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01
1월10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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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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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g09u5j95E4 (김정남 보니파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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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단순화시킬 때 명품이 탄생합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 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1주일 월요일 아침,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로 여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낼 이 하루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하루이기에 허투루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전례력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반복해서 축제를 되풀이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리들의 시간 속에 항상 현존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불멸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영원 속에서도 순간의 기쁨을 만끽해야겠습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첫사도단을 부르시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생업인 고기잡이에 전념하고 있던 첫 사도단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생계의 소중한 도구인 배도, 그물도 버립니다. 아버지도 삯꾼들도 뒤로하고 즉시 스승님을 따라나섭니다. 참으로 큰 버림이요, 큰 도전이요, 큰 투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버림’, ‘비움’이란 말이 재해석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들이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버리면 얻게 된다!”
기업 컨설팅 전문가들도 외칩니다. “장래성이 없거나 본질에 맞지 않는 사업은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의류 디자인 전문가들도 강조합니다. “옷을 디자인할 때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 때 좋은 디자인이 나옵니다. 단순화시킬 때 명품이 탄생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기본에 충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사도들께서 크게 버림으로 인해 크게 얻었음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들 삶의 목록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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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nRPi3dUo8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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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으면 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사람 낚는 어부는 세상에서도 존경받는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지금까지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선 ‘회개’란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에 대한 욕망, 육체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 힘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임을 깨닫고 방향을 새로운 욕망으로 트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나의 생존을 위한 욕망들’이기에 새로운 방향은 ‘이웃의 생존을 위한 욕망’, 곧 ‘사랑’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나를 위한 삶이 ‘땅’을 향하는 삶이었다면 하늘로 오르는 삶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노랑 애벌레는 고치를 거쳐 노랑나비가 됩니다. 노랑나비가 되니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봅니다. 모든 애벌레 속에서 자신과 같은 나비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애벌레들은 각기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노랑나비는 그들을 모른 체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비가 되었다면 나를 위한 삶이 가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더는 개인적인 욕심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면 남는 일이 다른 애벌레들도 나비가 될 수 있음을 알리는 일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일은 ‘선교’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례받으면 누구나 가정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선교사가 되어야 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내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도 그 영혼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우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세상에서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어른’ 프리미엄 특강쇼에서 김경일 인지심리학자는 전국 석차 0.1%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특징은 ‘착한 것’이라고 합니다. 2010년 EBS ‘학교란 무엇인가 – 0.1%의 비밀’이란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다급하게 김경일 교수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 프로그램은 공부를 잘하는 수재들의 비밀을 말해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 비밀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큐, 부모님 학력과 소득, 사는 지역, 특목고 여부까지 다 조사했는데 특징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김경일 교수는 이들이 분명히 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들의 일상을 찍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더 많은 친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물론이요, 공부를 아주 많이 못 하는 아이들에게까지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저의 지도교수님께서도 “구체적으로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주지 못하면 그건 네가 모르는 거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가르쳐주면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본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거나 혹은 알고 있는 것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외롭다, 외롭다’를 반복할 때 한 친구가 “예수님이 너와 함께 있는데, 뭐가 외로워!”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아이큐가 98이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그 친구에게 가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공부 못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등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친구는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착해지면 잘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디팩 쵸프라’도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너희는 남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게.” 남을 많이 도와주었던 큰아들은 인도에서 큰 사업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던 둘째는 아버지처럼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랑으로 살면 오히려 잘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고 한 것인데, 심지어 이 세상에서도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나머지도 덤으로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하는 자는 자기가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말도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교안은 초등학교 대상이었습니다. 이때 수녀님은 하나하나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쓰지 못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 소외된 이들을 도우려 하면 더 발전하게 됩니다.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만든 사람이 ‘스티브 사쏜’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코닥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필름 카메라를 설명하다가 그 필름을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는 순간에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필름을 보통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화학 반응하는 물질”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쏜은 “필름은 그릇이다”라고 말을 바꿔봅니다. 그렇다면 그릇이 굳이 필름일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이미지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만듭니다. 그렇게 조금씩 디지털카메라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0.1%의 비밀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라’로 가게 합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버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사랑해도 세상에서 저런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래야 성공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공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니까 성공하게 됩니다.
