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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불교
서른에 부처님을 만나다
1938년 음력 동짓달 초사흘, 나는 창원 합성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골 선비 김기성(金基聲), 어머니는 김대광명(金大光明) 보살로 나는 이 두 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마을 뒤로는 옥천 (玉川)이라는 작은 시내가 ‘촐촐촐 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옥천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백일홍 나뭇가지에 올라 매미처럼 노래 하며 자랐다. 지금도 옥천 물소리는 내 깊은 영혼 속에서 순수한 열 정으로 흐르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나는 ‘마산 사람’이다.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다녔다. 4 · 19 때는 마산에서 ‘민주사수’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자유당 독 재 반대 투쟁 대열에서 거리를 내달렸다. 해병대 포병장교로 김포 반도를 지키며 군 생활을 마치고, 1966년 스물아홉 살 때 100년 전통의 사립 명문 서울 동덕여고 교사로 부임했다. 이 과정에서 불의(不義)와 권위에 대한 ‘저항정신’이 내 무의식 속에서 강한 에너지로 형성되고 있었다.
인생은 순풍처럼 잘 풀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젊은 시절 부터 ‘죽음의 공포’에 쫓기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부터 시작된 ‘죽음의 공포’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어떻게 죽을까? 이 귀한 육신, 이 좋은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 다 버리고 어떻게 죽을까?’
하루도 마음 편한 날 없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끈적끈적한 공포 의 때[垢]가 온몸을 감고 나를 옥죄고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양산 통도사로 답사 갔다가, 밤에 몰래 빠져나와서 절 앞을 흐르는 큰 시 냇물에 들어가 돌멩이로 온몸을 빡빡 문지른 적도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1967년 30세가 되던 해 어느 가을날 오후였다. 나는 그날도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학교 도서실로 들어섰다. 책 읽을 생각도 없이 그 냥 들어섰다. 기웃기웃하다가 창문가에 쌓여 있는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먼지가 뽀얗게 묻은 책이었다. 무심코 첫 장을 넘겼다. 거 기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서간다.
마음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마음이 모든 것을 시키나니
순간 번쩍하고 섬광이 내리쳤다. 내 몸의 검은 점막들이 빙산(氷山)처럼 와르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뻥 뚫렸다. 깊 은숨을 내쉬었다. 살 것 같았다. 아니 살아났다. 창 너머로 학교 운 동장을 바라보니 가을 햇빛이 눈부셨다. 천지가 빛이었다.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책 표지에 《법구경》(김달진 역, 현암사 판)이라고 적 혀 있었다. 당장 책을 빌려 가서 석 달 동안 읽고 또 읽었다. 자구를 따지지 않고 말씀 통째로 그냥 꿀컥꿀컥 삼켰다. 이렇게 나는 부처님을 친견했고, 여기서 내 인생의 방향은 결정되었다.
‘동덕불교’ 창립
1970년 7월 초였다. 유정애, 김금용 등 고3 학생들 몇몇이 교무실로 찾아왔다. “선생님, 학교에 불교반 만들어주세요. 기독교반 천주 교반 다 있는데, 왜 불교반만 없나요?.”
내가 국사 수업 시간에 원효 대사 등 불교 얘기를 많이 했더니 나 를 믿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들의 눈은 맑고 아름다웠다.
“좋다. 한번 해보자.”
나는 학교의 허락을 받고 불교학생회 창립을 구상했다. 창립 날 짜는 7월 18일 토요일, 제헌절 다음날로 정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맨발로 뛰다시피 했다. 학생들이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회원 모 집에 나서는 동안, 나는 창립법회 법사를 모시기 위하여 무작정 조 계사로 갔다. 초행길이었다. 마침 한 스님이 설법하고 있는데 유창 했다. 물어보니 ‘무진장 스님(그 당시는 혜명 스님)’이라고 했다. 다 짜고짜 스님 만나서 ‘창립법회 오셔달라’고 청했다. 스님께서는 쾌히 응낙하셨다.
