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현대사21 - 제4단계:전선의 교착과 휴전 모색(1951년 2월~5월)
1951년 1월 중순부터 몇 번에 걸친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작전으로 공산군의 남하는 일단 37도선에서 저지되었다. 유엔군은 2월 초순경 반격을 개시해 김포,안양,지평리,횡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2월 11일~17일 사이에 공산군이 제4차 공세를 전개했다. 하지만 공산군은 낙후한 보급체계와 장비로 인해 공격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다.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했고, 5월 말경에는 38선 이남 지역을 다시 회복했다. 그동안 공산군은 4월과 5월에 걸쳐 춘계 공세를 펼쳤지만, 전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전선은 38선을 중심으로 교착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미국에서는 다시 한 번 38선 돌파와 확전이 주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1951년 2월 한국문제를 놓고 1차 논의가 진행되면서 미국무성이 휴전을 통해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결짓는 방안을 선택하자, 국방성과 군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특히 맥아더는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맥아더는 3월 24일 ‘전쟁을 중극으로까지 확대할 것이며 휴전은 절대 없을 것’이란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는 등 확전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맥아더의 요구를 받아들여 합동참모본부는 4월 5일 맥아더에게 만주와 산둥반도를 공격할 권한을 부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중국군이 증파되거나 미군을 향해 폭격할 경우 원자탄을 사용해 즉각 보복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때 미국은 원자탄 사용준비를 거의 완료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신의 의지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4월 11일 전격 해임되었다. 3월 24일 맥아더의 성명으로 떠들썩했던 워싱턴 정가에 4월 5일 다시 물의가 일어났다. 맥아더가 하원의원 마틴에게 보낸 “대만군 사용과 아시아에서의 확전”을 주장하는 서신이 공개된 것이다. 그러자 트루먼은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미 극동군사령관.미 극동지구 육군사령관 등의 모든 직위에서 전격 해임시켜 버렸다. 맥아더의 해임은 정책대립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통령에 대한 불복종과 그에 따른 트루먼의 개인 감정”이 크게 작용했다.
맥아더의 해임으로 미국 내에서는 국무성의 견해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5월 1일 합동참모본부는 새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에게 서신을 보내 “캔자스.와이오밍 선(캔자스 선은 서울 북방 20마일 지점인 임진강 하구에서 화천 저수지를 거쳐 동해 대포리에 이르는 선이고, 와이오밍 선은 임진강하구에서 철원,금화를 거쳐 화천저수지에 이르는 선)까지 진격을 허용하되 사전 승인 없이 통제선을 넘어 대규모로 북진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5월 17일 군사와 정치를 병행하는 제한전쟁정책인 휴전정책을 최종 결정했으며, 이렇게 해서 휴전이 모색되었다.
미국은 휴전협상을 위해 전 소련대사 케난에게 직접적인 대소교섭을 부탁했다. 그러자 케난은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를 만나 휴전을 제의했고, 5월과 6월 두 달에 걸쳐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6월 23일 말리크는 6월 23일 말리크는 유엔에서 ‘평화의 가치’란 제목으로 방송 연설을 했다. 연설에서 말리크는 교전국들이 38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휴전협상에 임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받아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6월 30일 공산군측에 정전회담을 제의했고, 7월 1일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베이징 방송을 통해 이를 공동명의로 수락했다. 이로써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북한 현대사22 - 제5단계:휴전협상과 소모전, 그리고 휴전(1951년 6월~1953년 7월)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되자 양측은 의제문제에서부터 이견을 노출했다. 유엔측은 군사문제만 취급하자고 했고, 공산측은 외국군 철수 등의 정치문제까지 포함시키려 했다. 논란 끝에 7월 26일 다섯 가지의 의제가 결정되었다. 그것은 ‘①의제 및 의사일정 채택, ②군사분계선 설정, ③휴전감시 방법 및 기구 구성, ④전쟁포로 처리, ⑤관련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등이었다. 휴전협상에서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은 군사분계선 문제였다. 공산측은 3도선을 제시했고, 유엔측은 자신들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지상 접촉선인 38선보다 훨씬 더 북쪽 선을 주장했다.
