頭崙山大芚寺, 頭輪山大興寺, 大芚山大芚寺, 大芚山大興寺,
일주문부터 경내의 현판까지 모두 제각각이다.
어느 것이 정답인가.
참으로 혼란스러운 이 문제를 4지 선다형으로 풀어볼까.
대둔산의 본디 이름은 한듬산이란다.
크다는 뜻인 '한'의 한자 '大'와 언덕, 둥치, 덩어리, 등의 뜻이 있는 '듬'의 이두(吏讀)식 표기로
한자 '芚'을 차용해 대둔산이 되었다니까.(둔은 芚이건 屯이건 개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북 완주군과 충남 금산군, 논산시에 자리한 대둔산과 동명이산이며 다같이 도립공원이다.
하나, 우리의 성산 백두산과 중국 고대의 성산 곤륜산(聖山昆崙山)의 차자합성(次字合成)이라는
이름 두륜산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중국 곤륜산맥이 한반도로 넘어와 백두산을 일으킨 후 백두대간을 타고 남하하다가 분기한 호남
정맥에서 다시 갈리어 남서단 토말의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에 생성한 산이라 두륜산이라 한다는
것이 억지같지 않은가.
동의한다 해도 각기 다른 뜻인 "輪'과 '崙'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쨌건, 문화재청이 사적.명승지로 지정할 때 대둔산이라 한 점을 고려해 나는 대둔산이라 쓰고
부르려 한다.
삼산면 구림리 산8-1 일대에 위치한 사적 및 명승 제 9호인 조계종 22교구 본찰은 대둔사인가
대흥사인가.
<....두륜산은 해발 703m로 예로부터 큰 언덕(산)이란 뜻으로 '대듬' 또는 '한듬'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어귀에 위치한 대둔사를 '한듬절'아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흥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최근에는 대둔사로 부르고 있다....>
사찰 어귀에 서있는 안내판의 설명이다.
만일, 일제의 압력으로 대흥사가 되었다면 촌각을 다퉈 본래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
경내의 서산대사(表忠祀)께서 눈을 부릅뜨고 계시지 않은가.
가까이 자라는 서로 다른 두 나무가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 한다.
오랜 세월 함께 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根), 몸통(줄기)이 겹치면 연리목(木), 가지가 하나되면 연리지(枝).
일명 '사랑나무'인 연리목은 "부부 또는 남녀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산에서 이따금 보게 되는 이 연리목은 경남 함양의 상림(上林)숲에도 탐방객의 시선을 끌만하게 가꿔
놓았는데 유독 여기 대둔사에서는 '기원등'(祈願燈)을 비치해 놓고 구입하기를 종용한다.(아래 그림)
<오늘 등불 하나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속 깊은 사랑 변치 않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하나,
참 고운 등불 하나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상술(?)이 번뜩인다 하면 무례한 표현일까.
"감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있기"
노력하지 않고 득(得, 성공)을 바라는 것을 빗댄 속담이다.
삿갓을 거꾸로 입에 물고 있으면 떨어지는 감을 받아 먹을 수 있는 확률이 엄청 높아질 것이다.
은행나무 아래에 설치된 그물(아래 그림)이 지식은 배움의 산물이지만 지혜는 나이테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살생 금지의 계율이 엄격함에서 까닭을 찾을 수 있을까.
불교의 역사에는 어떤 명분을 내걸고 규모 큰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단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호국불교의 면모를 보였으며 고려때는 활동이 더욱 왕성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이조에서도 편법으로나마 활용하던 승군이 임진왜난을 맞아 꽃을 피웠다.
중심 인물은 휴정 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1520~1604)다.(아래 그림2)
왜구가 침략했을 때(壬辰倭亂)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제자인 유정(惟政四溟大師),
처영(處英雷默大師), 영규(靈奎騎虛大師) 등과 함께 의승병(義僧兵)을 진두 지휘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에, 선조는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
階尊者)라는 장황한 칭호를 내렸다.
훗날, 정조는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려고 사액(賜額)을 내릴 때 현판'表忠祠'까지 친히 썼고.(아래 그림1)
보물 제 1347호인 서산대사 부도(浮屠)와 眞化門(위 그림)
선승(禪僧) 초의대선사(草衣大禪師:아래 그림)는 다성(茶聖) 또는 다신(茶神)으로 알려진 분이다.
