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우리나라 교육방송의 역사
교육방송이란? 방송법이 1963년 12월 16일 법률 제1535호로 제정되고 1964년 1월 1일 시행되었는데,
그에 따른 방송법시행령([시행 1964. 2. 10.] [대통령령 제1634호, 1964. 2. 10., 제정])을 보면 제1조 3항에 “‘교육방송’이라 함은 체계적인
내용을 일정한 기간 계속하여 특정범위의 시청자에게 교육시킴을 직접목적으로 하여 행하는 방송을 말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교육방송은 1951년 6월 18일 문교부가 설치한 ‘라디오 학교’가 그 시작이었다. 그래서 1951년을 교육방송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1)
이 시기는 6·25 전쟁으로 인하여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문교부가 교육을 지속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주로 학교장과 교사들의 교육활동에 참고가 되는 방송을 매일 아침 9시부터 15분간 내보냈다.
그러니까 일종의 ‘교사용’ 학교방송이었다.
그 후 점차 방송시간과 방송교과를 늘려나갔다. 1957년에는 학교방송이 국어, 사회생활, 음악의 3과목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대상으로 하루에 45분간 방송할 정도에 이르렀고, 주간 방송일람표까지 발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방송을 실제 수업에 이용하는 학교가 거의 없었고 또 학생 개인들의 청취율도 낮아 방송의 실효성이 없었다. 게다가 라디오 수신이 불가능한 학교가 36%나 되었고, 라디오 수신기가 아예 없는 학교가 40%나 되었다. 이에 KBS와 공보부는 예산과 인력의 부족을 이유로 1962년 8월에 학교방송을 중단하였다.
일단 중지되었던 학교방송은 1963년 3월부터 국민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재개되었다. 문교부 산하의 중앙시청각교육원이 기획, 편성, 제작한 프로그램을 KBS가 전파와 네트워크를 제공하여 방송하였다.
한편 교육텔레비전방송은 1969년에 대통령의 지시로 KBS-TV에서 주당 5일간 매일 한 시간씩 TV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대상으로 학교방송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972년 유류파동으로 아침방송이 폐지되면서 4년만인 이듬해에 학교방송도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한국교육방송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은 1972년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설립과 함께 교육전문방송국의 설립에 필요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데서 비롯된다. 이에 한국교육개발원은 독립적으로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을 제작·송출하는 교육방송국 설립을 목표로 하였다. “늦어도 1976년 3월까지 교육방송이 개국될 것”이라며, 텔레비전 교육방송이 학교수업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2) 그러나 한국교육개발원의 계획은 자금 부족과 기술적 한계 등으로 인하여 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그림 1】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 1959년 등장한 금성사의 라듸오 A-501 |
한국교육개발원에 의한 텔레비전 교육방송은 당초 계획보다 5년이 미뤄진 1981년, 교육전문채널인 KBS-3 TV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90년 한국교육방송공사(Korea Educational Broadcasting System, 약칭 EBS)가 설립되면서 비로소 독립된 교육방송국이 만들어졌다.
3. 한국교육개발원(KEDI)과 교육방송
당시 우리나라 교육은 여러 가지 시급한 현안들이 산재해 있었다. 베이비붐 세대가 성장하면서 초·중학교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에 따라 교육 재원은 극히 부족해졌고, 교육환경도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학생들의 학업 성취 수준은 낮아졌고, 교육의 질도 지역간 격차가 심해졌다. 이런 수많은 문제점들에 부딪치자 정부에서는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1972년 한국교육개발원을 설립하였다. 한국교육개발원에서는 이를 위해 새 수업체제 개발에 몰두하였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계획된 초·중등교육개발사업(Elementary and Middle School Project, 이하 EM프로젝트)은 초창기 한국교육개발원의 핵심적인 연구사업이었다.3)
이때 ‘교육방송’은 당시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의 하나로 고려되었다. 교육방송이 효과적인 교수학습도구로서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학교 교육의 질을 개선하고, 대도시와 농어촌 지역 간의 학교교육의 질적 격차를 줄이는 데 효과가 클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EM프로젝트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교육방송체제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기술만으로는 전국 단위의 컬러텔레비전 교육방송을 제작·송출하기가 어려웠다. 컬러텔레비전 교육방송을 포함하여 전국적인 교육방송 송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1972년 12월, 문교부는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와 Tethered Communication Corporation(T-COM) 방식의 방송송출시설 기술협약을 체결하고, 2개의 컬러텔레비전 채널과 1개의 라디오 채널을 독립적으로 갖춘 교육전담방송국을 설립하고자 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은 1973년 T-COM 송신소를 설치하고 1974년 중앙시청각교육원으로부터 라디오 학교방송을 인수하여 새 FM 스튜디오에서 매월 3시간씩 KBS 사회교육망을 통하여 방송하는 한편, 컬러텔레비전방송 시설 구축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1975년에는 UHF-TV와 FM방송망을 확보하였다.