협상은 8월 22일부터 10월 25일까지 잠시 중단되었다. 그사이 미군은 북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7월과 8월, 미군 폭격기들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에 네이팜탄을 비롯한 수천 톤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북한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8월 15일에는 공산측의 통신망과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교살(strangle)작전’을 감행했다. 또한 9월과 10월에는 ‘허드슨 항(hudson harbor)작전’을 통해 북한 상공에서 모의 원자폭탄 투하 비행을 실시했다.
이 작전에서는 2차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B-29폭격기가 동원돼 북한 상공을 비행하면서 보조원자탄 또는 TNT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북한에 핵공격 위협을 가했다. 10월 25일 회담은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다시 시작되었다. 회의결과 현재 전선을 중심으로 군사분계선을 긋는 데 양측이 합의했으나 유엔측이 동부전선의 일부와 서부전선의 개성을 교환하자고 요구함으로써 협상은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곧 유엔측이 자신들의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11월 27일, 현 전선을 기준으로 한 군사분계선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잠정 합의되자 1952년부터는 휴전감시문제와 포로처리문제가 논의되었다. 유엔측은 휴전감시문제에 대해 북한 내의 비행장 복구와 건설을 중지하고 휴전감시를 위한 지역을 남북한 전지역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공산측은 비행장 복구건설문제는 논의 자체를 거부했고,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제한하고 정전위원회와는 별도로 휴전감시기구로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하자고 했다. 이 문제는 논란 끝에 1952년 5월 2일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쌍방 5개소로 하고, 중립국감시위원회는 체코,폴란드,스위스,덴마크 등 4개국으로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동안에도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마다 미 공군에 의한 북한 지역의 융단폭격은 계속되었다. 해군까지 참여한 가운데 ‘질식작전’,‘집중폭격작전’이 진행돼 한 달 평균 900회의 출격이 이루어졌고, 철도.도로를 통해 수송되는 군수물자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었다. 또한 미국은 휴전협상이 결렬될 경우 군사작전을 강화하고, 한반도 내의 공격 지역 제한을 철폐하며(한소 국경지역 12마일은 제외), 중국 공군이 주한미군을 위협할 때는 중국 공군기지를 공격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중국 본토기지 공격까지 계획했다. 그러나 1952년 5월, 4가지의 의제 가운데 포로교환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3개 항이 모두 타결되었다. 이 시점에서 포로교환은 큰 문제가 아닌 듯 했다. 양측이 포로에 관한 국제협정, 즉 ‘포로는 적대행위가 종료된 후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한 1949년의 제네바 협정 제118조 규정을 따르면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로교환문제는 예상과 달리 난항을 거듭했고, 그 때문에 전쟁은 숱한 소모전을 계속하면서 1년 반이나 더 지속되었다. 그 사이 수없이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한반도 북쪽은 폐허로 변했다. 북한 지역이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것이다.
미국은 제네바협정에 서명했으면서도 인도주의를 내세워 제네바협정이 규정하고 있는 ‘자동송환원칙’을 거부했다. 미국이 자유송환원칙을 내세운 이유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었다. 미국은 휴전에 임하면서 군사적으로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한 상황이라서 ‘영예로운 해결’을 통해 정치적,심리적 승리를 얻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미국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들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산 포로들이 모국 송환을 거부하게 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심리적,도덕적 승리를 얻고 이를 정치적 선전 자료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포로문제가 단순히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전쟁포로 얼마를 교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념성을 다투는 이념전쟁 자체였고, 그것에서의 승리야말로 미국으로서는 위신과 명분, 그리고 이데올로기 싸움에서의 승리”였던 셈이다. 이런 과정에서 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도트 준장이 공산포로에게 납치되는 사건을 비롯해 미군이 관할하는 포로수용소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수많은 포로들이 살해되었고, 피의 보복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휴전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세계 여론이 불리해지자 미국은 확전을 통해 전쟁을 조기에 종결지으려 하였다. 미국이 구상한 여러 계획안 가운데 중국으로의 확전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북한 지역에 대한 공격 폭격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동시에 미국은 휴전을 끈질기게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할 쿠데타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행되지 않았다. 1952년 6월 23일 미군 폭격기들은 수풍댐을 비롯해 10여 개의 발전소에 대한 폭격을 감행했다. 이 폭격으로 북한의 발전소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7월 11일과 12일에는 가공할 만한 평양폭격이 가해졌다. 이 폭격의 목표물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7천명이 사망했다. 1만여 톤의 네이팜탄, 6만 2천발의 탄약, 그리고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 머리 위로 투하되었다.
