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웃음 / 오순택
목련이 함박 웃고 있다. 뜰이 환해진다.
목련 아래서 / 김시천
묻노라 너 또한 언제이든 네 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 그날이 오면 주저없이 몸을 날려 바람에 꽃잎지듯 세상과 결별할 준비 되었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하루에도 열두번 목련꽃 지는 나무아래서
목련나무 / 최기순
목련나무는 그 집에 일 년에 한 번 불을 켠다 사람들은 먼지가 쌓여 어둠이 접수해버린 그 집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목련꽃이 피어있는 동안만 신기하게 쳐다본다
목련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타고 놀던 목마와 버려지는 낡은 의자 플라스틱 물병과 그릇들 장난삼아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던 손과 방충망이 저절로 찢어지던 소리 늘어진 TV안테나 줄을 타고 근근이 피어오르는 나팔꽃을 뒤로하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아파트를 바라보는 기대에 찬 시선들을 드디어 두꺼비집 뒤에서 도둑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고 집이 삭은 관절을 스스로 부서뜨리며 우는 것을 제 그늘에 몸을 숨기고 다 보았을 목련나무는 해마다 봄이 되면 미친 듯 제 속의 불꽃들을 밀어 올려 저렇게 빛나는 불송이들을 매달았을 것이다
목련 그늘 아래서는 / 조정인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인다 마른 가지 어디에 물새알 같은 꽃봉오리를 품었었나 톡 톡 껍질을 깨고 꽃봉오리들이 흰 부리를 내놓는다 톡톡, 하늘을 두드린다 가지마다 포롱포롱 꽃들이 하얗게 날아 오른다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목련꽃 날아갈까 봐 발소리를 죽인다
목련 후기 /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 김성수
목련 나무에서 화려한 설법이 떨어져 내린다 저 우유빛 가슴, 겁탈 당한 조선시대 여인네 정절貞節같은, 품 한 켠 은장도로 한 생生을 접었다 옷고름 풀어헤친 짧은 봄날의 화엄경華嚴經 소리, 바람바람 전하더니, 거리 욕창 든 꽃잎 떨구며 봄날은 간다 아름다운 요절, 화려한 통점痛點, 동백의 투신은 투사의 모습이었고, 목련은 병든 소녀처럼 죽어갔다. 두둥실 명계冥界를 건너는 꽃들의 장송곡 따라 삼천 궁녀들 나무 위에서 자꾸만 뛰어 내리고 있다. 잎새들도 곧 뒤따르겠노라 하염없이 손 흔든다. 떨어진 목련꽃을 만진다. 화두話頭 하나 마음으로 뛰어 든다 내 생이 바짝 긴장한다 memento mori!*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목련나무엔 빈방이 많다 / 이정록
목련꽃 환한 낡은 기와집
나무 대문 앞에 弔燈이 걸려 있다
할아버지가 숨을 놓자 혼자 살던 집에 사람 북적인다
저렇게 食口가 많았던가
가까이 다가서니 언제부터 펄럭였나 빛바랜 달력 한 장
빈방잇슴 보이라 절절 끄름
목련나무의 빈방 안에서 哭소리 새나온다 건을 벗어 問喪하는 목련꽃 이파리들
木蓮 / 김 륭
나무는 제 팔 꺾어 세상을 휘두르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의 목을 조르거나 구름을 방석으로 깔아뭉개지 않는다
눈밭 헤치고 당도한 정원, 어디 꽃 한번 피워보나 싶더니 내 팔에 내 목을 걸고 한고비 넘나 싶더니 툭, 목이 몸밖으로 미끄러진다
하얗게 질린 몸짓 발등으로 부어 올라 눈에 불을 켠 목련송이들 날아오른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바닥이던가 밟히면 밟힐수록 후끈, 달아오르는 게 생生이던가
하얀 목련 / 김옥남
방금 기도를 끝낸 하얀 성의의 천사들이 꽃등불을 밝히고 삼월의 뜰을 걸어 나왔다
하늘을 향해 목울대를 곧추 세우고 꽃송이 송이마다 볼을 부풀린 것이
