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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 (1853-1856)
1853년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 내 러시아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도나우강 연안 공국을 점령하자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를 지원하였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막았으나 결국 오스트리아는 러시아를 적대했다.
1854년 연합군이 러시아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을 공격하자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에서 철수했다. 주요 전투지는 알마강, 발라클라바, 인케르만이다.
파리 강화로 종전된 후 러시아는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한 개혁을 시작했으며,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지를 잃자
그 영향권 아래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에서 나이팅게일은 군대위생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무려 19세기까지도 유럽의 야전병원에서는 위생과 청결에 대한 표준지침이 없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감염에 의한 사망이 불결한 환경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1853년 '크림전쟁'에서
영국의 '스쿠타리' 군병원의 부상병의 사망률은 44%를 찍었을 정도였다.
이때 '나이팅게일'과 그녀의 간호사들이 대활약을 하게 되는데..
무려 군병원의 위생과 청결에 대한 표준지침을 마련하고
병원을 박박 닦고 수술도구를 소독하기 시작한것이다.
이 전설적인 간호사의 노력 덕에 44% 사망률이라는
이 군병원의 사망률은 2%로 떨어진다.
흑해의 크림 반도는 언제나 화약고였다.
1853년부터 3년간 지속되었던 크림 전쟁의 전쟁터가 되었고,
4년전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이었던 크림 반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점령했다.
160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원하는 것은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원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북쪽 발트해와 동쪽 블라디보스톡에 항구를 두고 있지만,
겨울에는 얼어버린다.
러시아로선 겨울에도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흑해 연안에 영토를 확보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크림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가 먼저 걸었다.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러시아 니콜라스 1세에 선전포고를 했다.
중동과 동유럽, 아프리카 북부를 장악한 오스만 투르크의 힘이 쇠하고,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던 때였다.
전쟁은 종교 분쟁에서 시작된다.
종교적 광기가 개입되면 전쟁은 피도 눈물도 없어진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국내 카톨릭의 인기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지에서 카톨릭의 특권을 달라고 투르크 술탄에게 요구했다.
당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었다.
술탄은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성지 관리는
그동안 그리스 정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차르가 담당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774년에 체결한 조약을 거론하며 예루살렘 성지의 관리권을 주장했다.
이에 투르크 술탄이 프랑스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러시아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프랑스가 무력시위를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전함을 흑해에 파견해 러시아 차르에 압력을 넣었다.
이에 1853년 7월 러시아군은 지금 루마니아 영토인 몰다비아·왈라키아를 침공해 오스만 투르크를 북쪽에서 위협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누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지의 형식만 남았을 뿐이다.
전쟁은 처음에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 두나라 사이에 전개되었지만
, 곧이어 프랑스와 영국에 투르크 편에 서고, 사르데냐 왕국이 가담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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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번역(1895-1926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출신으로
미국 시민이 되어 조선에 온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한국명 피득1871~1958) 선교사다.
피터스는 러시아어, 히브리어,독일어,프랑스어, 영어, 일본어,
한글도 공부 하여 할 수 있었다.
1910년 무렵 신구약 성경 번역을 마쳤다.
언드우드, 게일, 레이놀즈선교사와
구약 성경을 번역한 알렉산더 피터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지고
여러모로 검토하여
1911-1938년 까지 (고치는) 개역 작업을 마쳐서
개역 성경이 만들어 졌다.
지질이도 마누라 복이 없어서
마누라 4명은 조선에서 죽고 본인은 70세에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1958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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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반도에 무슨 일이
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크림은 자치공화국 지위를 박탈당하고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 산하의 1개 주(州)로 들어간다.
그러다 1954년 크림을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영토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해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에 속했던 크림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에 양도한 것이다.
17세기 우크라이나 카자크 족이
러시아 제국에 복속을 요청한 페레야슬라프 조약 체결(1654년) 300주년을 기념한 친선의 표시였다.
당시만 해도 소련에 함께 속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소련 붕괴 이후
크림을 두고 다툼을 벌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결정이었다.
지도에서 세바스토폴 오른쪽 약 100 킬로 지점이 얄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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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회담 내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제 독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항복의 시기를 선택하는 일뿐이었다.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3거두는 전후 문제에 대한 사전 논의를 위하여 1945년 2월
소련의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에 모였다.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고
또 당시 진행 중에 있던 일본과의 전쟁과 그 전후 문제처리에 있어
소련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였으므로 소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루스벨트는 처칠의 회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게 많이 양보했다.
