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筏橋)와 꼬막(2015.11.28.토)
벌교는 북쪽으로는 제석산이 남쪽으로는 여자만(汝自灣)이 있어 대표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연안도시이다.
옛날에는 뗏목으로 다리를 놓아 건너 다녔다고 하여 벌교(筏橋)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단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이념으로 첨예하게 갈등하던 혼돈의 시대, 그리고 그 속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담은 소설 ‘태백산맥’은 전남 보성군 벌교를 소설 속 인물의 주요 활동 무대의 이미지(image) 도시로 부각되었고.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감싸는 벌교 앞바다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여자만(汝自灣)의 갯벌은 모래가 섞이지 않고 오염되지 않아 꼬막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조간대(潮間帶)이며, 2009년 해양수산부(현재 국토해양부)는 우리나라에서 상태가 가장 좋은 갯벌이라 발표한 청정해역의 꼬막은 미식가(美食家)들의 입소문이 자자한 도시이다.
“태백산맥”은 볼거리로, “꼬막”은 먹거리로 벌교를 쌍끌이 효과로 더하고 있는 테마여행지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육과 역사의 고장이요, 자연 생태환경의 체험 학습장소이기도 하다.
꼬막 시즌이 되면 방송사들은 앞 다투어 “꼬막 소재”의 방송이 단골 프로가 됐다.
방송을 보고 있으니 군침이 목구멍을 꼴깍하면서 넘어간다.
나는 군침을 참을 수 없어 대학친구들에게 단번에 전화를 하여 벌교 역 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김이 솔솔 오르는 꼬막 무침을 그리며 마음은 벌써 벌교로 향했다.
아침에 벌교로 출발하려는데 전북지역에 30cm의 대설주의보가 내려 을씨년스러워 부부는 방한복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의 애마(愛馬)를 쓰다듬으면서 오늘 하루 안전 운행을 부탁하고 눈보라 속에 출발하였다.
1시간 40여분 만에 친구부부들과 약속 장소인 벌교역 광장에 도착하였다.
벌교역 앞의 거리는 빨랫줄에 빨래를 널은 것처럼 “벌교 꼬막 특구 지역 지정”이라는 현수막이 터널을 이루어 꼬막의 군침은 입안을 또 질퍽하게 한다.
여름날 소나기는 논두렁 사이에서 갈라지고 소(牛) 등에서 갈라져 소나기가 내리는 지역이 달라진다 했는데, 전남 특히 벌교지역은 눈 한 방울 안내려 두툼한 나의 방한복이 다른 사람들한테 자꾸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다.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벌교역 플랫홈(platform)으로 나가보니 뽀얀 연기를 내품으며 들어오는 기차가 너무 반갑다. 다시 기차는 벌교역을 밀어 제치고 해안선을 미끄러져 멀어지고 있어, 어느 풋사랑의 연인이 단절을 선언하고 뒤돌아봄 없이 가버리는 것처럼 기차가 미워서 흘렸을 눈물이 대신 흐르려한다.
벌교역은 1922년 이후 경전선(慶全線)(경상도 삼랑진 ↔ 전라도 송정리) 철도가 지나면서 벌교역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일제 강점기 동안 전남 동부지방의 물산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창구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여 1937년 읍으로 승격하였단다.
조금 있으니 친구들 내외가 도착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역전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서 벌교에서 꼬막정식을 잘하는 곳을 부탁했다.
50대 전후로 보이는 남자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슨 전화를 받으며 기록장에 전화번호 같은 것을 연신 받아 적으면서 고개를 1시 방향으로 살짝 들어 얼굴에 앉은 파리를 쫓는 모습으로 “저쪽으로 가보세요” 하면서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황당하여 관광안내소가 아닌가하여 다시 간판을 확인해보니 관광안내소가 분명했다. 순간 화가 치솟는다.(자세히 확인해보니 관광안내소는 주위에서 콜택시 기사들이 택시주문을 받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었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역전에서 조금 떨어진 『역전식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식당은 내가 50여년 전 대학 시절에 여행 중 숙박했던 여관자리여서 감회가 솟아난다.
주인장 아주머니는 “어서오세요”도 목에서 기어 나오는 소리로 퉁명스럽게 겨우 인사를 한다.
그래도 주인장한테 아양을 떨면 꼬막 하나라도 더 얻어먹을 욕심으로 “사장님은 날마다 맛있는 꼬막을 잡수셔서 좋겠습니다.”하고 말을 건넸더니 “무엇이 꼬막이 맛있다요? 하나도 맛 없어요, 나는 안 먹어요”하신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나는 설령 맛이 없어도 자기 집 손님한테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되는데 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조리를 하여 손님 밥상에 올려놓은 꼬막 정식은 맛은 어떨가? 하면서 그럭저럭 꼬막 정식을 먹고 씁쓸하게 식당 문을 나섰다.
식사 후 벌교 시장에서 피꼬막, 새꼬막 그리고 농어를 모임 공금으로 구입하여 각자 차 트렁크에 실고 벌교 홍교로 향했다.
홍교에 도착하니 최근 보수 흔적이 완연히 드러난다.
현재는 뗏목다리는 없고 그 자리에 벌교 홍교(筏橋 虹橋)가 있다.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순천 선암사(仙巖寺)의 스님인 초안(楚安). 습성(習性) 선사(禪師)가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다리를 놓아 사람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을 중요한 보시(布施)로 꼽고 있다.
한국에 남아있는 홍교(虹橋)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돌다리이어서 대한민국의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그래도 300여년 전의 다리를 방치하지 않고 보수하여 후손들에게 조상의 얼을 느낄 수 있게 함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한참을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오니 우리 동연배쯤 보이는 동네 분에게 조정래 문학관을 물으니 너무나 친절하고 자세히 안내해 주어 역전의 『관광안내소』와『역전식당』에서의 메쓰꺼움이 조금은 진정된다.
일행은 승용차로 10분 거리인 조정래 문학관에 도착하여 샅샅이 관람하면서 2층까지 돌아보니 주로 “태백산맥”을 저술했던 작가의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소품들이 전시되었다. 그중에서 작가 가족과 독자들의 태백산맥 필사본(筆寫本)이 가장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
조정래 문학관 주위에 있는 소설속의 인물들의 집(현부자네 집, 소화의 집)을 둘러보고 김이 모락모락 나던 꼬막 꿈은 자동차 바퀴로 꾸욱 누르면서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주에 도착하니 7시 30분쯤 되었다.
이튿날 안식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벌교 시장에서 사가지온 꼬막을 삶아서 양념장에 찍어 먹으니 지난번 눈으로만 입맛을 느꼈던 TV속 꼬막 맛을 이제야 입속에서 느낄 수 있어 역전식당에서 억지로 먹었던 꼬막정식의 아쉬움도 사라진다.
발품 팔어 가며 찾아간 곳에 허탕을 쳤다면 알음알음 입소문은 더 멀리 퍼져간다.
행정당국의『벌교 꼬막문화 산업특구 지정』그리고 지역사회가 터널처럼 내걸었던 현수막도 좋지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했다. 불교에서는 공덕(功德)이 많이 있다던데 고운 말씨로 덕을 쌓는 언어공덕(言語功德)을 추가 권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