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선지식(善知識)이 어디 있는가?
나도 젊을 때는 선지식이 명산대찰, 천년고찰(古刹) 산중 수행처,
백운(白雲) 유수처(流水處)에 있는 줄 알았다.
고담(古談) 속에 있는 줄 알았다.
중생 속에서 선지식을 찾고 이들의 삶을 통해 추구하고 이들을 위한
자비심을 갖춘 수행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孔子)는 50세 되면 안다고<知天命> 했는데 나는 50까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60살되니까 세상(世相)이 다르게 보인다.
오늘 보는 세상은 80노망의 내가 보는 세상과 <젊은> 여러분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나는 대학도 안 나오고, 운전(運轉)도 못한다.
여러분이 나보다 더 잘하는 게 더 많다. 나는할 줄 모르는 것이 많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안다.
여러분도 자신이 경험한 세계보다 모르는 세계가
무진장(無盡藏)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0대 되어 우연한 기회에 아! 삶의 스승,
인생의 스승은 내 곁에 있었구나!.
내 주변에서 밥을 해주던 공양주보살,
군불 때주던 부목이 선지식임을 알았다.
나아가 산문을 나서면 어촌 주막(酒幕)의 주모와 어부(漁夫)가 선지식이었고,
더 나아가 대장장이가 선지식이고,
시장바닥의 노점상이, 염장(殮匠)이,
서울시청 앞에 누워있는 노숙자가 내 삶의 선지식이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내 스승이고 선지식이었다.
이들의 생생한 삶이 경전 (經典)이요,
이것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구나 그랬다.
어째서 그런가? 내가 이야기 해보겠다.
20여 년전에<내가 60쯤 때>한 신도가 남편상喪을 당해 염불(念佛)을
해달라고 청해 문상(問喪)을 갔다.
늙수구레한 염장이가 정성껏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화장을 곱게 하고 자기 마누라나 되는 것처럼
마지막 체취까지 조용조용 고요히 어루며 관을 덮더라.
시신(屍身)이라는 것이 무섭고 꺼리는 것인데,
그 염장이는 마지막 포옹까지 해주며 관(棺) 뚜껑을 덮을 때까지 정성(誠)을 다하는
모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부(夫婦)가 같이 살을 맞대고 살다가도 죽으면 무섭다며 곁에 안 가는게
세상 인심인데 저 염장이는 어찌 저럴 수 있는가 궁금해서 염이 끝나고 물어봤다.
얼마나 염(殮)을 했냐고 물으니, 40년 했다고 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정성을 들여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답하는 하는 말이 “스님 별말씀을.. 산사람은 남녀 구별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남녀노소 신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구별이 없다.
시비(是非)가 끊어졌다.
사람들은 시체가 무섭다 하는데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무섭지 시신(屍身)을 보면
마치 머잖은 장래(將來)에 내 자신의 시신을 보는 것 같아..”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되묻기를, ’그래, 염장이 한 40년 하다 보니,
스님 목사(牧師) 신부(神父)님을 만나는데
스님들은 사람 몸뚱이를 가죽주머니, 허깨비, 오물덩어리라고 하던데,
이 죽은 사람의 영가(靈駕)가 다 버리고 극락으로 가니 좋다고도 하고,
저 먼 곳에 불국토(佛國土)가 있다며 그 곳에 나라고 기도하던데,
스님, 참말로 극락(極樂)과 지옥(地獄)이 있습니까?
염장이의 질문 끝에 동서남북 사방사유(四方四維)가 캄캄했다.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동안 신도들에게 법문을 하면서 10만억 유순 떨어진 저 멀리에
극락 정토(淨土)가 있다고도 했고 마음이 극락(極樂)이라고도 했다.
이 분 앞에서는 캄캄하여 멍하니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 염장은 ‘이 업을 오래 하다 보니 시신을 보면 세상을 청정(淸淨)하게 살았는지,
후덕(厚德)하게 살았는지,
도둑질과 거짓말로 남에게 못할 짓을 하며 살았는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는지,
너무 일찍 죽은 시신인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잘 살다 죽은 시신은 대강 염해도 마음에 걸림이 없다.
그런데, 잘 못 살은 시신들과 왜 이렇게 살았냐고 말없는 대화 <觀想>를
해보면 ‘ 영감이 억천만년 살고싶어서,
내 마누라 자식들 행복지켜 주고 싶어서, 고래등과 같은 집과 차를 사서
좀 뻐기고 싶어서 금방 못 갑니다.
다른 사람을 자꾸 울리면 내 울화통 터져 극락 못 갑니다’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 어떻게 가족 같지 않겠는가?
