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생을 '무'라는 화두를 품고 참구하다
효봉 스님(1888~1966)은 일제강점기 판사를 하다가 사람이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법복을 벗는다. 엿장수로 전국을 3년 간이나 유랑하다 금강산 신계사의 석두 스님을 은사로 늦깎이 출가를 한다.
방랑과 수행을 통한 스님의 별명으로는,
'판사 중' '엿장수 스님' '절구통 수좌' 너나 잘해라' 등 다양한 별명을 가졌다.
스스로 4가지 규약을 정해 실천한 내용은 '동구불출' '오후불식' 장좌불와' '묵언' 이다.
- 효봉이 머문 사찰을 찾아서(남한 지역)
< 해인사 >
효봉은 우리나라 최초의 총림인 가야총림(1967년 해인총림으로 개설)의 방장을 지냈다. 1962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다. 제자로는 구산, 법정 스님이 있고 고은 시인도 한때 '일초' 라는 이름으로 효봉의 제자가 된 적이 있다.
< 통영 용화사 도솔암과 미래사>
- 용화사, 도솔암
해인사에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해남 대흥사로 이동 중 심한 배멀미로 인해 용화사의 도솔암에 머물게 된다. 구산, 법정 등 많은 제자들이 통영에서 함께 한다. 용화사에는 효봉스님의 사리탑과 사리비가 있다.
< 미래사 >
구산 스님이 도솔암에 계신 효봉 스님을 모신 미래사이다. 이곳에도 효봉 스님의 사리비가 있다.
< 두륜산 대흥사 >
초의선사의 일지암 있고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을 모신 표충사를 정조 임금이 내린 대흥사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 조계산 송광사 >
1969년 구산스님을 방장으로 우리나라 두 번째로 개설된 총림이 송광사이다. 승보사찰인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16국사를 배출하였다. 효봉 스님은 조계종 종조인 보조국사 지눌의 법통을 잇기 위해 긴 시간을 송광사에서 보낸다. 평생 '무'를 화두로 품고 계셨기에 '무무문'이라 이름한 문과 사리비 그리고 영정을 모신 영각이 별도로 모셔져 있어 효봉 대종사의 위업을 엿볼 수 있다.
- 재악산 표충사에서 열반에 들다
< 밀양 표충사 >
효봉 스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 밀양 표충사이다. 사명대사의 고향이 밀양인 까닭에 호국사찰로서 표충사로 명명된 절이다. 효봉 스님은 1966년 10월 15일 세수 78세, 법랍 42세로 입적하셨다. 속명은 이찬형, 법명은 원명, 법호가 효봉이다.
<열반송>
내가 말한 모든 법/모두 다 군더더기/
만약 오늘 일을 묻는다면/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 오늘도 카페의 적적함을 달랜다는 뜻으로 글을 올린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활동이 어려운 때,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가야지의 소리가 울리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다만 문화유산 답사의 일환으로 한 사찰기행답사기이니 혹자님들의 혜량을 바란다.
첫댓글 허회장님, 다양한 좋은 명산과 사찰을 두루 다녀오셨군요. 다시한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자료 감사드립니다.
산천을 두루 찾아가는 자유인.
좋은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효봉스님이 밀양표충사에서 입적하셨군요
다음 표충사에 갈 때 찬찬히 둘러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