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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 |
프랑스 귀족, 성직자, 인민으로 이루어진 3부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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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의회 결성. 바스티유 감옥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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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 |
프랑스 최초의 헌법 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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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
프랑스 시민 봉기. 프랑스, 공화정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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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 |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 시작 |
정약용 거중기 발명 | |
1794. 7. 27 |
프랑스 대혁명의 종식 |
로베스피에르 처형 |
수원성 쌓기 시작함 |
1장 사회주의의 근원
3절 사유재산과 탐욕 (루소, 공산주의적 계몽가들, 그리고 바뵈프)
윤리교육과
201216685
김은진
1. 루소
18세기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된 루소는, 온건한 인물 혹은 급진적인 신념을 가진 인물로 자주 인용되었다. 루소는 협동적 조직의 제창자라기보다 오히려 급진적 개인주의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루소의 논설 다수에는 혁명적인 사회주의 사상이 엿보인다.『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는 사유재산의 폐지를 이상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루소는 결코 사유재산의 폐지를 지지하지 않았다.
루소는「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General Will)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 때 일반의지란 공동의 이익을 위한 이타적인 의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다수의 의견을 뜻하는 전체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루소는 만약 사람들이 일반의지에 반대한다면 그들을 강제로라도 동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1789~99년 혁명가들에 의하여 권위주위와 전체주의의 이론과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2. 공산주의적 개념 사상가: 마블리와 모렐리
공산주의적 개념 사상가들은 탐욕의 문제에 루소보다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사유재산 폐지와 재산의 평등한 공유에 기초한 사회의 확립을 요구하였다.
마블리는 인간생존욕의 평등성을 주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선(이타적 행위와 물질의 공정한 혹은 평등한 분배에 관심을 두는 것)이 물질적 풍요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블리는 인간의 반사회적 혹은 이기주의적 본능이 동정심 혹은 애타주의적 심성을 어떻게 압도해 가는가 하는 문제를 밝히는데 전력하였는데, 그는 ‘존경’ 혹은 사회적 명예를 통해 인간은 자연적 이기주의를 충족시키고 아울러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한다고 믿었다.
그의 이론은 미래보다는 주로 과거에 대해 언급하였고, 인간 이성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기에 국가 통제하의 엄격한 일원화된 조직과 가혹한 조치를 바랐다.
마블리와 동일하게 모렐리도 재산의 소유와 소유욕을 비난했다. 그는 인간의 천부적 이기주의가 보편적 박애 혹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믿었고, 사유재산은 (설사 균등하게 분배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승화과정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유재산을 ‘제일 큰 악덕의 바탕’이라고 부르며 부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했다.
모렐리는『자연법전』을 통해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모어의『유토피아』를 지나치게 모방하였고, 지나치게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또한 자신의 제안들에 대한 자연적 토대를 제시하지도 않고 있다.
3. 바뵈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가라 볼 수 있는 바뵈프는, 사상에 있어서는 공산주의적 계몽 사상가들보다는 덜 독창적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루소, 마블리, 모렐리 등 계몽 사상가들의 작품을 혼합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뵈프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칭송받았던 이유는, 그가 부의 사회화라는 명분하에 격렬한 혁명적 행동의 세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민중의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정치적 활동에 뛰어들었다. 집정정부의 공포정치 시기, 바뵈프는 ‘평등자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실질적 평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바뵈프는 행복이 사회적 평등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평등을 일종의 자연권, 곧 ‘첫째는 자연적 욕구’라고 규정했다. 바뵈프는 어떤 사회가 이러한 평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저항하여 싸워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뵈프는 초기 공산주의 국가 단계에서는 독재적-군국적 노선을 따라 피의 숙청으로 보수적 정치 사상가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독재자가 제거되면 총체적 폭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것을 혁명가가 확신할 수 있다면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바뵈프의 사상은 기생적이고 부패한 소수는 사치에 빠져있는데 반해 다수 프랑스인들은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정부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반항은 인간 실존의 심층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이후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반항 역시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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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중혁명 후 사회가 양극화되고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국가에서 재화를 관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바뵈프에 의해 혁명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전의 이론만 주장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실천적인 혁명을 주도한 것입니다. 비록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의 사회주의자들과 민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만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주장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용기 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번 발표를 듣고 사회주의적 사상이 루소, 마블리, 모렐리, 바뵈프에 이어오면서 존재의 정당성에 더욱 힘을 얻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8세기는 사회적 약자들이 부유층과 계급층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상가들은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였는데, 마블리는 사회나 자연에서의 불행한 경험은 사람의 성격을 바꾸거나 인간성을 잃게 하지만 그들의 기본적 평등성은 불변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모렐리는 재산의 소유와 소유욕을 비난했습니다. 