그러니 내 마누라, 엄마, 형제, 친구 같아
그들에게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설명했다.
그러곤 '나도 이제는 죽을 일만 남은 시신입니다‘며 날 바라봤다.
이 염장은 자기맘 편하려고 하는 것인데 남이 보기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니 부끄럽습니다.
‘나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참 부끄러웠다.
이 염장(殮匠)의 삶이 선지식이고 그의 이야기가 대장경(大藏經)이었다.
이 염장의 말 속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眞理), 생노병사(生老病死),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의 진수(眞髓)가 다 들어있더라.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은 골동품일 뿐이다.
좋게 말해 문화재다. 진리가 아니다.
그 대장경 속에 억만 창생(億萬蒼生)이 빠져 죽었는데.
건져도 건저도 건져지지가 않아,
무수한 중생들이 대장경(藏經)바다에 빠져죽어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속에는 부처가 없다.
2500년 불교사에서 대장경을 읽고 그 속에 빠져 죽은 중생이 얼마나 많은가.
경전에 말과 글이 있을 뿐, 그것이 진리인가?
<달은 안보고>대장경 속에서는 부처님이 어떻고, 어떻고..
도대체 부처님이 어떻다는 건가?
그물에 걸린 것처럼<실참은 않고>모두 경전문구(文句)에 <손가락> 매몰돼 있다.
이것을 버리는 날이 해제(解制)날이다.
오늘이 해제날, 내가 노망기가 들어 하는 소리다.
옛날에 청담 (靑潭淳浩) 스님이 법문하러 갔다.
총무원장 업무 중에도 법문해 달라 하면 바로 일어나신 분인데,
군장병(將兵)을 대상으로 법문해, 더운 날이니 장병들이 졸아..
혜성스님이 시간이 다 되었다고 쪽지 올리니
'야 이놈아! 중은 영가(靈駕) 앞에서도 법문하는데,
<생불生佛이>졸고 있는데 법문(法門)하니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꾸짖고서 나머지 법문을 다 해 마치셨어..그러니까
오늘 법회가 끝나면 여러분은 산문을 나서 선지식을 찾아 나선다.
선지식이 명산대찰(名山大刹)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리의
노점상(露店商)과 노숙자(露宿者)도 선지식이다.
세상 속 중생의 가슴 아픈 삶 속으로 들어가 선지식을 찾고 가르침을 구(求)하라.
그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가고자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을 찾아가 <歷訪>는 구도여정(旅程)을 보라.
못난 놈을 만나야 잘난 놈을 만나, 문수의 교도(敎導)를 따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
세상속에서 문수의 지혜를 배우고 보현(普賢)의 행원(十大願)을 찾아 완성해야 한다.
절간에 부처가 있나?
절간은 스님들 숙소(宿所)야! 부처는 한 놈도 없다!.
나도 젊은 시절엔 천년고찰 (千年古刹)에 진리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절에 스님들은 공양주(供養主)를 부목(負木)을
선지식(善知識)으로 받들어 모셔라.
여러분들은 굶어죽어도 그렇게 못하지 않는가?
여러분이 못하는 일을 공양주가 하고, 처사(處事)가 한다.
여러분이 못하는 하찮은 일을 하는 그들이 문수(文殊)고 보현(普賢)이야.
그것이 보현의 행원이고 문수의 지혜다.
경전속에 행원(行願)이 지혜가 있지않다.
선방숮좌(禪房首座)들은 가슴에 붉은 피가 뛰고 있지 않은가?
전강(田岡永信)스님은 30대에 깨트리고 통도사(通度寺) 보광전 조실(祖室)을 했다.
그때 통도사에는 구하(九河)스님 같은 선지식 있었는데
구하스님이 전강스님을 법상에 모셨어.
경허(鏡虛惺牛)스님은 한 철만에 깨트렸다.
만해(萬海龍雲)는 선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깨뜨렸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천년 전 중국의 육조, 조주, 황벽, 남전 등 할 일 없는
늙은이들의 넋두리에 코가 꿰어 사는가?.
‘차나 한 잔 들고 가라’<喫茶去> ‘개에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無'라 대답하는 거<狗子無佛性> 그게 뭐?
모두 조주(趙州) 늙은이가 쳐놓은 그물이다.
거기에 꿰어 어찌할바 모른다.
아메리카 대륙울 발견한지 300년이 지났다.
바다의 고래도 어부漁夫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세상,
그래서 경허鏡虛나 만해萬海같은 분은
그물을 치워서 대 자유인(自由人)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삼처전심<三處傳心>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어쩌고 어떻고 하고 있다.