1975년 12월 12일에 시범학교였던 안양서국민학교에서의 컬러텔레비전 교육방송 공개수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T-COM 방식은 날씨에 따라 화질이 저하되는 문제가 있었고, 송신기 고장도 잦았다. 이런 기술적 문제에 더하여 교육현장의 설비 부족과 활용체제의 미흡, 프로그램의 취약성 등으로 인하여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다가, 1977년 8월 19일에 사업이 종료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교육개발원이 초창기에 계획했던, 교육프로그램의 독자적인 제작 및 송출을 담당할 독립적인 교육방송체제 구축에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 후 송신망을 지상방식으로 전환하면서 KBS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2원체제의 교육방송으로 가게 되었다. 즉 한국교육개발원에서는 세부편성 및 제작을, 그리고 KBS에서는 송출을, 각각 나눠 맡게 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며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과외 과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KBS의 TV방송망을 통하여 과외방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1981년부터는 교육전용방송국을 개설, KBS-3 채널을 승인하고 교육방송을 전면적으로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4. 신안군 교육방송국의 설립과 운영
1) 설립 배경과 의의4)
예부터 “서울사람들[京居者]은 촌사람들[鄕人]을 하대(下待)하고 육지사람들[陸居者]은 섬사람들[島民]을 멸시(蔑視)하여”5) 라는 말이 있듯이 섬은 늘 천시받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열의만은 육지부 어디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1924년 1월, 하의도의 주민들은 토지분쟁 소송에서 졌다. 그 결과 3백여 년을 경작해오던 땅을 일본인에게 눈뜨고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제의 칼날 아래에서 “눈물을 삼키며 강제 화해에 굴종[淚를 呑하고 强制和解에 屈從]”하면서 화해 조건을 내걸었다. 그중 하나로 “도내의 교육을 위하여 학교를 세우며”라는 조항이 들어갔다. 3백 년 경작하던 땅을 빼앗기면서도 끝내 얻으려 했던 조건의 하나, 그것은 바로 교육이었다.6)
신안 섬 주민들의 교육열은 해방 이후에도 물론 왕성했다. 조선산악회가 연례로 개최하는 제6회 사업인 다도해학술조사대가 1948년 8월 10일 목포를 기점으로 대흑산도, 홍도, 가거도(소흑산도), 완도 등의 서남해상의 도서를 일주하였다. 그리고 나서 열린 다도해 학술조사대의 보고에서 “그렇게 빈약한 외로운 섬[孤島]의 살림 가운데에서도 도처에 교육열만은, 규모는 적을망정, 대단히 왕성한 데 감복치 않을 수 없었다”7) 라고 하였다. 이렇듯 열악한 사정에서도 섬사람들의 교육열은 왕성하였다.