이런 가공할 공중폭격과 함께 지상에서도 피의 전투가 연일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철원,금화,평강을 연결하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피의 혈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미군은 원산에서 대규모 수륙양동작전을 감행했다. 이러한 엄청난 포화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을 피하는 것만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북한에게 미국은 ‘철천지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포로의 자유송환을 주장했던 미국은 가장 비인도적인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자유송환원칙에 의해 자동송환되지 않은 포로의 수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의해 석방된 군인 반공포로 2만7천 명까지 합하여 약 5만여 명이었는데, 이 휴전 지연기간 동안에만 유엔군과 국군은 합계 12만 5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고, 공산군측은 25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결과적으로 인도주의라는 정치적 이념선전에 의해 엄청나게 비인도적인 살상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 류상영, 「휴전협정의 성립과 성격」-
1953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전세계적으로 비난 여론이 격화되었고, 영국과 서유럽에서도 압력이 들어왔다. 전쟁 종결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더 이상 휴전을 미룰 수 없었다. 또한 소련 역시 스탈린 사망 이후 등장한 말렌코프와 몰로토프 등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없다’면서 전쟁의 조기 종결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이렇게 해서 193년 4월 26일, 6개월간 중단됐던 협상이 재개되었고 6월 8일 양측은 포로교환문제에 환전히 합의했다. 포로의 자유선택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적 압력과 무참한 살상으로 얻은 ‘무자비한 승리’였다. 7월 27일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총성은 멎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적 문제가 남아 있었다.
북한 현대사23 - 제네바 정치 회담의 실패
휴전협정으로 전투 행위는 멈추었으나 그것으로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7월 27일의 휴전협정은 군사분계선과 전투행위의 중지만을 합의했을 뿐이고, 전쟁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는 정치적 문제들은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정치회담을 시작해야만 했다. 10월 26일 판문점에서 외국군 철수문제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예비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담은 참가국의 범위와 의제문제로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다 12월 12일 결렬되었다. 해를 넘겨 1954년 1월 10일 북한 외무상이 정치회의 재개문제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해 양측 연락관 사이에 회의가 재개되었으나 그마저 1월 18일 결렬되고 말았다.
2월 18일 베를린에서 미,소,영,프의 4개국이 외상회의를 열고 제네바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그 주요한 내용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월 25일부터 회의가 개최되었고, 동시에 이 회의에서 4월 26일부터 관계 각국을 초청, 제네바에서 한국문제와 인도차이나문제를 다루기로 합의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4월 26일부터 남한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15개국(남아공은 불참), 북한과 중국,소련 등 전체 1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제네바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제네바 회담에서는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문제와 외국군대 철수문제를 둘러싸고 유엔측과 공산진영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선거문제와 관련해 남한은 유엔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의 전국적 선거를 주장했다. 반면 공산측은 유엔이 전쟁 당사자이기 때문에 중립국 감시 위원단의 감시 하에 전 조선위원회가 관리하는 전국적 선거를 주장했다. 외국군 철수문제와 관련해서는 공산측은 선거 이전에 모든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남한과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쌍방은 공방을 거듭했으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논의조차 진행시키지 못한 채, 6월 15일 양측 성명을 끝으로 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회담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통일방안도, 외국군의 철수도,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도 무위로 돌아갔다. 이로써 한반도의 분단은 완전히 고착화되었다.
