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빛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시 읽기>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정진규
정진규 시인은 지금(2000) 한국시인협회 회장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월간 시잡지 『현대시학』의 주간입니다. 그러나 이런 직함은 그의 외양에 불과합니다. 그는 한국시인협회 회장이기 이전에 『현대시학』의 주간이기 이전에 우리 시대의 아주 좋은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저는 방금 정진규를 가리켜 ‘우리시대의 아주 좋은 시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아주 좋은 시인입니다. 제가 그를 이렇게 부른 데는 평론가 이전이 한 인간으로서 그이 시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평론가로서도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정진규 시 중에는 여러분들과 함께 목소리를 맞추어 읽어보고 실은 시가 아주 많습니다. 그의 시는 쉽게 읽히면서 손에 잡힐 듯한 실감을 갖게 하고 , 정신도 아주 심원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온몸이 편안해지는 느낌과 더불어 감각의 즐거운, 그리고 영혼의 깊은 울림을 맛보게 됩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그의 작품 중에는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해보고 싶은 작품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을 다 함께 감상할 시간은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우선 한 편을 같이 감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함께 감상할 작품의 제목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입니다. 이 시는 그의 시집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속에 들어 있습니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 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 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 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 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 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날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전문
정진규의 이 시를 읽는 동안 제 마음속에는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저의 고향집 앞마당 고추멍석 위에 내리쬐던 햇볕이 떠올랐습니다. 고추멍석 위로 햇볕이 투명하게 쏟아지고 나면 고추는 몸을 뒤척였고, 햇볕 속에서 마른 고추는 몸 속에 그 햇볕을 간직한 것처럼 아주 말고 신비로운 얼굴을 붉게 드러냈습니다. 고추장을 광고하는 어느 회사의 광고 문안처럼 그야말로 그 고추는 놈 속에 ‘햇살’을 담고 있었습니다.
정진규의 이 시를 읽는 동안 제 마음속에는 골목마다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동네 조무래기들이 머리 위로 아주 따스하게 내리쬐던 시골 마을의 햇살이 떠올랐습니다. 난방시설도 시원치 않고 겨울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골 마을의 동네 아이들에게, 햇살은 아주 부드럽게 내리쬐어 그들을 덥혀주곤 하였습니다. 그 햇살을 동무 삼아 아이들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습니다.
이외에도 정진규의 시를 읽으면서 저는 햇살과 관련된 많은 정경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농부의 지게 위로 내리쬐던 햇살, 졸고있는 부뚜막의 파리 위로 내리쬐던 햇살, 마루 끝 한 자락을 오랫동안 밝히던 햇살, 사립문의 강아지 코 위로 부서지던 햇살, 물결 위에 켜켜이 쌓이던 햇살, 적막한 방죽 위로 내리꽂히던 햇살, 황금색 들판 위로 쏟아지던 햇살, 문 창호지에 스며들던 햇살, 장독대 위에 서 늘고 있던 햇살, 늙은 호박의 뒤통수를 비추던 햇살, 말똥구리의 허리께를 비추던 햇살, 할아버지의 담뱃대 위로 쏟아지던 햇살, 낡아 빠진 옛날 잡지 위에 앉았다 가던 햇살, 사과의 한쪽 볼을 묽게 적시던 햇살, 구멍가게 과자 봉지 위로 내려앉던 햇살, 햇병아리의 첫 나들이길을 밝히던 햇살 등 그야말로 수도 없이 많은 정경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도 햇살과 관련된 많은 정경들이 저 이상으로 떠올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시를 감상하는 데는 한 개인의 체험 내용이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어떤 시에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간다’는 구절이 나온다면, 그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알고 있거나 만난 적이 있는 시냇물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앞에서 한 제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끊임없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햇볕 혹은 햇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렇듯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은밀하고 주관적입니다.
정진규는 그의 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을 농사꾼인 그의 아우로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아우의 이 말은 형인 정진규 시인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잊지 못하고 그것을 사렬 시를 썼습니다. 그 시가 바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입니다.
이 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의 의미는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 속에 다 숨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을 읽어낼 수 있다면 이 시의 비밀을 거의 다 읽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선문답의 한 구절 혹은 경구의 한 구절 같은 이 말,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이 말의 속뜻을 이해하고 거기서 감동의 순간을 맛보려면, 먼저 어떤 대상과 상생相生의 관계를 맺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상생의 관계란 사로가 살아나는 관계입니다. 여기서 양자는 서로를 살려내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편에도 죽음과 패배가 찾아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이런 순간을 맛보려면 살림의 신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살림의 신비를 아는 사랑은 어떤 것도 도구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존재를 살리는 일에만 열성적으로 몰두 합니다.
조금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징진규는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의 이야기를 직접 예로 들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진규의 시에서 작품 속의 농사꾼인 아우와 이 시의 작자인 시인은 모두 햇볕과 상생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햇볕은 아우와 시인을 살려내고, 아우와 시인은 햇볕을 살려냅니다. 그들 양자는 아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완벽한 합일의 관계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 속에서 아우와 시인은 햇볕을 통하여 살림의 일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햇볕의 힘을 빌려 무엇을 도구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도구화란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존재를 죽은 존재처럼 만들어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와 시인은 모든 존재를 살려내고 그들과 생생한 교감의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이때 햇볕은 물론이고 아우와 시인 자신도 살림의 일에 참여하는 신비로운 존재가 됩니다. 구체적으로 아우와 시인은 햇볕을 통하여 고추도 살려내고 참깨도 살려내고, 젖어 있는 마음도 살려내고, 추운 사람도 살려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습니다. 이처럼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햇볕과 더 오래, 더 깊이, 상생의 관계를 맺고 싶다는 소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더 많은 존재를 살려내고 싶다는 소망이 숨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은 어떤 존재와 상생이 관계 속에서 살림의 일에 참여하는 것일 터입니다. 그곳에는 탐욕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쟁과 도구화로 인한 폐해가 끼어들지 않습니다.
빌딩 숲으로 변한 도시에서 , 우리는 햇볕을 제대로 느끼며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햇볕을 느낀다 해도 그것은 아주 기계적이고 도구적이며 제한적입니다. 저는 정진규의 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속의 아우나 시인같은 햇볕을 속깊이 느끼려면 우리의 삶이 자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하고, 생명 속에서 생명을 만나고 키우는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삶은 너무 도구화된 인공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즉시 여러분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은 고사하고 살아 있는 것조차 거의 없는 환경 속에 여러분들이 끼여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저의 집을 한번 둘러봅니다. 저의 집에 자연이라곤 자연답지 않은 베란다의 화초 몇 분 이외에 눈에 띄는 게 없습니다. 생명 또한 저의 가족 세 명 말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진규의 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속의 아우나 시인 같은 감정을 맛보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고 시간이 나시면, 들로 산으로 나가봅시다. 그곳에 가서 햇볕을 느껴봅시다. 그 햇살과 더불어 살림의 일에 참여해봅시다. 또 다시 기회가 되거들랑, 늦가을 들판으로 나가봅시다. 그곳에 갓 늦가을이 햇볕을 느껴봅시다. 그리고 그 햇살과 더불어 살림의 일에 참여하는 기쁨과 신비를 느껴봅시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3.
첫댓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기막힌 시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