지휘봉을 휘두르는 바람의 호흡 따라
지금이라도 곧 봄을 찬양하는 합창을 시작할 것만 같다
목련꽃 그늘 아래 울다 / 김태형
대낮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몇 집 건너 또 몇 집 목련나무 피었네 지난밤 내 손에서 벗어난 사랑은 그러나 서툴렀네 그러나 한번 더 사랑이 나를 저버린다면 그때 나는 그 무엇도 되지 않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아득한 울음을 울겠네 겨우내 뒤란 귀퉁이 잘 말려 두었던 대추 몇 알 꺼내 맑은 물을 끓였었네 두고두고 마실 양으로 한 주전자는 끓였었네 그 향기 봄 그늘에도 잦아 있어 오늘 내친걸음에 어디 먼 데라도 갈 모양으로 나섰느니 하지만 괜스레 햇볕만 내쏘다 돌아섰네 오늘 하루의 몫으로 시를 쓰면 또 며칠을 살아낼 수 있을까 단 며칠의 목숨을 위해 쓸쓸한 날은 몇 줄의 초고를 남기거나 지친 몸으로 난필을 읽다가 이 청청한 봄날을 다 보냈구나 나 홀로 아픈 세상길에 눈물을 흘리네 탄식과 환희와 대답 없는 사랑이 한데 모여 이루는 목련나무 키 큰 언덕에서 어떤 뜨겁게 치미는 게 있어 그애는 지금 창밖을 내다보며 목련가지 물오른 꽃송이처럼 그애는 한 음 한 음 음자리를 맞추고 있겠지 내 노랫말이 그애의 작은 창틀까지 하나하나 고스란히 제 음자리로 옮겨 앉기까지 나 온통 이 목련꽃 그늘에 놓아 줘야 할 것들 울음으로 풀어 줘야 할 것들 내친걸음 뒤돌아 이끌고 온 맨살의 숨구멍 봄 햇살에 반은 술렁이고 반은 심하게 몸을 뒤흔드네 나 이제 그것들을 이름 부르려 하네 그리하여 또 며칠 분의 안타까운 목숨으로 살아 낼 슬픔들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어디로도 숨어들지 않을 낮은 음자리로 하나하나 자리할 때까지 노래가 될 때까지
목련꽃 진다 / 최광임
아름다운 것이 서러운 것인 줄 봄밤에 안다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 흔들어 대던 낮바람을 기억한다 위로 솟거나 아래로 고꾸라지지만 않을 뿐 바이킹처럼 완급하게 흔들리던 둥지 그것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이라고 의지 밖에서 흔들어대는 너 내 몸에 피어나던 목련꽃잎 뚝뚝 뜯어내며 기어이 바람으로 남을 채비를 한다 너는 언제나 취중에 있고 너는 언제나 상처에 열을 지피는 내 종기다 한때 이 밤, 꽃이 벙그는 소리에도 사랑을 하고 꽃이 지는 소리에도 사랑을 했었다 서러울 것도 없는 젊음의 맨몸이 서러웠고 간간이 구멍난 콘돔처럼 불안해서 더욱 사랑했다 목련나무는 잎을 밀어 올리며 꽃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이 밤도 둥지는 여전히 위태롭고 더욱 슬퍼서 찬란한 밤 또 어디서 꽃잎 벙그는 소리 스르르, 붉은 낙관처럼 너는 또 종기에 근을 박고 바람으로 불어간다 꽃 진다, 내가 한고비 진다
되돌아가는 시간 / 전남진
할머니는 천천히 돌아가고 계신다 올 봄은 지난 봄으로 가고 올 진달래도 지난 봄으로 간다 마당에 핀 작은 목련도 지난해나 혹은 어느 먼 처녀적 마을로 돌아간다 돌아가다 잠깐씩, 어떤 날은 아주 오랫동안 가던 길을 선명하게 밟으며 돌아오신다 돌아가기에 올 봄이 너무 환했을까 돌아와 꽃잎 뜯어내듯 다시 가까운 과거부터 잃어버리고 먼 과거로 사뿐사뿐 걸어가신다 가시다가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시집온 그날로 가마 타고 가신다 가시다 돌아보면 아득한 얼굴들 어느새 되돌아와 식구들의 손을 들여다 보신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할머니는 그리운 어느 한 시절로 가고 계신다 언덕 넘어 개울 건너 내가없던 그때로 가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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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멈추고 바라보기 원문보기 글쓴이: 유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