자택(부악문원) 앞에서 책 반환 행사를 하는 모습. 사진 이재유
부악문원 옥상에서 내려다본 모습. 사진 이재유
조선일보에 보낸 칼럼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가 7월 2일자에 실렸다.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도 나치의 선전선동을 연상시키지만 야당이 사생결단식으로 반발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보고 달리는 두 기관차 같은 정권과 언론 가운데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면 언론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내 딴에는 객관화를 위해 노력한 글이었다. 내 글이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발표 이후 그에 대해 가장 먼저 문제 삼았던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뜻밖에도 추미애 의원의 ‘곡학아세(曲學阿世)’ 발언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키웠다. 그는 칼럼 게재 이튿날인 7월 3일 새천년민주당 당 4역 회의에서 “지식인들이 언론의 지면 할애를 통해 성장한 후 언론에 곡학아세해서야 되겠느냐”며 나를 공격했다. 칼럼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논란의 정치화는 예상 못 한 것이었다.
충성 독자에 감정적 대응, 사태 악화
내 책에 대한 반환 논의가 돈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번에는 동아일보 7월 9일자에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문화상품인 책도 얼마든지 소비자보호운동의 대상이 되지만 작가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집단적으로 반품한다면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의 문화 파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다.
폭격 맞은 것처럼 내 홈페이지에 글이 쏟아졌다. 그 전해 연말에 개설한 홈페이지는 칼럼 논란 이전까지 게시글이 1000여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칼럼 게재 후 10일 만에 1만4000개가량으로 늘어났다. 내 편을 든 사람도 있었지만 상스러운 표현을 써가며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결국 홈페이지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득을 보겠다고 자해 행위를 하고 있겠나.
돌이켜 보면 한 충성스러운 독자에게 내가 감정적으로 대했던 것이 사태를 악화시킨 측면도 있다. ‘콜리산’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은 내 책을 스무 권 넘게 읽었다고 했다. 10권짜리 『삼국지』 나 『수호지』가 아니라면 단행본으로 나온 내 소설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사람이 내게 실망했다며 책들을 반납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글을 올렸다. “책값에 은행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겠다. 어디 가서 내 책 읽었다고 하지 마라”는 식으로 답했다. 그런 내 대답에 오기나 빈정거림의 감정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내 소설을 그리 열심히 읽었다는 사람이 그만한 일로 나와 결별하려 한다니 섭섭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 전체를 상대로 반환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가 오만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콜리산이 먼저 내게 사과했고 나도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지금이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겠지만, 내가 책 반환하겠다고 독자 대중에 맞섰다가 결국 사과했다는, 한번 굳어진 이미지는 당시에는 쉽게 희석되지 않았다.
11월 3일 책 반환 행사를 강행한 사람들은 이름부터 별났다. ‘이문열 돕기 운동본부’라니. 내 책을 장사 지내고, 내 작품을 형상화한 조악한 조형물을 만들어 태우는 행위가 나를 돕는 일이라는 것인가. 단순히 온라인 반환 논의에 그치지 않고 반환을 위한 단체가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들렸지만 설마 했다. 부산에서 사진관을 한다는 화덕헌이라는 사람이 주모자였는데, 경기도 이천 우리 집 앞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는 몇 년 지나 부산에서 진보신당 구의원이 됐다고 들었다.
책 반환 행사가 벌어질 때 그에 반대하는 민주참여네티즌연대 회원들도 부악문원을 찾아 반환 행사 측과 대치했다. 두 단체 사이에 충돌은 없었다. 사진 KBS 캡처
나는 그날 집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여름부터 약속한 대구 문학 강연이 있었다. 그날 오전 ‘손석희의 시선집중’ 라디오 프로에 출연했다. 오후 대구 강연에 맞춰 가려면 방송 출연 후 오전 아홉 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손석희는 내가 집을 비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손석희 프로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운동본부 측에 내 일정을 알린 다음 행사일을 한두 주일 앞당기거나 미뤄 달라고 했다. 일정이 이미 홍보가 돼 있어서 날짜를 변경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의 답이었다.
