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는 북핵 실험 직후인 2006년 10월20일 개성을 방문, 북한 접대원들과 '춤판'을 벌였다. |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선거캠프 고문으로 활동한 金槿泰(김근태) 한반도재단 이사장(前열린당 의장)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집요하게 국보법 폐지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金이사장은 2001년 11월28일 국회의원 20명과 함께 국보법폐지법률 서명을 주도했으며, 2004년 9월10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국보법폐지 저지를 선언하자 이렇게 비판했다.
“그토록 정권에 악용되고 국민의 자유민주주의를 탄압한 한낱 임시법이요, 악법 중의 악법인 국보법을 마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양 비장하게 말하고 있다…(중략) 악법이 대한민국의 체제와 연결된다는 발상 자체가 극악스러울 뿐이다…(중략) 국가안보라는 명분 아래 독재정권의 안위를 위해 악용되던 국보법에 한나라당이 그토록 애착을 보이는 것은 군사독재의 적장자임을 자인하는 모습이라 더욱 씁쓸하다.”
경제적 관점(?)에서 국보법 폐지 주장
金이사장은 2005년 1월12일 한 라디오프로그램에서 “국보법을 계속 갖고 있으면 북한과 중국과 계속해서 협력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불필요한 장애가 된다”면서 경제적 관점에서 국보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金이사장은 같은 맥락에서 한총련 등 국보법을 위반해 온 反국가행위자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비호해왔다.
▲ “한총련 합법화에 대한 정부의 긍정적 검토를 바라며 양심수 석방과 수배자 해제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용단을 기대한다.” (2003년 4월 18일 與野의원 47명과 함께 한 성명 中)
▲ “송두율에 대한 공격은 舊(구)시대적 매카시즘(2003년 10월6일)”, “본인의 소원대로 조국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2003년 10월14일, 2004년 7월 ‘북한 대남공작원’이라는 확정판결을 받은 송두율에 대한 발언)
▲ “젊을 때 열정을 갖고 있더라도 나이가 들면 시들어 지는데 한결같은 민족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던 분이다. 한 번도 원칙을 포기한 적 없는 활동가며 지식인이었다.” (2005년 1월7일, ‘金日成수령영생’ 등 북한을 미화해 온 간첩전력자 김남식 장례식장 출처 <통일뉴스>)
金이사장은 또 2005년 10월18일 검찰이 강정구 구속수사 방침을 정하자, 강정구를 비판한 당시 박근혜 대표와 조갑제 前월간조선 대표를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검찰은 지난 1월 ‘친북비호 독재정권 타도는 합헌’이라는 제목의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 내란선동혐의로 고발된 월간조선 조갑제씨에 대해 구속수사하지 않고 무혐의 결정을 내린 바 있다…(중략) 수구 기득권 세력들의 과도한 주장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처분에 대해서는 침묵하다가, 한 관념적인 교수(강정구)의 과도한 주장에 대해서 구속수사를 하지 않는 것이 무슨 대한민국이 큰 결딴이라도 나는 것처럼 마구 소동을 피우는 박근혜 대표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南北국회회담으로 6.15선언 법제화” 주장
김근태 이사장은 反헌법적 6.15공동선언의 계승·발전을 주장해 온 인물이다.
그는 2003년 6월3일 국회의원 29명과 함께 5억 달러에 달하는 不法대북송금사건에 대해 특검반대성명을 발표한 뒤, 같은 달 22일 “대북송금 사건은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막고 남북화해를 위한 결단이었다”면서 “햇볕정책과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2004년 5월6일 “오는 8월15일에 남북국회회담 개최를 추진하겠다”면서 “국회회담에서는 △2000년 남북공동선언을 법제화, 제도화하기 위한 기본법 제정 △경제교류협력을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 합의 등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金이사장은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문제제기는 냉전수구적 색깔론이라고 매도해왔다.
그는 2006년 1월25일 “색깔론을 들고 나오는 박근혜 대표와 대적할 사람은 색깔론의 희생자인 내가 적임자”라거나 “한나라당은 모든 것을 색깔론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같은 달 9일, 8일, 4일 사학법 관련 발언”고 주장했었다.
이와 함께 그는 2004년 12월21일 이철우 파동 당시 “더 이상 이 땅에 냉전과 색깔논쟁의 망령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2003년 7월17일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이적행위로 매도하는 한나라당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행태”라고 비난했다.
金의장은 2006년 5월29일 지방선거 유세에서 “테러와 폭력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듯이 싹쓸이와 민주주의도 양립할 수 없다”면서 한나라당 싹쓸이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으나, 2004년 4월 총선에서는 “거대여당 견제론이라는 유언비어가 수도권까지 넘어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부활을 막지 못하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면서 열린당 싹쓸이를 주장했었다.
金이사장, 세 명의 형과 숙부 모두 越北(월북)
金이사장의 理念성향은 그의 혈연관계에서도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월간조선>이 2004년 3월 보도한 과거 정부의 ‘김근태 신원 및 배후사상관계’ 파일에 따르면 金의장의 큰형은 서울대 美大 출신으로 6·25당시 김일성 초상화를 제작한 후 越北(월북)했다.
둘째 형 역시 越北 후 평성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고등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셋째 형은 의용군으로 越北해 교육성 장학사를 거쳐 통일전선부 對南공작원으로 선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金이사장의 숙부는 越北 후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성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숙모는 6·25때 越北했다. 이 파일에는 또 1973년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 金이사장의 셋째 형을 남파시키려했으나 김정일이 중지시켰다는 첩보가 실려 있다.
김근태 이사장은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 중이던 1986년 국보법위반으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88년 가석방됐고, 1990년에는 전국연합의 전신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정책기획실장으로 국보법을 위반,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전민련은 출범 이후 국보법철폐, 민주자유당 해체 등의 ‘반독재민주화투쟁’,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주한미군철수 등의 ‘반외세자주화투쟁’, 8·15범민족대회 등 ‘조국통일투쟁’ 등을 전개해오다 1991년 12월 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한편, 박원순 변호사는 서울시장 당선 이후 정무부수석비서관실을 신설, 이곳에 김근태계 인물들을 포진시켰다.
일례로 기동민(前박원순 선거캠프 비서실장) 정무수석비서관은 김대중 정권 시절에 청와대 행정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정책보좌관, 고건 前서울시장 시절 신계륜 정무부시장의 비서를 지냈다. 성균관대(85학번) 총학생회장 출신의 기 씨는 전대협 대변인을 거쳐, 김근태 이사장이 極左단체인 전국연합을 이끌 당시 우상호, 이인영 등과 함께 실무자로 일했다.
기동민 정무수석비서관 밑에는 이홍영·권상훈·김동현 정무비서관 3명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이홍영 비서관은 金이사장 보좌관 출신으로 박원순 선거캠프에서 TV토론팀장을 맡았다. 김원이(前청와대 행정관) 정무보좌관 역시 김근태 계로 신계륜 정무부시장의 비서 출신이다. <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