도와주다 보면 내가 공부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도와주려고 더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성장합니다. 진정한 사람 낚는 어부는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방법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은퇴했음에도 전세계 운동선수 선행왕 4위에 자리매김한 적이 있습니다. 2017년까지 기부액이 56억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이며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장학회 홍보위원이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믿으면 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 살기 때문에 하는 모든 일이 잘되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존경받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내가 주는 대로 되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되도록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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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4-20 : 첫 제자들을 부르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오로지 복음서에만 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 활짝 열렸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 쓰여 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신앙의 기쁨은 회개에 따르는 어떠한 쓰라림도 보상해 준다. 거룩한 양심의 기쁨을 바라는 사람은 회개의 쓴 맛을 삼켜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고 하신다. 예수님은 비천한 어부들 같은 가난한 사람들과도 어울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려 그들을 부르신다. 즉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장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다음, 그분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힘과 용기를 채워주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이 가르치셨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태 4,19)고 하시며 그들을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영혼을 쫓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거룩한 일꾼이며 교사로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셨고, 그들을 당신 가르침의 선포자라 선언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즉 방해가 되는 것은 “곧바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말씀이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고(19-20절) 마태오는 세관에서 벌떡 일어났으며(마태 9,9), 어떤 이는 믿음 때문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조차 남에게 맡겼다(루카 9,59-60).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어떤 핑계를 대는 사람은 없었다.
주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 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사도들이 했을까? 사도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분의 얼굴에는 그분을 뵙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재산과 허영심, 사회적 지위와 쓸데없는 욕심과 같은 온갖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배대오도 버리고 그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배마저 버렸다(20절) 마태오와 바오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무엇에도 집착이나 애착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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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20)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루카 17,21) ‘때가 차서’ 라는 말은, 드디어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회개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마태 7,21)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이렇게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일상의 회복’만 말하고 있지만, 신앙인은 ‘회개’를 말해야 합니다. ‘일상의 회복’만 말하는 것은 뒤를 돌아보면서 지나간 삶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만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냉철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코로나 전의 삶’이 반드시 되찾아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는가? 그게 정말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이었는가? 우리 교회의 모습과 신앙인들의 모습도 냉정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코로나 전의 교회의 삶과 신앙인들의 삶’이, 그것을 되찾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만한 것이었는가? 정말로 그렇게 ‘좋은 것’(선한 것)이었는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6-20)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 35절-42절에 있는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랬는데 요한의 인도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요한 1,35-40). 하룻밤을 예수님과 함께 묵은 다음에 그는 자기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요한 1,41-42) 그 일이 있었던 때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때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몇 달 동안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정식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도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 눈여겨보시다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시고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한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내 뒤를 따라라.”, 또는 “내 뒤를 따라 걸어라.”인데, “나의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 사는 어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 만들겠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를 버려두고’로 표현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어부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5,11)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모든 것’을 마치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버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은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어부라는 ‘직업’은 버렸지만, 집과 가족은 버리지 않았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던 인생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인생으로 자기 인생을 바꾼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도들처럼 인생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물론 사도들처럼 직업을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만일에 신앙생활을 현세에서 복을 누리기 위한 생활로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런 복이나 빌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딱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1코린 15,19) 지상의 인생은 잠시 거쳐 가는 ‘임시 천막집’일 뿐입니다.(2코린 5,1)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집에서 살기를 희망하면서 지상의 천막집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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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과 한반도’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이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면서 중국을 압박했지만 중국은 잘 견디면서 극복하였습니다. 미국이 생각보다 강한 나라가 아니었고, 중국은 생각처럼 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강점은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이 세계 최강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오면서 미국은 ‘Pax Americana를 벗어나 America First'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에서 미국의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강점은 넓은 땅, 많은 인구입니다.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혼돈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8년 개혁과 개방을 통해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지금은 미국 다음으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한반도가 있습니다. 2020년 미국 시민 20,000명에게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의 순위를 물어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나라는 국경을 마주하는 캐나다였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미국 시민들의 생각에는 32번째로 중요한 나라였다고 합니다. 미국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적성국가로 대하지만 어떤 면에서 북한은 미국에게 효자손이라고 합니다. 북한이 있기에, 북한의 도발이 있기에 주한미군의 주둔이 정당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고, 핵개발을 포기하면 미군의 대한민국 주둔에 대한 정당성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중국에게 북한은 혈맹이라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는 북한이라고 합니다. 미국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개발하는 탄도미사일과 핵무기이지만 북한의 태도변화에 따라서 중국에게 가장 큰 군사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대한민국에게 우호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의 돌발 상황에 대해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무역 상대도 중국입니다.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안다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면 기가 죽어서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고, 허세를 부리며 잘난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견 강국이 된 대한민국은 이러한 국제질서를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듯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 잡힌 외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처럼 대한민국의 문화와 경제력으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외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은 120개 국가 중에서 119번째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8위의 경제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기술은 결코 뒤지지 않는 중견 강국이 되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미국과 중국에게 할 말은 하는 태도를 가져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처한 상황을 잘 알아야 하고, 주변 국가들의 강점과 약점도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저는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길은 나의 거짓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낡은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과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단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3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3차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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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어제 우리는 주님 세례축일을 지내며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연중 시기의 전례 말씀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걸음을 따르게 합니다. 그 시작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첫 말씀이 그분 공생활의 모든 것을 함축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로,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사실이 바로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이는 천지 창조 때부터 계획되고, 많은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기다림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에 응답하는 우리의 태도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을 걷다가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믿음’은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본보기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부르심에 갈등이나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주저함이나 미련 없이 옛 삶을 포기하고(회개), 그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해야(믿음)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언젠가 우리도 베드로처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하신 말씀을 명심하며, 우리 앞에 놓인 연중 시기를 주님을 따르는 은총의 길로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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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호 다미아노 신부님]
<길을 얻었는가?>
예수님을 만났다 함은 길을 만난 것입니다. 참된 행복의 길, 평화로운 인생길, 조화로운 삶의 길입니다. 내 앞에 길이 있음은 내가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찾아야 할 삶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내게 생명을 주시고 손을 떼신 것이 아니라 매순간 삶을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외치기만 하지 않고 친히 그 영접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우리를 부릅니다.