해방 이후 교육계의 가장 시급한 현안은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이었다. 그 해결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분교장(分校場)의 설치였다. 즉
“유인도와 무인도의 팔백 도서를 포용하고 있는 무안교육구 관내는 낙도라는 입지적 조건으로 의무교육에서 금단의 지역처럼 되어 교육시설의 미비로 아직껏 의무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적령아동들의 미취학자가 무려 3,175명을 헤아리고 있는데 무안교육구에서는 낙도지대에 분교장 설치로써 의무교육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안하여 지난 11월 13일 국회와 정부에 이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즉 그 내용은 우선 20호 이상의 낙도 49개소에 분교장을 설치하기 위하여 그 건축비 금액과 시설비로 8천만환을 보조 요청함과 동시에 도서 근무 교원에 대한 벽지수당 지불과 도서지대일수록 우수한 교원을 배치하여야 한다는 것이 또한 무안교육구 교원인사 행정상 절대 요망되고 있다는 것이다. … 의무교육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49개소 분교장 설치 계획에 의거 착착 설치 수속이 진행 중에 있는데 … 낙도주민들은 하루빨리 교육의 혜택을 보게될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한다.”8)
이렇듯 분교장 설치로 의무교육의 돌파구를 찾았다.
신안군에서 교육 환경 개선의 계기는 신안군의 분군(分郡)을 전후하여 마련되었다. 1969년에 종전의 무안군을 육지부와 도서부로 나누어 육지부를 무안군으로 잔존시키고 도서부를 신안군으로 신설하는 분군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교육청도 나뉘어져 도서부만 관할하는 신안군교육청이 만들어졌다. 신안군교육청이 신설되던 바로 그해 신안군교육청은 관내 낙도교육의 진흥책으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전남도교육위원회에 건의했는데, 그 첫 번째가 ‘낙도교육 진흥의 기본 대책’이었다.9)
이때 라디오, 즉 교육방송도 해결책의 하나로 제안되었다.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이 처한 어려움은 컸다. 1957년이 되면 문교부의 라디오 학교가 보내는 학교방송이 국어, 사회생활, 음악의 3과목을 국민학교 대상으로 하루에 45분간 방송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보조의 일부를 할애하여 무안군내 도서 학교에 전지용 라디오 96대를 구입하여 각 학교에 배치시키기도 하였다.10)
신안은 섬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군이라 육지부의 교육과는 다른 특별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도입된 방법 중의 하나가 이와 같은 라디오 교육방송이었다. 이런 시도는 신안군 교육방송국의 개국으로 나타났다.
앞서 보았듯이 한국교육개발원이 설립된 이후 새로운 교육체제의 일환으로 교육방송의 실현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자체 방송망을 갖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 그 문제들로
“첫째, 라디오 학교방송 운영면에 있어서 학교방송은 KBS의 특집 프로에 밀려 그 진행에 차질을 가져온 일이 많고, 둘째, 기획에서 방송하기까지 절차상의 번잡성 때문에 능률면에서 낭비가 많았으며, 셋째 교육과정 지역화의 입장에서 볼 때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방송은 그 내용이 학습자의 생활경험과 밀착되지 못하여 효과가 감소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넷째, 라디오 학교방송이 교육과정 전개에 치중함으로써 교육과정의 운영을 돕는 교원연수와 장학행정 그리고 관리행정면을 도외시한 감이 없지 않았다.”11)
등을 꼽았다. 이에 그 해결책은 결국 새로운 지역 내 교육방송국 설립을 통해 자체 방송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에서 전라남도 교육위원회가 우선 신안군 관내 교육방송의 해결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당시 신안군은 행정 관리구역이 직경 150㎞의 광활한 해역에 700여 도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통·통신면에서는 아직도 미개발 지역이었고, 모든 유인도에 교육기관이 있지만 정기항로가 없는 도서가 많아 행정업무 연락 또한 매우 불편하였다. 이처럼 행정의 사각지대에 있는 학교들을 “정처없이 표류하는 난파선”에 비유하면서 신안군 교육방송국 설립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찾고 있었다.
첫째,군(郡) 교육행정과 학교경영을 밀착시켜 행정의 능률화를 기함으로써 학교차(學校差)를 해소하는 데 공헌한다.
둘째,어린이의 경험권(經驗圈)을 확대시켜 질적으로 보다 수준 높은 학력을 기르는 데 공헌한다.
세째, 교원의 자질을 향상시켜 신뢰 받는 새 낙도교사상(落島敎師像) 정립에 공헌한다.