7월 18일, 운명의 날이 왔다. 아이들이나 나나 초조했다. 얼마나 모일까? 100명만 모이면 성공인데,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오후 2 시가 되었다. 200명이 넘게 찾아와서 시청각실이 꽉 찼다. 선생님들도 20여 분이 오셨다. 좌석이 모자라서 옆방에서 의자를 가져다 가 교탁 앞에까지 빼곡히 채웠다.
“여러분 몸이 법당입니다. 여러분 몸속의 부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몸속에 부처님이 있다니 학생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무진 장 스님의 설법이 큰 감동으로 파도처럼 흘렀다. 나는 작은 법열로 몸을 떨었다. 곧 여름방학이 되었다.
우리는 화성 용주사로 3박 4일 수련대회를 갔다. 100여 명이 넘 게 참가했다. 발우공양과 3,000 배 철야정진, 일종식이 이어졌다. 나도 생전 처음 해보는 고된 수련이었다. “은혜는 갚고 원수는 갚지 마라.”
지도법사 정무(正無) 스님의 법문은 우리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다. 모두 기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동덕여고의 불교 역사’ 는 시작되었다. 우리는 열성을 다하여 토요법회를 열었다. 얼마 뒤 새벽법회로 전환하였다. 여명(黎明)의 어둠 속에 앞앞마다 촛불을 밝히고 찬불가를 부르고 입정하고 설법을 들었다. 무진장 스님께서 밤이고 낮이고 달려오셨다. 거마비 한 푼 드릴 형편이 아니었지만,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않았다. 수많은 지도법사가 동덕법회를 다녀갔다. 석주 스님, 광덕 스님을 비롯해 서정주 선생, 박목월 선생, 한갑수 선생이 찾아와 강의해주었다. MBC 출신 아나운서 강영숙 선생은 이건호 거사 소개로 새벽법회를 왔다가 어둠 속에 반짝이는 수백 명 아이들의 눈빛을 보고 감격해서 불자가 되었다.
동덕법회가 하나의 용광로가 되어 전국의 불교 지도자들을 초심으로 펄펄 끓게 했다. 1970〜1980년대는 불교 중흥기였다. 감히 말하건대 동덕불교가 그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회원 수도 매년 늘어났다. 첫해 200명에서 다음 해 300명, 400명…… 그리고 1978 년 3월 동덕불교 창립 9년째 되는 해에는 총 850명이 회원이 되었 다. 전교생 1,500여 명의 반이 불교학생회에 나왔다. 이것을 위해 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거의 사력을 다하다시피 했다.
그 결과 동덕불교는 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하나의 전설이 되었 다. 아니 세계 불교사에서도 아름다운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이것 은 우리 아이들이 피땀으로 만들어낸, 눈물로 이룩한 고귀한 결실 이었다.
청보리 운동을 시작하다
1972년, 남산 대원정사에서 ‘대원불교학생회’를 창립했다. 1975 년에는 ‘대원청년대학생회’를 창립하고 나는 지도법사를 맡았다. 당시 서울의 명문이라 일컫는 서울고교와 동덕여고가 함께 만났다.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1976년 가을에는 창신동 청룡사에서 ‘청보리학생회’, 1979년에는 ‘청보리청년대학생회’를 창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청보리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돼 갔다. ‘청보리’는 ‘푸르른 보리 씨앗들’이라는 뜻 이다. 곧 ‘청소년 청년대학생 불교운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청보리 운동은 동덕불교로 불붙기 시작해서 청보리 청년대학생회 로 타오르고,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부처님은 민족의 혼, 이 땅에 부처님 나라 성취할 때까지 모이자, 배우자, 인도하자’
이것이 우리 청보리 슬로건이다. 이렇게 순수한 열정으로 불타는 청년대학생들, 눈 푸른 수행자들이 매년 수백 명씩 청보리를 통 하여 쏟아져 나왔다.
