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황인숙
어제도 그제도
고양이 밥 주지 말라고 시비 걸던 남자 노인
오늘도 난닝구 바람으로 나와 있네
나도 모르게 고개 치켜들고
그쪽 하늘 향해 미친 듯 소리 질렀네
"루저들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루저! 루저! 루저! 루저!
루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구!"
내 서슬에
지나가던 청년 흠칫 쳐다보고
노인은 꼬리를 감췄네
세상에,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
칠십 줄에 가족 없이, 에어컨도 없이
하숙방에 사는 사람한테
아, 내가, 내 입에서!
루저가 루저한테 생채기 주고받는
열대의 밤
- 2018년 <발견> 가을호
■ 황인숙 시인
- 1958년 서울 출생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 외
<감상>
옆집에선 고등학생 또래의 여자아이가 또 악을 쓴다. 정확히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층 어느 집에서는 대낮부터 돼지고기를 굽는다. 근린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자기가 끌고 온 개가 똥을 누고 있는 걸 멀거니 바라보던 남자가 나를 시답잖은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 뒤 열댓 걸음 저편 중학생들 네다섯이 공중화장실로 몰려 들어간다. 금세 담배 연기가 폴폴 난다. 어린아이들 열댓을 풀어놓은 젊은 어린이집 교사가 짧게 쨍하니 욕을 내뱉는다. 검은 비닐봉지에다 은행알을 연신 주워 담고 있는 할머니를 길 가던 다른 할머니가 나무란다. 늦은 나비를 얹고 있던 코스모스가 기우뚱한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도스토옙스키의 말이다. 나도 그들의 지긋지긋한 이웃 중 한 명이다.
-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