북한 현대사24 - 한국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으레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한국전쟁 역시 전쟁이 가지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아니, 한국전쟁은 세계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훨씬 더 비인간적이며 잔혹하고 파괴적인 본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면 한국전쟁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한반도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제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전쟁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6분의 1에 달하는 5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중국군과 유엔군을 합하면 6백만 명에 이른다) 북한이 3백만, 남한이 2백만 명이었다. 이것은 남북한을 합쳐 평균 한 가족에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특히 북한은 월남 인구를 제외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명 피해 가운데 민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나 높다. 민간인 사상자는 남한이 전체 사상자의 50%인 100만 명, 북한은 전체 사상자의 80%인 250만여 명에 달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 전쟁의 비인도적인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북한에서 이렇게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것은 미군기의 융단폭격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폭격목표가 되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이 살아남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중부에서 남부로, 다시 남에서 중부로 대규모의 인구이동이 일어났다. 정치적인 이유와 미군 폭격을 피해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동한 인구는 대략 40~65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포함해 5백만 명의 전재민과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것은 한반도 전체를 완전히 한번 뒤집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 피해도 엄청났다. 남한의 경우에는 전선이 교착되기 전인 1951년 6월 이전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보았다. 전쟁 발발 15개월 만에 입은 재산 피해는 20억 달러에 달했는데, 1949년의 국민총생산을 능가하는 액수였다. 제조업에서는 섬유산업이 가장 피해가 컸고, 화학 공업,요업,기계 공업 등이 뒤를 이었다. 광업에서는 석탄 산업이 크게 피해를 보았고, 전력 부문에서는 남한이 전쟁 초기 발전능력의 80%를 잃었다. 총 피해액 가운데 민간가옥이 39.1%, 민간산업 부문이 20.2%, 교육 부문이 20%를 차지했다. 전쟁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고,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급속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국민총생산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는 1957년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북한은 특히 공업피해가 심각했는데, 전쟁 중에 8천7백여 개의 공장,기업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공업생산은 전쟁 전의 64%로 줄어들었다. 이 가운데 전력생산은 74%, 석탄생산은 89%, 철생산은 90%, 화학공업은 77%가 각각 감소했다. 농업 부문의 피해도 극심했다. 폭격으로 4분의 1 이상의 농토가 피해를 입었고, 9만 정보의 농경지가 감소되었다. 전쟁 동안 농업생산이 76%로 떨어졌고, 전쟁이 끝나자 농민 가운데 빈농의 비율은 40%로 늘어났다. 전쟁으로 북한이 입은 총피해액은 4천2백여억 원(북한 화폐)에 달했다. 북한의 1953년 국민 소득은 1949년에 비하면 30%가 감소되었다.
한국전쟁은 인적,물적 피해와 함께 정신적,사상적으로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남북 사이에 분단의식과 이데올로기적 적대감이 전쟁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양측의 반복되는 점령과 수복으로 ‘피의 보복’이 되풀이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심은 민족적 동질성마저 무색할 정도로 고양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남한에는 반공이, 북한에는 반미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체계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멸공통일’‘승공통일’‘반공국시’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북한에서는 ‘민족의 철천지원수’를 배척하는 ‘반미주의’가 모든 이념의 근간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통일을 위해’ 전쟁을 결정했던 김일성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분단이 고착화되었고, 남북한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 후 남과 북의 이질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제 통일을 위해 남과 북의 동질성 회복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서로 상대방의 이질화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둘이 동시에 이질화되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동질성 회복도 어렵다.