이렇게 의의를 찾았고, 그러면서 “교육방송국의 탄생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전라남도 교육위원회와 신안군 교육청이 그늘진 도서 벽지의 교육행정을 능률화하고 교육방법의 현대화를 기함으로써 균형 있는 교육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표상으로서 이루어 높은 금자탑”이라 스스로 평하였다.
2) 개국의 경위
신안군에 교육방송국이 들어서게 된다는 소식은 1972년 11월 24일자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즉
“신안군 교육청은 73년 초에 관내 1백 4개, 섬마을 학교(본교 61개, 분교 42개)에 교육방송국을 설치한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섬으로 구성된 (유인도 1백30개, 무인도 5백80개) 동교육청은 장학지도와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는데 폭풍주의보가 발효됐을 경우 등은 교육행정이 마비되기 때문에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해 1천5백만 원의 예산으로 목포에 송신소를 설치하고 교육방송국을 운영할 방침이다. 교육방송국을 운영하게 되면 관내 3만6천5백6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학습내용을 청취할 수 있어 시청각교육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12)
신안군에 교육방송국을 설치해야 하는 지역의 절대적 요청을 받아들여 전라남도 교육위원회는 1972년 12월 4일 방송국 운영 및 시설계획의 수립을 지시하였다. 이에 면밀한 현지조사를 거쳐 시설설계를 완성한 당시의 서용수(徐龍洙) 신안군 교육장은 1972년 12월 4일 시설비 특별교부 신청서를 첨부하여 도 교육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기본 설계는 도 교육위원회와 문교부의 심의를 거쳐 1973년 10월 방송 전파를 보내는 무선국 설치 가허가를 받았다. 방송국 건설사업은 이로부터 본격화되었다.
신안교육청은 1974년 2월 19일 오전 10시에 교육방송국 시험방송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13) 교육방송 시험발사를 전하는 신문기사를 보면
“낙도교육을 위해 처음으로 시도된 신안군 교육방송국은 관내 105개교를 대상으로 방송하게 되는데 이날 첫시험 방송을 박월신(朴越信) 교육장이 직접 실시했다. 각 학교의 수신기는 FM바테리레시바로 공지사항 등을 수신했다. 방송국시설은 현재 90% 공정을 보이고 있으며 오는 7월 정식개국 때까지 시험방송을 매일 오전 10시부터 30분간 오후 4시부터 30분간씩 두 차례씩 실시한다. 신안군 교육방송국은 5천만원의 시설비를 들여 신축했는데 오는 7월부터 개국을 하면 낙도교육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14)
동년 2월 25일 방송국 건물이 준공되고, 2월 28일에는 신안군 교육방송국 설치 조례가 공포되었다. 4월 30일 제반 방송기기 시설이 완공되고 동년 5월 6일 무선국으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음으로써 신안군 교육방송국은 완성을 보게 되었으며 1974년 9월 27일 정식으로 개국하였다. 이에 따라 새시대를 열어주는 교육의 길잡이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그림 2】 신안군 교육방송국 개국 기념식과 문교부·도 지정 연구발표회 모습(1974.9.27). 전남도교육청 제공 |
교육방송국의 송신소는 목포시 양을산에 두었다. 기기실, 관리실, 창고 등을 갖추고 높이 60m의 송신 철탑에는 주파수 32.6메가헬츠(MHZ), 출력 300왓트(W)로 서남부 해역 일대에 산재한 신안군의 초·중학교 136개교에 방송 전파를 보냈다.