동덕여고 졸업생들이 대학으로 가서 대학불교 창신동 청룡사 청보리 중고등학생회 창립법회(앞줄 왼쪽 4번째가 필자. 1976년)
를 일으켰다. 1세 회장 유정애는 동덕여대에 진학해서 불교학생회 를 창립하고, 2세 회장 어순아는 성신여대로 진학하여 불교학생회 를 창립했다.
대학생불교회가 없는 곳에서는 새로 만들고, 있는 곳 에서는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물결이 모이면서 ‘대불련(大佛聯, 대 학생불교연합회)’은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되었다. 대불련 본부에 가면, ‘대불련이 동덕여고 동창회네’ 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그 인연으로 4대 회장 홍경희는 지금도 동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
1970년 9월, 〈보리지(誌)〉가 탄생했다. 동덕불교 창립 직후, 회원 들 학습용으로 〈보리지〉를 수백 권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가족 모임 때 둘러앉아 함께 공부하게 했다. 내가 원고를 쓰고 학교 필경사가 가리방(철판)으로 옮겨 쓰고 등사기로 한 장 한 장 밀어서 만든, 갱지 16쪽짜리의 초라한 인쇄물이었다. 그러다가 1976년 5 월, 청소년교화연합회가 〈보리지〉를 청소년 교재로 만들어서 수천 부씩 전국으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내용도 붓다의 생애를 중심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보리지〉를 매개로 전국 청소년지도 자들의 네트워크(network)가 형성되고, 방학 때는 한자리에 모여 서 지도자 강습회를 열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수백 명씩 몰 려왔다. 어느 해는 청도 운문승가대학 젊은 비구니 학인 스님 수십 명이 집단으로 참석했다. 한국 불교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만 해도 출가, 재가가 무릎을 맞대고 함께 둘러앉는 것이 불교 공동 체였다.
1978년 5월, 나는 그동안 〈보리지〉에 연재된 붓다의 생애를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묶어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를 출판했다. 이 책은 뒷날 불광출판사에서 40여 년 동안 수만 권을 찍어냈다. 지금도 계속 출판되고 있다. 이어서 1987년 《우리도 부처님같이》가 불일출판사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룸비니에서 구시나 가라까지》 《우리도 부처님같이》 이 두 책은 한국불교 최초의 ‘시민 불교 교과서’다.
이 두 권의 책이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한국불교의 지성 사(知性史)를 바꿔놓았다. 정체불명의 불교를 ‘붓다의 불교’로 전환 시킨 것이다. 불교 최초의 종합복지센터 ‘연꽃마을’ 설립자인 각현 스님은 나만 보면 고맙다고 했다.
“법사님, 제가 젊었을 때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를 읽고 제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년 전 초기불전연구원장 각묵 스님도 ‘우리는선우 법당’에서 나를 보고 말씀했다.
“제가 산청에서 어린이회를 하고 있을 때 법사님이 쓴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를 교재로 삼았습니다.”
불교방송의 김봉래 기자는 자기 결혼식 답례품으로 이 책을 선물 했다고 한다.
올해(2023년) 6월 13일, 안성 죽산 도피안사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오후 6시경, 저녁 공양을 하기 위해서 대중방으로 갔다가 주 지 송암 스님으로부터 봉투를 하나 받았다. 열어 보니 5만 원짜리 6장, 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명함도 한 장 같이 있었다. 흐린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금강(金剛) 스님’이라는 함자가 적혀 있었다. 자세 히 살펴보니 스님은 중앙승가대학 불교사회학부 교수이고, 도피안 사 가까이 있는 ‘활인선원’ 원장이었다. 잘 모르는 분이어서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다.
“아 선생님, 1987년 제가 젊을 때 전남 광주에서 법회를 하고 있 었는데, 그때 선생님의 《우리도 부처님같이》를 읽고, 그때부터 맘 속에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다음에는 선생님을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몸 둘 바 모를 말씀이었다. 평생 선생으로 살면서 이런저런 촌지 (寸志)를 더러 받아봤지만, 스님한테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뭐가 거꾸로 된 것 같기도 하고.
