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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Freedom)'
진정한 아나키스트[anarchist] - 국가의 권위를 부정한 최초의 자유인은 다름 아닌 예수였다. 로마제국은 거대한 노예국가였고, 자유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자유(Freedom)'는 인류의 천부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창조물일 따름이고, 늘 권력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로마제국은 거대한 노예국가였고, 자유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자유란 노동과 행동의 제약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의미했다. 자유롭다는 것은 귀족적 태생이나 배타적인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의미였다. 개인이나 가문에 부여되던 자유의 특권은 중세 후기 특정 도시에 부여되었다. 그에 따라 도시민은 권력에서 일정한 면책특권을 부여받았다.
오늘날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영국의 ‘자유대헌장’ 역시 보편적인 자유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주와 귀족 사이의 이권다툼의 산물이었다. 일부 부유하고 힘 있는 신하들이 왕의 미약함을 틈타 왕에게서 특권을 뺏어낸 것이었다. 거기에는 미심쩍은 존 왕의 국왕 자격, 막대한 봉건 귀족들의 재력, 인내심을 한계점까지 몰고간 십자군 원정의 고비용, 기사들의 군복무 필요성, 점증하는 내란의 위협 등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군주는 마음대로 세금을 거둘 수 없게 되었고, 귀족들은 왕의 행동을 구속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대헌장에는 만약 왕이 주어진 권한을 넘어 권력을 휘두를 경우 그것은 위법이 되고, 귀족들은 왕에 대항해 무기를 들 권리가 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좀더 극단적인 자유의 추구는 아나키즘에서 볼 수 있다. 권력이 소수에게만 자유를 부여한다는 사실은 모든 권력을 철폐해야 진정한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아나키즘을 낳았다.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아나키즘의 주요 공격 대상은 국가와 종교의 권력이었다. 국가의 권위를 부정한 최초의 자유인은 다름 아닌 예수였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는 로마정권을 타도하고 그 하수인으로 고위직과 성직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축출하기 위한 게릴라전이 활발하던 때였다. 식민지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 관료의 타락, 강제 부역, 인플레이션에 짓눌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세의 구원을 약속하는 예수의 교리는 민중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가 처형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황제의 상에 대한 숭배 거부였다. 예수는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고 추종자들에게도 황제 숭배를 거부할 것을 종용했다. 그것은 로마의 법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 혹은 ‘유대 왕’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당국은 예수를 식민지 해방을 위한 지도자로 의심했다. 이에 헤롯 일당은 예수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적법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는 동전 하나를 가져오게 한 후 반문했다. “이 화상과 글이 뉘 것이냐?” 헤롯 일당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두상은 제국에서 통용되는 모든 돈은 가이사의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예수는 간단히 대답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줘라.” 이 한마디에는 절묘한 면이 있었다. 그것은 헤롯을 안심시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예수가 왕위 찬탈이나 식민지 해방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의중은 황제의 권한을 한정짓고자 하는 데 있었다. “황제의 권한은 이것이 전부다. 그러니 나머지의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권리가 없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다.” 이것이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심문할 때, 예수의 대답은 보다 분명한 의중을 드러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것은 현실 권력에 관심이 없음을 표명하는 동시에 신민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자유란 세속적 조건에 얽매인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자유란 무한히 커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자유’를 맛보지 못한 노예들의 불행한 의식상태에서 자유가 파생하기는 힘들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찬탈한 왕정 시대의 반역자들은 ‘죽 쒀서 개 준다’는 속담처럼 어렵게 뺏은 권력을 기껏해야 왕의 먼 친척에게 양도하기 일쑤였다. 반역자들은 그 외의 다른 형태의 반역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역은 ‘권력은 세습된다’는 관념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간혹 자유로운 이성을 가진 이단아가 등장하기도 했다. 청나라 말기의 혁명가 담사동은 <인학>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인류의 초기에는 본래 군주나 신하라는 구분이 없이 모두 같은 백성이었다. 백성들은 서로 다스릴 수도, 또 다스릴 틈도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다 같이 한 사람을 뽑아서 군주로 삼았다. …..’함께 뽑았다’는 것은 또한 함께 없앨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성을 주기은 이치만 있지 군주를 폐하는 이치는 없다. …..충이란 원래 마음속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군주가 오로지 악정을 베풀면서도 도리어 충성으로 자신을 섬기게 하니, 걸왕을 돕고 주왕을 돕는 꼴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반역을 꾀하다 결국 사형당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권위가 있는 곳, 그곳에는 자유가 없다.”며 모든 권위에 맞서 싸웠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절대왕정을 무너뜨렸던 그들은 혁명 이후, 다시 사회주의자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새로운 절대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때 동지였던 사회주의자들의 아나키스트 탄압은 절대왕정 못지 않게 가혹했다.
1918년 7월,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그룹에서 활동했던 네스토르 마흐노는 “과거의 예처럼 새로운 주인에게 우리의 운명을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바로 우리 손 안에 쟁취하기 위해, 또 스스로의 의지와 진실의 개념에 따라 우리의 생을 영위하기 위해” 볼셰비키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의 목적은 우크라이나 지역에 무정부주의적인 자유 코뮌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 11월 볼셰비티 정부의 본격적인 탄압에 의해 마흐노주의자들은 섬멸되었다. 마흐노는 파리로 망명하여 노동자로 비참하게 살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21년 3월 크론슈타트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었던 발틱 함대의 수병들이 볼셰비티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현재 소비에트는 노동자, 농민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한때 동지였던 그들을 혁명의 적으로 몰아붙여 무차별 학살했다.
