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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근거지와 선교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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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근거지와 선교지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오늘의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행적을 짧게 소개하는데 이 엄청난 선교를
이렇게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듯이 소개해도 되는지 생각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 문장으로 요약된 것 안에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여기에 바오로 사도의 선교 Pattern 곧 형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에서 얼마 동안 지내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안티오키아가 바오로 사도의 선교 근거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14,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다."(15,35)
"바오로는 카이사리아에 내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에 인사한 다음,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18,22)
저는 여기서 근거지와 선교지 관계를 보고자 합니다.
안티오키아가 근거지라고 함은 선교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지가 없다면 그래서 한 곳에서 줄곧 머문다면
그곳은 근거지가 아니라 주거지거나 고향이겠지요.
프란치스칸인 제겐 이런 삶이 오랜 꿈이고 영원한 꿈입니다.
근거지는 있되 어디고 눌러 앉아 살지는 않는 선교의 삶 말입니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치라"는 소명을 프란치스코가 받았고,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같은 소명을 그 후예인 저도 받았음을 깨달은 이후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저는 무작정 목포 북교동 성당 신부님께
전화를 드려 본당에 속한 섬에 가서 한동안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그것이 1980년대 후반이고 간 곳은 신안군의 자은도라는 작은 섬이었으며
그 첫 시도가 발전한 것이 지금의 저희 순회 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 이후 교회는 점차 순회 교회에서 정착 교회가 되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교회 안에 다시 순례자와 나그네 정신을 불어넣었으니
이것을 교회는 정주 영성과 다른 탁발 영성이라고 일컫습니다.
아무튼, 다시 얘기하면, 근거지가 있다는 것은 선교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근거지에 한동안 머문 바오로 사도는 이제 3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갈라티아와 프리기아 지방을 차례로 거쳐 갔다고 사도행전은 얘기하는데
차례로 갔다는 것은 이전에 늘 가던 선교지가 있고 차례가 있었다는 표현이고,
실제로 그 이전에도 이 지방을 순회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습니다.(16,6 참조)
이렇게 떠나가서 바오로 사도가 한 것은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는 것입니다.
직접 선교도 하지만, 그곳 사람들을 제자로 키워 선교하게 했다는 표시인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 사도가 제자로 키운 것은
그들을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키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 우리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구나 자기 선교지가 있어야 하고
"가서" 주님의 교회를 재건하라는 소명을 받은 프란치스칸은 더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안주처가 아니라 근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몸으로 달려갈 선교지가 없다면 마음의 선교지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나를 찾는 주변 사람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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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여기에서,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드러내줍니다.
먼저,“예수님의 이름으로”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순위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필요에 따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의에 따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이다. 기도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리고 품고 있는 관심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필요를 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기도하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욕망의 해석자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기도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간청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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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론 하느님 앞에 철부지이니 떼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하면 좀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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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지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 꼬마 아이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동차 장난감을 계속 움직이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신부님도 한 번 해볼까?”하면서 자동차를 뒤로 당겨 앞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해달라며 제게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2~3번 연속해서 해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달라며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했으니까 이제 그만할까?”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경우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움직임 자체를 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는 것이고, 어른은 알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움직임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예도 볼 수 있습니다. 화가는 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그렇게 오래 볼 수 없습니다. 화가는 그 모습의 본질을 계속 찾으며 보는 것이고, 일반 사람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 있고,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모습만 보면서 자기 판단으로 단정 짓고 맙니다. 여기에 부정적인 판단이 등장하면서 자기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겉으로만 대충 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은 분이 될 것입니다. 기도, 묵상, 미사, 봉사와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하기 싫어하고 지루해야 하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16,23)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일을 선포하실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하나를 보면서, 주님의 본질을 보게 되고 새로움을 찾게 됩니다. 계속 주님께 머물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시선은 과연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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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 유일한 행복이다(마리 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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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9년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당시에는 아는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퀸즈 성당의 신부님들은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팬데믹 기간에 매주 나눔을 하였고, 지금도 나눔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캠핑도 같이 다녔습니다. 퀸즈 성당의 봉사자들은 매달 우편물 작업을 도와주십니다. 