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동양화 벗어나 감정 표현
명료한 정신의 기운 담은 눈빛
농담 강약 조절로 얼굴 표현
젊은 날 작가로서 고뇌 느껴져
무제, 김정욱, 한지에 먹, 84.5x62cm, 1998.
최근 1990년대 한국화에 대한 논의의 현장을 다녀왔다. 현대 한국화를 이야기하다 보면 가장 논의가 활발했던, 그리고 가장 한국화의 기법 파괴가 이루어졌던 1990년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 미술 ‘서화’를 ‘동양화’로, 이후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한국화’로 부르기 시작해서 1983년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일반적인 용어가 된 한국화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인터넷이 들어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시대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개념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먹 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을 그리고 있는 김정욱 작가의 1998년도 그림을 소개하려한다. 당시 이 작가의 그림에 대해 먹의 번짐과 선염효과, 여백은 전통적 기법을 따르고 있지만 동양화 답지 않게 고통과 절망, 두려움을 표현하는 표현주의적 동양화라고 한 신문 기사에 표현되어 있다.(한겨레 1998년 8월31일 이주현 기자) 당시만 해도 전통기법의 인물화는, 특히 여성을 그린 인물화는 미인도를 연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대상이 되는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가의 감정을 인물에 이입하여 무표정하게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표정과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이것은 수묵화를, 동양화를 현실 속으로 끌어내려 당시 작가와 20~30대 여성 관객의 감성의 공감대를 만들어 냈다. 전통회화도 동시대 감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림이 시대를 표현하고 시대의 감각과 느낌을 표현할 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김정욱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한결 같이 왜소하다. 기운 없이 침울하고 우울하다. 퀭한 얼굴은 오랫동안 근심과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빛은 어떤가? 다르게 표현된 눈동자에서는 이상한 힘이 느껴진다. 나른하게 온몸은 쳐져 있고, 육신의 기운은 빠졌어도 눈빛만은 그렇지 않다. 욕망과 야망의 눈빛이 아닌 명료해지는 정신의 기운을 담은 눈빛이다. 배경은 온통 검다. 어두움은 두 인물을 더 빛나게 한다. 기존 전통회화의 인물화가 가는 세필로 섬세하게 피부를 표현했다면 김정욱 작가는 농담의 섬세한 강약 조절로 붓질 몇 번으로 얼굴을 표현하고 있다.
아직은 완숙한 테크닉은 아닌 실험의 과정인 작가의 초기작이지만 젊은 날의 고통과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면서 느꼈던 세상의 무게를 온통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은 인물들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 같다. 그림은 이래야 한다. 동양화는 이래야 한다는 의식으로 팽배한 때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모험이고, 먹을 검은 물감처럼 사용하는 것도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파격이 다시 또 수묵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연말 한 해를 마감하며,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고 나를 비우고 싶은 때이다. 몸을 가볍게, 생각을 가볍게 하고 다른 어떤 기대와 희망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고 싶은 마음이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예술교육 팀장 curator@sejongp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