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의 혁명은 전 세계의 웬만한 자유 세계의 나라의 젊은이들에게는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다.
프랑스부터 시작하여 미국,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캐나다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지만, 한국은 비껴나 있었다. 한국은 68혁명의 이념이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다르지만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늦게나마 비슷한 운동이 일어났다.
재러드가 보기에 68혁명의 여러 나라 중에서 여파가 가장 큰 것이 독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가장 폭력적이었다.
그 이유가 첫 번째로 구세대는 나치 세대라는 불신감이 젊은 세대의 머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두 번째로는 독일 사회 자체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전통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5년 무렵 태어난 세대는 대체로 부모 세대를 나치의 부역자로 도덕성에 대한 의문점을 가졌을 것이며, 그전 세대는 너희들이 전쟁의 잔혹함을 어찌 알겠느냐와 그것을 극복하고 경제 기적을 이루어낸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달리 독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은 같은 추축국 입장이어서 유달리 폭력성이 강했다.
그 결과 테러를 저지르는 단체도 나타났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른바 “ 적군파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은 기존 좌익 정당들도 지지를 철회했으며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 성공한 실패 ”로 묘사가 된다. 대부분 나라는 정권의 방향을 바로 돌리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제시한 의제는 차츰차츰 국가에 채택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급진파는 거의 해체되었지만 보수로 노선을 바꾸던지 혹은 계속 진보를 간직한 이들은 이른바 “ 녹색당 ”으로 전환을 한다.
최소 1968년 이전까지는 독일의 자유 진영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권위주의란 말에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대단히 희석이 되었다고 재러드는 보고 있다. 여성 총리인 메르켈이 집권을 장기적으로 하는 것 하며 심지어는 언어도 2인칭일 경우, 예전에는 Sie(당신)을 자주 썼지만 지금은 du(너)를 훨씬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witpo
68혁명
1968년 프랑스에서 프랑스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8명의 청년들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된 전례 없던 반체제, 반문화 운동이다. 파리에서 시작한 시위는 냉전과 베트남 전쟁 등의 시대적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해 웬만한 전 세계의 여러 나라, 미국, 서독, 체코슬로바키아,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한 운동이다.
프랑스는 드골정권이 붕괴가 되었지만 정치적인 것보다 성의 혁명이 높았고 미국은 히피운동으로 성의 자유화와 반전, 독일은 군국주의 청산이 요체이었고 네덜란드는 마약이나 성의 자유화, 캐나다도 트뤼도가 집권하여 동성애, 낙태 등의 자유화가 시발하였고 일본은 전공투가 나왔다.
당시 한국은 살벌한 박정희의 반공정책으로 68혁명이 들어올 수 없었다.
독일 녹색당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녹색당이 있지만 독일의 녹색당은 전세계 녹색당 운동의 본류이자 녹색 정치운동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 독일 사회민주당과의 연정을 통한 실제 집권 경험까지 있는 독일의 제도권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