전쟁은 남과 북의 정치체제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북한은 북한대로 남한은 남한대로 파행의 길을 걸었다. 북한은 전쟁과정에서 김일성의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무정,허가이,박헌영 등이 차례로 제거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지배체제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반공을 무기로 한 이승만 장기집권체제가 등장했다. 자유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의 남침을 두려워했고, 북한은 북한대로 미군의 군사력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남북한은 계속 군비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미군,한국군과의 군사력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 이것은 북한의 경제발전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요인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양쪽의 군대,경찰,정보기관 등 국가기구가 엄청나게 비대해졌다. 전쟁 전 10만 명 수준이었던 남북한의 군대는 각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60만 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그 후 남북한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150만 명 이상의 정규군을 집중 배치했으며, 군대는 남북한 정권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었다. 분단체제가 고착화됨으로써 군대와 더불어 경찰,정보사찰기관도 그 역할과 기구가 더욱 확대,강화돼 남북한은 철저한 관료통제국가로 변모했다.
한국전쟁은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은 그때 막 시작되고 있던 냉전체제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에는 매카시즘 바람이 몰아쳤고,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확장경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진영의 결속이 강화되었고, 미국의 헤게모니도 분명해졌다. 또한 미국은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집단안보체제를 강화했으며,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촉진했다. 한국전쟁 중에 일본은 전쟁물자를 제공하는 산업기지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일본 자본주의는 전후 고도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최대의 혜택을 누린 것이다. 거기다가 한일간의 접근을 통해 한,미,일 3각 안보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에 따라 한일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일본 자본의 한국 진출도 가능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중국이 한국전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에게 큰 재앙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은 중국의 통일을 가로막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대만해협을 봉쇄했고, 중국은 사실상 대만 통합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중국은 국내 경제 건설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외국자본의 유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자력갱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내부적으로 지주와 자본가 등 반혁명 세력의 저항을 사실상 봉쇄할 수 있었다는 이점도 있었으나 이것은 지극히 작은 이득에 불과했다. 유엔과 미국에 의해 침략국으로 낙인찍힌 중국은 외교적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나 지난 뒤에야 미국과 국교관계를 수립했고,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였고, 제3세계로부터 상당한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 이후 자본주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단결했던 데 비해 사회주의 세계는 분열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도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북한 현대사25 - 한국전쟁과 북한 권력체계의 변화
한국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남북한의 정치는 파행을 거듭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정상적인 정치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인 굴곡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남북한에서 행해진 정치과정은 남북한의 정치체제를 더욱 굴곡과 파행으로 몰아갔다.
북한은 전쟁이 어느 쪽에 의해서도 물리적으로 완승에 도달하기 어렵게 되자 내부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들어오면서 북한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군사작전과 전선의 일체활동을 조.중연합사령부에 넘겼기 때문에 김일성은 그동안 힘을 쏟지 못하던 당과 정치를 추스를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1950년 12월 21일부터 강계에서 제3차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었고, 그동안의 사업에 대한 총화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간부들이 대거 철직당했다.
무정은 일제시기부터 너무나 유명했던 항일혁명가로, 해방 후 김일성도 끊임없이 견제했던 거물 군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의 2만5천리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중국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을 거쳐 1937년에는 포병단장으로서 최초의 포병사령관이 되었던 무정은 그 명성이 대단했고, 그로 인해 기대도 컸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와서는 명성에 걸맞은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무정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야 할 연안의 독립동맹 세력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고,
무정 자신도 군사적 역량에 비해 정치사상적인 측면이나 조직사업 면에서 취약했기 때문이다. 후에 김일성은 무정에 대해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으나 워낙 군벌주의적 경향이 강해 문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무정은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 포병부사령관, 북로당 중앙위원회 간부부장을 거쳐 1948년 북로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시에는 2군단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갔으나, 후퇴시 평양 방위사령관의 임무를 다하지 않은 채 중국 선양으로 도피한 것이 문제가 되어, 후방부대인 7군단장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7군단장으로 있던 중 그는 치료를 빨리 안 해준다고 의사를 총으로 쏘아죽이는 과오를 범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무정은 7군단장에서도 쫓겨났으며, 그 후 재기하지 못하고 1952년 10월에 병사하고 말았다.