‘연꽃들의 행진’과 ‘붓다의 메아리’
동덕불교는 1971년부터 창립기념으로 ‘작은 음악회’를 교내 행사 로 개최하다가, 1975년에는 학교 강당에서 ‘제1회 연꽃들의 행진’이 라는 종합예술제를 열었다. 1976년부터는 동국대 강당에서 열고, 1979년부터 같은 재단인 동덕여대 대강당에서 열었다. ‘연꽃들의 행진’은 최초의 청소년 불교 예술제였다. 그것은 꿈의 잔치였다.
해 마다 국화꽃 향기로운 10월이 오면 행진이 벌어지고, 전국 각처에 동덕여고불교학생회 종합불교예술제 “연꽃들의 행진”(1982년 동덕여대 강당)서 2천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들었다. 하얀 칼라의 교복을 차려입 은 ‘동덕불교 백팔합창단’이 무대에서 〈오라, 친구여〉 〈붓다의 메아 리〉 등 찬불가를 부르고, 연극부 처용클럽이 창작극 〈바보 판다카〉를 공연했다. 탈춤부 셔블불휘(서울의 뿌리) 클럽은 얼쑤 너울너울 탈춤을 추고…….
가을 국화처럼 은은히 스며드는 붓다의 향기가 대강당을 완전히 휘감는 감동의 물결로 관중들이 눈물을 쏟아냈다. 전국에서 모여든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회 한(悔恨)과 결의(決意)가 차올랐다. 대중들은 스스로 이렇게 절규 하였다.
‘연꽃들의 행진…… 아- 불교도 이렇게 할 수 있구나. 우리 불교 도 이렇게 장엄하게 할 수 있구나. 우리 불교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 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왜 못했을까? 그동안 우리는 무엇하고 있었 던 걸까?’
시골서 올라온 한 비구니 스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꼭 붙 들고 다짐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작은 시골 절이지만, 가는 대로 바로 학생회를 만들겠습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며 음악 전도집회 ‘붓다의 메아리’가 탄생하였 다. 1975년 동덕여고에서 처음 시작하고, 얼마 뒤 삼풍상가 강당에 서 시민들의 전도법회로 열렸다. 수백 명의 시장 상인들이 손뼉을 치며 〈붓다의 메아리〉를 함께 불렀다. 이 집회에서는 서울음대 출 신의 작곡가 서창업 선생과 ‘자비의 소리’ 대표 반영규 선생이 큰 역 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서창업 선생 중심의 찬불가 시대가 본격적 으로 시작되었다. 동요나 찬송가 조를 벗어나 찬불가의 독자적 영 역을 개척해갔다. 이들을 찬불가 제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운문 스님 단계는 초창기에 속하고, 그 후 김용호, 변규백 선생들이 제2세대에 해당한다.
‘꿈의 잔치, 연꽃들의 행진’ ‘시장바닥에 울려 퍼지는 붓다의 메아리’는 잠든 불교도의 감성(感性)을 흔들어 깨웠다. ‘불교’ 하면 우중 충하고, 따분하고, 머리 아프고,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이 모두 기 피하던 시절이었다. 이 뿌리 깊은 터부(taboo)를 시원하게 때려 부 수고, 눈 푸른 청소년들 청년대학생들이 둥실둥실 춤추며 떼 지어 노래하는 ‘젊은 불교’ ‘감성의 불교’가 생겨난 것이다. 불교의 판도를 크게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1970년대 우리가 청보리운동을 시작할 당시, 우리 불교는 ‘중국 불교’나 다름없이 그 아류(亞流)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입만 열면 달마대사, 육조혜능을 찾고, 입만 열면 선어록(禪語錄)을 읊조렸다. 법회서도 설법에서도 중국의 조사(祖師) 선사만 찾고 화 두 드는 얘기들만 주를 이뤘다. 물론 중국의 조사도 중요하다.