당시 두 개의 임시정부를 갖고 있던 폴란드의 독립 문제에 있어서
루스벨트는 처칠이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거부하고, 스탈린이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갖는 대신
폴란드는 그 잃은 만큼의 영토를 독일 영토에서 보상받도록 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얄타 회담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요시프 스탈린.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도자들은 전후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루스벨트는 최종적인 결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독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야겠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덧붙여 소련은 일본으로부터 쿠릴 열도를 얻고, 중국으로부터는 군사 기지와 그 밖의 이권을 얻도록 양해되었다.
결론적으로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을 실질적인 승리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스탈린은 새로 만들어진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독일 항복 이후 3개월 이내에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여하기로 약속하였다.
루스벨트는 얄타 회담에 대해 의회에 보고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3국은 얄타 협정을 통해 공통의 기반을 찾았으며, 최종 결정은 앞으로도 3자의 합의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전후에 확고한 평화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3국의 협조체제가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얄타 외교에 대한 비판이 이미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의 처칠은 스탈린이 당시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 동유럽 일대에,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극동에 공산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점을 주시하며,
시종일관 이를 저지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당시 루스벨트가 어느 정도로 소련의 진의를 파악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조정 능력을 과신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의 최종 승리를 보지 못한 채 1945년 4월 12일 조지아의 웜 스프링스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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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붕괴의 길로 치닫던 1991년 2월 크림주는 전체 주민투표를 통해
크림 자치소비에트공화국의 부활을 결정했고 소련 붕괴 후인 1992년 2월
크림 의회는 크림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크림 공화국은 그해 5월 독립국 지위를 규정한 헌법까지 채택했으나
러시아의 중재하에 결국 우크라이나 내의 자치공화국으로 남게 됐다.
크림은 자체 헌법에 기초해 공화국 대통령까지 뽑는 대폭적인 자주권을 누렸으나
대통령직은 1995년 폐지됐다.
이후로도 계속됐던 크림의 독립 움직임은 1997년 체결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우호조약에서
크림의 우크라 영토 귀속이 공식적으로 확정되면서 한동안 수면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조약에서 크림은 자치공화국 지위를 부여받고 행정수반을 크림 의회에서 선출해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인준을 받는 행정적 자율권을 누리게 됐다.
그 뒤 줄곧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으로 남아있던 크림의 독립 문제는
2013년 말부터 불거진 우크라이나 내 친러-친서방 세력 간 정치 투쟁의 결과
친서방 진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러시아인으로 친러 성향이 강한 크림 자치공화국이
친서방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우크라 이탈과 러시아 귀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1894. 4. 15 ~ 1971. 9. 11. 러시아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국가원수 겸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했으며,
1958년부터는 소련 총리와 소련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크림 의회와 크림에 위치한 특별시인 세바스토폴은
결국 2014년 3월 11일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고 3월 16일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 귀속을 결정했다.
이후 러시아가 일사천리로 크림 병합 절차를 추진하면서 크림은 결국 60년 만에 러시아로 되돌아가게 됐다.
크림의 러시아 병합에 대해
서방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된 국제 질서에 대한 최대 위협이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흐루시초프의 변덕으로 왜곡됐던 역사를 바로잡은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크림반도 주변의 흑해
러시아, 터키,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조지아에 둘러싸인 흑해는
지중해와 이어져 있고 해안선이 비교적 단조롭다.
단조로운 해안선 북부에 혼자 튀어나와 있는 크림반도는
지중해로 나아가려는 러시아와 그에 대한 진출을 막으려는 연합국의 분쟁이 있었던 지역이다.
표트로 대제 때 발트해에 진출한 러시아는 바다로 가는 항구를 차지했지만,
발트해는 겨울만 되면 꽁꽁 얼어붙어 무역이 원활하지 못하고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없었다.
이에 러시아는 원활한 무역과 그로 인한 국력 강화를 위해 지중해 진출을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크림 반도[ Krym Pen.]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로 돌출해 있는 반도로 옛 이름은 타우리카였다.
크림은 '요새'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크리미아(Crimea) 반도라고 한다.
북쪽은 페레코프 지협을 통하여 본토와 연결되며, 동쪽은 케르치 반도를 사이에 두고 아조프 해와 흑해로 갈라진다.
불가리아 레조보 근해의 흑해
흑해[ Black Sea]
유럽 남동부와아시아 사이에 있는 내해(內海)로
유럽 지중해의 에게 해와는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어져 있다.
