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어린이날이 되면 우리나라에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선생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어른들부터 어린이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방정환 선생이지만 사실 그 분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1899년11월 19일에 태어났고 1931년 7월 23일에 별세해서 우리 나이로 3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死因)은 과로와 고혈압이라고 합니다.
1922년 4월에 소년운동단체와 신문사 등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스물네 살 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이 5월 1일이었는데 노동절과 겹친다고 5월 5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 후, 어린이날은 여러 변화를 겪다가 1973년 3월에는 법정기념일로, 1975년 1월에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린이날이 방정환 선생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라는 말은 그분이 처음 썼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해 그분만큼 애를 쓴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래는 방정환 선생에 대한 『나무위키』의 내용입니다.
<1919년, 손병희를 도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넣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이때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도 있는데, 당시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옥사까지 했으니 고초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부터 방정환은 위험 인물로 분류되어 고등계 형사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1919년 말 도쿄에 유학, 도쿄연수(硏修)영어학교에 입학해 소정의 과정을 수료했고, 1920년 토요대학 철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토요대학 철학과에 다닐 때 마해송, 윤극영 등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김기전과 함께 어린이날을 만드는 등, 활발한 어린이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도쿄에 천도교청년회 지부를 설립해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 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했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다. <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왕자와 제비, 잠자는 왕녀 등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다작을 번역하면서 본인이 소설도 많이 썼다. 소파,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 등등 여러 가명을 썼는데, 이는 잡지사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정환은 또한 신문과 잡지에 수필도 많이 기고했다. 그의 글을 보면, 1920년대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문체가 굉장히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김기전과 함께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상하 관념과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문화 아래에서 사회적 약자들인 어린이들이 천시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실제로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후로도 '아기별 삼형제' 등의 동요를 짓고 추리소설인 <칠칠단의 비밀> 등을 집필했다. 외국 동화도 계속 번역했고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야기하는 재주가 뛰어나서 동화구연을 하러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매년 70회, 통산 1,000회 이상의 동화구연을 했으며, 당시로서는 시골인 경상남도 양산시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당시에도 죄수들에게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해줘서, 슬픈 이야기를 하면 몰래 이야기를 듣던 간수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나중에 방정환이 석방될 때, 다른 죄수들과 간수들이 그를 못 가게 막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강연에 항상 참석했던 고등계 형사도 최루성 동화구연에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강연을 듣다 보면 자기도 자지러지게 울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와사부로는 방정환을 이렇게 평가했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그놈이 내지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 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1930년대 중앙유치원 사범과(現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유아교육과)에서 아동문학을 가르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본디 허약한 체질이면서 너무 열성적으로 활동한 탓에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는데, 평소 폭식, 골초 등 나쁜 생활 습관이 있었던 것까지 더해 특히 1931년부터 지병인 고혈압과 신장염이 악화되었다.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 창간으로 인해 <개벽>의 판매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빚을 지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겹친 데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해 바쁘게 활동하다 보니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결국 1931년 7월 9일에 사무실에서 코피를 쏟으면서 쓰러졌고, 입원한지 2주가 된 7월 23일, 향년 31세라는 너무나도 젊고 아까운 나이에 고혈압과 신장염으로 별세했다.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 기준으로 봐도 비만이 심한 편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신체 사이즈에 관한 기록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키는 약 178cm정도인데 몸무게는 120kg대에 해당했다.
본래 방정환은 몸이 허약한 편이었는데, 장인인 손병희가 자신의 딸과 함께 처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을 당시만 해도 마른 체형이었던 사위를 보고 안쓰러웠던 나머지 보약을 해먹이고 그 후로도 방정환이 처가를 찾을 때마다 고기반찬 같은 기름진 음식을 자주 권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곧 비만이 심해진 방정환은 맞는 허리띠가 없었고 땀도 많이 흘려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늘 닦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전략) 우리 사(社)에 있는 이의 이야기를 또 해서 미안하지만은 방정환 씨는 빙수를 어찌 좋아하는지 여름에 빙수점에서 파는 빙수 같은 것은 보통 오십 그릇은 범 본 사람의 창(窓) 구멍 감추듯 하고 설탕은 또 좋아하야 십오 전짜리 냉면에도 십 전짜리 설탕 한 봉을 넣지 않고는 잘 못 자신다. 그와 친한 분은 누구나 조심하십시오. 약간 돈 가지고 빙수나 냉면 내려다는 큰 코 다칠 터이니.....(후략)>『나무위키』에서
위인은 여러 분야에 많고, 또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낸 위인도 많지만 32세의 짧은 생애에 대한민국의 어린이를 위해 방정환 선생만큼 애를 쓴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정환 선생이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고, 당시 시류에 따랐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분명한 것은 방정환 선생은 소위 친일파가 아니었고, 시대를 앞서나갔던 선각자로 특히 대한민국의 어린이를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다 바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