이방 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인들은 자기들 나름의 해석과 수행체계를 정립했고, 우리는 그 불교를 전해 받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 에는 ‘붓다’가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사람들을 위 해 거룩한 길을 걸어간 ‘붓다 석가모니’는 찾을 수가 없었다. 붓다의 생애에 관해서도 《팔상록(八相錄)》 정도의 신화적인 얘기들뿐이었 다. 어디서도 인간 붓다, 역사적인 붓다 석가모니를 만날 수가 없었 다. 일본 번역서 몇 권이 그나마 갈증을 식혀주는 정도였다.
‘불교(佛敎, Buddhism)’는 어디 갔는가? 붓다의 가르침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왜 우리는 ‘중국불교’만 떠받들고 있는가? ‘인도불교’ ‘초기불교’ ‘붓다의 불교’를 다 팽개치고 중국적 사유(思惟)로 허풍 치는 대국적(大國的) 관념의 노예가 되고 말았는가? 화두 들고 십 년, 이십 년 참선하고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 불교인가? 과연 부처 님은 화두 들고 깨쳤는가. 부처님은 찾지 않고, ‘나도 부처다’ ‘모두 가 부처다’ ‘두두물물이 다 부처다’ 하는 것이 과연 불교인가? ‘나도 부처’ ‘모두 부처’라면서 과연 우리는 부처님처럼 살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그 깨달음이나 부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져보면 ‘마음이 부처’라든가 ‘두두물물이 부처’라는 주장은 브라만교의 우빠니샤드(Upanisad) 사상에서 내세우는 ‘범아일여( 梵 我一如)의 짝퉁’이며, 철학에서 한물간 ‘범신론(汎神論)의 추억’일 뿐 이다.
과연 누가 부처인가? 유사(有史) 이래 석가모니 부처님 말고, 누가 부처인가? 또 부처님같이 산 사람은 어디 있는가?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고 비참한 숲속 동포들 찾아서 피땀 흘리며 목 말라 하며 걷고 걸으신 부처님 같은 분은 또 누가 있는가? 달마대사 인가? 혜능 선사인가? 성철 스님인가? 부처님을 잃어버린 불교, 붓다 석가모니를 모르는 불교, 조사의 교(祖敎), 선사의 교(禪敎), 이 것은 이미 ‘불교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외치며 나갔다.
바라나시 초전법륜탑 아래에서 ‘사띠’ 수행 중인 청보리빠리사 인도성지순례단
‘우리도 부처님같이, 부처님 제일주의, 붓다 석가모니 제일주의 이 것이 붓다의 불교다.’ 이것이 우리가 펼친 청보리운동이다.
나는 붓다의 생애를 그린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를 쓰고, ‘연꽃들의 행진’ ‘붓다의 메아리’에서 붓다를 노래했다. 인도 8대 성 지를 맨발로 걸으며 예불 올리면서 눈물을 쏟아내면서, ‘이것이 우리가 전개해야 할 불교다.’라는 주장을 쉬지 않고 외쳤다. 그리고 실천를 위해 입에서 단내가 나고 다리에서 쥐가 나도록 뛰고 또 뛰었다.
‘보살행 제일주의’로 ‘한소식’ 벗어나기
1970〜1980년대 한국불교는 거의 전적으로 참선에 빠져 있었다. 십 년 이십 년 화두 들고 참선하며 앉아서 ‘한소식’만 찾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은 곧 ‘한소식’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 직지견성(直指見性), 한순간 몰록 한소식 해서 마음을 보고 자기를 보고 우주의 진리를 본다는 것이다. 마음을 보고 자기를 보고 우주 진리를 보고 생사불이(生死不二)를 구가하며 유유자적 대장부 살림살이를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랜 시간을 수행해서 대자유 대해탈을 얻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 사람이 어디에 몇이나 있는가. 그리고 2020년대, 지금은 여기에 더하여 ‘명상’이 대유행이 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사마타 수행법이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다. 한 대상을 심상화(心象化) 시각화(視覺化)하 고 특정한 주파수를 맞추듯 영원불멸의 절대적 생명을 명상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일종의 신비(神秘)체험이다. 그런데 과연 ‘참선’ ‘한 소식’, 이것이 곧 깨달음의 길일까? 명상, 위빠사나, 사마타, 이것이 곧 ‘깨달음의 길’일까?
