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10)
제자 중의 요셉이 예수님의 주검을 묘지에 모신 이후
처음으로 그 무덤을 찾은 이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은 부활했으므로
거기 계시지 않았다.
놀란 마리아가 즉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여
그들도 허겁지겁 묘지를 찾지만
그 안에 계시지 않는 예수의 시체를 보며 당황하여
누군가 시체를 옮겼으리라는 억측 등
어리둥절할 뿐,
예수의 부활에 대한 언약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적용>
1. '상황을 넘어서는 순전한 믿음'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열정을 식힌다.
혹 무언가를 죽은 예수님에게 한다면
그것은 옛 정,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죽은 예수를 찾는다.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온 마음과 뜻으로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곧 전인격적 믿음이 아닐까?
그에게 원리나 원칙이 무엇이 중요할까?
설령 입으로 논리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미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하다.
주변을 본다.
말로 신앙의 원리를 잘 설명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아내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섬김과 순전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소중하고 충분히 존중해도 부족할 존재이다.
아내에게 잘하자!
내 잘난 척 하지 말고...
2. 상황적 충격에 약속을 망각하는 연약한 믿음.
1번의 상황처럼 예수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순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추종하는 일련의 행동을 했건만,
'시체실종'이라는 충격적 사실 앞에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언약을 완전히 망각한다.
그래서 현실적인 접근으로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로 접근한다.
사람들이 그렇다.
나와 내 주변의 충격적 사건과 현상은
평온할 때 부르짖던 믿음에 대한 고상한 원리를
모두 깨고도 남을 만큼 흔들린다.
그것에 대한 괴리감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차피 인간의 불완전성은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진리가 호소하는 것처럼,
겸손하고, 내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를 인식한다면
너무 극심한 자책과 자책에 따른 행동으로
교만해지는 죄를 범하지 말자.
북쪽을 가르켜야 하는 나침반이 실제로는
북쪽을 견고하게 가르킨 적이 한 번도 없이
그 근방에서 처절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에 완전히 합치될 수 없는 내가
어떻게든지 궤도에서 이탈하지 말고
최대한 하나님의 진리의 언저리를 지키려고 하는
'분투'의 삶을 견지하자!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는데
오늘 강의를 하면서 많이 풀었습니다(?)
이런 기회와 자리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실망하더라도 포기하지는 않는 것을
실천할 수 있게 힘을 주세요.
지인의 아들인 현준이,
골방에서 나오는 기적을 주세요.
젊은 영혼의 상처와 실망을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해 주십시오.
하나님 주시는 햇빛과
일상의 즐거움, 고귀한 것을
조금씩 느끼며 회복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