남쪽은 터키, 서쪽은 유럽의 터키·불가리아·루마니아,
북쪽과 동쪽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연방·그루지야에 둘러싸여 있다.
15~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연안 지역을 정복하고 이 바다를 흑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는 이 바다에서 이따금 때아닌 폭풍이나 짙은 안개로 위험에 휩싸이게 되는 데서 유래한다.
보스포루스 해협[ Bosporus St.]
흑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터키의 위스퀴다르와 이스탄불 사이에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룬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水路)로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지명은 그리스 어로 '소가 건너간 나루터'라는 뜻이다.
암소로 변한 이오(Io)가 해협을 헤엄쳐서 건넜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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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우리는 더 이상 얄타 시대에 있지 않다"며 "우크라이나 사태라는 무대에서 미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EU도 중요한 역할이 맡겨진 위치"라고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영국 등 강대국에 의해 유럽이 분단됐던 '얄타 회담'에 현 상황을 빗대며 유럽의 발언권을 강조한 것이다.
과거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 수뇌부는 흑해 크림반도 얄타에 모여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연합군이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일의 동서 분할과 비무장화, 폴란드 동부의 소련 병합 등이 결정됐다. 역사는 이 얄타 회담을 미국과 소련이 유럽을 나눠, 동서 냉전의 시발점이 된 것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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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유럽의 힘겨루기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15세기만 해도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 있는 비슬라브 부족체의 연합체일 뿐이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쪽에서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근간이 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는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가 오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1340년대에 볼린과 할리치나는 각각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병합됨으로써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는 소멸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 민족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분화됐고
언어도 제각기 사용했다.
다만 이 시기에 ‘가장 우크라이나답다’고 할 수 있는
코사크(준군사적 자치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땅은 여러 나라가 노리는 먹잇감이 되었다.
먼저 리투아니아가 한때 볼린, 체르니히우, 키예프 지방, 드네프르강 동안까지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특이했던 것은 언어와 문화 모두 리투아니아인들이 우크라이나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다음으로 촉수를 뻗은 것은 폴란드였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자기네 문화를 강제로 심으려 한 점에서 완전히 달랐고,
이는 훗날까지 우크라이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 지역에서 정치적 힘은 종교와 관계가 깊었다.
키예프 루스 시대에 루스 땅에는 정교가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교는 두 방향에서 문제가 생겼다.
첫째, 우크라이나 땅이 정치적으로 약해지자 정교의 중심이 키예프를 벗어났고,
모스크바 공국이 융성함에 따라 ‘키예프 부주교좌’를 그곳으로 옮겨갔다.
둘째, 폴란드의 가톨릭이 강성해지자 루스 귀족들이 정교를 떠나
폴란드에 동화돼간 점이다.
그러자 정교와 루스의 언어는 어느덧 하층계급의 것으로 전락했다.
늘 득세하는 것은 러시아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1480년 킵차크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제3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모스크바는 루스 땅을 둘러싸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맞붙으면서
서서히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1654년 페레야슬라프 보호 협정으로, 이 협정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없다.
러시아사에서 이것은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반면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이 협정이 당시 지도자 흐멜니츠키가 동맹들과 맺은
보호 약속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의 고압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껴 스웨덴 등과 동맹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해버렸다.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검증해볼 때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해석이 맞는다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자치를 지키고자 모스크바의 보호를 요청한 것일 뿐이었다.
다만 사후 맥락에서 이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병합되도록 한,
파멸의 첫걸음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모스크바는 이 협정 덕에 제국의 길을 밟아간다.
세계대전이 유린한 나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가 탐을 냈던 땅이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가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일차대전까지
120년간 우크라이나 영토는
80퍼센트가 러시아 제국, 20퍼센트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일차대전이 터지자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만큼 심하게 유린당한 땅도 없었다.
전쟁 후에도 사방에서 침투하는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동쪽은 볼셰비키 적군, 서쪽은 폴란드군, 동남쪽 돈강 방면은 반혁명의 백군,
서남쪽 드네스트르강 방면은 루마니아군,
남부 오데사 방면은 프랑스군이 간섭하고 있었다.
이처럼 1919년과 1920년의 우크라이나는 근대 유럽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22년 소연방이 성립되면서 우크라이나는 70여 년간 연방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런 와중에 1929년 빈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이 결성돼 무력 투쟁을 벌인다.
폴란드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한 이 시도는
그러나 서광도 못 본 채 이차대전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차대전에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의 6분의 1인 530만 명을 잃었다.