3) 운영
신안군 교육청이 발표한 교육방송국 운영목표를 보면, ①교육방송을 통하여 도서벽지 ‘복식교육’의 질적 심화를 기하며 ②연수방송을 통하여 교직의 전문성을 신장하고 ③행정방송을 통하여 낙도 행정통신의 원활을 기함으로써 행정능률을 향상시키는 등의 세 가지였다. 즉 학습지도 방송과 장학연수 방송, 행정 방송 등의 실시였다.15) 말하자면 교직전문성 신장을 위한 연수방송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림 3】 1961년 우리나라 최초로 대류권 산란방식 무선통신의 효시를 이루었던 양을산 스켓타 통신시설터 표지석. 현재 이곳에는 KT 양을산 중계소탑이 들어서 있다. 이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안군 교육방송국의 송신탑은 지선식 철탑구조물로 현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
【그림 4】 KT 양을산 중계소탑.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이 ①의 복식교육이었다. 도서벽지는 그 자연조건 때문에 소규모 학교가 많다. 소규모 학교는 학급 및 학생수 감소, 아동의 경험 및 경험영역 감소, 학습환경의 빈곤, 교육시설의 빈약 등의 요인 때문에 적절한 교육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규모 학교는 1인의 교사가 2개 학년 또는 3개 학년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로 수준이 다른 교과를 동시에 동일한 장소에서 수업해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수업을 복식수업이라고 한다. 소규모 학교가 다수인 도서에서는 부득이하게 복식수업이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이를 보완하면서 그 장점을 최대한 찾아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신안군 교육청이 방송을 통해 복식교육의 질적 심화를 기하려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혹시 이런 데서 도서·벽지 소규모 학교 교육의 미래를 위한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교육방송국의 운영실적 및 효과는 다음과 같다. 1977년도의 실적을 보면,
【표 1】 방송운영 실적(1977년도)
구분계획실적비율
학습방송 | 2054회 | 2081회 | 101.3% |
장학연수방송 | 315회 | 286회 | 90.7% |
새마을 방송 | 59회 | 38회 | 64.4% |
행정방송 | 540회 | 542회 | 100.4% |
계 | 2968회 | 2947회 | 99.3% |
【그림 5】 음악 교육방송 중인 학생들의 모습. 전남도교육청 제공 |
【그림 6】 신안군 교육방송국 내부시설 및 방송활동. 전남도교육청 제공 |
교육방송의 효과로는 “첫째, 학습방송은 도덕과와 음악과에서 특히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둘째, 교원 연수방송은 연수시간과 경비의 절감에 효과가 크다. 셋째, 행정방송은 행정경비와 시간의 절약에 효과가 크며 공문서의 분실을 방지하고 지시사항의 침투가 철저해지는 등 방송매체가 지닌 제반 특성(동시성, 속보성, 구체성)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등 세 가지를 꼽았다.
1975년에는 난청(難聽) 지구 해소를 위해 다음과 같이 교육방송 시설비 지원을 요청하는 등 꾸준히 개선해 나가고 있었다.
“신안군 교육방송국은 76년에 방송수신 시설을 위한 예산 2천5백만 원을 문교부에 지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청은 이 자금은 현재 초․중학교 8백39개 교실 중 5백 교실에 방송수신기를 설치, 아둥물의 학습효과를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지난 6월 문교부 관계관이 현지를 돌아보고 간 후 방송시설 보강비와 흑산면 등 17개소의 난청지국에 철탑을 세워 해소토록 1천여만 원을 지원한 것이다.”16)
이때만 해도 “개국 이래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신안 교육방송국의 전망은 밝기만 하다”고 할 만큼 기대가 컸다.
【그림 7】 방송하고 있는 제6대 이대순 교육감(1979.6.28~1980.12.1)의 모습. 전남도교육청 제공 |
4) 폐쇄, 그 이후
이렇듯 나름 의미있게 발전해 나가고 있던 신안군 교육방송국은 아쉽게도 1985년 11월 28일 폐쇄되었다. 이는 기술의 변화가 초래한 결과일 뿐, 교육열이나 의지가 변했던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이미 1981년부터 교육전문채널인 KBS-3 TV가 운영되면서 TV교육방송이 전국적으로 본격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라디오 교육방송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무작정 끝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TV교육방송국 설치를 시도하였다. 한국교육개발원과 제휴하여 본 방송국을 TV화할 구상이었다. 그리하여 서해 남부와 남해 서부의 모든 도서를 대상으로 하는 “다도해 교육방송”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설립자도 신안군 교육장에서 전라남도 교육감으로 바꾸고, 방송국 위치도 목포에서 광주로 이전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방 순시에서 교육방송의 TV화 연구를 지시함으로써 태동되어 한국교육개발원 TV국 설치계획과 통합하여 추진하도록 결정된 바 있었다. 그래서 한국교육개발원은 1975년에 신안군 내 섬 학교 아동들의 교육효과를 높이기 위해 TV교육방송국 설치를 추진하였다.