기원전 589년, 붓다는 첫 설법의 땅 바라나시 사슴동산에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나는 중도를 깨달았다. 중도란 무엇인가? 곧 팔정도다. 곧 고집멸도다.”
상윳따 니까야 56, 11 《전법륜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에 따르 면 ‘깨달음의 길’이란 곧 팔정도다. 고집멸도의 사제팔정도다. 명명 백백 단순명료하다.
다른 말을 하면 그야말로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면 이미 틀렸다. 깨달음 또는 견성이란 무엇인가. 사제를 알고 팔정도의 길을 걷는 것이다. 팔정도의 길이야말로 수행자의 길 이요 불자의 길이요 보살의 길이다. 이 길밖에 없다. 만약 다른 길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外道)의 길일 뿐이다.
부처님은 다만 팔정도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붓다 석가모니는 아무 말 없이 룸비니에서 쿠시나가라까지 팔십 생애를 오롯이 그 길을 걸었다. 모래바람 뙤약볕 아래서도 피땀 흘리며 목말라하며 걸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불자의 길이다. 어떤 것이 그 길인 가. ‘보살행 제일주의’가 그 길이다. 금촌 음성나환자촌 마을로, 대림 맹인촌 마을로, 창신동 근로자합숙소로, 군인들 막사로, 영등포 교도소 감방으로, 시흥 혜명보육원 아이들 속으로 찾아가는 길이 그 길이다.
이렇게 믿은 나는 2011년부터 남지심 보살과 함께 ‘국제구호단체 자비수레꾼’을 설립해서 캄보디아 국경 마을 어린이 5백 명을 위해 서 초등학교 짓고, 중학교 짓고, 지금은 후대들이 맡아서 공예전문 학교(고등학교)를 짓고 있다.
이렇게 나는 뜻 맞는 도반들과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우리 청보리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걷고 걷는 것으로 불교를 해왔다. 사제 팔 정도, 보살의 길, 붓다의 길, 이 길을 걷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깨달음을 삼아 왔다. 이 길을 걷는 것으로 ‘만인견성-시민불교의 길’을열어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이 길을 걷고 걷는 것으로 ‘붓다의 불교’를 개척해가고 있다.
‘붓다의 깨달음’은 피땀 흘리며 동포들의 고통 속으로 걷고 걷는 것이다. 보살구원의 길을 걷고 걷는 것(patipadā)이 팔정도다. 누 구든지 이렇게 걸으면 곧 깨달음이고, 그래서 ‘만인견성의 시민불 교’다.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깨달음은 깜짝 ‘한 소식’을 하는 것, 몇 몇 상근기(上根機)들만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출가 우월의 독각주의(獨覺主義)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불교가 미래를 잃고 무너지게 한다. 출가승들이 카스트적(caste的) 우월감 속에 자만할 때 시민 대중은 아웃사이더가 돼 떠나간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음의 문제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 붓다의 깨달음과 우리의 깨달음은 이렇게 근본 개념이 다르다. 이 ‘깨달음’ 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한국불교, 세계 불교는 희망이 없다. 종단개혁 같은 것은 여기서 도리어 지엽적인 문제다. 우리는 그런 문제보다 무엇이 근본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늙고 병들어도 나는 걷고 있다
1999년, 나는 학교에서 은퇴하고 안성 도피안사에 들어와 공부하고 있다. 광덕 스님과의 인연으로 송암 스님이 주지로 불사를 하고 있는 이 도량에 와서 많은 일을 해냈다. 2009년에는 박사학위도 받았다. 학위논문은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이다. 이 논문은 민족사에서 출판되었는데, 대한불교진흥원이 주관하는 원효학술상 수상 도서로 선정되었다. 또 조계종의 ‘올해의 불서(佛書)’로도 뽑혔 다. 이 밖에도 《초기불교개척사》 《화엄코리아》 《붓다의 일생 우리 들의 일생》 등 10여 권 넘는 불서를 펴냈다. 판소리 〈불타전(佛陀傳)〉도 만들어 안숙선 명창이 몇 차례에 걸쳐 공연했다. 주말이면 집으로 가서 2박 3일 편히 쉬고 고기도 좀 먹고 온다. 절에서는 온통 풀만 먹는다. 그 덕택으로 이 나이에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부처님 은혜, 스님 은혜, 공양주 보살 은혜다.