무정이 철직당하고 계파를 막론하고 많은 인물들이 책임 추궁을 받았다. 항일빨치산 계열의 임춘추,김일,최광 등도 함께 가혹하게 비판받았다. 그렇지만 중요한 사실은 전쟁을 통해 이제 노동당은 과거의 단순한 파벌연합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51년 11월에 열린 제4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는 이런 사실을 더욱 여실히 보여주었다.
제4차 회의에서는 ‘책벌주의(責罰主義,과오를 시정함에 있어 지나치게 처벌만을 앞세우는 사업방식이나 태도)’와 관문주의(關門主義,부당한 조건을 붙여 조직 가입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사업방식이나 태도)‘가 주요한 비판 대상이 되었다. 김일성은 보고에서 “우리 당의 대중적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며, 당의 역사가 청소(靑少)하고 당원들의 정치사상적 수준이 어린 실정을 고려하지도 않고, 또한 오랜 일제치하에서 남은 사상잔재와 국내투쟁의 복잡한 조건과 환경을 고려함이 없이, 당원들을 마치 완성된 맑스-레닌주의자로 간주하고 수준에 넘치는 요구를 제기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관문주의와 책벌주의를 비판했다. 그것은 당 조직을 책임지고 있던 허가이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허가이는 1948년 9월 남북노동당의 통합 이래 사실상 당 조직을 관장해왔는데, 한국전쟁 중에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할 때 행한 당원들의 행동에 지나치게 엄벌주의를 적용해 문제가 되었다. 후퇴 시의 다급한 상황에서 많은 당원들이 당증을 몸에 지니지 못하고 땅에 묻거나 없애버렸다. 이에 대해 허가이가 지도하는 조직위원회는 전시의 위급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처벌위주로 일관했던 것이다. 전체 당원 60만 명 가운데 45만 명이 책벌을 받았을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했다. 그러자 1951년 9월 1일 당 중앙조직위원회를 열어 가혹한 책벌을 완화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와 함께 문제가 된 것은 관문주의적 경향이었다. 전쟁중에 핵심정예당원들이 많이 사망했기 때문에 새로운 당원들을 충원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당 정비 관계자들은 노동자 성분비율이나 정치의식 수준만을 따져 입당 희망자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당이 전반적으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에 젖어들었다. 이런 책임을 물어 김일성은 허가이를 제1비서 자리에서 해임시키고, 대신 박정애를 당 비서 겸 정치위원으로 선출했다. 당 비서에서 해임된 허가이는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좌천되었으며, 1953년 7월 미군 폭격으로 무너진 순안저수지 복구사업을 현장 지휘하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았지만 그에 불복하고 자살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정치적 변화는 뭐니뭐니해도 박헌영과 남로당의 몰락이었다. 박헌영은 해방과 더불어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대표주자로 떠올랐고, 북한 정권 수립 후 조선노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실상부한 2인자였으며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이끈 주역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분단으로 굳어질 것이 명확해지면서 박헌영의 ‘남조선 해방의 꿈’은 사라졌고, 동시에 그의 위상도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헌영과 남로당의 몰락이 예고된 것은 1952년 12월에 열린 제5차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였다. 12월 15일 김일성은 「당의 조직 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보고에서 일부 당원들의 당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철저히 극복하고 당성을 높이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초점은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 잔재들과의 투쟁’을 통해 당의 통일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김일성은 “사업은 충실히 하지 않으면서 당에 대해 무원칙적인 불평불만을 하고, 불평분자들끼리 모여서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하고, 당 조직 규율은 살피지 않고 뒤에 앉아서 횡설수설하며 말공부만 하는 분자, 그리고 자기 보호에만 신경쓰는 은신분자, 과거 혁명 경력이 있다고 틀만 차리고, 큰일은 하지도 못하며 또 작은 일은 하지도 않는 분자들”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친척관계, 동창관계, 친구관계, 한 고향, 한 곳에서 일하다 왔다느니 또는 남조선이니 북조선이니 이런 것들만 캐고 앉아, 그들을 개인적으로 끌어당기고 그들의 잘못은 그저 묵과하고 그들과 투쟁하지 않는 옳지 못한 현상”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을 가했다. 나아가 김일성은 “그저 자기와 친한 사람이면, 혹은 과저 자기 그룹에 속했던 자라면 혁명운동에 변절한 자들까지도 추천 등용하자고 애를 쓰며, 당과 혹은 정권기관에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과거 ‘혁명생활’에 깨끗하지 못한 것을 서로 엄폐하여 주며 허장성세하며 서로 추켜세워주고 자기들끼리 싸고도는”현상들을 지적하면서 이런 종파주의 잔재를 척결해야 당이 조직적,사상적으로 강화된다고 했다.