부르클린 성당의 신부님은 매주 미사를 가는 저를 위해서 기꺼이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토요일에 가서 하루 머물기도 하고, 일찍 가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늑한 방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LA에도 제가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부부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명예기자로 인연을 맺었지만, 지금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였던 제자들처럼 제가 LA로 갈 기회가 있으면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작년에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LA에 만들었습니다. 기꺼이 사무실을 내어주고, 지국장을 맡아 주신 형제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제가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본당에서의 사목경험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발표를 듣고 교구 사목국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첫 본당신부를 마치고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업무를 맡았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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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것을 얻기 위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요즘들어 고독을 못이겨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가난 때문에 노인들의 강력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마음의 중심을 잃고 또 받아들여지는 따뜻한 품이 그립고 안타까운 사회상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주시리라고 말씀하신다(16,23). 그분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계신다. 제자들의 어려움과 문제, 고통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고 청함으로써 받아들여져 풀린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믿는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16,27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께 많은 것을 청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리라는 이해불가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기소침해 있던 그 시간까지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16,24).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는 지상 생애 동안에는 그분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속해 있음을 고려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는 늘 아버지와 일치된 행동을 하신 “예수님을 대신해서”라는 뜻도 지닌다. 이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아들과 하나 되어 아버지께 향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결속관계 안에서 청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무엇을 청하든지 예수님의 전인격을 받아들여 그분의 마음과 생각, 느낌과 몸짓으로 청하도록 하자!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16,23)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바친 제자들의 기도와 청을 틀림없이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 여러분은 내 이름으로 청할 것입니다.”(16,26)라고 하신다. ‘그 날’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를 가리킨다. 부활 이후에는 제자들이 아버지께 직접 청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랑을 믿고 맡기며 청할 때 “기쁨이 넘쳐 충만해질 것이다.”(16,24)
이제 우리 신앙의 방향과 자세를 되돌아보자. 나는 일상의 삶을 어떤 존재와 끈을 맺고 살고 있는가? 무엇을 하든 예수님과 깊은 결속 관계 속에서 그분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의식을 갖고 하는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살고 숨쉬며 증거하는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부활하신 그분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그분을 드러내고 있는가? 기쁨이 충만하여 신명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그늘과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보며 나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가?
오늘도 이 싱그러운 녹음과 봄 향기가 모두에게 생명의 호흡이 되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생명과 관대함과 정의와 사랑의 지혜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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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오늘의 말씀에서 묵상해야 할 화두는 복음에서는 기도요, 독서에서는 지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네 신앙 현실의 경험과 다소 아니 어쩌면 한참 동떨어집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해 오고 있지만 기도하는 것마다 들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기도가 그분의 기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기도해야 당신 귀로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삶으로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으면 즉시 알아들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마음에 그려지는 바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마태 6,8).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여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마음에 그려지고 삶에서 우러나왔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삶에서 기도와 동떨어진 채 간절한 마음도 없이 입으로만 기도하는 수가 많은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 이해와 우리의 기도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진정성이요 실천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부터 청하되(마태 6,33), 기도하고 나서는 그 기도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24). 이처럼,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기도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을 정리해 놓은 인식 체계가 성경이나 교리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는 세상 지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서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는 힘과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영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으로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기 어렵지만, 영적인 지식은 자기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의 동업자이자 동료 선교사가 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가 아폴로라는 설교가를 만나서 한 수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평신도 부부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은 성경에도 정통하고 예수님에 관한 일들까지도 정확히 가르쳤던 직업적인 설교가를 가르쳐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그 부부는 바오로로부터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에 관한 초대교회의 체험과 전승을 전수받을 수 있었지만, 아폴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도 지도자 역할을 한 선비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약종은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는데, 그는 강학회에서 교리에 통달했던 이벽으로부터 직접 천주교 교리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이벽이 지은 ‘성교요지’와 한역서학서들을 참조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기도 마재 교우촌에서 사귄 황일광 시몬이라는 천민 출신의 교우로부터 민중 언어는 물론 그에 담긴 민중의 심성 속에 전해져 내려오던 전통적 신관을 배워서 이 교리를 담아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신화되어 버린 민간 무속에 대하여 영적인 식별을 정확히 해 냈으므로, 교우촌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혔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신자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한 후에 교리서 저술을 맡겨서 ‘주교요지’가 쓰여지게 되었는데, 평신도로서 정약종이 쓴 이 책이, 프랑스 선교사 마이야(馮秉正, Joseph Marie Anne de Moyriac de Mailla)가 지은 ‘성세추요(聖世蒭蕘, 대중교리서, 1733)’라는 한역교리서보다 낫다고 주 신부도 평한 바 있습니다.
