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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8. 오전 9시 주일예배 설교문
신앙고백 (3)
찬송 36 주 예수 이름 높이어식)
대표기도 이선희 권사 (549)
성경 말씀 로마서 5:1~11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카이로스
찬송 206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새 가족 박해자 선생님
광고 추수감사절 예배 후 직원총회 (박영숙, 박이순 권사 임직식)
가족 방문 백춘자 권사 딸, 고정순 권사 서울 아들, 이선주 권사 서울 둘째 아들
김복순 권사 큰아들,
찬송 487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축도 아프니까 그만하세요. 주님도 아프잖아요
정겨워요
당신 목소리
노래도 참 잘하네요
세상 이야기도 잘 아네요
약속도 잘 지키네요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런 당신이
내 귓가에 늘 함께 있어 좋아요/ 정원, 침묵 45 (라디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절,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 요양원 정원은 참 아름답습니다.
담벼락에 담쟁이넝쿨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목사님이 신학교 시절 100년이 넘은 신학관 담벼락에도 담쟁이넝쿨이 가득했습니다.
여름에는 장관입니다.
요양원 담벼락이 푸르고 푸릅니다.
지금은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러면서 O.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저 잎이 지면 나도 죽겠지.
그래서 운명처럼 마지막 잎새만을 남기려 한잎 두잎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엊그제 새벽 3시에 띠리링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목사님, 장로님 배에 있는 관 빠졌습니다.
걱정 마세요.
대자인 병원 응급실 갈 겁니다.
그러자 바둑왕 배복실 선생님께 문자가 올라왔습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배금배 간호사 문자가 올라왔습니다.
아~ PEG는 응급상황입니다.
그리고 전주 대자인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배곱처럼 딱 오그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처럼 수면 내시경실에서 처리해야겠다고
비용이 많이 들거라고.
소화기 내과 의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양원에 왔습니다.
목사님 눈이 아프고 온몸이 으슬으슬 춥고
그래서 몸살 약에 수면제를 먹고 그냥 잤습니다.
온종일 방구석에서 꼼작도 안 했습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목사님이 신학대학원 시절에 구약학 교수님이 박준서 교수님이셨습니다.
키는 목사님과 비슷했지만 풍채는 좋으셨습니다.
100년이 넘는 연세 신학관에서 10여명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박 교수님께서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구약학의 대가셨습니다.
박 교수께서 강의할 때면 꼭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과 함께 오른손을 번쩍 들면서 샬롬 shalom~ 샬롬 shalom ~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목사님 머리도 박 교수님처럼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놈 참 좋습니다.
샬롬 평화 화평이란 놈 참 좋습니다.
화합이란 놈 참 좋습니다.
믿음 샬롬 평화 화합은
전쟁 때문에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역사적 사명 아니겠습니까?
우리 위대한 대한민국도 국민의 짐인지?
주진우, 김태규, 무소속 한동훈 등의 내란 세력들이 버젓이 국회의원 뺏지를 달고
큰소리, 손가락질하는 꼴이란 정말 꼴사납습니다.
그래서 때론 이재명 대통령이, 민주당이 무능하기까지 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얼마나 무능했습니까?
그래서 윤석열이란 해괴망측한 괴물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마터면 대한민국이 망할뻔했습니다.
이런 악의 세력들을 척결도 못 하면서 뭣들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재명 대통령도 정말 강해져야겠습니다.
지난 1주일 동안 목사님이 아팠습니다.
목사님이 지난 2, 3주 동안, 많이 속상했습니다.
정말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들 때문입니다.
아니면 말고 직원간 갈등 때문에 그냥 짐싸 들고 가버립니다.
평생 사랑하겠다던 여편네들도 하루아침에 바람따라 사라지지 않습니까?
이런 여편네들은 말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삼희 선생님 때문에 위로받았습니다.
막 돼먹은 여편네 대신 첫날 출근했는데
하루 근무를 마치더니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난다며
일 못하겠다고 짐 싸 들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체질의 문제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새로 오실 선생께 인계는 하셔야지요?
그러자 두말하지 않고 예!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불교인데 목사님 설교 말씀에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듯 상식과 끝이 아름다운 사람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수석 제자 베드로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먹고 자고 했던 친구입니다.
그러면 가족입니다.
우리 박이순 집사님도 벌써 5년차입니다.
그러면 가족입니다.
가족은 어려울 때 함께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실때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도망치고 모르는 척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참 비겁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이렇습니다.
이것이 칼 흉이 말했던 우리 인간들의 일그러진 페르소나(가면)입니다.
그래서 양두구육 羊頭狗肉이라 합니다.
양 대가리 걸어 놓고 개 대가리 판다지 않습니까?
이제 사랑이란 가면도 벗어 버릴 때입니다.
이제 기독교인이란 가면도 벗어야겠습니다.