어차피 순수한 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책을 반환받을 생각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책 장례식과 대구 문학 강연은 그날 오후 같은 시간에 열렸다. 강연 내내 못 견딜 정도로 심기가 나빴다. DJ 정부의 언론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이 한 희생양이랄까, 죄를 덮어씌울 누군가를 기다리던 차에 내가 걸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반환 행사 측 순수 독자 아냐
반환 행사 측이 순수한 독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나중에 법원 판결문에서도 드러났다. 이문열 돕기 운동본부는 ‘월간 인물과 사상 독자모임’이 주축이었다. 월간 ‘인물과 사상’은 진작부터 내게 비판적이었던 강준만 교수가 발행하는 잡지다. 그런데 인물과 사상 독자모임은, 2003년 7월 나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1심 판결문에 안티조선운동의 회원이라고 나온다. 특정 매체 거부 운동을 펼치는 세력이 그 매체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그 기고자를 단죄하겠다고 나선 것 아닌가. 넉 달 동안 내 책 700여 권을 모았을 뿐이라는 점도 그들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게 했다. 이미 내 소설은 그 당시 모두 합쳐 2000만 부 가까이 팔렸을 때다. 물론 그들은 패소했다.
반환 행사 이튿날인 4일에는 지금은 불타 사라졌지만 고향 경북 영양의 광산문학연구소에서 광개토대왕 관련 모임이 있었다. 5일 집에 돌아와서야 반환 행사의 전모를 들을 수 있었다. 40여 명쯤이 모였다고 했다. 그들은 마을 구석구석 돌며 시위할 계획이었지만, 입구에서 이장에게 제지당하고 내 집 앞에 모였다.
전국적으로 150여 명이 보냈다는 내 소설 733권을 널빤지에 쌓은 다음 묶어서 관처럼 꾸미거나 유골함처럼 치장한 박스 안에 담아 우리 집을 둘러싸듯 자리 잡은 문학 사숙(私塾) 부악문원 앞까지 운반했다. 조시(弔詩) ‘한 시절 천재 작가의 곡학아세를 장송하며’ 낭송에 이어 규방문학 ‘조침문’을 진중권이 패러디한 ‘조책문(弔冊文)’을 또 다른 참가자가 낭송했다고 한다. 그것도 운구 행렬이라고 해야 할지.
내 소설책 표지 사진들을 이어 붙여 제작한 일종의 책 영정을, 열 살가량 여자아이에게 들려 앞세웠다고 한다. 당시에도 이 나라 언론은 갈려 있었다. 내게 온정적인 언론은 문화 참사 혹은 문화 히스테리로 사태를 규정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진시황의 분서갱유, 히틀러의 베를린 분서를 빼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책을 불태운 사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하루 두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살아남아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책 장례식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도 있었지만 정치적 ‘지역 가르기’도 상당히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장례식이 열리기 두 주 전쯤인 10월 16일 부산에서 문학 강연이 있었다. 강연 도중 책 반환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아마 부산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말을 했다. 부산은 안동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다음 건너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사대에 진학할 때까지 10대 후반 4, 5년을 방황하며 보낸 곳이라 어느 도시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같은 경상도 안에서도 지역마다 성향이 다르고, 호남도 전주와 광주 사이에 작은 구별이 있다. 부산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직정(直情)적이기 때문에 화가 나면 불같이 일을 저지르면 저질렀지 한두 권씩 찔끔찔끔 모으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강연이었기 때문에 내가 평소보다 흥분했을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얘기는 거두절미하거나 현장 분위기를 생략하면 오해하기 십상이다.
내 발언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화덕헌이라는 사람이 이튿날 저녁 내가 묵던 호텔로 찾아왔다. “내가 부산 사람 아니면 전라도 사람이냐”고 내게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실수라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답해 뭔가 빌미를 준 것이었다. 화덕헌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부모가 전라도 사람 아니냐고 내가 캐묻더라는,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나는 평생 누군가의 면전에서 대놓고 출신 지역을 물은 적이 없다. 막말로 적지 않은 호남 독자 떨어질 일을 왜 했겠나. 내가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는 뜬소문이 퍼지면서 나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됐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호남 친구들을 만나 광주에서 술 마실 때 그들이 나를 지켜준다고 술집에서 망을 보다시피 하며 잔을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박완서 선생이 유일하게 나 옹호해줘
선배 소설가 박완서씨가 유일하게 이문열씨 소설책 반환 행사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중앙포토
작가에게 소설은 흔히 영혼의 자식이라고 한다. 내 소설들이 그런 처분을 받는 것에 치를 떨 때 나를 옹호해준 동료 작가는 2011년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이 유일했다. 박 선생은 계간 문예중앙 2001년 겨울호 인터뷰에서 기자와의 문답 끝에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그렇게까지 문학이 모독당하는 일이 생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문열씨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에겐 최소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수많은 문학 단체의 침묵은 또 뭡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없이 그냥 넘기는 건 문학 하는 사람들의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박 선생은 용기 있는 발언이 알려져 이뤄진 조선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도 “정말 참담한 느낌이었다. 책을 관 속에 넣고 아이에게 책표지까지 들린 것은 충격이었다. 문학단체가 이씨를 옹호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문학이 이렇게까지 돼야 하는가에 대한 입장 표명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침묵하는 대부분의 동료 작가들로부터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런 일을 벌인 몇 안 되는 사람들보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작가들이 어쩌면 더 마음을 상하게 했다. 자기들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인데, 어떤 문인단체도 책 장례식을 비판하는 성명 하나 낸 적이 없다. 다 지난 얘기다.
