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명의 징검다리
김 선 구
터키의 이스탄불을 여행 중 먼저 이스탄불의 신시가지에 서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견학하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제국 시절에 세워진 호화로운 궁전이었다. 2층으로 구성된 건물은 파리의 르브르 박물관과 런던의 버킹검 궁을 모방하여 짓고, 오스만의 르네상스 양식이라 불렀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경관이 아름다운 보스포루스 해안을 끼고 바다너머로 아시아 대륙을 내다보고 있었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니 천정에 걸린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호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황제의 접견실이었던 방이었다. 750개의 장식등으로 이루어졌다는 이 제품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창문을 통하여 바람이 들어오면 크리스털 장식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궁전 내부는 이태리와 프랑스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들과 이슬람 전통의 고급카펫으로 장식 하고 있었다.
화려한 분위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어울리지 않은 장식물이 하나 보였다. 벽 한쪽에 걸려있는고장 난 벽시계였다. 시계의 침이 09시 05분에 멈춰져 있었다. 무슨 의미일가?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무스타파 케말이 사망한 시각이었다. 궁전 안에 있는 모든 시계가 그가 사망한 시각에 멈춰져 있다고 했다. 그는 터키공화국의 국부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군인출신의 정치가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패전국이 된 오스만 제국은 영토가 분해될 위기였다. 대부분의 국토가 연합국에 의하여 점령당했다. 그 때 조국을 수호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 무스타파 케말이었다. 전선에 나아가 터키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하고 독립전쟁을 진두지휘 했다. 1922년 8월 30일 아나톨리아를 침공한 그리스를 패퇴시키고 승리를 이끌어 내면서 모든 분쟁을 종식시키고 터키공화국 존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터키공화국이 출범 후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지만 케말 대통령은 때로 이 궁전에 머물면서 업무를 보았다. 후궁들이 살던 하렘 내 방 하나를 집무실 겸 관저로 삼아 가족도 두지 않고 오직 조국을 위해 헌신하다가 1938년 11월 10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전 재산은 국가에 기증 되고, 그가 사용하던 서재와 침실만이 보존되고 있었다.
터키공화국의 출범은 한 세를 풍미했던 오스만 제국이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무혈혁명에 의한 정권교체라 할 수도 있지만 제국이 관할했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고 제국의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공교롭게도 돌마바흐체 궁전이 있는 곳은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을 정복 할 때 해군이 정박했던 포구자리였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머드 2세는 군사들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허지만 금각만(Golden Horn)의 방어벽 때문에 해군의 공격이 쉽지 않았다. 금각만이란 이스탄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르는 바다로, 동로마제국 말기에 콘스탄티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 길이 800여 메타에 달하는 금각만의 입구를 굵은 쇠사슬을 설치하여 적함이 침입 할 수 없도록 대비해 두었다. 이에 작전을 바꿔 배 밑에 기름을 칠한 후 황소를 동원하여 배를 끌게 하고 해발 60메타 높이의 갈라타 언덕을 넘었다. 드디어 72척의 오스만함대가 언덕을 넘어 금각만 해협으로 진입했고,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말았다.
천년을 이어 온 동로마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로마의 멸망은 한 국가의 흥망을 넘어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중세기를 마감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천년의 왕국 동로마도 오백년을 이어온 오스만 왕조도 같은 운명을 반복했다. 제국의 흥망성쇠가 보스포루스 해 물결위에 여울져 지나갔다.
돌마바흐체 궁전 가까운 곳이 유람선들의 출발지점이었다. 우리가 탄 배가 북상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들어섰다.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사이 32km 해협을 2시간에 걸쳐 유람했다. 해안선을 따라 궁전과 요새 그리고 별장 등이 보였다. 오스만시절 왕족과 고위직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 외에 작은 숲과 찻집 카페 등이 즐비했다. 해상무역이 발달 하면서 보스포루스가 이스탄불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스탄불은 예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였다. 기원전 658년 그리스의 비자스왕이 보스포루스 해협 유럽 쪽에 식민도시 비잔티움을 건설했다. 이후 페르시아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어 동로마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오스만시대를 거쳤다. 그 과정 속에 비잔티움은 네오로마,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2700년의 긴 역사와 함께 동서 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일러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노천박물관“이라 했다. 이 노천박물관이 형성되기까지 보스포루스 해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시키며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분리시키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는 우리나라의 한강에 비견 할 만큼 좁은 물길이었다. 이 물길을 건너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이 있었고, 페르시아인의 서방진출이 있었다. “암소의 여울“이라는 전설을 지녔다는 이 작은 바다가 그리스시대 이래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2023. 10.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