이제 목사라는 페르소나도 벗어야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누구를 믿는지 조차 아리송합니다.
어쩜 제 자신조차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까?
바울의 근본적인 믿음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우문 愚問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것은 바울의 엄청난 깨달음입니다.
이렇듯 깨달은 자는 겸손하고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동년배였던 예수를 만나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미움이라는 놈도 서로 알아야 밉던지 사랑하던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났습니다.
바울(사울)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던 장면이 생생합니다.
사도행전 9장 3,4절입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절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8, 9절입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5절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7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절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라 믿었습니다.
바울이 만났던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입니다.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절,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너무나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작금의 세상은 너무도 비상식적입니다.
트럼프가 대표적입니다.
트럼프는 양아치 대장입니다.
푸틴, 김정은, 시진핑, 젤렌스키, 네타냐후 등 모두 양아치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예수님 같은 영웅이 절실합니다.
지금 어느 누가,
이 더럽고 배반이 일상화된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겠습니까?
그러니 언제 인류의 멸망이 올 것인지가 관건 아니겠습니까?
수 많은 기후 학자들이 인류의 멸망을 말하고 있지만 어느 누가 믿겠습니까?
내일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은 몇십억 몇백억 강남 아파트 사는 것이 장땡입니다.
한마디로 종말은 트럼프 같은 양아치들에게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절,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렇게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우리에게 소망이 찾아옵니다.
5절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참 아름답습니다.
목사님도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것이 목사님의 고뇌입니다.
그러니 누구가 밉겠습니까?
모두 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일주일이 휙휙 지나가 버립니다.
우리 김복순 권사님께서(90) 말씀하시기를
목사님과 함께 산지가 벌써 10년입니다.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눈물이 납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영웅입니까?
그것도 선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의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악인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 어디 있겠습니까?
미친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악인을 위하여,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못 박혀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인의입니다.
이 악인은, 이 죄인은 누구겠습니까?
지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서두에 칼 흉이 페르소나를 벗어 버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이 가면을 쓴 얼굴들의 실체를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엄마의 가면?
아빠의 가면?
아내의 가면?
남편의 가면?
목사의 가면?
국회의원들의 가면?
그렇게 된다면 아마 동물의 세상, 이리, 여우들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과의 평화, 화해가 사람들과의 화평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 예수께서는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이 절망 중에 있을 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카이로스(때)라 합니다.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셨겠습니까?
그만큼 우리의 죄가 그만큼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배반, 가증, 위선, 간음, 살인, 도둑질 어찌 이 추악함을 말로 다 셀 수 있겠습니까?
더럽고 추악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인의입니다.
감사합니다.
| ***시 평론 “그래서 눈물을 닦기도 해요” 저는 이 구절이 이번 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1. 라디오가 지식의 전달자에서 마음의 친구로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노래를 잘하고, 세상 이야기를 잘 알고, 약속을 잘 지키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노래를 듣다가 눈물을 닦는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라디오가 단순히 소리를 들려주는 기계가 아니라,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함께하는 친구가 된 것입니다. 특히 이 표현이 좋습니다. “눈물을 흘리게 해요”가 아니라 **“눈물을 닦기도 해요”**라고 하셨지요. 노래 때문에 눈물이 날 수도 있지만, 노래가 마음을 어루만져 눈물을 닦게 해 준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짧은 한 줄에 슬픔과 위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2. 시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깊어집니다. 이번 작품의 흐름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감정이 담깁니다. 오랫동안 자신을 위로해 준 존재에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이 느껴집니다. 3. 마지막 구절의 의미도 더 커졌습니다. 이전에는 친근한 목소리가 늘 곁에 있다는 즐거움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내 눈물을 닦아 준 존재가 언제나 곁에 있다는 안도감까지 느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좋아요”라는 소박한 말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사랑한다거나 고맙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충분히 전해집니다. 한 가지, 시인에게 드리고 싶은 의견 저라면 지금 새로 넣으신 구절을 그대로 두겠습니다. 더 꾸미거나 설명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시의 매력은 어려운 시어가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쓰는 말로 독자의 기억을 불러낸다는 데 있습니다. 라디오를 오래 들어 온 독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릴 것이고, 다른 독자는 AI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목을 모른 채 읽으면 AI에 대한 시처럼 보이고, 제목이 《라디오》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오래된 친구에 대한 시처럼 읽힙니다. 그 두 가지 해석이 함께 살아 있다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수정본이 지금까지의 세 버전 가운데 가장 따뜻합니다. 라디오의 기능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라디오와 함께 살아온 사람의 마음까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그래서 눈물을 닦기도 해요”라는 구절은 실제로 라디오를 들으며 경험하신 감정에서 나온 것인가요? 아니면 라디오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위로를 상상하며 쓰신 것인가요? 어느 쪽이든, 이 한 줄이 시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느낍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