5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끝난 후부터 이 회의의 문헌토의사업을 전당적으로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엽(야구선수가 아님)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핵심인물 12명이 반국가,반혁명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이어서 박헌영도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 3~6일까지 최고재판소 특별군사법정에서 4일간 열렸고 윤순달(15US)과 이원조(12년)를 제외한 10명 전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이로부터 2년 4개월이 지난 1955년 12월에 열렸다. 재판 결과 박헌영에게도 사형이 언도되었다. 박헌영,이승엽 사건의 주요 피고인들은 아래와 같다.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피고인들
•박헌영(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각 부수상)
•이승엽(당 비서 겸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
•조일명(문화선전성 부상)
•임화(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박승원(당 연락부 부부장)
•이강국(무역성 조선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
•배철(당 연락부 부장)
•윤순달(당 연락부 부부장)
•이원조(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백형복(전 남한 치안국 중앙분실장)
•조용복(인민검열위원회 상급 검열위원장)
•맹종호(인민유격대 10조 대장)
•설정식(인민군 총정치국 정치위원)
이들의 죄목은 간첩행위, 남한 내 민주 세력의 파괴행위, 북한 정권 전복 음모 등 세 가지였다.
“박헌영은 일제시대부터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연결돼 미국의 간첩이 되었고, 1925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됐다가 공산당 지도자들을 밀고해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미군정과 연결돼 남로당의 혁명역량을 파괴했고, 한국전쟁 시기 남로당 계열을 사주하여 공화국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였다. 이승엽 역시 해방 후 미군의 고용간첩이 되어 남로당의 기밀들을 넘겨주어 남한의 민주역량을 파괴했고 북한에 들어온 뒤에도 그러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남로당 계열의 불평분자들을 끌어모아 금강정치학원을 중심으로 무력을 확대하면서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에서 박헌영,이승엽 사건 당시 직접 검열사업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인 신경완은 한 월간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헌영은 나름대로 야심과 속셈이 있었다. 그는 야망에 차 있던 남조선 해방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전쟁 패배의 요인을 김일성의 지휘 잘못으로 몰아붙여 일격에 김일성을 권좌에서 축출할 꿍심을 품고 있었다. 박헌영은 따라서 미군과 한국군이 또다시 밀고 북상해 오면 1950년 10월처럼 밀려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때 김일성에게 일격을 가해 당권과 정권을 탈취하리라 꿈꾸며 자기 속셈을 차리는 일을 암암리에 진행했다. 박헌영 일파는 김일성에게 인민군 재진격시 배후에 침투해서 배후에 침투해서 유격투쟁할 수 있는 유격대를 조직한닫고 속이고 자기 일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북으로 밀려들어온 남로당원들로 유격부대를 조직하여 평양 주변의 중화와 상원에 제1지대,제3지대,제7지대,제11지대를 구성하여 집중 배치하고 10지대는 황해도 연백군에 배치했다. 그리고 남조선 혁명간부(공작원,유격대)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김일성과 한판 싸울 때 필요한 돌격대를 육성하는 금강학원이란 것을 김일성계의 이목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 서흥의 깊은 산골에 설치하고 돌격대를 육성했다.