기원을 신라에 두고 있음에도 명맥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동다(東茶)를 예찬하며 다도(茶道)의 생활화를 꾀했다.
31송으로 된 그의 동다송(東茶頌)은 한국 차에 대한 예찬이라는 뜻이지만, 한국 토산차에 대해서는 6송에 불과하고.
중국 차를 언급하고 있어 유감이다.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인 그의 다도정신이 퇴색한 느낌이랄까.
'遊仙館"(아래 그림1, 2)은 여관이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여관들이 모두 이랬다.
이즈음의 민박, 여인숙, 여관, 모텔, 호텔, 펜션, 콘도 등은 격만 다를 뿐 모두 여관의 일종이다.
나는 아직도 이런 예스런 분위기를 선호한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 들렀을 때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5. 18광주항쟁 이전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
당시에 이 일대에는 이같은 여관이 즐비했으니까.
전남 어느 지역에 가나 5. 18항쟁의 상흔들(아래 그림3)을 볼 수 있다.
그만큼 거도적(擧道的)이었고 심각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표지판을 세울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염원한다.
5. 18항쟁이 거도적이었다면 항일 독립운동은 거국적이었다.
서산대사의 표충사 아래 심적암에서도 일제의 만행이 있었던 것.
황두일 의병장을 비롯해 60여명이 희생되는.
특히 해남지역에 무자비했던 것은 울돌목 콤플렉스(complex) 때문 아니었을까.
이중환이 전라도는 밟아본 적이 없다 했으니 전라도에 관한한 택리지는 무시해도 될 것이다.
대부분의 땅이 살 만한 곳이 못된다 했는데 '농촌건강장수마을'(삼산면 신흥리)이 버젓이 있으니까.
옛부터 효자, 효녀, 효부가 많이 나와 경로, 효친 시범마을이란다.
우스갯말이지만 노인이 살기 좋은 곳이 효자동이라잖은가.
나도 언젠가 여기 신흥리에서 살아볼까.
고백컨대, 나는 고산 윤선도(孤山尹善道1587~1671)에 대해서는 비호의적이다.
천재는 경솔하다던가.
우리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이며 문신인 그의 행적에는 그런 면면이 깔려 있다.
돈 키호테(Don Quixote)적인 면도 있다.
대군들(鳳林과 麟坪)의 사부(師傅)를 비롯해 중용과 유배가 반복된 까닭도 그렇다.
신하의 도리보다 일신의 안일에 치중한 듯 하다.
그의 시조들이 다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병자호란때의 그의 처신이나 효종의 하사품인 수원의 집을 해남(綠雨堂:아래 그림2))으로 옮기고,
보길도를 자기의 성(城)으로 만들어버린 것 등등.
나는 오히려, 그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恭齋尹斗緖1668~1715)를 꼽는다.
천재형 유전자가 해남윤씨 가문에 대를 이어가고 있는가.
천재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이 공재의 외증손자니까.
공재는 고산보다 다방면에 걸쳐 더욱 뛰어난 분이다.
서예, 회화의 대가일 뿐 아니라 천문 지리학, 금석학(金石學), 병서(兵書)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조 중엽의 화가 삼재(三齋:恭齋와 謙齋鄭敾, 玄齋沈師正)중 1인으로 그의 자화상(아래 그림1)은
국보 제 240호다.
해남윤씨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인 綠雨堂의 솟을대문 벽에는 尹亨植의 문패가 붙어있다.
실제 거주중인 14대 종손이란다.
우슬재(아래 그림1에서 마주 보이는 460m 만대산 자락에 위치한 '전남학생수련원' 우측 길의 고개마루)를
두고 터널(아래 그림2)을 뚫으므로서 해남의 관문은 우슬재에서 해남터널로 이동했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옥천땅이다.
옥천면소재지 ~ 강진길 18번국도상에 '萬義塚'이 있다.(아래 그림3)
정유재란(丁酉再亂:1597)때, 이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들과 왜군 간의 교전중 희생된 시신들의 무덤이라는
구전(口傳)에 따라 옥천면민들이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향사(享祀)를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갖는단다.
성산리(星山) 대교들(野) 일원에 6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1960년대의 경지정지사업때 3기가 소멸되었다고.
남아있는 3기도 분산되어 있는데 향토유적 제 6호로 지정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건물에 대한 보편적 상식을 깨는 건물(아래 그림1, 2)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우수영성당이다.
이 교회에 대해 아는 것은 전무하지만 파격임에 틀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