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족보에서 벼슬명만 있고 그이외의 기록이 없어서
마음 한구석에 궁금하게 생각하였던 감찰공 박여해 선조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문암의 주관적인 관점이 강한 것이며,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감찰공의 가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 은거 " 였다.
은거라는 의미가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지낸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감찰공을 기준으로 외가를 비롯해
처가와 심지어 매부의 가문까지 은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여기서 은거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감찰공의
부친 판서공 선조가 1375년 유배를 간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은거와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먼저 감찰공의 사촌동생 도솔재공 박힐 선조는 태종의 벼슬 제안을
거절하고 금산에 은거하였다.
이어서 감찰공의 외가는 문화류문인데 외조부는 군사공 류안우
선생이며 그 아들 장령공 류희 선생이 1370년생으로서 1396년
사헌부 장령을 제수받았으나 실제 관직에 나가지 않고 27세라는
젊은 연령에 가족을 인솔하고 경상도 초계군 성산리라는 지역으로
은거하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것인데, 장령공이 바로 감찰공의 외숙이 되는 것이다.
감찰공의 처가는 강릉김문인데, 장인이 되는 운암공 김윤남
선생은 고려시대에 감무라는 벼슬을 수행하다가 고려가 망한
이후 더 이상의 벼슬을 맡지 않고 파주로 은거하였으니 가히
고려에 끝까지 절의를 지킨 충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암공 뿐만 아니라 동생이 되는 일로공 역시 문과급제
동기인 태종의 벼슬 제안을 거절하고 연천에 은거하는 삶을
택했으니 실로 그 형의 그 동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운암공의 증손 진사공 김사기 선생은 생육신의 한명인
문두공 성담수 선생의 사위였으니 이는 충신의 가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문의 전통이 감찰공의 매부의 가문으로 까지
연결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찰공의 매부 암탄공 이양몽 선생은 광주이문으로서 고려시대에
판서를 역임하다가 고려가 망한 이후 광주 원적산 아래로
은거하는 생활을 택했다.
그런데 이러한 결단은 암탄공 뿐만 아니라 그 형이 되는 석탄공
이양중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석탄공은 고려시대에 형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조선에서
태종이 되는 이방원과도 친분관계가 두터웠다고 하며,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한 이후 석탄공을 한성좌윤으로
제수까지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켰다고 하는데, 석탄공은 하남 수리골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덧붙이면 석탄공이 고려 충신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문동
72현에 포함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감찰공 가문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당시
감찰공의 심정을 생각했다.
감찰공의 입장에서 볼 때 친가를 비롯해 외가와 처가, 매부의
가문까지 전부 은거의 삶을 택한 것을 보면서 아직은 추정이기는
하나 감찰공 역시 은거의 삶을 결행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족보에 등장하는 감찰의 관직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문암은 이 문제와 관련해 감찰공도 외숙이신 장령공의 경우같이
왕으로부터 감찰에 제수되었으나 실제 관직은 수행하지 않고
은거의 삶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한 은거의 삶을 택했기에 족보에 생몰년도를 비롯해 처가
관련 기록과 묘소 위치마저 전부 누락된 것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면 감찰공이 문암의 추정대로 은거를 하셨다면 후손들의
묘소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황해도 지역일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문암은 감찰공의 미스터리한 삶의 단서를 은거로
보았으나 아직 확신 단계는 아니고 뜻밖의 변수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을 것이다.
2024년 5월 25일(토)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