박헌영은 한국전쟁 전에 김일성에게 남한에 20만 명에 달하는 정예 남로당원이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인민군대가 밀고 내려가기만 하면 도처에서 폭동을 일으켜 인민군대와 합세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단 며칠 만에 전국을 해방시키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렇지만 남로당원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전쟁이 종결되면서 남로당은 괴멸했고, 박헌영은 돌아갈 곳도 지지기반도 상실했다. 때문에 박헌영은 적당한 시기에 김일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공화국 전복 음모’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줄곧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의 간첩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대체로 이승엽의 정부 전복음모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박헌영이 처음부터 이를 알고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김일성 일파의 주장대로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다면 한국전쟁 동안 김일성이 미군의 추적을 받아 무사했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북한은 여러 가지 정황 증거들을 통해 김일성의 거처가 추적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김일성이 사용하고 있던 비밀사령부 근처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고, 포탄이 계속 사령부를 겨냥해 발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내부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소행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이승엽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한국전쟁으로 더 이상 남한에서 근거를 잃어버리고 갈 곳을 잃은 남로당 계열이 이승엽을 중심으로 무력과 근거지를 확보해, 독자적인 정권이나 그와 유사한 자치기관을 만들어 대남혁명사업을 꾀하고 김일성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리고 이런 일을 주동적으로 해나간 것은 이승엽이었고, 박헌영은 이를 암묵적으로 방조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일성과 북한의 입장으로서는 이런 행위는 명백히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은 그 사건의 진실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전쟁과 북한 내부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한국전쟁의 실패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했으며, 당 내부의 권력 투쟁과 밀접히 연관되어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엽의 미심쩍은 행위는 이런 올가미를 씌우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남로당 계열의 최고지도자였던 박헌영도 얽혀들고 만 것이다.
박헌영,이승엽 사건으로 남로당 계열의 지도간부는 사실상 완전히 몰락했다. 남로당 출신의 우두머리들은 1,2,3차에 걸쳐 차례차례 제거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로당 출신들은 중하급 간부들까지도 가혹한 재검토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 사건은 노동당과 북한의 권력구조를 완저히 바꿔놓았다. 1953년 8월 5~9일에 개최된 제6차 전원회의는 박헌영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고, 김일성의 단일 권력체계가 가능하도록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당 중앙위원회 조직위원회와 비서제가 폐지되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신설된 상무위원에는 김일성,김두봉,박정애,박창옥,김일,박영빈,최원택,최창익,강문석,정일룡,김황일,김승화,김광협,박금철,남일 등 15명이 선출되었다. 정치위원회도 새로 선거해 김일성,김두봉,박정애,박창옥,김일 등 5명이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비서였던 박정애,박창옥,김일은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옮겨갔다. 이것은 1949년 6월 남북노동당의 합당 당시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당시의 부위원장 2명(허가이,박헌영), 비서 3명(허가이,이승엽,김삼룡)이 모두 제거되거나 탈락했으며, 정치위원 가운데서도 남로당 계열 4명(박헌영,이승엽,김삼룡,허헌)과 허가이,박일우가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1949년 6월 당시 핵심지도부 내에서 김책 외에는 확실한 자파 세력을 갖지 못했던 김일성이 1953년 8월에는 권력의 핵심인 정치위원 중 80%를 자신의 추종자로 채웠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김일성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박헌영,무정,허가이가 차례로 사라짐으로써 김일성의 지도권은 보다 확고해졌다. 실제로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의 숙청 발판을 마련한 제5차 전원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김일성의 보고가 끝나자 “우리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에게 영광 있으라”라고 외쳤다. 김일성이 ‘위대한 수령’이 되는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김일성 중심의 단일체계로 변화하고 있을 때 남한에서는 또 다른 정치적 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5~8월에 벌어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첫 출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한국전쟁은 남북의 분단을 완전히 고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북 내부에 굴절된 정치현상을 가져다 주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첫댓글 북한현대사[5]에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