박해가 종식된 직후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 보두네(Baudounet, François Xavier, 1859-1915) 신부는 호남 지방의 교우촌들을 둘러보고 나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이런 보고서를 써 보냈습니다. “새로 입교한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1889. 4. 22).
‘주교요지’를 통해 얻어진 교리 지식을 실천한 결과가 이렇듯 놀라웠습니다.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나누는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어려운 이웃은 물론이고 부모 잃은 어린이에게는 대부(代父)와 대모(代母)가 되어 힘써 돌보았으며,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세(代洗)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지니고 있던 교리 지식의 실상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세상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을 살았던 영적인 지식이었으며, 공동생활 양식을 실천한 인간관계의 지혜였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삶과 마음으로 바치는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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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기쁨 충만한 삶-
기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기도는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나이 40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 싶으면 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도 평생공부입니다.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이듯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정말 소원이 무엇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주저함없이 기도 잘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겸손히 평생 배워야 할 기도요, 무엇보다 기도의 필수 전제 조건은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바로 오늘 본기도가 청원기도의 모범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지요! 한마디로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정말 이런 기도는 그대로 응답됩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오래전 개신교 목사님과 주고 받은, 자주 인용했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일언지하에 대답했고 내심 흡족했습니다. 지금도 묻는 다면 역시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삶이었는지, 참 성인의 삶이었는지, 참 행복한 삶이었는지는 죽음에 직면해서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환상이나 거품이나 거짓은 말끔히 걷히고 진실만이 환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착한 자매들이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을 때는 답이 생각나지 않아 대답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먹을 것을 묻습니다만 저는 이런 경우 “자매님을 좋아합니다. 하느님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에둘러 대답하곤 합니다. 언젠가는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부끄러워하는 분에게 주신 글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 좋은 분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좋은 분 자체가 최고의 선물로 생각됩니다. 아마 하느님도 그러할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하여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도 생각납니다. 한 수사가 문틈으로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서 참 잘 썼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당신 외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만으로 족합니다!”
요지의 문답이요, 수차례 인용한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저에게 청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저 역시 주님이신 당신을 한결같이 간절히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 하나뿐이겠습니다. 당신의 전사戰士답게 죽는 그날까지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하다가, 즉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는 것뿐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미사와 강론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며 걷는 것 하나뿐이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다 아시는데도 청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다 보면 필요한 것 한가지는 주님뿐임을 깨달아 알 것이며, 사랑의 눈만 열리면 다 받은 것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여기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이겠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항구히 간절히 사랑하는 것 하나만이 참 필요한 소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이래서 기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습니다. 제멋대로, 제생각대로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요,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의 이름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하는대로 받을 것이며 무엇보다 충만한 기쁨이란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제가 볼 때 사도행전의 혜성같이 등장한 신비의 인물, 아폴로도 성령께서 교회에, 바오로에게 보내 주신 뜻밖의 기쁨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며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며 공공연히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니 교회에, 바오로에게 천군만마의 역할을 하는 참 좋은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복자福者도 부자富者도 자유인自由人도 아닙니다. 마음은 참 어둡고 허전할 것입니다. 참으로 꼭 필요한 주님만을 청할 때 기쁨과 평화, 희망의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주님 자체가 기쁨이자 평화요 희망이기에 기쁨 충만한, 희망찬 평화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내 이름으로 청하라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참으로 우리가 해야 할 바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는 복福된 운명의 인생 여정임을 깨닫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며칠전 나눈 짧은 시를 또 나누고 싶습니다.
“꽃은
다 예쁘다
사람도
다 예쁘다
웃는 얼굴은
다 꽃이다
주님은
다 예뻐하신다.”
그러니 용기를 내시고 주님 사랑에 더 박차를 가하시기 바랍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랑도 평생 노력이요 평생 훈련입니다. 무엇보다 참 필요하고 참 좋으신 주님을 사랑하여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참 좋은 선물이신 주님을 모시는 은혜 충만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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