어부는 고기를 잡고 농부는 곡식을 거둡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물자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들고 바다로 가고 소를 몰고 밭으로 가고 승용차를 몰고 회사로 갑니다. 한결같이 피곤하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출정입니다.
그러나 지고의 행복이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예수, 그분께서 행복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시고 직접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고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자는 자신에게 행복의 도구였던 어선도 그물도 버렸는지 챙겼는지 무상해집니다. 그분을 따라나서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럼에도 즉시 따라나서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까운 행복을 두고 왜 아직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까요? 움직이길 싫어하면서 건강을 위한 운동은 따로 하고 몸에 좋은 약과 웰빙 식품을 찾습니다. 버리고 떠날 수는 없을까요? 우리 ‘산 위의 마을’에서는 힘들여 노동하면서 소박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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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드러난 종말의 완성입니다. 종말은 저 멀리 떨어진 꿈 같은 시간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의 결단의 자리에 있습니다. 종말은 기다릴 실재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 그래서 급합니다. 우리의 결단이 급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을 학자들은 ‘급한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종말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재촉하는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에는 ‘곧바로’, ‘즉시’라는 표현들이 넘쳐 납니다. 제자들도 급하게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사는 고귀한 이들이 아닙니다. 고기 잡고 그물 손질하는 이웃집 아저씨들, 그들이 제자가 된 이유는 바로 ‘급하게’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종말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못나고 부족하여 내세울 것 없어도, 우리는 지금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르기 위하여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어찌하면 예수님을 더 잘 따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의 나로 여기에 머물러 있나?’ 하는 질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따르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제자 됨을 영웅담으로 분칠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지금,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금, 나를 다시 한번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에 저당 잡혀 살아가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신 분이시지, 우리에게 저만치 오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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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서경돈 알베르또 신부님]
<그리스도 가르침의 시작 - 회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하느님의 대변자가 가장 많 이 외친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의 백성이 예언자들 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공 생활을 시작하시며 세상을 향해 맨 처음 외치신 첫 일성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고 말씀하신다.
인류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래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회개를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개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회개는 삶의 중심, 생활의 기준 문제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어 그 중심과 기준을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둔다. 그래서 오해하고, 미워하고, 탓하고, 불평하고, 고통 받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하느님을 잊는다. 이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와 닿을 수 없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과 기준을 내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두는 것이 회개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우리에게 이것은 한시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보라,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미사에까지 와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사람관계, 어려운 일, 돈 문제 등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미사시간에 왜 그렇게 얼굴들을 펴지 못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지 못하시는 것이겠는가? 회개가 필요한 모습들이다.
주님께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맛들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의 중심을 주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용기도, 강복도 주신다. 믿음을 가지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회개를 종말 때까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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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고 난 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부 네 사람, 곧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17)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위한 나의 회개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회개'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 예수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에 대한 나의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어제로 성탄시기를 마치고, 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묵상하는 시기인데, 특히 모두의 구원을 위해 애쓰신 예수님의 땀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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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아>
마르코 1,14-20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이어라
사람아,
사람이 되어라
사람아,
사람의 사람이 되어라
사람아,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하여 사람아,
사람의 사람이 되어라
그리하여 사람아,
사람이 되어라
그리하여 사람아,
사람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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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형수에 관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형 집행 날짜를 모르는 사형수는 너무 불안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 자신의 죽을 날짜를 알고 있는 사형수는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을 반성하며 슬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삶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분명한 진실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죽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날짜를 몰라서 지금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곧 자기반성입니다. 자기반성으로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우는 삶이 아닌, 하느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듯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면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부모를 떠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세상의 일과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일임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보여줍니다.