1978년 대통령의 연두 순시에서도 도서·벽지교육을 거듭 강조한 바에 따라 문교부 장관이 교육방송의 전국적인 확대를 기안함에 이르러 이 계획은 차츰 구체화되어 갔다. 이런 흐름 속에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기술진이 시설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TV교육방송국 설치는 복잡하고 또 인력확보도 어려운 데다가 특히 앞서 본 것처럼 T-COM 방식의 기술적 실패 등이 겹치면서 중단되었다. 1978년 10월경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17)
4. 섬 학교 교육의 미래 대안
의무교육조차도 어려웠던 섬 교육, 전라남도 교육위원회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일찍이 라디오 방송을 활용하는 교육을 도입하여 전국 최초, 유일의 신안군 교육방송국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0여 년간의 운영 끝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를 TV교육방송으로까지 발전시키려 하였다.
앞서 본 것처럼 라디오 교육방송을 신안군 지역만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한 목적 중 하나가 “복식교육의 질적 심화”에 있었다. 복식수업의 원조를 서당교육에서 찾기도 하지만, 핀란드 등 선진국에서도 복식학급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다. 복식수업은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학교에서 지향하고 있는 열린교육의 한 방법이자 선진국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개별화 학습과 무학년제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두 학년을 가르치면 각 학생의 진도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어 오히려 아이들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가능하며, 방송은 자기주도적 학습역량을 늘이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18)
인구소멸, 작은 학교 …. 분명 새로운 교육체제가 필요하다. 지금은 정보통신의 발달로 기술적 장벽은 사라져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소규모 학교의 일방적인 통·폐합 대신, 복식교육의 미래버전을 찾아 도서·벽지의 소규모 학교 교육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전라남도교육청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글로컬 미래교육의 답도 이런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 1927년 2월 16일 사단법인 경성방송국(JODK)이 라디오 방송 전파를 발사한 후 2년이 경과한 1929년에 학교방송의 전신인 어린이 시간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방송되었던 적이 있었다.
2) 김우영, 「냉전시기 미국의 교육원조전략 변화와 한국 텔레비전 교육방송의 시작」(『한국교육사학』 44권 4호, 한국교육사학회, 2022.12), 2쪽.
3) 같은 글, 16쪽. 이하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이 글을 참고하였다.
4)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석규, 「압해도의 교육과 각급 학교의 연혁」(『島嶼文化』 18,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2000.02) 참조.
5) 『皇城新聞』(1899.08.19.)
6) 『東亞日報』(1924.01.31.)
7) 『朝鮮日報』(1948.08.28.)
8) 『全南日報』「버림받은 낙도의 適齡兒童 近四千/分校場設置請願/務安敎育廳서 豫算早速令達苦待」(1956.11.26.)
9) 이기훈 외, 『전남 학교의 역사』Ⅱ(전라남도교육청, 2015.12.10.), 24쪽.
10) 『全南日報』(1957.07.30.)
11) 신안군 교육방송국의 설립부터 운영 실태, 전망 등에 대하여는 전라남도 교육위원회, 「新安 敎育放送局 運營의 實際」(1978, 국회도서관 제공)가 있어 이 글 작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12) 『전남매일』 「섬마을에 교육방송국/ 新安교육청 낙도아동 자습내용 알게」(1972.11.24.)
13) 전라남도 교육위원회 기록에는 1974년 1월 25일 감격적인 시험전파발사에 성공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좀더 시의성이 있는 『전남일보』의 기사를 따랐다.
14) 『全南日報』(1974.02.20.)
15) 『全南日報』(1974.03.08.)
16) 『전남매일』 「교육방송 시설비 支援要請」(1975.07.09.)
17) 『全南日報』 「TV敎育放送取消/ 新安 人力確保등 어려워」(1978.10.26)
18) 강봉수, 「왜 '복식수업'이 교육적 효과 낮다고 보는가?」(「헤드라인 제주」, 2012.10.31)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