이처럼 평등을 주장한 사상가들이 나타난 이유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억압받는 배경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보고 위기를 기회로 삼고 나아간다면 더욱 발전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루소와 마블리, 모렐리는 각각의 이론적인 주장을 펼치며 사회주의의 틀을 다잡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바뵈프는 격렬한 저항적인 행동을 하며 실천적으로 사회주의를 나타냅니다. 이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주의를 논의하고 고민한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바뵈프는 폭력의 경제성을 말하며 때로는 폭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바뵈프의 사상에서 그가 세상을 바꾸기에 얼마나 격렬한 힘이 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많은 사상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가 양극화 됨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제안들을 하였습니다. 이런 제안들이 사회주의의 틀을 잡아주고 단순히 이론에만 머물러 있는 사상들이 아닌 좀 더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안들도 완벽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사회주의의 이론이 정립되지 않고 여러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이론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뵈프가 자신의 이론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사회주의는 좀더 사실적이고 실천적인 이념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은진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고대로부터 계몽사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가들, 다수 대중은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났고, 이에 따라 사상가들과 대중은 또다시 거기에 대항했습니다. 이 절에서 나오는 여러 사상가들은 ‘이러한 문제들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그것이 사유재산과 탐욕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사유재산과 탐욕에 대해 서로의 시각이 달랐습니다. 아직 사회주의의 이론이 정립되지 않고 여러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이론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뵈프는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의 사회화란 명분하에 격렬한 혁명적 행동의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사상가들도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방법들을 다양하게 제시했으나 바뵈프는 최초로 실천에 옮긴 사상가였습니다. 자칫 혁명은 폭력적이 되어 피를 보기 쉬운데 혁명가는 ‘폭력의 경제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며 즉, 폭력 제거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또한 절제하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참 인상 깊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를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공부한 내용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번 발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뵈프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바뵈프만이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바뵈프는 비판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사유재산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몸소 실천을 하며 혁명가로서의 자세를 갖췄기에 바뵈프가 지금도 이름을 알리는 것 같습니다.
3절은 1,2절과 다르게 사유재산과 탐욕이라는 주제가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생소한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발표는 예습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발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뵈프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슨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시초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탄압을 받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모두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회주의의 최초의 순교자로서 희생당했지만 후대 사회주의자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서 가장 큰 갈림길인 사유재산의 문제에서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대처 방법에 대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주의의 문제점 중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하는 이론가들 중에서 바뵈프는 이런 사유재산제도가 탐욕을 만들고 불평등을 불러오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독재도 불사할 수 있고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이것을 사회주의자들이 인정하게 되는 이유는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재도를 없애야 하고 그 과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고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개인과 국가 그리고 평등과 자유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서부터 끊이질 않았고 계속해선 논쟁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과 체제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발표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인물은 바뵈프라고 생각합니다. 루소와 공산주의적 계몽사상가들은 모두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하지만 루소는 비판하였지만 실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뵈프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의 사회화라는 명분 아래 혁명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사유재산과 탐욕에 대한 인간의 본성을 국가적 차원에서 대안을 제시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월 24일 오전 4시 0분
과제 불이행: 없음
지시 불이행: 없음
은진학우가 발표한 '사유재산과 탐욕'은 어쩌면 사회주의 사상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유재산'이라는 제도를 두고 부유층과 빈자가 갈등하는 현상은 계속 있었습니다. 이 절에서 공상적 계몽 사상가인 마블리와 모렐리, 그리고 바뵈프는 모두 소유욕을 비판하고 사유재산 폐지를 주장합니다. 사유재산에 의한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이 사회악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뵈프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이어진 형식적 평등으로 말미암은 일반시민의 피해를 인식했고, 사유재산 폐지와 같은 실질적인 경제평등을 적극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상을 구체적으로 행동화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반대하는 사회적 배경과 현존하는 제도에 맞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만들어간 공상적 계몽주의가 후대 사회주의자들에게 사상적 기틀과 나아갈 방향을 앞서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다양하듯이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생각 또한 다양합니다. 여기서 누가 옳고 그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생각들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주제에 획일화된 생각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양한 사상을 배워야 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해야 했던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