불의의 사고로 하늘 나라에 간 언니의 유품을 정리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짐이 없어서 유품 정리할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정리할 짐들이 너무나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언니보다 훨씬 많은 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하나 사들였던 물건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정작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하지 않고 이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죽음 뒤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을 애지중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제일 중요한 것 같지만 죽음 뒤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과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힘센 분이시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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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합시다>
오클랜드 대학교 교수 피터 다우릭은 신체장애가 있는 청년들과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2주 안에 조립을 완수하는 조건으로 청년들은 두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집단은 자신의 작업 모습을 녹화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실수하는 장면이나 작업 속도가 더딘 장면을 지운 영상이었습니다. 다른 집단은 작업량이 10% 늘 때마다 성과보수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업 영상을 본 집단의 생산성은 15%, 성과보수를 받은 집단의 생산성은 3% 증가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최고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의욕을 얻어서 생산성 높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보다 최고의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의욕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하는 칭찬이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칭찬을 많이 해야 합니다. 칭찬이 전혀 없고 다른 이에 대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많은 공동체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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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나라 선포>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으로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으로 동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자기 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중심에 사랑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분은 부르시고 나는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드라마를 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아니, 얻었기 때문에 버립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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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하느님 나라의 삶-
어제 점심식사중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가장 좋은 복福이 뭐냐?’는 질문에 저는 식복食福이라, 인복人福이라, 천복天福이라 했고, 질문했던 수사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했고, ‘아 그렇구나!’ 공감했습니다. 삶은 변화입니다. 더불어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사자성어와 관련된 예화도 생각납니다.
현재의 지금이 전부가 아니니 상황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넓고 길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름대로 우리의 앞날을 예비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한나를 봐도 이해가 됩니다. 프닌나의 무시가 얼마나 마음 아프게 하는지, 남편 엘카나의 위로도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 한나는 슬픔을 하느님께 맡기며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와중에서 한나에게 사무엘 아들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슬픔중에도 해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가는 한나의 한결같은 인내의 믿음을 하느님은 마음 깊이 담아 두셨음이 분명합니다. 전화위복,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마디 안에 하느님의 개입을 감지합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오늘부터 연중시기의 첫날의 시작입니다. 제의 색깔도 백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고 성무일도 찾기도 아주 단순하고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끝은 시작이요,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도 연중시기 첫날 답게 참 신선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언제나 현실성을 지닌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지금의 때가 카이로스의 결정적인 유일한 때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그날의 때가 아닌 오늘 지금이 카이로스의 결정적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시간 낭비가 큰 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야흐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는 장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야 하고 또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결정적인 응답이 바로 우리의 회개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늘 끊임없는 회개요, 그리하여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늘 새로운 시작에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회개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우리와 함께 펼쳐가십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닌 구체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네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주님의 은총의 부르심이 바로 구체적 회개를 촉발 시켰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니 그대로 회개의 응답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의 출구出口’인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입니다. 우리의 경우 외적 환경은 그대로이지만 내적 삶의 자세가 바뀜으로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내적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니 바로 이것이 정주영성의 핵심입니다. 환경環境이 아닌 관점觀點이,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평생을 갈릴래아 호수에서 출구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어부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 마쳤을 것인데 주님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선택함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여정에 오른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요,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이와 흡사합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만나 회개와 더불어 세례를 받고 주님을 따라 나선 삶이 아니였다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상상이 안됩니다. 우연이 아닌 필연의 하느님 섭리이자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당신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이끄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는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자 부단한 엑소더스exodus, 탈출의 여정입니다. 한 두 번의 버림이, 따름이, 회개가, 탈출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작의 버림이자 따름이자 회개요 탈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늘 새로운 시작의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 탈출의 여정에 한결같이 항구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삶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하느님 나라의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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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z3994gm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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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 18)
복음은
따라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회개의 만남이
가장 큰
만남입니다.
버려야 따를 수
있는 믿음과
봉헌의 시간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첫걸음은 언제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삶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입니다.
따르면서
치유되고
따르면서
사람의 길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주님을 따라야
되찾게 되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버리고 따르는
관계의 여정입니다.
집착의 그물과
이기심의 배를
버리는 새로운
복음의 관계입니다.
회개의 관계는
복음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기쁜
첫걸음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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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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