전화해서 위로해준 이들은 있었다. 그 무렵 김훈은 술에 취해 전화하면서 울어준 사람이다. 나보다 두 살 위지만 친구처럼 지내던 소설가 박범신도 하루는 술 마시고 전화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울먹였다. 그는 내 초기작 『젊은 날에 초상』에 ‘하가’로 나온 인물의 실제 모델의 친구였다. 하가의 실제 성은 하씨가 아니라 노씨, 그러니까 노가였다. 박범신은 노가의 익산 남성고 동창이었다. 노가와 나는 소설에서처럼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다녔다. 노가를 통해 박범신을 알게 됐고 셋이 자주 어울렸는데 60년대 후반은 홍콩 무협 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이다. 경공술(輕功術)이라고 사람이 날아다니는 무공은 기본이었다. 눈 내리는 날 우리는 사람이 눈 위에 발자국을 안 남기고 날아다니면 어찌 되는 거냐며 낄낄거리고 돌아다녔다.
돌이켜보면 책 장례식은 나를 둘러싼 이념 시비의 정점이었다기보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인터넷 사용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서 겉으로는 문화운동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를 해치는 무기의 가능성이 열린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책 장례식이 남긴 상처는 사건 직후에는 오히려 덤덤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깊어지는 것 같았다. 한두 해 지난 2003년께는 자다가도 깨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화가 나곤 했다. 이후 내 생각이 좀 더 보수적이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한참 후에 상징이라는 것에 대해 한동안 생각하게 됐다.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정신의 자식이 불태워지는 것뿐 아니라 내가 사형을 당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010919 홈페이지 게시판을 닫으며
※ 나는 2001년 7월 칼럼 논란 이후 두 달여 만에 결국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당시 마지막으로 올렸던 글을 이 자리에 다시 옮긴다.
일 년 전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며 게시판을 열 때 나는 많은 낙관적인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대화의 장소, 이 통로를 통하여 지금까지는 간접적일 수밖에 없었던 독자와의 관계를 직접적인 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아울러 방문하는 독자들 상호간에도 분열이 있으면 일치를, 불화가 있으면 화해를 지향하는 건전한 대화의 장소로 활용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의 근거는 교신의 쌍방성(雙方性)이 갖는 이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매우 쓸쓸하고도 울적한 마음으로 그 기대를 덮습니다. 모든 문명의 이기(利器)는 양면성을 갖습니다. 같은 샘물도 나비가 마시면 꿀을 만들고 독사가 마시면 독을 만듭니다. 교신의 쌍방성은 독선과 맹목으로 두절되어 결국 이 게시판의 개설은 일방적이고 표덕스런 욕설만이 오가는 싸움터 하나를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또 독자들의 육성을 통해 내 창작이 보다 현실감을 얻고 자기반성과 아울러 부족한 정보까지 보충받고자 했던 내 터무니없는 기대도 무참히 깨졌습니다. 현실감은커녕 무언가에 홀린 듯한 동어반복만 거듭되고, 자기반성의 촉구와는 무관한 여지없는 단죄거나 욕설과 폭언만이 들끓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익한 정보는 없고, 비뚤어진 자기과시욕과 천박한 영웅심이 무슨 자랑처럼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인격권의 침해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내 인내심은 충분히 시험당한 것 같습니다. 소수의 진지하고도 성실한 방문자들께는 죄스럽지만 나는 잠시 이 게시판을 닫고 우리 네티즌의 의식 향상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이러한 대화의 장이 우리 시대만이 갖는 축복이 되는 시대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닌 듯합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창작은 마음의 평온에 바탕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끊임없이 작가의 상상력과 창조성을 악의로 할퀴어대는 이 게시판을 유지하는 것이 자해행위(自害行爲)에 지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포용력과 관대함을 자랑하고 싶은 작가의 허영이 치르는 대가치고는 너무 큰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성원해준 분들, 그리고 생각과 믿음을 나와 달리하고 있는 분들 모두 우리가 처음 누리게 된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 방식이 단절된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는 진정한 문명의 이기로 승화되는 그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2001년 9월 19일 李文烈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