지금은 초고속인터넷 세상이고 스마트폰 시대다.
이 시대에 千年 전 조주의 그물에 걸려 꾸벅꾸벅하고 있다.
먹을 것을 던져주면 먹을 것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韓盧逐塊>
던져주는 사람을 문다.<獅子咬人>그게 사자(獅子)다.
자신을 옭죈 고삐를 풀고 대자유인이 되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어
인체중생(一切衆生)을 구제했는데 나는 이게 무엇인가?
전강田岡스님은 30대에 다 벗었는데 나는 이게 무엇인가?
분발해야한다.
산散철 3개월은 자기충전(充電)을 위해 발초참현(撥草參玄)
선지식을 찾아 끝없는 정진이 필요하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 실상(實相)을 아는 것이다.
80을 산 나는 잘 못살았다.
내가 일찍이 사람을 믿고 바른스승 밑에서 공부했다면 좋았을 것을..
어릴 때부터 의심이 많아 다른사람을 못 믿는데다가
게으름으로 못 배워서 여지껏 나는 살아가는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 내 이야기는 법도 아니고 법(法)이 아닌 것도 아니다.
다만 여러분과 내 손금이 다르듯,
산에 피는 꽃색이 다르듯, 생각이 다르므로 80늙은이의
세계가 이와 같다고 공감만 하면 되겠다. 지금까지는 노망(老妄)이야기고
주지(住持)가 부르니까 해제법문(解制法門) 한 마디만 하겠다.
정인설사법 사법실귀정 사인설정법 정법실귀사 正人說邪法 邪法悉歸正 邪人說正法 正法悉歸邪 |
<금강경 오가해五家解 야보송> 무슨 말인가 하면
‘생각이 바른 사람<정법인>은
삿된 법이나 거짓말 해도 그 사법이 다 정법으로 돌아오지만,
삿된 사람은 바른 법을 말해도 정법이 모두 다 삿된邪 법이 된다.'
사기꾼으로 낙인찍히면 법률적으로 사리에 다 맞췄다 해도
사기꾼이니까 안 믿어.
진실된 사람은 법률적<지식>은 아무것도 몰라.
사기꾼은 집문서 가져다 줘도 돈 안 준다.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말이다.
이러니 중이 됐다면 좀 더 솔직하고 진실 되게 감동을 주는 수행자로서
자신의 본분사를 마쳐야한다.
로케트도 달나라에 가려면 3단 로켓을 분리한다.
출가납자라면 3번 출가해야 한다. 먼저
① 육신(肉身)을 벗어나야 하고
② 오온(五蘊)과 법계를 벗어나야 한다.
③ 끝내는 깨달음까지도 벗어버려야 대자유인이 된다.
수행자라면 대신심(大信心)이 우선돼야 한다.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화두 공부로 일대사를 깨칠 수 있다는 믿음이 서야 한다.
그 다음에 대의정(大疑情), 오매불망 간절한 의심이 있어야 한다.
또 의심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에게 분노해야 한다. 대분심(大憤心)이다.
남에게 분노(憤怒)하는 것은 중(僧)도 아니다.
오늘 이야기도 수행에 진척이 없는 자신에 분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없으면 3개월 수행해도 한 게 없게 된다.
10년 전부터 내 주변은 시간재고 도망가기 바빠,
경전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면 싫어해, 천 년 전 이야기,
천 년 전의 화두도 무無자, 오늘의 화두도 무無자,
사람이 감동을 안 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면 놀라게 해야 한다.
신문장이들이 특종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
염장(殮匠)을 만나 부끄러워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분노했는데<듣기 싫은 사람 나가라>
신흥사(新興寺) 돌담을 쌓은 것은 석수장(石手匠) 영감,
그 영감은 돈을 더 줘도 안 받아,
돌담쌓는데 돌 구하기 어려워 10년 걸렸다.
이 설법전을 지은 것은 목수장(木手匠)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담을 ‘무산이가 쌓았다’ 고 하고,
법당은 '무산(霧山)이가 지었다’라고 답한다.
무산霧山이로서<나>는 부끄러운 일이다.
회주會主 스님이 했는지,
돌쟁이가 했는지 진실이 뭔가? 제대로 봐야한다.
내가 석수장石手匠보다 못나 잔소리만 했는데
무산 큰스님이 돌담을 쌓았다 한다.
이 집을 목수(大木)가 지었는데 회주가 지었다 한다.
진실이 어디 있는가?
"절간에는 부처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 있는고? 지금 여기..
그대 눈앞에 벗어나지 않았거늘 어디서 찾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