2023년 현재, 나는 ‘빠리사학교’를 운영하며 도반들과 함께 걷고 있다. 2013년에 인도 성지순례를 하고 영상을 쵤영해 와서 10부작 〈영상 붓다 석가모니〉를 제작하고, 조계사 공연장에서 발표했다. 이것을 계기로 ‘빠리사학교’를 설립해서 10년째 열심히 공부하고 보 살행을 닦아가고 있다. ‘개척법사’를 육성하는 3년 과정이다. 한 달 에 두 번씩 사티(sati) 수행을 하고, 줌 스터디를 통해 학인들이 연 구 발표하고 토론하며 공부하고 있다. 신기윤(전 행자부 불자회 장), 진철희(수원불교문화원장) 민병직(교장), 조명숙(어린이회 법사), 이형(불광법회장), 윤웅찬(부산대 교수), 변혁주(행자부 간부) 등의 도반과 법흥 스님(울산 고경사 붓다대학 법사) 등 유능하고 열성적인 ‘개척법사’ 수십 명을 배출했다. 최근에는 미국 LA 금강불자 회(회장 황금서)의 옛 제자 서진호 거사와 연락이 닿아서, 빠리사학 교에서 공부한 영상을 LA 금강TV를 통해서 미국 동포들에게 방영 하고 있다. 1984년 이래 40년 넘게 계속해온 동방불교대학 강의도 영상자료로 계속하고 있다. ‘자비수레꾼’ 모금운동도 힘닿는 대로 참여하고 있다. 이 일은 서암 거사 등 후배들이 맡아서 잘하고 있 다. 모두 ‘청보리 운동’이고 ‘붓다의 불교’ 운동이다.
올해 내 나이는 팔십하고도 여섯이다. 이제 늙고 지쳤다. 몸도 병 들고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든다. 새로운 장(場)이 가까이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틈나는 대로 처음에 걸었던 길을 쉬지 않고 걷고 있다. 평생 걸어온 붓다의 길, 청보리의 길은 외로운 전사(戰士)의 길이었다. 아직도 나는 아침마다 1시간씩 ‘사념처(Sati 기본형) 수행’을 하고, 하루 두 번씩 절 앞 호수 길을 포행하면서, 또 순간순간 끊임없이 ‘무상 사티(無常 Sati) 수행’을 하면서 몸과 마음 을 가다듬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는 지나간다 사라져간다. 몸도 마음도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 ■
김재영 muwon0@hanmail.net
1938년 마산 출생. 서울대 사범대학 역사학과, 동국대 불교대학원(석사) 졸업.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학 박사. 1970년 동덕여고 불교학생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청보리운동’을 전개해왔다. 국제구호단체 ‘자비수레꾼’ 공동대표이며, ‘빠리사 학교’ 등을 설립하여 새로운 전법활동(붓다 스터디)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 《룸비니에서 쿠시나가라까지》 《우리도 부처 님같이》 《초기불교 개척사》 《붓다의 일생 우리들의 일생》 등 다수. 대원상, 원효 학술상 등 수상. 현재 동방불교대학 교수, 붓다스터디 빠리사학교 주임교수.
출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첫댓글 출가승들이 카스트적(caste的)
우월감 속에 자만할 때
시민 대중은 아웃사이더가 돼 떠나간다...
붓다의 길, 청보리의 길은 <<외로운 전사(戰士)의 길이었다>>..._()_
마하반야바라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