또 이 시기 소련 전체의 물질적 손해 중 4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 각각이 입은 것보다 더 큰 규모였다.
이후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인의 거주 지역은
소연방 체제하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합쳐졌다.
이것은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상 첫 통합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의 독립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라다)’의 선거가 이뤄졌다. 소련에서는 각 공화국을 어떻게든 연방의 틀 안에 묶어두고자
고르바초프가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독립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쿠데타 사건이었다.
쿠데타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옐친의 용감한 저항으로 맥없이 실패한다.
이로써 주도권은 고르바초프에서 옐친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누가 봐도 소련은 지속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쿠데타 실패의 여세를 몰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거의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고,
훗날 이날은 독립기념일이 된다.
폴란드,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즉각 승인했다.
많은 우크라이나 이민자를 끌어안고 있던 캐나다도 신속히 승인했다.
미국은 12월 24일 승인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은 20세기 들어 벌써 여섯 번째였다.
1918년 1월 키예프에서 중앙 라다의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그해 11월 리비우에서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1919년 1월 키예프에서 디렉토리아 정부와 서우크라이나 정부가 합병한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1939년 3월 후스트에서의 ‘카르파토 우크라이나 공화국’, 1941년 6월 리비우에서 OUN의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에 이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독립 선언은 다 오래 못 가거나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반면 이번 독립은 통치능력을 가진 정부가 있고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 거의 전역을 포함하며 국제적으로도 승인된 후에 이뤄진, 영속의 개연성을 지닌 독립이었다.
우크라이나 속 유대인의 역사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유대인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중세에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도시의 상인, 수공업자가 된 후 농촌에 진출하면서 귀족의 장원 관리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은 농민이 거둬들인 수익을 영주의 주머니에 넣어주는 역할을 했고,
이는 훗날 이 지역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저자는 책에서 유대인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이주에 대해 상세히 다루는데, 그 이유는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로 훗날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손에 넣으면서 그 땅의 유대인도 끌어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가노비치와 같은 유대인이 우크라이나 태생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또한 유대인 음악가 오이스트라흐, 밀슈타인, 길렐스, 작가 바벨 등도 이 나라 출신이다.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제국 내에 520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는데 이 중 200만 명이 우크라이나에 살았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도시민이어서 우크라이나 도시 인구의 53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한 우크라이나인 농민들에게는 유대인이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로 비쳐 자신들을 착취하는 인종으로 적대시되기도 했다.
이차대전 때 우크라이나는 독일의 점령 아래 놓인 적이 있다.
이때 나치 독일의 식량과 노동력 공급원이 됐는데,
이 시기 독일은 우크라이나에서 85만~9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와 민족 자존심
‘우크라이나’라는 단어 자체는 우크라이나인의 자존심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여태껏 러시아사를 바탕으로 한 학설에서 우크라이나는 ‘변경邊境지대’를 뜻해왔다.
하지만 변경이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봤을 때 그런 것일 뿐 현재는 ‘우크라이나’에 변경이란 뜻은 없고 ‘땅’이나 ‘나라’를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키예프 연대기』와 『할리치나-볼린 연대기』가 있다. 설령 변경이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파생됐다 해도 모스크바 혹은 훗날 러시아 제국의 입장에서 본 변경의 의미는 아니었다. 12~13세기에는 모스크바 지방이 오히려 더 변경에 속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우크라이나’는 비로소 특정한 땅을 가리키게 된다. 즉 코사크의 대두와 함께 드네프르강 양안으로 펼쳐지는 코사크 지대를 일컫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자 ‘우크라이나’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땅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라 불렀다.
우크라이나는 영어로 Ukraine이고 현재의 국명도 관사 없이 Ukraine으로 쓴다. 관사를 붙여 the Ukraine이 되면 보통명사인 ‘변경지대’에 정관사를 붙여 쉽게 고유명사화한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러시아의 변경지대로 얕보는 어감이 들어서인지 우크라이나 정부와 민족주의자들은 이 표기를 꺼린다. 참고로 우크라이나와 유럽, 미국의 학자가 저술한 우크라이나사는 ‘History of Ukraine’인 데 반해 러시아 관점에서 쓰인 우크라이나사는 ‘History of the Ukraine’로 표기돼 있다.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 방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따라서 진실하고 고상한 것은 러시아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출판물도 흥미로운 소재는 러시아어로, 지루한 소재는 우크라이나어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는 ‘우크라이나 언어법’이 제정되었고 우크라이나어가 국어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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