한때 진보진영 내에서 사회주의 그룹보다 훨씬 광법위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아나키스트들의 그 사상적 특성 때문에 중앙집권적 상명하달 체계를 가지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사불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자들과의 경쟁에서 자유와 자율에 기반한 아나키스트들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자유는 권력을 토대로 성립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권력이 많은 자는 가장 자유로운 자였다. 그러나 철학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아이러니를 낳았다. 권력을 혐오하는 은자들에게 권력은 자유가 아니라 구속으로 가가왔던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권력은 ‘자유로운 자유’도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유에서 벗어날 자유’도 제공한다. 플루타르코스의 말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포스 왕이 허락할 때만 먹을 수 있었지만, 디오게네스는 아무때나 원할 때 먹을 수 있었다.” 권력의 무거운 책임감은 부담스러운 것이며 때로는 너무 위험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권력을 싫어하기도 한다. 권력의 쟁취와 거부는 자유에 있어서 정확히 양자택일은 아니다.
콜럼버스,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같은 모험가들은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을 필두로 유럽의 식민지 시대가 개막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은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구속의 상징이 되어야 마땅하다. 식민지 시대에 인도를 사실상 지배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깡패와 건달로 구성된 회사였다. 그들은 군대를 모집하고 배를 무장하고서 대규모 해적행위를 일삼았으며, 세월이 지난 후 부유한 노신사가 되어 영국으로 돌아갔다. 1519년 아스텍 문명을 붕괴시킨 헤르난 코르테스 일당도 스페인의 건달들이었다. 600여 명의 병력이 200년 역사의 제국을 일시에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어이없게도 그들 몸의 병원균이 오랜 고립으로 면역성을 갖추지 못한 아스텍인을 무차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세균전의 승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인들이 부르짖은 ‘자유’는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된 하나의 레토릭에 불과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의 대결구도 속에서 상황에 따라 군주제, 민주주의, 자유무역, 노동조합, 국가의 경제 개입, 복지 국가 등에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했다. 흔히 자유의 확대로 해석된 ‘작은 정부’는 국민의 자율성과 자유의 신장을 의미하기보다는 기업이나 자본의 이익이 커진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와 불평등을 은폐시키려는 레토릭에 불과했다.
민주사회에서의 자유란 사실상 유권자가 가지는 선거권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자유란 조셉 슘페터의 말처럼 “대개 진정한 의지가 아니라 정치가들에 의해 가공된 의지”였다. 루소의 “일반 의지는 투표를 함으로써 밝혀진다.”는 가정을 따르는 현대정치는 무엇보다 가장 자원을 필요로 하는 소수집단을 사실상 거부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들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자극을 거의 받지 않는 반면, 정치적 결정에 좌우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향을 미칠 자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며 그 역설적 비극을 지적한 바 있다.
자유는 단지 외적 강제와 억압이 없는 것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의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자유는 무엇보다 사생활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실행된다. 사생활은 다른 사람들이 나만의 시공간에 침입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것에는 비용이 든다. 사생활에는 자기만의 방, 담이 있는 정원, 은거지, 울타리 쳐진 숲같이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공간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언제든지 점유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사생활이란 결국 나머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을 요하는 목표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선택할 수 없고 이것과 저것에 대해서만 선택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호하다. 예를 들어 거대한 도시생활에서 늘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차를 몰고 갈까, 걸어갈까를 택할 수 없다. 다만 차나 전철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의지의 자유가 상실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성적 자유와 소비의 자유, 변덕의 자유에 기대고 있다. 요새 젊은이들은 어떤 행동을 하면서 “이것을 왜 해야 하는가?”를 자문하지 않고, “왜 그러면 안 되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체의 의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우리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무의식과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난하게 자란 사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삶, 다년간 알코올 중독으로 음주가 체질화된 사람, 환경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사람도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진실로 주장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있다. 1970년 네덜란드 정부는 마약을 합법화하고, 마약 상습자들이 의료진의 감독 하에 센터에서 필요한 만큼의 마약을 무료로 받을 수 있게 했다. 정부는 이런 조처가 마약 상용자들이 마약 상인에게 노예화되어 있는 것, 터무니없이 비싼 마약 가격, 그리고 마약 거래를 둘러싼 폭력적 범죄들을 줄이고 나아가 마약에 대한 욕망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도시의 센터로 마약 상습자들이 무섭게 몰려들었으며, 암스테르담은 마약의 본거지가 되었다.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자유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구속이 될 수도 있다.
자유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슈티르너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독일 청년헤겔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슈티르너는 개인과 사회를 아예 대립관계로 규정하고 개인의 절대자유를 주장했다. 사회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결합체이며, 그것은 언제나 전체의 이익을 위해 나의 충성과 희생을 요구한다. 선, 신, 인류, 진리, 휴머니즘, 정의, 조국 등 모든 사회적 규범과 가치는 위선이며 부정되어야 한다. 애타적인 행동도 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것은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그는 “내가 주인의 노예이기를 거부할 때, 나 자신과 이익만을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유로운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이해에 의해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유란 타인과의 소통 단절과 전적인 고독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유란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의 기원은 자유롭지 않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속에는 절대적 의지 또느 자유의지는 없다. 오히려 마음은 이것 또는 저것을 바라도록 원인에 의해 결정되어 있고, 이 원인은 또한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었고, 이 원인도 또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러한 일은 무한히 계속된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은 알지만 그 욕망의 동기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욕망의 자유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일 뿐 사실이 아니다.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는 허무주의 철학을 전개했던 에밀 시오랑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JOUNGUL(좋은글닷케이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